2011년 7월 13일 수요일

7. 인조-효종-현종-숙종

1623년 3월12일 밤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서인인 이귀, 김유, 김자점, 최명길은 광해군의 국정능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 서인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능통한 자들이었는데 명나라와의 의리명분과 소중화사상을 중요시 하였다.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은 자신의 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주살하였고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삭호하였었는데 이것은 서인들에게 반감의 계기가 되었다. 또 광해군은 후금과는 실리외교를 펼쳤는데 이것은 친명배금을 주장하고 있던 서인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서인들은 조정의 실권자들이었던 대북파와 광해군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무관들이었던 이서, 이중로, 김유는 병력을 끌어모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은 이괄을 대장으로 삼아서 이 군사들을 통솔하면서 창의문으로 진격하였다. 이흥립은 훈련대장이었는데 반정군과 내응하고 있었으므로 궁궐은 반정군에게 쉽게 점령이 되었다. 반정군은 유폐되어있던 인목대비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곧 반정군은 의관인 안국신의 집에 피신하여있던 광해군을 붙잡았고 왕비유씨 그리고 세자와 세자빈 박씨를 모두 강화도로 유배보내었다. 반정군은 대북파인 세자빈 박씨의 외할아버지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을 처형하였고 그외 200여명을 유배보내었다. 나중 일이지만 세자빈 박씨는 강화도에서 자결하였고 세자는 도망가다 잡히자 자결하고 말았다.  

곧 능양군은 즉위하여 인조가 되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면서 광해군의 조카였다. 인조는 광해군의 이복 동생인 정원군과 부인 구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정원군은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사이의 소생이었고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김씨와의 소생이었다. 인조는 당시 인렬왕후 한씨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두고 있었다.

인조는 반정에 공훈이 있는 자들에게 훈작을 수여하였다. 정난공신의 1등공신에는 김유, 이귀, 김자점, 신경진, 최명길 등이 추록되었고 2등공신에는 이괄, 김경징 등이 추록되었다.

1623년 7월에는 기자헌과 유몽인 등이 인조에 대하여 역모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해 10월에는 황현과 이유림 등이 역모를 하여 흥안군을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흥안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이괄은 정난공신의 2등 공신임에도 훈작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이괄은 부원수인 평안도 병사로 전직이 되었는데 나중에 조정의 중신들은 이괄과 그의 아들을 역모죄로 모함하였다. 조정은 체포령을 내렸고 이괄을 압송하기 위하여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이괄은 그들을 죽이고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인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의 반란군은 보름만에 개성을 지나 임진강을 건넜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공주를 향하여 몽진을 떠났다. 이것은 1624년 2월8일의 일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2월11일 한양에 입성하였고 흥안군을 옹립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흥안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다. 그 후 이괄은 길마재에서 임경업과 정만이 이끄는 관군과 조우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괄은 도망하였고 그의 부하인 기익헌과 이수백은 잠들어 있던 이괄과 이수 그리고 한명련등을 목베어 주살하였다. 한편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과 한택 형제는 도망하여 후금에 투항하였고 당시 후금에 있던 강홍립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들은 나중에 정묘호란의 불씨가 된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훈이 큰 자들에게 훈작을 수여하였는데 진무원중공신의 1등공신에 임경업 등을 추록하였고  2등공신에는 최명길과 조시준 등을 추록하였다.

1626년 인조 4년 호폐법을 실시하였다. 호폐법은 호구조사를 통하여 군역과 요역을 충실하게 할 수 있고 또 신분관계의 증명을 통하여 계급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 해 1월에는 영원성전투가 있었다. 명나라의 원숭환은 병력 1만을 이끌고 병력 10만의 누루하치군을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누르하치는 퇴각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이 해 8월 11일에는 후금의 칸인 누르하치가 부상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 누루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치는 봉견영주인 베이러의 8기중에 3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누르하치를 승계하여 후금의 칸이 되었다.

1627년 인조 5년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베이러, 즉 후금의 봉건영주인 아미타수에게 흉노족 3만을 내주어 조선을 치게 하였다.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광해군이 폐위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괄의 난 후에 후금으로 탈출하였던 한윤과 한택은 홍타이치에게 인조즉위의 부당성을 알렸던 것이다. 또한 홍타이치는 누르하치가 타계하였을 때 조선이 조문단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봉건영주 아미타수는 강홍립과 한윤과 한택 형제를 길잡이로 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를 침략하였다. 일부는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의 군대를 공략하였다. 모문룡은 이전에 광해군의 제의를 받고 요동수복을 위하여 가도에 병력 5천과 난민 1만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조선은 이들에게 군량미를 지급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후금을 자극하고 있었다.

1627년 1월 24일 아미타수의 후금군은 평양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인조와 왕실은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전주로 피난하였다. 한편 안주성에서 후금군과 결전을 벌이던 남이흥은 무기가 떨어지고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성에 불지르고 김언수, 함응수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조정은 강화도에서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라졌으나 후금의 아미타수는 강홍립의 주선으로 강화제의를 해왔다. 협상에 나선 후금은 조선에게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도록 하였고 의주에 중강개시를 열어서 자신들과 교역하도록 하였다. 또 가도에 있는 모문룡을 축출하도록 하였고 자신들의 풍습인 하늘에 맹세하고 맹약하는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후금은 왕실의 종친인 원창군을 볼모로 잡아갔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백성12,000명을 포로로 끌고갔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10년 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인조의 왕세자인 소현세자는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소현세자는 16살이었고 민회빈 강씨와의 사이에 3형제를 두게될 것이다.

1628년 인조 6년 유효립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유효립은 대북파들의 잔당과 규합해서 인성군을 새 왕위에 옹립하려고 하였다. 인성군은 선조와 후궁인 정빈 민씨와의 소생이었다. 역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인성군은 진도로 유배를 떠났다가 나중에 목을 매어 자진하고 말았다. 한편 후금으로 끌려갔던 포로 1만2천명 중에 3천명이 도망쳐서 돌아온 일이 있었다. 후금은 이들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도록 요구하였다.

1631년 인조 9년 인목대비가 49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였고 선조와의 사이에 영창대군을 두고 있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고 대북파들이 득세하자 소북파들은 숙청을 당하였고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된 후에 증살되었다. 증살은 불을 이용하여 쪄서 죽이는 것이다. 왕대비였던 인목대비는 유폐되었으나 후일에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환궁하였고 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를 왕위에 올려놓았었다.

1633년 인조 11년에는 상평청을 설치하여 주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상평청은 물가조절기구였는데 풍년에는 곡물값이 떨어지므로 곡물을 비싼값으로 사들여서 곡가를 올렸고 흉년에는 곡물값이 상승하므로 곡물을 싼값으로 방출하여 곡가를 내렸다.

1635년 12월 인조비인 인렬왕후 한씨가 4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렬왕후 한씨는 원자를 낳았는데 곧 죽어버렸고 인렬왕후 자신도 산후병으로 나흘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그녀는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이 되었다. 인렬왕후 한씨는 인조와의 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두고 있었다. 후일 인조는 계비로서 장렬왕후 조씨를 맞이한다.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청나라 홍타이지는 12만 연합대군을 몸소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청군 7만을 이끌었다. 그리고 후금에 투항했던 명나라의 공유덕과 경중명이 명군 2만을 이끌었으며 또한 몽고군 3만이 합세하였다. 이제 연합대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피하여 쳐들어왔고 우수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단, 10일만에 수도 한양을 위협하였다. 조선조정은 척화론의 김상헌과 주화론의 최명길로 갈라져있었다. 조정은 이조판서 주화파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버는 한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하여 비빈종실의 귀족들을 강화도에 먼저 피신하도록 하였다. 그후 인조와 소현세자와 조정중신들이 강화도를 향하여 출발했을 때에는 이미 피난 길이 청나라군대에 의해 막혀있던 터라 남한산성으로 몽진하게 되었다. 청군은 12월16일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성내에는 조선군사 1만 2천과 50일분의 식량 1만 4천여 섬이 있었다. 다음해 정월에는 청나라 태종인 홍타이지가 직접 북한강가에 도착하여 진을 쳤고 전군을 지휘하였다. 청군은 먼저 도르곤과그의 3만 군사가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곧 강화성은 무너졌고 수비대장인 김상용은 자결하였으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포로로 잡혔다. 이 소식은 남한산성 내에 전해졌고 주화파의 주장으로  45일만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인조는 성문을 열기전에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삼전도(송파)의 수항단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다. 인조는 땅바닥에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것으로 인조의 용안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청나라는 화약의 조건으로서 황금 100냥과 백은 1,000냥 그리고 각종 물품 20여종을 세폐로 바치도록 하였고 신하의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며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나라로부터 받은 고명책인을 헌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의 장자와 제 2왕자 그리고 대신들의 자녀들을 인질로 보내도록 하였고 일본과 무역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인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는 도르곤을 따라서 인질로 끌려갔고 척화파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는 인질로 끌려간 후에 참형을 당하였고 김상헌도 오랜 옥종생활을 하였다. 한편 당시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에서는 조선인 처녀와 마님 등 포로 60만명 이상이 인간시장에서 거래되었다.

1638년 인조는 계비로서 조창원의 딸을 맞이하였다. 인조는 44세였고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는 15세였다.

1641년 인조 19년 광해군이 승하하였다. 향년 67세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사이의 소생으로서 선조를 승계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친명배금과 소중화사상을 중시한 서인들의 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았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옹립하였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능양군은 즉위하여 인조가 되었던 것이다.그후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제주도 애월로 이송되어 거기서 유배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8년간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몽골어를 배웠고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에 거류하고 있던 50만 이상의 조선인들을 보호햐는데 심려를 기울이기도 하였고 조선에서 끌려와 재판을 받고 있던 김상헌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청나라 섭정인 도르곤이 명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는 소현세자도 함께 동행하였고 베이징에서 70일간 체류하면서 예수교 선교사였던 독일인 신부 아담샬과 교류하며 서양문물과 캐돌릭 등을 접하였다.

1643년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명나라 출정을 위한 만찬모임에서 연회를 베푼후에 갑자기 타계하였다.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한편 도르곤은 8기체의 베일러 봉건영주 합의체에서 다음 황제의 승계자로서 홍타이치의 아들인 복임을 강력하게 추천하였고 그 뜻을 이루었다. 복임은 순치제로서 즉위하였고 당시 그의 나이는 6살이었으므로 그의 삼촌들인 호격과 도르곤이 좌우섭정을 맡았다.

명나라의 이자성은 군사를 일으켜서 서안을 점령하였고 국호를 대순으로 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 대순의 황제가 된 이자성은 대순 15년인 1644년 군대를 이끌고 북경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명나라 숭정제는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써 276년을 이어왔던 명나라는 망했다. 한편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후금에 투항하면서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도르곤은 병력을 이끌고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었고 북경으로 치고들어가 이자성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재미있게도 도르곤은 운좋게 어부지리로 중국대륙을 통일했던 것이다.

1644년 좌의정인 심기원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심기원은 조정중신들을 잔치에 초대하여 거사를 치른 후에 회인군을 옹립하기로 하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심기원은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두달만인  4월26일에 타계하였다. 향년 34세였다. 소현세자의 시신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7혈에서 선혈이 흘러나왔으므로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사람 같았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사이에는 석린, 석견, 석출 3형제가 있었다.

후금, 즉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3만 여명의 조선마님과 처녀들이 환향하였다. 이 여인들은 각 가정에서 이혼 등의 문제로 인하여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조선조정은 각 도에 회절강을 지정하였고 면죄의식을 거행한 후에 이 부녀들을 각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한편 회절강은 한강, 예성강, 낙동강, 소양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등이었다.

1645년 6월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인조는 즉시 새 왕세자로서 봉림대군을 책봉하였다. 한편 8월에는 소현세자빈인 민회빈 강씨의 동생인 강문성이 소현세자의 장사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에게 찾아가서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것을 듣고 불쾌하였다. 인조는 강문성, 강문명 형제를 제주도와 진도에 부처하였다. 나중에 이들은 장살당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민회빈 강씨의 궁녀들인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그녀들을 옥에서 죽였다. 민회빈 강씨 또한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별궁에 유치했다. 그런데 당시 김자점은 민회빈 강씨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그녀를 무고하였다. 그녀는 물증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되고 말았다. 민회빈 강씨의 나이는 36세였고 귀국 후 1년만이었다. 그녀의 아들들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석철은 장살당하였고 석린은 병으로 죽었다. 막내인 석린은 다음 왕으로 효종이 즉위하면서 복위될 것이다.

1646년 임경업은 포로로서 청나라의 심양으로 호송되어 있었다. 임경업은 명나라 말기에 숭정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후금의 정벌에 나섰지만 명나라가 망하면서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한편 인조는 임경업이 심기원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설을 확인하기위하여 청나라에 그의 송환을 요청하였다. 이전에 좌의정 심기원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사되었었다. 곧 인조는 송환된 임경업을 친국하였으나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은 그를 국법위반과 배신을 근거로 하여 문초하였는데 임경업은 문초중에 등뼈가 부러지면서 죽고말았다. 김자점은 열열한 친청파였고 임경업은 열열한 친명파였다.

1647년 주화파 최명길이 6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55세 였다. 인조는 능양군시절에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삼촌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인조는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의 소생인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였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이 있었지만 소현세자는 청나라로부터 귀국한 지 2달만에 타계했었다. 인조는 둘째 아들인 봉립대군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자 즉각 그를 세자로 책봉했다. 인조는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당시 장렬왕후, 즉 자의대비 조씨는 24세였다.

1649년 5월31일 31세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원래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가 일찍 타계한 까닭에 원손을 대신하여 세자위를 승계하였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는 원손을 두고 있었는데 그가 후일의 현종이다.

효종 초기의 조정은 서인이 주도하였다. 공서파는 인조반정에 공훈이 있었던 서인들이었다. 반면에 청서파는 인조반정에 참가하지 않았던 서인들이다. 김자점은 공서파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송시열은 청서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효종의 스승이었다. 한편 효종은 즉위하자 김자점을 영의정으로 중용하였다.

1649년 영국에서는 찰스 1세가 처형되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직전 왕인 제임스 1세의 차남이었다. 찰스 1세의 왕비는 프랑스 앙리 4세의 딸인 앙리에뜨 마리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된 이유는 청교도 혁명에 따른 내전에서 왕당파가 의회파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찰스 1세가 더햄과 뉴캐슬을 점령한 스코틀랜드 군대를 치기 위한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11년간 폐지되어왔던 의회를 소집하면서 비롯되었다. 의회가 열리자 의원들은 찰스 1세 에게 요구사항을 건의하였다. 그것은 11년(1629-1640)간 참주정을 도왔던 켄터베리 대주교 라우드(William Laud)와 스태포드(Stafford) 백작을 처형하도록 하고 또 선박세를 과세하는 것이 불법임을 인정하고 또한 의회의 동의없이 의회를 해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못박아 주기를 바랐다. 찰스 1세는 전제군주 성향의 왕이었다. 찰스 1세는 곧 격노하였고 자신에 대항하는 의원 5명을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재빠르게 도망가 버렸다. 도망간그들은 청교도들을 끌어모으고 절대군주에  대항하여 내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럼, 왜 스코틀랜드는 뉴캐슬을 점령하여 청교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는가. 찰스 1세는 매우 종교적인 왕이었다. 찰스 1세는 교회 의식이 웅장하고 형식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간단하고 단순한 스코틀랜드인들은 기도서의 장황함에 반발하여 그것을 시정해 주도록 영국의 뉴캐슬과 더햄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불쾌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치기위하여 전쟁비용이 필요했고 상공인들과 재력가들을 등에 업은 의회 의원들의 힘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찰스 1세가 처형되자 영국은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크롬웰의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크롬웰이 죽자 1660년 왕정이 복고되고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즉위하게된다.

1651년 김육은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효종에게 건의하였다. 각 지방은 공납으로서 특산물을 중앙에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현지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공납으로서 지방에 부과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간관리들은 공납을 대신하여 중앙에 바치고 농민들에게 방납을 거두어 충당하였는데 중간착취의 폐단이 되었다. 이것은 중앙과 농민들 모두에게 이롭지 못하였다. 그런데 대동법은 이 공납을 특산물이 아니라 쌀로 통일하였고 그것도 각 호당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의 결단위에 따라 부과하였다.

한편 김자점은 인조의 후궁이었던 귀인조씨와 함께 효종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김자점은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끌어모으게 하였고 송시열과 김집 그리고 원두표 등을 제거한 후에 귀인조씨의 아들인 숭선군을 옹립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사전에 탄로가 나서 실패하고 말았다. 김자점과 귀인조씨는 서로 친족관계였다.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은 귀인조씨의 딸인 효명공주와 혼인하고 있었다. 이 역모사건으로 인하여 김자점은 1651년 12월21일 참수되었고 귀인조씨는 사사되었다.

1652년 효종은 훈련도감의 대장에 이완을 임명하였고 비밀리에 북벌계획을 진행하였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은헤를 갚고 청나라에 대한 치욕을 씻겠다는 명분론을 강조하였는데 문에는 송시열, 무에는 이완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이들을 아꼈다. 훈련대장 이완은 어영청에 소속된 군사를 2만명으로 늘렸고 이들에게 지급되는 군보도 종전의 1보에서 3보로 늘리는 한편 안산의 덕물도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이완은 현종대까지 16년동안 그 직책을 유지하는데 한성부판윤과 공조판서, 형조판서, 포도대장을 겸임하였다. 한편 이해에는 난리때 척화파였던 김상헌이 8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1653년 1월 10일 하멜과 그의 일행 36인은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에 제주도 근해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하였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고 있던 박연이 제주도에 급파되었다. 박연의 본명은 웰터브레였고 그 또한 1628년에 제주도에 표착하였었다. 곧 하멜과 그의 일행는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나중에 이들은 분산 수용되어 생활하다가 대부분 병사하였다. 그후 하멜을 포함한 7인은 탈출에 성공하였고  제주도 표착 15년만에 일본을 거쳐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654년 효종은 청나라 강희제의 요청으로 대장 변급과 조총군 150명을 흑룡강(아므르강) 유역의 아르바진에 파견하였다. 아르바진은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였다. 러시아는 이반대제 이후에 지금은 짜르 알렉세이 1세가 집권하고 있었다. 짜르는 영토를 계속 동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는데 야쿠츠크와 오호츠크에 이어서 1648년에는 캄차카를 건설하였다. 러시아의 짜르는 1651년에는 몽고 땅인 바이칼호 근처에 이르크츠크를 건설하였고 계속 남하하여 청나라의 영토인 아르바진을 위협하였다. 이전 러시아는 1613년에 이반 4세가 타계하자 전국회의인 젬스키 소보르에서 미하일 로마노비치를 짜르로 선출하였는데 이로써 로마노프왕조가 시작이 되었었다. 이 미하일 1세는 봉건제를 강화하였고 권력을 중앙집권화하였다. 1645년 미하일 1세가 타계하자 그의 아들인 알렉세이1세가 짜르가 되었다. 알렉세이 1세는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와의 권력다툼에서 승리하였고 황제권의 우위를 확립하였다. 한편 효종은 1658년 2차로 조총부대를 파견하였다. 후일에 러시아와 청나라는 네르친스크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하였는데 분쟁지역인 아르바진은 버려진채 파괴되었다.

1658년 효종 10년 40세의 건장한 왕인 효종이 승하하였다. 효종의 귀밑 볼에 종기가 있었는데 점점 커졌다. 어의 신가귀가 침을 놓았는데 침을 빼자 피가 멈추지 않았다.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는데 나중에 교수형을 당하였다. 한편 송시열은 효종의 시신을 소렴하였는데 느슨하게 한 까닭에 시신이 부풀어서 관에 들여놓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널판을 이어서 관을 늘리고 시신을 입관하였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으로서 병자호란 후에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었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그가 왕세자가 되었고 인조를 이어서 왕위를 승계하였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사이에는 청나라 심양의 조선관에서 태어난 원자가 있었는데 그 원자가 왕세자가 되었고 이제 현종으로서 즉위할 것이다.

1659년 5월 9일 현종이 즉위하였다.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사이의 아들로서 청나라 심양의 조선관에서 태어났다. 19세의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에는 아직 원자가 없었다.

1660년 3월에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 즉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이 문제가 되었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는 38세였는데 전에 소현세자가 타계하였을 때 3년복을 하였었다. 서인들은 효종이 봉림대군으로서 제 2왕자였으므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은 기년설 즉 만1년설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남인 허목은 송시열에 대항하여 3년설을 주장하면서 서인들을 맹공격하였다. 또한 남인 윤휴와 윤선도도 효종이 왕위를 승계하였으므로 적장자와 다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3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송시열의 기년설이 채택이 되었고 이것으로 서인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이다. 한편 윤휴가 3년복을 주장한 근거는 의례 참죄장의 주석이었는데 거기에는 제1장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제2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라고 쓰여있다.

1661년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가 후일의 숙종이다

현종대의 초기에는 홍수가 있었는데 이어서 흉년이 들었고 그러자 돌림병이 돌았다. 5만 여명이  장티푸스와 콜레라에 감염되어서 고열과 신음속에서 고통받다가 그 중 1,000여명이 죽었다. 이 때 환자를 길바닥에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고 환자를 추행하는 일도 있었으며 소돌림병까지 있었다.

1665년 현종 6년 남한산성에 화약 1,500근이 폭발하는 일이 있었다. 한편 송시열은 현종에게 건의하여 동성동본 통혼의 금지를 건의하였다.

1671년 현종12년에도 기근과 역질이 있었다. 이 해의 전국의 가구수는 138만 5408호였고 인구수는 472만 5189명이었다. 한편 여주의 효종능에는 호석이 갈라지고 양마석이 떨어져나가는 일이있었는데 효종의 능을 세종의 영릉 동편으로 천장하였다.

1674년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모친인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57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이때 인선왕후 장씨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가 문제가 되었다. 예조에서는 경국대젼의 예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해놓았다가 나중에 대공복 즉, 9개월복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인 허목은 원래 정해 놓았던 대로 기년복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번에는 남인이 주장하는대로 기년복이 채택이 되었고 남인이 득세하였는데 이것이 제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1674년 13살의 왕세자가 보위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직전왕인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의 외아들이었다. 숙종과 16살의 인경왕후 김씨사이에는 원자가 없었다. 숙종은 나이가 어렸음에도 섭정을 세우지 않았다. 숙종은 자신의 할머니이자 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타계하자 장례 복제에 관련하여 자신의 증조할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는 기년복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남인 허목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9개월의 대공복을 주장하였던 서인들은 물러났고 남인정권이 수립되었다.

1680년 숙종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타계하였다. 발병 20일 만이었는데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녀의 부친은 김만기였는데 김만기의 동생은 구운몽으로 유명한 김만중이었다. 한편 숙종과 인경왕후 김씨사이에는 두 공주가 있었다.

1680년에 숙종은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허적을 불러서 그의 조부인 허잠에게 시호를 내렸다. 허적은 이 경사를 위하여 연회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마침 연회 당일날 비가 왔다. 허적은 궁궐에서 천막을 가져갔다. 그러나 숙종은 허적이 허락도 없이 천막을 가져간 것을 알게 되자 대노하였다. 숙종은 철원에 귀양가있던 김수항을 영의정에 임명하였고 조종의 요직들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었다. 김수항은 척화론자였던 김상헌의 손자였다. 한편 영의정에서 낙마한 허적에게는 서자인 허견이 있었다. 허견은 성질이 급하여 자신의 처형을 때려서 이빨을 부러뜨리기도 했었다. 허적은 복선군과 의논하여 숙종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복선군은 인평대군의 아들이었는데 역모에 성공하면 그를 옹립하기로 계획하였지만 사전에 발각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허견이 참수되었고 복선군은 교살되었다. 남인의 영수인 허적과 윤휴는 사사됨으로써 남인이 몰락하였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한다.

1681년에 숙종은 새 왕비를 맞이하였는데 민유중과 송씨부인 사이의 딸이었다. 그녀는 15살이었고 인현왕후 민씨이다. 인현왕후 민씨의 모친인 송씨부인은 송준길의 딸이었다. 따라서 송준길은 인현왕후 민씨의 외조부였다. 송시열은 송준길보다 1살 어렸는데 친족상 숙부인 송준길을 형이라고 불렀다.

1682년에 허새의 옥사가 일어났다. 서인인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기위하여 남인인 허새를 끌어들여 역모를 조작하도록 하였고 서인인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 일당들을 역모죄로 몰살하기로 계획하였다 김석주는 대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이었고 김익훈은 타계한 인경왕후 김씨의 종조부였다. 이 날조사건은 사전에 발각이 되었는데 서인인 윤증은 이 역모를 조작한 김석주와 김익훈을 처벌하도록 강하게 주장했던 반면에 같은 서인인 송시열은 처벌을 반대하였다. 따라서 서인들 내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는데 노론들은 정적인 남인 일당들에 대하여 온건한 태도를 취하였던 무리들이었고 반면에 소론은 남인 일당들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던 무리들이었다. 노론은 영수인 송시열과 김수항, 김만기 등 노장파였다. 그리고 소론은 영수인 윤증과 남구만, 박세채, 조지겸, 한태동 등 소장파였다.

소론의 영수인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다. 윤증의 부친은 윤선거였는데 윤선거와 송시열은 서로 동문수학한 친구사이였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을 갔었는데 그때 당시 서인 사대부들과 부녀자들은 모두 자결을 선택하였으나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후 윤선거가 타계하자 아들인 윤증은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송시열은 묘비명에 윤서거가 병자호란 때 살아서 돌아온 것을 두고 그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면서 야유하듯 써버렸다. 이것에 격노한 소론 윤증은 노론 송시열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것을 시정해주도록 요구하였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것을 회니의 시비라고 하는데 노론 송시열의 집은 회덕에 있었고 소론 윤증의 집은 이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1683년 12월5일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가 4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청나라의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의 왕비였고 현종이 승하하자 자신의 아들인 숙종이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고 자신은 왕대비가 되었었다. 숙종의 즉위 초기에 명성왕후 김씨는 자신의 부친인 김우명과 짜고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였던 인평대군의 세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무고하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고 모함하면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이 홍수의 변이다.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이 무고로 밝혀지자 주모자인 김우명은 무고죄로 처벌받게 되었는데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인 숙종을 다그치면서 불륜은 사실이었다면서 억지를 부렸다. 숙종은 외조부인 김우명을 처벌하지 않았고, 대신에 인평대군의 세아들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 적이 있었다. 그후 김우명은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다가 홧병으로 타계했다. 한편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인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자 무당의 조언에 따라서 추운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홑치마만 입은 채로 물벼락을 맞으면서 아들의 쾌유를 기원하였다. 결국 그녀의 아들인 숙종은 완쾌가 되었으나 정작 자신은 독감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명성왕후 김씨가 타계한 다음해에는 그녀의 척족인 서인 노론 김석주가 타계하였다.  

1686년 자의대비 조씨는 장옥정을 재입궁시켰다. 장옥정은 후일의 희빈장씨, 즉 장희빈으로서 후일 경종의 모친이다. 원래 장옥정은 자의대비의 나인출신었으나 숙종비인 인경왕후가 타계하자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는 장옥정이 천민출신이었으므로 숙종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를 궁궐 밖으로 쫓아냈었다. 장옥정의 모친은 서인 노론 조사석의 가비였는데 한번은 조사석이 뱀에 물리자 그 상처를 입으로 빨았으므로 대댠한 총애를 받았었다. 자의대비 조씨의 사촌동생이 바로 조사석이었다. 한편 장옥정이 재입궁하자 이제는 인현왕후 민씨의 반발이 격렬하였는데 그 이유는 숙종이 장옥정을 너무도 총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들과 결탁해서 후궁을 들이기로 했는데 영빈김씨를 간택하였다. 후궁 영빈김씨는 서인 노론의 영수인 영의정 김수항의 증손녀였다.

1687년 인현왕후 민씨의 부친인 민유중이 57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한편 장옥정은 숙원에서 소의로 품계가 상승하였다. 그리고 1688년 8월 장렬왕후이자 자의대비인 조씨가 64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같은해 10월27에는 숙종과 소의장씨 장옥정사이에 원자인 윤이 태어났다. 숙종은 다음해인 1689년 1월에 왕자 윤을 원자로 봉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소의장씨 장옥정을 빈으로서 책봉하였다.

서인 노론 송시열은 후궁의 소생이 원자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상소하였다. 중국 송나라 때 신종은 28세 때 후궁으로부터 철종을 낳았으나 후궁의 아들이었으므로 번왕에 책봉하였다가 나중에 신종이 적자가 없이 죽은 후에야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을 승계한 전례가 있었다. 서인 노론 송시열은 이 역사적 사실을 숙종에게 상기시키면서 정빈인 인현왕후 민씨가 아직 젊기 때문에 후궁소생의 원자 책봉을 늦추어주기를 탄원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하여 송시열이 왈가왈부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또한 남인들은 이제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숙종은 서인 노론 송시열을 파직하고 제주도로 유배보내었고  또 서인 노론 김수항을 진도로 유배를 보내었다. 그리고 인경왕후 김씨의 숙부인 서인 김만중을 남해에 유배보내었고 또 인현왕후 민씨의 중부인 민정중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시켰다. 이렇게 서인들이 쫓겨나게 되자 남인들이 정권을 재집권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 기사환국으로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 장옥정과 남인 일당이 득세하였다.

 1688년 11월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암은 영국의 데본Devon에 당도하였고 현직 왕인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1689년1월 오렌지공 윌리암3세는 의회를 소집하고 혁명에 필요한 법안을 성공적으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다. 1689년 2월 13일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오렌지공 윌리암 3세와 그의 부인인 메리를 공동왕으로 선포하였다. 윌리암 3세의 부친은 네덜란드의 왕자인 윌리암 2세였고 그의 모친은 청교도 혁명과 내전의 패배로 인하여 처형된 찰스 1세의 딸이었다. 한편 공동왕이자 왕비인 메리의 부친인 제임스 2세는 이미 프랑스로 도피하였고 지금 막 폐위되었다. 제임스 2세는 재위동안 로만캐돌릭을 영국에서 다시 국교화하고자 시도하였지만 토리당과 휘그당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웠다. 결국 의회는 개신교도이자 당시 네덜란드에 있었던 찰스 1세의 외손자인 오렌지공 윌리암 3세를 초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으로 인하여 영국은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하였다.

1689년 5월 4일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비하여 사가로 폐출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인 4월23일은 인현왕후 민씨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기간이었으므로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에게 생일하례와 선물을 생략하도록 당부하였지만 대신들은 인현왕후 민씨에게 생일 하례편지와 선물을 전달하였다. 숙종은 어명이 지켜지지 않는것에 분노하였고 그 다음날 인현왕후 민씨를 서궁에 유폐하였었다. 한편 후궁 귀인김씨도 인현왕후와 밀접한 관계라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후궁 귀인김씨의 부친도 귀양을 떠났다. 6뤌에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송시열을 한양으로 압송하도록 하였는데 송시열은 한양으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왕명에 따라 사사되었다.

1690년 10월 22일 숙종은 희빈장씨 장옥정을 왕비로서 책봉하였다. 숙종은 왕비 장씨의 부친을 비롯하여 3대에 걸쳐서 정승을 추증하였다. 왕비 장씨의 이복 오빠인 장희재는 포도대장을 거쳐서 나중에는 한성부 좌윤에 승차한다.

1691년에 서인 김만중은 경상도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만중은 인현왕후 민씨가 폐비된 것은 부당한 처사였음을 알리기 위하여 <사씨남정기>를 집필하였다. <사씨남정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사대부 유현수라는 자가 있었다. 유현수의 부인은 사씨였는데 자식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유현수 주변의 사람들은 소실을 얻도록 권하였다. 유현수는 교씨 성를 가진 첩을 구하였는데 그 교씨 첩은 얼굴이 예쁘기는 하였으나 마음씨는 나빴다. 이윽고 교씨 첩은 드디어 사씨 부인을 쫓아내버렸다. 한편 유현수는 쫒겨난 사씨 부인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마침내는 교씨를 쫓아내고 사씨를 찾아내어 다시 행복하게 같이 살았다. 이 <사씨남정기>는 언문으로 되어있었으나 나중에는 한문본으로도 간행하였다. 김만중은 이 소설에서 숙종을 유현수에 빗대었고 사씨부인을 인현왕후 민씨에 빗대었던 것이다. 김만중은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채 1692년 유배지인 남해에서 타계하고 말았다.

1694년 서인 노론인 김춘택과 서인 소론인 한중혁은 폐비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하였다. 김춘택은 서인 노론 김만기의 손자이므로 이미 타계한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의 조카였다. 한편 남인의 영수이자 우의정인 민암은 이번 기회에 서인 일당들을 모조리 제거하고자 서인들인 김춘택과 한중혁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숙종은 오히려 남인 영의정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해버렸다. 그리고 숙종은 서인 소론인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등용하였다. 이어서 숙종은 남인 일당과 결탁하고 있던 왕비 장씨 장옥정을 빈으로 강등하였고 그녀의 오빠인 한성판윤 장희재를 제주도에 부처하였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이 갑술환국으로 인하여 이전의 기사환국으로 조정을 거머쥐었던 남인 일당들은 몰락하였고 다시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이제 숙종은 폐비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로서 복위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서인 노론인 송시열, 민정중, 김석주, 김익훈, 김수항, 조사석 등을 복작하였다. 한편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는 불결한 환경에서 생활했던 탓인지 허리와 디리에 종기가 많이 피었다. 한의학에서는 담경에 문제가 있으면 종기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해, 즉 1694년에 숙종과 후궁인 숙원 최씨사이에 아들 연잉군이 태어났다. 그리하여 후궁인 최씨는 숙빈으로 계급이 상승하였고 연잉군은 후일 영조가 될 것이다.

1696년 4월 희빈 장씨의 부친인 장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왕세자 윤을 저주하는 목패와 칼 찬 인형 두개가 발견되었다. 장희재의 가노가 이것을 고변하였는데 재미있게도 그 가노가 오히려 귀양을 갔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장희재의 자작극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묘소 작변의 사건이다.

9살이 된 왕세자 윤은 11살의 심호의 딸을 세자빈으로서 맞이하였다. 그녀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12대 손이고 명종의 장인인 심강의 7대 손이고 동서분당의 원인을 제공했던 심충겸의 6대 손이다. 세자빈 심씨는 왕세자 윤이 경종으로서 즉위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타계한다. 세자빈 심씨는 병약하여 가례당일에도 복통을 일으키는 소동이 있었다.

1701년 숙종 27년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된지 8년만에 이름모를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35세였다. 인현왕후 민씨의 부친은 서인 노론의 민유중이었고 모친은 송준길의 딸이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더불어 서인노론의 거두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타계하고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숙종의 계비가 되었지만 원자를 생산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차에 희빈장씨가 왕자 윤을 생산하자 서인 노론 송시열은 이 왕자 윤이 원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기사환국(1689)을 맞이하게 되었었다. 집권한 남인 일당은 숙원 장씨가 희빈이 되는데 일조하였고 또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는데 일조하였었다. 그후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되었지만 폐비복위 운동이 일어나고 갑술환국(1694)이 성공하자 폐비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되었고 왕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희빈장씨는 앙숙 관계였던 인현왕후 민씨의 단명을 기원하면서 방술에 심여를 기울였다. 희빈 장씨는 취선당 별채의 대청에 인현왕후 민씨의 화상을 걸어 놓았는데 그 화상은 화살자국으로 가득하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죽기전에 희빈장씨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3대 궁중소설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한중록이다.

숙종은 곧 제주도에 부처되어있던 장희재를 한양으로 압송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런데 희빈 장씨는 이 사약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이제 상궁들은 발광하는 희빈 장씨의 팔다리를 붙들고 막대기로 그녀의 입을 벌리고 사약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나이 43세 였다. 그때 왕세자 윤은 죽어가는 모친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서인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메달리는 왕세자를 외면했다. 한편 서인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말하기를 죽음으로써 세자의 은혜를 갚겠노라고 하였다. 한편 서울로 압송된 쟝희재는 군기시에서 사사되었고 그의 친구인 동평군 이항도 사사되었다. 이것이 무고의 옥이다. 이때 서인 소론 남구만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렸갔다. <청구영언>에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로 시작하는 남구만의 시 한수가 실려있다.

1702년 숙종은 새 왕비로서 김주신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인원왕후 김씨가  되었다.

1704년 숙종과 숙빈 최씨사이의 왕자인 11살의 연잉군은 서종제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녀는 당시 13살로 후일 정성왕후 서씨가 될 것이다.

1714년 숙종 44년 왕세자 윤의 세자빈 심씨부인이 갑자기 혼절하여 돌연사하였다. 향년 33세었다. 왕세자 윤과 심씨부인 사이에는 원자가 없었다. 31세의 왕세자 윤은 새 세자빈으로서 14살의 어유구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후일 선의왕후 어씨가 될 것이다. 한편 어유구는 그때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김창집의 제자였다.

숙종 46년인 1720년 6월 8일 숙종이 타계하였다. 향년 60세였다. 숙종은 청나라에서 태어난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의 외아들이었다. 숙종의 재위동안은 붕당과 댱쟁의 전성기였다.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한 경신대출척, 남인이 득세한 기사환국, 서인 소론이 득세한 갑술환국등이 있었다.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의 왕세자 윤은 곧 숙종을 승계하여 경종으로서 즉위할 것이고 숙종과 숙원 최씨 사이의 연잉군 또한 경종을 승계하여 영조로서 즉위하게 될 것이다.

한편, 중국 송나라 때 구양수는 붕당의 갈등을 합리화하였는데 붕당 때문에 난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난정 때문에 붕당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나라 때 한비자는 군주는 말에 따라서 신하에게 일을 맡기고 말과 일이 다를때 신하를 벌준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2011년 7월 6일 수요일

6. 선조-광해군

1567년은 선조가 즉위한 해이다. 선조는 직전왕인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후사가 없었으므로 명종의 방계혈족으로서 보위에 오른 것이었다. 선조는 중종과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원군이었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16살로 어렸으므로 인순왕후 심씨가 1년간 수렴첨정하게 되었다. 선조 2년인 1569년 선조는 왕비로서 박응순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15살이었고 의인왕후 박씨가 된다. 그녀는 후일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을 것이고 후사없이 타계할 것이다.

선조는 1574년에 후궁인 공빈김씨와의 사이에 임해군을 얻었고 3년 후에는 광해군을 얻었다. 그러나 공빈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후에 타계하였다. 향년 26세였다. 한편 1577년 선조는 또 하나의 후궁인 인빈김씨와의 사이에 의안군을 얻었고 그 다음해에는 신성군을 얻었으며  나중에는 정원군을 얻게 될 것이다. 후일에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은 인조가 될 것이다.

심의겸은 어린 선조를 대신해서 수렴청정했던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이었다. 당시 심의겸은 이조참의였다. 마침 이조정랑인 오건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김효원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소윤 윤원형이 계파였다는 것을 이유로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김효원은 우여곡절 속에서 다음해인 선조 6년 이조정랑에 승차하였다. 그런데 다음해인 선조 7년에 이조정랑 자리가 비게 되자 조정기가 자신의 후임으로 심충겸을 천거하였다. 그런데 심충겸은 심의겸의 동생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조정랑 김효원이 이것을 결사반대하였고 그리하여 심충겸은 낙마하고 대신에 이발이 승차하였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서 조정은 양쪽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쪽은 서인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동인이 되었다. 심의겸은 한양 서쪽인 정동에 살았으므로 서인이 되었고 김효원은 한양 동쪽인 건천동에 살았으므로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후일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동인은 이발의 북인과 우성전의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어서 동인의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1589년 선조22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정여립은 이이 문하의 서인이었는데 서인들 내에서 마찰을 일으킨 때문에 동인으로 이탈해나갔다. 그래서 정여립은 고향인 호남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거기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계를 조직해서 노비와 무사를 끌어모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는 왜구를 섬멸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고 자신의 세력을 황해도로 진출시켰다. 재미있게도 황해도 관찰사는 정여립이 선조에 대항하여 역모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말았다. 즉시 조정은 체포령을 내렸고 관련자들을 압송하였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의 토굴에서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은 또다른 파장을 가져왔다. 이것은 기축옥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인은 정여립을 역모로 몰았던 반면에 동인은 그것을 반박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희생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기축옥사이다. 당시 서인 송익필은 송사련의 아들이었다. 송사련은 중종때 신사무옥의 주모자였다. 이전에 송사련은 안당을  밀고하여 안당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일약 천민의 신분에서 당상관으로 승차하였었다. 그런데 선조가 즉위하면서 안당의 손자인 안로의 처 윤씨부인이 안당의 처사가 부당하였음을 상소하였고 선조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송사련의 70여 일족은 재산의 몰수되고 다시 천민이 되었었다.  이때 이발을 비롯하여 동인들이 많은 기여를 하였었다. 이제 송사련의 아들인 서인 송익필은 동인들을 경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송익필과 정철을 주축으로 한 서인들은 이 기축옥사를 톻하여 호남의 많은 동인들을 희생시켰다.

서인 정철은 그후 좌의정이 되었다.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신성군의 모친인 의빈 김씨는 내심 신성군이 책봉이 되기를 바랬던 나머지 정철에 반발하였고 이에 부화뇌동하여 선조 또한 정철을 미워하게 되었다. 의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영의정인 동인 이산해는 마침내 서인 정철을 강계로 유배보내는 데 성공하면서 서인들을 보복하였다. 이것을 건저의 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동인들은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철을 죽여야한다는 북인과 살려두자는 남인으로 갈라졌는데 정철에 대하여 강경파였던 북인은 이산해와 정인홍 그리고 이발이었다. 다행히 정철이 유배를 가게되자 이발은 정철을 대신해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정철에 대하여 온건파였던 남인은 우성전과 유성룡 등이 있었다. 나중에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진다.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1583년 일본전토를 장악하였고 1585년에는 드디어 관백이 되었다. 관백이란 천황 바로 밑인 간바쿠로서 조선의 영의정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 간바쿠 밑에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있었는데 이 다이묘들 즉 지방의 영주들은 주어진 토지와 가신, 농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전 1336년 무로마치 막부시대가 열렸다. 세월이 흐르자 각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충성하고 있던 가신들이 하극상을 벌리고 다이묘들에게 대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혼란한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승전하였고 나중에는 큐슈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이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했던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되었다.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상문제로 겐소와 소 요시토시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따라 조선도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서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선통신사 일행들은 1590년 본국으로 돌아왔다. 조선통신사의 정사였던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곧 조선을 칠 것이므로 전쟁이 임박하였다고 말하였고 부사였던 동인 김성일은 이것을 부정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사체계는 제승방략이었다. 제승방략은 세종때 김종서가 함길도의 6진을 개척하면 사용했던 군사전략이었다. 진관법이 지역방어의 전략이라면 제승방략은 대인방어라고 볼 수 있다. 제승방략은 중앙의 순변사가 각 도의 병력을 특정한 곳에 집결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반면에 진관법은 각 도의 군사요충지인 진이 독자적인 병력과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유성룡은 선조에게 제승방략체계를 진관법체계로 바꿀것을 건의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은 총병력 28만을 16군으로 나누어서 제1군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를 필두로하고 제2군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필두로 하여 조선진출을 시작하였다. 또 제 16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마지막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출정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일본의 대의명분은 정명가도였다. 명나라를 치고자 하므로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에따라 왜구들은 일본상인들의 후원을 힘입어서 더더욱 명나라 해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임진년 4월14일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하였고 이어서 송상현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10일 후에는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을 상주에서 패퇴시키고 경상도를 장악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4월24일 충주의 탄금대에서 달천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치고있던 신립의 조선군대를 물리쳤다. 이때 신립과 부장 김여물은 자결하였다. 신립의 기병대는 이 날 비가 많이 왔으므로 땅이 질퍽해져서 파괴력있는 돌파를 하지 못하였다. 한편 제 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과 영천을 거처서 충주에 당도하였고 제 1군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합세해서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은 개전 20일만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이미 조선왕실과 조정은 피난을 떠나 평양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끌어모으는 한편 공명첩을 이욯하여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공명첩이란 곡식과 벼슬을 맞바꾸는 것이었는데 광해군은 이것을 합리적으로 매관매직에 이용하였다. 한편 한양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안도로 진격하였고 6월 13일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때 선조는 의주를 향하여 피난길을 떠나 있었다. 한편 일본군 제 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출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을 바탕으로 5월 사천해전, 6월 당포해전, 7월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병력보충과 물자 그리고 보급품 수송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청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었으나 금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곽재우와 김시민은 진주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금산성에서 전사하였고 김천일은 진주에서 전사하게 될 것이다. 정문부는 함경도 길주와 경성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었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과 그의 제자 유정은 1500여명의 승병을 끌어모아서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시민은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권율은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것으로 조선 최대 곡창지역인 전라도는 안전하게 보전되었다.

명나라의 신종, 즉 만력제는 조승훈과 병력 5천을 구원군으로서 조선에 파병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점령당한다면 명나라로서도 좋을 리가 없었다. 순망치한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릴 수밖에 없다. 만력제의 조선파병 결정은 명나라의 연장을 위한 자구책일 수도 있었다. 조승훈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서 이여송은 병력 4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드디어 탈환하였고 그러자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이때는 1593년 1월 이었다. 퇴각한 일본군은 경기도 벽제관에서 병력을 정비하면서 전력을 최상으로 끌어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일본군은 벽제관에서 이여송의 명나라군대를 상대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는 개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일본군은 성종의 묘인 선릉과 중종의 묘인 정릉을 파헤쳤는데 선릉에서는 시신이 없었다. 이어서 일본군은 함경도에서 후퇴하고 돌아온 가토 기요사마와 합세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 분전하여 승리하였다.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는 심유경을 보내어 화의를 추진하였다. 한양의 일본군 본진은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화의에 응하였고 4월에는 전군을 남하시켜서 서생포와 웅천, 즉 창원에 성을 쌓고 화의의 결과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병력 12만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진주성은 조선군 3천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9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함락되고 말았으나 일본군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이 전사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에서 가장 치열했던 제 2차 진주성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명나라와의 강화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훈련도감의 창설을 건의하였다. 훈련도감이란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들이 궁궐과 수도한양을 방위하는 관청이다. 병력은 10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포수와 사수, 살수로 나누어서 3개의 조직으로 만들었고 이것을 삼수병이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직업군인 예니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얀피부를 갖고 있었고 대부분 슬라브족 출신들이었다.

한편 이 난리로 인하여 기근과 전염병이 퍼졌고 식인도 행하여졌다. 이때 말 한필 값이 쌀 서너말이었다. 쌀에 대한 수요는 과잉이었고 쌀의 공급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쌀의 실물가치는 급상승하였다.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이었던 것이다. 물가의 안정을 되찿기 위해서는 안정된 토지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쌀의 생산을 늘려야 했다.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이몽학은 전주이씨이자 왕가의 서얼이었는데 전쟁과 흉년, 전염병으로 민심이 사나와지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선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이몽학의 반란군은 수천명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홍주성을 빼앗앗다. 이에따라 도원수 권율은 관군을 이끌고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김경창이 이몽학을 주살하는 일이 있게 되면서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경창은 이몽학의 부하였다. 선조는 김덕령과 곽재우를 이 역모에 관련이 있다고 하여 친국하였는데 김덕령은 매를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일이었다.

1597년 일본군은 남해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것이 정유년 1월14일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가토 기요사마가 선봉군인 제1군으로서 부산으로 침략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 2군으로서 웅천 즉 창원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하삼도를 점령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가토 기요사마가 부산을 재침략하였을때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나가싸우라는 명령을 밭았음에도 이것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조선조정이 일본의 계략에 말려들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순신은 명령불복종으로 파면되었고 대신에 원균이 새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7월4일 원균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는데 크게 당하였다. 조선수군은 패주하였고 거북선을 포함하여 판옥선 300여척중에서 170여척이 매몰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칠천량해전인데 이것으로 남해안의 제해권은 일본군으로 넘어갔다.

조선조정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인 7월22일 이순신을 새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군이 전라도까지 침입해 있었고 일본군은 방화와 약탈,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남원성에서는 소금에 절인 조선인의 코가 5만 이상이나 되었고 10만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중 대부분은 도공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쓰마주에게 명령하여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오도록 하였던 것인데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들 조선포로중에 일부는 포르투갈의 노예시장에 팔려나갔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였고 마침내 직산에서 조선 명나라 연합군과 조우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대패하였고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진도의 울돌목 명량에서 조선수군 13척을 가지고  일본수군 133척을 대파하였고 그러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1598년 9월 조선 명나라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과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왜성, 가토 기요사마의 울산왜성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때 조선 명나라 육군과 수군이 서로 협력하면서 공격하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일본군은 철병하기 시작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을 숨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향년 62세였다. 이순신과 명나라 도독 진린은 조명연합수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퇴로를 노량에서 차단하였다. 1598년 11월19일 새벽 4시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그날 낮 12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 함대 500여척 중에서 450여척을 파괴하였다.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지 못한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안타깝게도 이 순신은 이 노량해전 전투에서 일본함대를 추격하던 중에 적병의 총탄을 맞고 타계하였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세살 연하였는데 같은 하회마을 출신이었다. 이것으로 7년간 이어졌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한편 서양에서는 1571년 레판토 해전이 일어났다. 스페인과 베네치아, 제노바 등 신성동맹국은 갤리선 203척을 이끌고 오스만 투르크의 갤리선 함대 230척에 대항하여 그리스의 고린트만 레판토에서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전에 오스만 투르크의 알리 파샤는 지중해의 키프로스를 점령하였고 서진을 계속하여 이탈리아를 침략하려고 하고있었다. 이때 교황 비오 5세와 스페인왕 필립2세가 중심이 되어서 연합군을 형성하였고 오스만투르크의 서진을 성공적으로 막아서 이탈리아를 보호할 수 있었다. 레판토 해전은 10월 7일 아침에 교전하여 5시간만에 끝이 났다. 신성동맹군은 7500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12척의 갤리선을 상실한 반면에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는 2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갤리선 137척이 나포되었고 50척이 침몰되었다. 한편 이때 돈키호테를 지은 작가인 세르반테스도 신성동맹군으로서 참전하였는데 부상을 당하여 그후 평생 왼손을 쓸 수가 없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함대에 의해 궤멸당하였다. 스페인 왕 필립 2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왕권을 무너뜨리려고 영국침공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의 후원자이었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캐톨릭국인 스페인으로서는 영국의 지원을 차단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영국으로부터 보호하여야 했다. 또한 스페인 편이었던 교황 식스투스 5세도 스페인군이 영국에 상륙할 경우에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스페인을 지원하였다. 초반에 영국함대는 선제 기습공격을 하였으므로 프랑스와 네덜란드 경계에 정뱍해있던 스페인 함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무적함대는 6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영국함대의 전사자는 100여명이었다. 그러자 스페인은 본토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는데 퇴로인 영국해협이 영국함대에 의해 차단되었으므로 멀리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함대는 퇴각을 시작하였고 다행히 스코틀랜드를 무사히 지났지만 아일랜드 북부에서 큰 폭풍을 만나서 24척의 배가 난파되었고 150척중에서 50여척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때 2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로인하여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이용하여 영국을 침략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경복궁을 비롯한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들이 소실되었고 역대 실록을 보관해왔던 사고 중에 유일하게 전주사고 만이 남았다. 일본은 고추와 담배를 전래하였는데 조선은 종래의 동치미와는 맛과 모양이 다른 김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은 사서오경을 필사해 주었는데 이것은 조선주자학을 일본에 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권력승계를 놓고 전투가 벌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정략결혼을 시켰두고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파들에 대항해서 세끼가하라 전쟁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바쿠후가 되어서 에도시대를 열었다. 한편 고니시 유끼나가는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당하였고 시마즈 요시하라도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로 영지를 보장받았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교역을 중단하는 등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1602년 선조는 51세였다. 선조는 두 해 전에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후사없이 타계하였으므로 새 왕비를 맞이하였다. 새 왕비는 김제남의 딸이었는데 16세였다. 그녀는 계비 인목왕후 김씨로서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장자가 된다. 광해군은 차기 왕권과 관련하여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조는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경작지가 줄어들었므로 각 지방에 어사를 파견하여 양전을 실시하였고 납속책을 실시하여 재정을 확보하였다. 납속이란 곡식을 받고 벼슬을 주는 것으로서 납속수직이라고도 하였는데 양반이 쌀 백섬을 기부하면 동반 정3품에 승차할 수 있었고 서얼이 쌀 100섬을 기부하면 동반 6품에 승차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납속책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었다. 또 선조는 시전, 염분, 어전을 왕자와 옹주들에게 경제적 편의를 위하여 나누어줬는데 이것은 궁방전의 기초가 되었다.

선조는 1604년 유정을 일본에 보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협정을 맺게 하였고 왜관에 시장을 상설해서 통상하기로 하였다. 한편 유정은 일본에 끌려간 조선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57세였다. 선조는 중종과 후궁 창빈안씨와이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원군이었다.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 박씨는 전란중에 후사없이 타계하였고 후궁인 공빈김씨와의 사이에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두었고 또다른 후궁인 인빈김씨와의사이에는 신성군과 정원군 등을 두었다. 나중에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은 인조가 된다. 또 선조는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적자인 영창대군을 두었다.

광해군은 왕세자이긴 하였지만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남으로 해서 저으기 불안하였다. 광해군 자신은 후궁의 소생이었으므로 세자위가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책봉을 구하고 확인을 받아오는, 즉 고명책봉하는 처지였으므로 광해군은 왕위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정당한 승계위치에 있어야 했다.

1608년 2월2일 광해군이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사이의 둘째아들이었고 전란중이었던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형이었다. 광해군은 왕비 유씨와의 사이에 원자를 두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강홍립 등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파를 중용하였다. 한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소북파는 유영경을 중심으로 적통론을 내세우면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었다.

임해군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한다는 설이 있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자신의 형인 임해군을 전라도 진도에 부처하였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고명책봉에 시비를 걸면서 엄일괴와 민애민 등 차관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엄일괴는 왕권의 적통자로서 임해군을 염두해 두고 있었으므로 전라도 진도에서 강화도 교동으로 부처되어 있던 임해군과 몸소 면담하였다. 재미있게도 임해군은 그자리에서 의자를 들어서 엄일괴를 향하여 던져버렸다. 광해군으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고 위기를 모면한 순간이었다. 한편 광해군의 애첩이자 상궁이었던 김개시는 은 오천량과 인삼 50근을 엄일괴에게 뇌물로 주었다. 임해군은 그 다음해인 1609년 음독하여 타계하였다.

광해군 1년인 1609년 조선조정은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고 통상을 재개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1년에 세사미두 100석을 대마도에 하사하였고 대마도는 세견선 20척에 한하여 조선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대마도주는 부산포에 한하여 교역할 수 있었다. 광해군 2년에는 허준이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나중에 동의보감은 18세기 일본과 청나라에서 번역출판된다. 한편 광해군은 전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기 시작하였는데 백성들의 원성이 적지 않았다.

1611년 광해군은 왕세자의 세자빈으로서 박자흥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자는 그때나이 14살 이었다. 한편 박자흥은 대사헌 박승종의 아들이면서 대북파인 이이첨의 사위였다.

1612년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성균관 학유였던 김직재와 아들 김백함 부자가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들은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을 옹립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순화군은 선조의 서자였다. 그런데 이 역모사건은 김직재가 고문도중에 매를 이기지 못하여 잘못 발설한 것으로서 사실은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위하여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 무고사건으로 인하여 김직재는 참형을 당하였고 진릉군은 위리안치되었다. 그리고 소북파 100명도 처벌받았다.

광해군때 강변칠우는 북한강변에서 술과 시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던 일곱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고관대작의 아들들이었는데 모두 서얼 출신이었으므로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영의정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와 사양갑, 김평손 등이었는데 그들은 세상을 비웃으면서 자신들을 중국의 죽림칠현에 비유해서 강변칠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돈이 떨어지자 유흥비 마련을 위하여 새재에서 은상인을 살해하고 은 수백냥을 약탈했는데 다음해에 포도청에 잡혀왔다. 그들은 포도청에서 진술하기를 김제남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짓진술하였다. 김제남은 영창대군의 외조부였다. 이것을 기화로 대북파들은 소북파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밀어내려고 결심하였다. 광해군은 김제남을 사사하였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 유배보내버렸다.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김씨는 서궁, 즉 경운궁에 유폐되었다.또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은 사사되었다. 그리고 정온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되었다. 한편 강화도에 유배를 가 있던 영창대군은 강화부사 강항에 의하여 증살되었다. 향년 9세였다. 증살이란 아궁이에 불을 높인 후 쪄서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1613년에 있었던 계축옥사이다.

광해군 초기에 세도를 누렸던 인물들은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였던 이이첨과 세자빈 박씨의 조부였던 박승종 그리고 광해군의 왕비인 중전유씨의 부친이었던 유희분 등 이었다.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일어났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아들이었는데 정원군의 부친은 선조였다. 신경희는 서인이었는데 능창군을 옹립하면서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이 되었고 주동자 신경희는 참수되었고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목매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정원군은 아들이 죽은 이 사건 때문에 화병으로 탸계하였다. 나중에 정원군의 첫째아들인 능양군은 반정에 성공하여 인조가 될 것이다.

1616년 광해군 8년에 이이첨은 해주사람 박이빈을 사주하여 소북파인 박승종과 유희빈 등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상소하도록하였다. 해주목사 최기는 박이빈을 문초하는과정에서 이 역모가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으나 발설하지는 않았다. 재미있게도 이이첨은 해주목사 최기를 역모의 괴수로서 몰아붙여서 마침내 그를 때려죽여버렸다. 이 사건으로 소북파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616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을 통일하여 후금을 건국하였다. 누르하치는 대패륵과 소패륵의 합의체에서 칸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후금의 팔기제도는 맹안모극제에서 유래한 것인데 팔기를 구성하는 각기의 수장은 대패륵이 되었고 이들의 합의하에 칸을 추대하였다. 평화시에는 팔기가 사법과 행정 그리고 토지를 관할하는 기준이 되었다.

인목대비 김씨의 모친인 노씨부인은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 김씨가 하루빨리 복위되기를 바라면서 불당에서 발원하였다. 내수사에서는 노씨부인의 생계를 위하여 양곡을 비밀리에 지급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노씨부인을 제주도로 유배보내버렸다. 제주도에 도착한 노씨부인은 생계를 위하여 주점을 열었는데 끼니 때에는 탁주를 걸러낸 찌거기인 모주를  밥 대신 먹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술에 쩔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주모라고 불렀다. 어원상 노씨부인은 조선 최초의 주모였다.

명황제 신종, 즉 만력제는 후금의 누륵하치가 강성해가자 위기감을 느꼈고 신하들에게 조선을 고무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명나라에 협조할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치도록 하였다. 1618년 도원수 강홍립은 조선병 13,000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밀지를 전달하였는데 현지에서 명과 여진의 형세를 보아서 향배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1618년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인 페르디난드 2 세는 전 해에 페르디난드 1세를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는 열렬한 캐돌릭교도었으므로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교도들 즉 루터교파들은 1555년에 있었던 아욱스부르크조약으로 인하여 캐돌릭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종교적 자유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제 그 수가  더 늘어나서 칼뱅파와 재세례파도 등장하면서 캐돌릭을 위협하고 있었다. 한편 황제 페르디난드 2세는 국정에 관여하게 될 대표 3명을 보헤미아에 보냈다. 그런데 보헤미아인들은 그 대표들을 불신하였고 약식재판을 한 후에 그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이것이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다. 이 보헤미아인들의 반란을 기화로 하여 캐돌릭교도와 개신교도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나중에는 덴마크가 개신교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였다. 뒤를 이어서 스웨덴이 개신교편에 서서 전쟁에 등장하였지만 캐돌릭 황제인 페르디난드 2세는 독일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의 지원을 통하여 그들을 무찔렀다. 한편 프랑스는 캐돌릭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캐돌릭과 개신교와의 전쟁에서 개신교를 편들기 위하여 전쟁에 참가하였다. 프랑스의 실권자인 리슐리외와 후임자인 마자랭은 개신교편에 서서 캐돌릭국가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하여 전쟁에 참가하였고 마침내 승리하여 베스트팔렌조약을 맺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은 인구의 4분의 1을 상실하였고 유럽의 지배력은 독일의 합스부르크가에서 프랑스의 부르봉가로 넘어갔다. 또한 개신교국인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을 끝내어 독립을 이루어냈고 스위스도 독립국가가 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도 개신교국을 지원했었고 캐돌릭국인 폴란드와 전쟁을 해서 승리하였었다.

1619년 명나라의 10만 군대는 조선군 1만2천의 군대와 더불어 후금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젼투는 3월 1일의 사르후 전투부터 시작하였다. 강홍립은 명나라 동로군의 장군인 유정과 함께 부차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후금 군대를 상대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강홍립은 남은 군사 5,000을 이끌고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한편 명나라는 이 전투의 패배로 만주를 후금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누르하치는 요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1620년 명나라 만력제, 즉 신종이 타계하였다. 그러자 그의 20세의 아들인 광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광종은 즉위 29일만에 타게하고 말았다. 그는 알악 2개를 먹었는데 급사하고 말았다. 새 황제로서 그의 아들인 천계제, 즉 희종이 즉위하였다. 희종은 문맹이었으므로 국정을 환관에게 넘겨주었고 자신은 취미인 목공일을 하였다. 그로부터 7년후, 희종의 동생이 황제에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즉 의종이다.

광해군은 인목대비 김씨를 유폐했었는데 이번에는 삭호까지 하였다. 삭호란 관작을 삭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목대비 김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광해군의 애첩인 김상궁은 매관매직을 통하여 재물을 확보하였는데 그녀는 장사꾼에게 돈을 빌려서 전결의 세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인 이이첨과 애첩 김상궁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반대파들을 혹독하게 탄압하였으므로 조정은 신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편 강홍립이 오랑케 후금에 투항하자 광해군은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광해군은 조정중신들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삭탈관직하였으나 그의 가족들을 구금하지는 못하게 하였다.

신경진은 임진왜란때의 도원수인 신립의 아들이었는데 한때 부친의 공으로 무관의 일종인 선전관이 되었었다. 그런데 신경진은 광해군과 대북파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귀와 역모모의를 하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그때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왕조편





2011년 6월 27일 월요일

5. 중종-인종-명종

중종반정은 1506년 9월 1일 밤 11시 경에 시작하여 9월 2일 아침 거사가 완료된 사건이었다. 지중추부사 박원종과 영의졍 유순정, 전 이조참판 성희안은 반정계획을 세웠고 사복시 첨정 홍경주와 군기시 첨정 박영무는 훈련원의 병력들을 끌어모았다. 이어서 반정군은 연산군의 최측근인 훈구파 임사홍부터 주살하였고 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을 주살하였다. 곧이어 반정군은 궁궐을 장악하였다. 반정군은 연산군의 보모였던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 연산군을 폐위하자고 종용하였다. 또 반정군은 정현왕후 윤씨로부터 그녀의 아들인 진성대군으로 보위한다는 교지를 받아내었고 즉시 연산군을 찾아가서 옥새를 빼앗앗다. 이어서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진성대군의 사저를 찾아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진성대군은 반정군 일당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줄 알았다.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은 무관출신이었고 그때 나이 40살이었디. 박원종의 누나는 월산대군의 부인이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이다. 재미있게도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을 자주 찾아가서 서로 연인관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침내 임신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약을 먹고 자살해버렸다. 박원종은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연산군을 더욱 경원하였었다. 마침내 중종반정에 성공한 박원종은 후일 영의정으로 승차하였지만 화류병이 악화되면서 타계한다.

1506년 9월2일 19세의 진성대군은 중종으로서 즉위하였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즉 자순대비 사이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중종의 부인은 신수근의 딸인 신씨부인이었다. 신씨부인의 부친인 신수근은 방금 전에 주살되었다. 재미있게도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또 새 왕이 된 중종의 장인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왕비 신씨부인이었고 신수근의 딸은 중종의 왕비 신씨부인이었다. 신수근은 자신의 매제인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서 도승지, 이조참판,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었다. 재미있게도 신수근의 할머니는 임영대군의 딸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종의 아들이다.

중종은 자신의 이복형이자 직전왕인 연산군을 강화도의 교동으로 유배보내었고 왕비 신씨를 폐비하였다. 또 자신의 조카인 폐세자 황을 강원도 정선으로 유배보낸 후에 곧 사사하였다. 한편 유자광은 중종에게 건의하여 연산군의 외척이 되는 중종의 왕비 신씨부인의 폐위를 간곡히 주장하였다. 중종은 영의정 유순정, 좌의정 김수동, 우의정 박원종 등 공신들의 위세에 눌린 나머지 눈물을 흘리면서 윤허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종비인 신씨부인은 폐비되어버렸다. 왕비 신씨부인은 나중에 중종을 그리워하며 못 잊다가 치마바위의 전설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후 명종때 71세의 일기로 타계한다. 그녀의 고모인 연산군의 왕비 신씨부인도 폐비되었었다.

중종은 연산군이 폐쇄한 경연과 사간원을 부활시키고 중종반정에 공이 큰 인물들에게 정국공신의 훈작을 주었다. 정국공신의 1등공신에는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홍경주, 신윤무 등이 책록되었다. 한편 그해 1506년 11월 7일 강화도 교동에 유배중이던 연산군이 승하하였다. 향년 31세였다.

중종은 폐비 신씨부인 대신할 후궁들을 맞아들였다  경빈박씨는 서얼출신으로서 박원종의 친척이었다. 희빈홍씨 또한 서얼 출신이었는데 홍경주의 딸이었다. 숙원윤씨는 윤여필의 딸이었는데 나중에 중전으로 책봉이 되고 후일 인종의 모친이 될 것이다. .

중종 2년 1507년 박경과 김공저가 중종반정의 주역인 좌의정 박원종과 유자광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켰다. 박경과 김공저는 역모에 성공하면 정미수를 영의정에 앉히기로 계획하였다. 그런데 그만 심정과 남곤에 의하여 발각이 되고말았다. 정미수는 단종의 매형인 영양위 정종의 아들이었다. 주동자였던 김공저와 박경은 참수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재산이 몰수되면서 관노가 되었다. 또 역모에 가담했던 여럿은 유배되었다. 조광조와 김식도 이 '박경과 김공저의 옥사' 에 연루되었는데 나이가 어렸으므로 석방이 되었다.

악처에 관한 일화가 있다. 노와공신 신수린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자꾸 하녀와 놀아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동안 그 하녀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어느날 노와공신 신수린은 부인으로부터 아침밥상을 받고 있었다. 신수린이 밥뚜껑을 열자 거기서 그 하녀의 손목이 잘린채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재미있게도 신수린의 부인이었던 성씨부인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성희안의 여동생이었다. 성희안이 정국공신이 되자 성희안의 모친은 여동생과 사위도 좀 생각하라면서 데모하듯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이 일은 당시 좌의정 박원종 등 중신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운좋게도 성희안의 매제인 신수린은 자신의 장모의 뜻대로 공신으로 추록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공신이되었다고 하여 그를 노와공신이라고 불렀다.

중종은 여러 후궁중에서 윤여필의 딸을 중전으로서 책봉하였다. 이 장경왕후 윤씨는 후일 인종의 모친이 된다.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7일만에 타계한다.

이과는 정국공신으로서 당시 전산군에 봉해졌는데 자신의 관직이 높지 않음으로 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과는 좌의정 박원종과 영의정 유순정에 대항하여 역모가 상공하면 견성군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계획하였는데 그만 노영신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견성군은 성종과 숙위홍씨의 소생이었다. 중종은 사전에 이 거사를 막았다고 칭찬하였고 노영신을 정난공신의 1등공신으로 책록하였다. 이것이 이과의 난이다.

중종 5년 1510년 4월 4일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동래의 부산포와 웅천(진해)의 내이포, 울산의 염포에 왜인들이 2,000여명 거주하고 있었는데 웅천(진해)의 내이포에 그 인구가 가장 많아서 1,500명 가량 되었다. 조선조정은 이들 왜인들에 대하여 선박을 억제하고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등 강경책을 쓰고 있었다. 왜인들은 이것에 불만을 품었고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으로 조선백성 300명 가까이 희생되었고 민가는 800호 가까이 전소되었다. 조정은 4월 19일 병력을 파견하여 웅천(진해)의 내이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물리쳤다. 이것으로 삼포는 폐쇄되었다. 그 후 일본은 내부경제가 팽창하면서 교역로를 확장하려고 조선을 게속하여 침범한다

그해 1510년 4월 17일 중종반정의 주역인 영의정 박원종이 타계하였다. 반정 후 4년 만이었다. 2년 후에는 유순정이 타계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성희안이 타계하였다.

삼포왜란이 끝나고 2년이 지난 중종 7년 1512년 조선조정은 대마도주의 요청으로 임신약조를 맺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였는데 웅천(진해)의 내이포만을 개항하였다. 그리고 세견선은 50척에서 25척으로 줄여서 교역을 허락하였고 세사미두도 200석에서 100석으로 줄여서 왜인들에게 수여하였다. 왜인들은 진해의 내이포 왜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시장과 상점, 공청을 설치하고 거주하면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상거래를 하였다. 이 왜관은 나중에 부산포로 옮겨가게되고 숙종때에 가서는 초량으로 옮겨간다. 한편 조선은 세종때부터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맺고 왜인들과 통상과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삼포왜란으로 인하여 교역이 중지되었었다.

중종반정의 삼총사인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이 모두 타계한 후인 중종10년 1513년 '박영문, 신윤무의 옥사' 가 일어났다. 중종반정의 훈구공신들이 타계하고나자 사림파들은 남아있는 훈구공신들을 공격하였다. 박영문과 신윤무는 중종반정의 훈작인 정국공신의 1등공신들이었다. 의정부 관노인 정막개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훈구공신 박영무와 신윤무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중종은 즉각 그들을 참수하였고 정막개에게는 정 3품 절충장군을 수여하였다. 그런데 중종은 정막개가 고변을 늦게 아뢰었다는 이유로 다시 그에게서 벼슬을 빼앗아버렸다.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왕자를 낳은후 7일 만에 타계하였다. 1515년 3월 25일 향년 25세였다. 한편 왕자는 후일 인종이 된다. 장경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담양부사 박상과 순천군수 김정은 중종의 왕비였던 폐비신씨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폐비신씨의 부친인 신수군은 반정군에 의하여 주살되었었다. 유자광은 신씨부인이 그대로 왕비에 머물러 있을 경우 아버지를 잃은 그녀가 자신을 비롯한 반정공신들에게 복수할 여지가 있으므로 왕비신씨를 폐위시켜 달라고 중종에게 간하였고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였었다. 한편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은 이 신씨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한 박상과 김정을 벌주자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조광조는 이러한 처사에 발끈하면서 오히려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의 파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안로는 양시론을 주장하였는데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의 주장은 국가 백년대계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하였고 조광조의 주장은 언로가 국가의 흥망성세를 결정하므로 그의 주장 또한 정당하다고 하였다. 결국 중종은 상소를 올린 박상과 김정을 외지에 유배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2년 후인 1517년 윤지임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 17세의 왕비 윤씨는 문정왕후 윤씨이고 그녀의 원자는 명종이 될 것이다. 이미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와 지금 문정왕후 윤씨는 서로 9촌간이었고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후손이었다.

중종 12년 1517년 조광조는 출사 3년만에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에 승차하였다. 조광조는중종의 신임을 받게 되자 현량과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현량과는 한나라때 시행되었던 현량방정과를 말하는 것인데 일종의 천거제도이다.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제도만으로는 도학정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유능한 인재들이 초야에 묻혀서 과거시험을 멀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유생들은 과거시험 과목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의 도학정치를 위한 격물치지의 학습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학정치란 도를 따르는 정치이다. 유생들은 덕을 수양하고 인을 습득하여 현실 속에서 실천하여야 했다. 조광조는 왕의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라고 주장하였고 왕을 통한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가 도학정치를 들고 나오자 공신세력인 훈구파들은 반발하였다. 특히 중종반정의 공신인 심정이 그러하였다. 마침 야인 속고내 사건이 터졌다. 야인 속고내가 압록강의 갑산에 번번히 침범해 약탈해가자 병조판서 유담년은 이들을 비밀스럽게 꾀어내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일이 시행되기 직전에 조광조는 오량캐인 속고내를 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조광조는 큰 나라가 도적들이나 쓰는 꾀로서 조그마한 오랑캐를 치는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종은 조광조가 주장하는 당위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것은 1518년의 일이었다.

대사헌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소격서를 폐지하자고 중종에게 건의하였다. 소격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는데 도교의 의식에서 유래하였다. 조광조는 백성들이 미신과 무속에 미혹되어서 선량한 풍속을 해치고 있다고 보았다. 조선은 원칙적으로는 땅신을 모시는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조선 초기 세종은 즉위 초기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사직단과 함께 소격서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의 이념의 바탕이 된 성리학도 도교적인 속성이 없지 않았다. 공자의 유학이 송나라 말기에 도교의 형이상학과 합쳐진 것이 성리학이다.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점차 훈구파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어느날 궁궐에 조광조와 김식을 비방하는 글이 화살과 함께 꽂혀있었다. 훈구파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훈구파들은 조광조와 신진세력들을 특이하게 보아왔고 자신들의 세력을 위협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사림파들은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의 녹훈을 시정해서 기준에 미달하는 훈구파 공신들을 삭훈하려고 준비하였다. 훈구파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조광조를 더욱 미워하였다. 중종의 후궁인 희빈홍씨는 정국공신인 홍경주의 딸이었다. 어느날 희빈홍씨는 자기처소를 거닐다가 뜰에서 낙엽을 발견하였다. 그 낙엽에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희빈홍씨의 부친인 홍경주는 훈구파 심정과 모의해서 낙엽들에 꿀을 발라놓았는데 개미들이 그 글자들을 따라서 갉아먹었던 것이다. 주走자와 초肖자를 합성하면 조趙자가 되므로 주초위왕이란 조씨가 왕이 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곧 중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세력다툼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1519년 기묘년 11월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임박하였다. 훈구파 홍경주와 심정 그리고 남곤은 주초위왕을 근거로 조광조와 김식 등 신진사류들을 역모로 몰았다. 훈구파들은 조광조와 김식등을 속전속결로 처단하고자 하였지만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안당은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당시 국립대학인 성균관 유생들은 대궐로 몰려가 농성하였다. 이로인하여 조광조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능주 즉 지금의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를 갔다. 사림파 신진세력들이었던 김정, 김식, 윤지임 등도 유배를 떠났다. 그런데 훈구파 심정은 조광조의 추종자였던 성균관 유생 황계옥을 매수하였다. 그러자 유생 황계옥은 조광조를 사사해달라고 상소해버렸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유배된지 한 달만인 중종14년 1519년 12월 16일 사사되었다. 향년 38세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기묘사화의 주역중에서 남곤은 조선성리학의 시조인 김종직의 문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후대의 사림들로부터 간사한 인물로 매도당한다. 한편 조선성리학자 김종직의 문하는 김굉필이다. 김굉필의 문하는 조광조이다. 조광조의 문하는 백인걸이다. 백인걸의 문하는 이이이다. 이이의 문하는 김장생이다. 김장생의 문하는 송시열이다.

1517년 10월 독일의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정문에 로마캐돌릭에 대항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가지고 로마캐돌릭을 공격하였다. 면죄부란 교회의 사제가 돈을 받고 죄를 면제해주는 증서였다. 루터는 교황에 반감을 갖고있던 유럽의 시민들과 귀족들로 부터 환영받았고 마침내 로마캐돌릭으로부터 독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개신교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독일농민들은 귀족들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1524년에 있었던 독일농민반란이었다. 독일 농민들은 영주들의 과도한 소작료와 세금착취 때문에 생활이 피폐해져가자 영주들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독일농민들은 학살당하였고 주동자였던 토마스 뮌쩌도 처형되었다.

1536년 영국도 로마캐돌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영국 왕 헨리8세는 수도원법을 통과시키고 수도원을 해산하였으므로 1000년 가까이 영국에서 지속해왔던 로마캐돌릭과 결별하였다. 헨리 8세는 당시 자신의 형수인 캐더린과 결혼하였다. 헨리8세는 자신의 형인 헨리7세가 결혼 1년만에 타계하자 자신의 형수와 강제결혼한 것이었다. 캐더린은 스페인의 페르난도와 이사벨 공동황제의 딸이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궁녀인 엔 불린과 사랑에 빠지게 되자 형수인 캐더린과의 결혼은 근친상간이자 성경에 위배되므로 혼인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7세는 이것을 불허하였다. 이에 대립해서 영국의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은 적법하다고 주장하였다. 곧 헨리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였고 1533년에는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그리고 1534년 영국 의회는 수장령을 통과시켰고 국가가 교회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이것으로 영국성공회는 로마로부터 독립하였다.

중종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를 낳고 7일만에 산후병으로 타계하였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녀에게는 효혜공주와 원자가 있었는데 이 원자는 후일에 왕세자가 되고 인종이 된다. 한편 효혜공주는 김안로의 아들인 김희와 혼약하였다. 그러므로 김안로는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였다. 따라서 중종과 김안로는 사돈이었다. 나중에 김안로는 영의정에 승차하게되고 공포정치를 편다. 한편 막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의 오빠는 윤임이었다. 윤임은 왕세자의 외삼촌이면서 대윤의 영수가 되어서 사림들을 가까이 두게되고 반대파인 윤원형의 소윤과 대립한다. 그런데 윤임은 김안로의 조카사위이기도 하였다.

우의정 안당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뒤 2년 후 1521년 파직되어 있었다. 어느날 안당의 부인이 타계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림파들이 안당을 조문하였다. 송사련도 조문을 갔다. 송사련은 사림파들이 훈구파인 심정과 남곤을 비난하는 얘기를 듣게되었다. 송사련은 이것을 훈구파 심정에게 고변하였다. 심정과 남곤은 이것을 알게되자 사림파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곧 안당과 그의 두아들인 안처겸과 안처근이 처형되었고 그외 조광좌, 권전, 이경숙 등도 방명록을 근거로하여 처형되었다. 이것을 고변한 송사련은 정 3품 절충장군으로 승차하였다. 이것이 신사무옥이다. 그후 명종때 안당의 손자인 안윤이 상소해서 댜행히 신원되고 칙첩을 회수받는다. 선조때는 시호를 받는다.

중종의 왕세자 후일 인종이 세자빈으로서 박용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자는 12살이었고 세자빈 박씨는 11살 이었다. 세자빈 박씨의 부친인 박용은 3개월 후에 타계한다.

동궁은 왕세자가 거주하는 궁궐이다. 어느날 불에 탄 쥐의 머리통과 왕세자를 저주하는 방서가 동궁의 나무에 메달려 있었다. 불에 탄 쥐는 꼬리와 사지가 잘려져 있었고 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바로 전날은 세자의 생일이었는데 세자는 돼지띠였다. 누군가가 세자를 모함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것이 1527년 2월 26일 있었던 작서의 변이다. 중종은 후궁인 경빈박씨와의 사이에 복성군을 두고있었다. 만에 하나 왕세자가 급사라도 하는 날이면 복성군이 세자위에 올라서 중종의 뒤를 이어서 보위를 이을 수 도 있는 처지였다. 불행하게도 경빈박씨는 이 일의 주모자로 몰렸고 복성군과 함께 유배되었다. 사건의 실체는 진실과 정반대로 되어갔다. 곧 환궁할 날만을 기다리던 그녀는 후일에 일어나는 가작인두의 변과 얽혀서 유배지에서 사사된다. 나중에 이 사건의 실체는 밝혀지고 주동자는 경빈박씨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주모자는 중중의 사돈인 김안로였다. 그때 당시 김안로는 훈구파 심정의 탄핵으로 유배를 가있었는데 자신의 아들인 김희를 시켜서 이 일을 꾸몄던 것이다. 김희의 부인은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이다. 한편 경빈박씨는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박원종의 수양딸이었다. 그래서 경빈 박씨는 훈구파인 심정과 남곤 등과 같은 편이었다. 그녀는 기묘사화때 희빈홍씨와 함께 주초위왕의 낙엽사건을 퍼뜨리는 데 일조하였었다. 한편 당시 김안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목장을 사유화하기에 이르자 영의정 남곤이 김안로를 유배보내었던 것이다. 이 작서의 변으로 인하여 훈구파 박원종의 수양딸인 경빈박씨가 희생되었으므로 유배지에 있던 김안로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이 일로 훈구파 심정은 주모자인 경빈박씨와 내통하였다고 해서 사사되었다. 그후 김안로는 유배가 풀려서 집으로 돌아온다.

중종의 외척은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었다. 대윤은 타계한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윤여필과 그의 아들인 윤임이었는데 왕세자 즉 후일 인종을 보호하면서 득세하였다. 소윤은 지금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일족으로서 윤지임과 그의 아들들인 윤원형과 윤원로를 가르키는데 앞으로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이 태어나게 되면서 소윤이 득세하게 된다.

김안로는 대제학이 되었다. 대제학은 종신직이었는데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당상관 이상이 모여서 다수결로 엄격하게 결정하였고 왕은 추인만 하였다. 대제학은 자신이 받은 신임성을 근거로하여 언론을 주도하였다.

1530년 자순대비 정현왕후 윤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58세 였다. 정현왕후 윤씨는 폐비윤씨를 대신하여 성종의 왕비가 되었었고 또 연산군의 보모이자 중종의 친모였다. 그녀는 연산군이 폐쇄한 원각사를 크게 일으켰었다.

1533년 중종 28년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났다. 세자가 거주하는 동궁의 비자나무에 사람머리모양의 두상과 목패가 걸려있었다. 채무택이 이것을 발견하였는데 채무택은 김안로의 처족이었다. 그 목패에는 중종과 세자 그리고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를 저주하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그 내용은 왕은 목졸라 죽이고 세자는 찢어서 죽이고 중전은 목쳐서 죽이라고 쓰여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의 주모자로서 경빈박씨가 지목이 되었다. 이전의 작서의 변 사건으로 유배를 가있던 경빈박씨는 환궁할 날만을 기다리던 차에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그녀는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박원종의 친척이었는데 후일 박원종의 수양딸이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중종의 후궁이 되었고 중종과의 사이에 복성군을 두고 있었다.

1534년 중종 29년은 중종이 46세가 되는 해였다. 중종은 새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와의 사이에서 원자를 얻었다. 문정왕후 윤씨는 그 때 나이 34살이었고 왕비로 책봉된지 17년만 이었다. 이 원자는 후일 명종이 될 것이다. 문정왕후 윤씨가 득남함으로써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과 부인인 정난정이 득세하게 된다.

이조전랑은 이조의 정5품인 정랑과 정6품인 좌랑을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전랑은 그 직급이 높지는 않았지만 조선왕조의 3사인 홍문관과 사헌부 그리고 사간원의 관리를 천거할 수 있는 막강한 천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조전랑은 중죄가 아닌한 탄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조판서는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전랑을 임면할 수 없었고 전랑 자신이 스스로 후임을 임명한 후에 이직하였다.

김안로는 좌의정이 되어 있었다. 김안로는 중종의 사돈으로서 자신의 정적에 대하여는 친족과 재상을 불문하고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이전에 경빈박씨가 무고하게 사사된 것도 그가 배후에서 자신의 아들 김희를 시켜서 꾸민 일이었다. 한편 홍섬은 전랑인 이조좌랑이었다. 김안로는 홍섬에게 청탁하여 자신의 큰아들을 이조좌랑으로서 임명하여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홍섬이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김안로는 홍섬을 매질한 후에 옥에 가두고 삭탈관직하였다. 이것이 홍섬의 옥사이다.

김안로는 이제 문정왕후 윤씨를 탄핵하면서 폐위시키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안로는 이 일로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곧 사사되고 말았다. 한편 김안로와 채무택 그리고 허항을 합하여 정유년 3흉이라고 하였다. 김안로가 사사되자 김안로에 의해 외직으로 나가있던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이 내직으로 들어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이므로 후일 명종의 외삼촌이다.

김안로가 타계하자 권력관계는 타계한 전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대윤과  현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일족인 소윤의 2파전으로 좁혀졌다.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윤원형은 김씨부인 이외에 후실로 정난정을 두고 있었다. 정난정은 정실부인인 김씨부인을 독살하고 스스로 정실부인이 되었다. 당시 이 독살사건의 실체가 가려져 있었으므로 정난정은 자신이 올케인 문정왕후 윤씨와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중종이 승하하였다. 중종 39년 1544년 11월 15일이었다. 향년 57세 였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소생이었고 연산군은 그의 이복형이었다. 중종은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즉위하였다. 중종은 일찍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로부터 인종을 두었고 문정왕후 윤씨로부터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을 두었다. 중종은 후궁인 창빈안씨와의 사이에 덕흥군을 두었는데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은 후일에 선조가 될 것이다.

인종이 1544년 11월 20일 즉위하였다. 당시 인종은 19세였다. 인종은 중종의 아들로서 그의 모친 장경왕후 윤씨는 그를 낳고 7일만에 산후병으로 타계하였으므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사이에 아직 원자가 없었다. 인종에게는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그가 경원대군이다. 인종의 계모인 문정왕후 윤씨는 계모가 된지 17년만인 35세에 원자를 얻었는데 그가 경원대군이자 후일의 명종이다. 조선조정은 인종을 중심으로한 대윤 사림파와 문정왕후 윤씨와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 을 중심으로한 소윤 훈구파로 나뉘었다.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공조참판 소윤 윤원형이 영의정에 천거되자 대윤인 대사헌 송인수가 부당한 처사라고 하면서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리고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도 대윤으로서 소윤인 윤원형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 탄핵으로 인하여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은 영의정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원형의 누나인 문정왕후 윤씨는 마음이 심히 불편하였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 인종은 이 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계모 문정왕후 윤씨의 거처 앞에서 자리를 깔고 석고대죄하였다. 인종은 비를 맞으며 며칠을 그렇게 용서를 빌었으므로 몸이 더욱 나빠졌다.

한편 성균관의 유생들은 권당해서 대궐로 몰려가 기묘사화 때 죽은 사림 조광조의 신원을 간청하였다. 권당이란 지금의 데모이다. 그렇지않아도 인종은 조광조를 좋게 보아왔으므로 그를 복권하여 추작하였다. 또 그동안 폐지되었던 현량과도 복과하였다.

인종이 재위 7개월만에 승하하였다. 1545년 7월 1일 이었다. 향년 20세 였다. 인종은 자신의 계모이자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차려준 다과상에서 떡을 먹은 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정왕후 윤씨는 다과상을 차려주면서 그날따라 인종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인종은 왕비 인성왕후 박씨를 남겨둔채로 후사없이 승하하였다.

1545년 12세의 경원대군이 명종으로서 즉위하였다. 명종은 지난해에 심강의 딸인 심씨부인과 혼약하였는데 그녀가 인순왕후 심씨이다. 인순왕후 심씨는 후일에 순회세자를 낳을 것이고 순회세자는 요절할 것이다. 한편 명종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외삼촌인 훈구파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명종의 즉위한 이 해 즉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는 직전왕인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현왕의 외삼촌인 윤원형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이었다. 소윤인 훈구파 윤원형은 대윤인 윤임 및 사림파를 제거하여 권력을 안정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윤원로는 윤원형의 형이었는데 명종이 즉위하자 군기시 첨정에 승차하여 있었다. 윤원로는 대윤 윤임과 사림파들을 무고해서 숙청하고자 하였다. 윤원로는 대윤 사림파들이 과거 경원대군 즉 명종을 주살하려 했었다고 비방하고 다녔다.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은 윤원로가 망언을 하고 친족을 이간질한다고 탄핵하였고 그를 파직하고 해남으로 유배보내 버렸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불만을 품은 윤원형은 사림파들을 제거하기위하여 다시 일을 꾸몄다. 윤원형은 대윤 윤임과 유관 그리고 유인숙 등 사림파들이 왕을 폐위하고 계림군 또는 봉성군을 옹립하려 한다고 꾸며서 소문을 퍼뜨렸다. 마침내 소윤 윤원형은 대윤 사림파들을 역모죄로 엮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대윤 윤임과 사림파 유관, 유인숙과 계림군은 역모죄로 사사되고 말았다. 이것이 을사사화이다.

이 역모사건을 진압했다고 하여 위사공신의 훈작이 주어지는데 위사공신의 1등공신에는 윤원형의 심복들인 이기, 임백령, 정순봉, 허자 등이 추록되었다.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은 서녀였다. 정난정은 무반 최고직인 오위도총관 정윤겸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다. 한때 정난정은 기생이었지만 신분상승의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윤원형의 눈에 들어서 첩이 되었고 후사가 없었던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한 후에 스스로 정실부인이 되었다. 정난정은 남편인 윤원형을 따라서 궁궐출입을 하게 되었고 문정왕후 윤씨에게 궁밖 소식을 알리는 등 좋은 조언자가 되기도 해서 문정왕후의 사랑을 받았다. 또 그녀는 봉은사의 지주인 보우를 문정왕후 윤씨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정난정은 남편인 윤원형이 영의정에 승차하자 그녀는 종 1품인 정경부인에 승차하였다. 그러나 후일 문정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정난정은 급격히 몰락하였고 그녀의 신분 또한 천민으로 강등된다. 결국엔 남편 윤원형과 함께 자살하여 생을 마친다.

보우는 문정왕후 윤씨의 신임을 얻어서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불교를 부흥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보우는 1550년 선과 교 양종을 부활시켰고 300여 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공인 정찰화하였다. 그때 당시 봉은사는 선종이었고 봉선사는 교종이었다. 보우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 4,000여명을 선발하였고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게하였다. 보우 또한 나중에 문정왕후 윤씨가 타게하자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제주목사 변협은 보우를 장살한다. 그 후 양종제도와 승과제도는 폐지된다.

을사사화의 피바람이 지나갔지만 소윤과 훈구파들은 문정왕후 윤씨에 대항하고자 하는 대윤 윤임의 잔당이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다.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은 자신들의 정적이었던 대윤 송인수 등을 제거하였다. 이때 의금부와 형조는 자의적으로 숙청대상자들을 골라서 살생부를 만들었다.

1551년에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가 순회세자이다. 1553년인 명종 8년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첨정을 끝냈다. 그녀의 나이는 58세 였다.

1555년 왜구가 왜선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남도 영암, 달량, 진도 등을 약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왜구는 삼포왜란 이후에 교역조건이 계속 까다로워지자 난리를 일으켰다. 조정은 토벌군을 내려보내서 일망타진하였다. 이 왜구들은 퇴각중에 제주도를 침략하였으나 섬멸당하였다.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한편 이 을묘왜변을 계기로 해서 비변사는 상설기구가 되었다. 비변사란 전쟁시 문관무관 합동회의 기구이다. 비변사는 삼포왜란때는 임시기구였지만 앞으로 임진왜란을 통하여 더 강력해진다.

1559년은 황해도에 흉년이 들었다. 황해도 지방의 관리들은 문정왕후 윤씨의 외척세력들이었다. 황해도의 토산, 평산, 서흥 주변에 도적들이 출몰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관아를 습격하였다. 임꺽정은 관아에서 약탈한 곡식들을 빈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관군은 임꺽정과 그의 도적들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백성중에 내응하는자들이 있어서 그들를 사로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1562년 3도토포사 남치근은 관군을 이끌고 구월산에서 임꺽정을 비롯한 무리들을 섬멸하였다. 임꺽정은 백정으로서 신분사회의 한계를 뛰어넘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조선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강력한 신분사회였고 그가 불평하였던 사회적 모순은 결국 외적으로가 아닌 내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명종의 아들인 11살의 왕세자인 순회세자는 세자빈으로서 윤옥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12살이었다.

승려 보우는 문정왕후에게 건의해서 중종의 묘인 희릉을 이장하도록 하였다. 보우는 중종의 묘가 혈자리에 있으므로 산의 맥을 끊었는데 그렇게되면 후손이 메마르게 된다고 하였다.

명종의 왕세자인 순회세자가 타계하였다. 향년 13세였다. 세자빈 윤씨와의 혼인 후 2년만 이었다.

1564년 명종19년 명종의 외척인 이량의 아들 이정빈이 부정한 방법을 써서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량은 아들을 이조전랑을 시켜볼려고 하였지만 전임자의 전랑천대법에 따라서 천거절차가 필요하였다. 이량은 어렵게 아들을 위하여 전임자의 천거를 받아내었다. 하지만 당시 이조전랑이었던 윤두수는 이량의 청탁을 끝까지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무고로 파직되었다. 이정빈이 이조전랑이 된 후에 그의 부친 이량은 이조판서로 승차되었다. 이조판서가 된 이량은 상피제도로 인하여 아들인 이조전랑과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었으므로 그 아들 이정빈은 이직되고말았다. 나중에 심의겸과 김효원은 이 막강한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으로써 사림파들은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선다. 이것이 선조 초기(1575년)에 벌어지게 될 을해당론이다.

1564년 예조좌랑 이이는 명종에게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도록 또 외척인 소윤 훈구파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때 이이는 불승이었다.

명종 20년 1565년 4월27일 문정왕후 윤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5세였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계비로서 인종의 보모였고 현왕인 명종의 모친이었다.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은 소윤의 영수로서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사림들을 숙청하였고 윤원형의 부인인 정난정은 그녀의 총애를 입고 정경부인이 되어서 재물을 끌어모았다. 또 문정왕후 윤씨는 보우를 등용해서 불교를 중흥하였다.

이전에 명종의 부친인 중종은 왕비로써 문정왕후 윤씨와 장경왕후 윤씨 말고도 폐비된 신씨부인이 있었고 사사된 경빈박씨가 있었다. 또 후궁인 창빈안씨와의 사이에 덕흥군을 두었었다. 이 덕흥군은 인종과 명종의 이복동생으로서 후일에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은 선조가 될 것이다. 명종은 순회세자가 타계하였으므로 후사가 없어서 방계혈족인 하성군에게 보위를 내주게 된다.

1567년 명종22년 명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34세였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사이의 소생이었다. 명종은 왕비인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두었으나 순회세자는 일찍 타계하였으므로 후사가 없었다. 명종은 승하하기 전에 자신의 이복동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을 보위에 올렸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있다. 명종이 병석에서 덕흥군의 세아들을 불러서 익선관을 써보게하였다. 익선관은 왕이 쓰는 왕관의 일종이다. 위로 두 아들은 별 말 없이 써보았지만 셋째인 하성군은 현직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말하였다. 명종은 이 말을 듣고 흐믓해 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왕조편








2011년 6월 26일 일요일

4. 성종-연산군

1469년 재위 2년만에 예종이 물러났고 자산군이 13살에 즉위하여 성종이 되었다.  자산군의 부친은 도원군 즉 의경세자였고 갑작스럽게 요절한 의경세자의 부친은 세조였다. 자산군 즉 성종은 홀어미니인 수빈한씨의 손에서 자신의 친형인 월산군과 함께 자랐었다. 성종은 자산군 시절이었을때 한명회의 넷째 딸과 혼약을 맺고 있었다. 한명회의 넷째딸은 이제 중전인 공혜왕후 한씨가 되었다.

성종 1년인 1470년 귀성군의 난이 일어났다. 귀성군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둘째아들이었다. 귀성군은 세조 말기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남이, 유자광 등과 함께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돌아와서 영의정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최세호가 말하기를 귀성군이 왕의 재목이 될만 하다고 읖조렸다. 이것을 엿들은 정인지는 최세호를 역모로 엮었는데 끝내는 최세호와 권맹희가 주살되었고 귀성군은 유배를 가고 말았다. 이 귀성군의 난리를 평정하는 데에 공이 있다고 하여 좌리공신의 훈작이 주어졌다. 좌리공신의 1등공신에는 신숙주, 한명회 그리고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 조석문 등이 추록되었다. 신숙주는 성종 3년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의정에 승차하였다.

성종 1년인 1470년 토지조세제도가 바뀌었다. 세조 때부터 시행되던 직전법과 더불어 관수관급제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토지를 놓고 수조권자인 전주와 경작자인 전호 또는 전객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수조권자인 관료 즉 전주들은 직전법이 당대에 한하므로 10분의 1의 수조율을 넘어서 수취하려고 들었다. 이에따라 성종은 경작자인 전객의 수확물을 직접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고 왕은 관료인 수조권자, 즉 전주에게 녹봉으로서 쌀, 보리 등을 비율에 따라서 지급하였다. 이로써 왕은 수조권자인 전주 즉 관료를 대신하여 새로운 수조권자가 되었다. 전주인 관료들은 녹봉만을 받았고 수조권은 왕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경작자인 전객들은 전주인 관료들의 중간수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세조의 지시로 편찬이 진행되고 있었던 경국대전이 반포되었다. 이 경국대전은 바로 직전 왕인 예종 때에 완성되었으나 예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반포를 미루고 있었다. 경국대전은 경제법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태종때의 경제육전과 속전등을 종합하였다.

성종의 왕비이자 한명회의 넷째딸인 공혜왕후 한씨가 타계하였다. 성종 5년 이었다. 성종에게는 소용정씨, 소용엄씨, 숙의윤씨, 숙의권씨등의 후궁들이 있었는데 공헤왕후 한씨가 타계하자 숙의윤씨를 새 왕비로서 책봉하였다. 이 숙의윤씨는 신숙주의 당조카였고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먼 친척이었다. 한편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 한씨는 내훈을 발간하였다. 내훈은 열녀전, 여교, 명감, 소학 등에서 명구들을 발췌하여 수록한 여성 교육서인데 원문은 한문으로 되어있고 정음으로 번안되었다.

성종이 20세가 되는 해였던 1476에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가 7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때 한명회가 섭정폐지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는데 한명회에 대한 불경죄 시비가 있었다.

성종과 새 왕비인 중전 윤씨사이에 원자가 탄생하였다. 1476년 11월 9일이었다. 이 원자는 후일 연산군이 될 것이다. 성종의 계비인 중전윤씨는 후궁시절부터 소용정씨와 소용엄씨와의 사이가 아니 좋았다. 그녀들은 모두 성종을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압승술 등 여러 방술을 써가면서 성종에게 구애했었다. 당시 소용 엄씨는 압승술을 시도하여 지금의 왕비인 숙의윤씨의 처소에 있는 소나무에 불을 질렀다. 이제 중전 윤씨는 소용 엄씨를 비롯하여 후궁들을 경원하였다. 그런데 중전 윤씨는 성종이 자신과 거리들 두고 후궁들과 가까이 지내자 소용정씨와 소용엄씨를 더욱 경원하였다. 어느날 소용 엄씨는 밥상에서 비상바른 곶감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중전윤씨를 의심하였다. 아닌게아니라 중전 윤씨의 방에서 방향하는 서책이 나오자 성종은 중전 윤씨를 수빈으로 강등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난 1477년 3월 29일 성종은 수빈 윤씨를 다시 왕비로서 복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전 윤씨는 계속하여 시기와 질투를 하였다. 소용엄씨와 소용정씨의 처소에서는 그녀들과 똑 닮은 인형들이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 당시 소용정씨는 임신하고 있었는데 원자라도 태어나는 날이면 소용정씨의 지위가 더 높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소용 정씨는 이 일로 인해서 충격을 받고 유태하고 말았다. 중전윤씨의 질투와 암투는 계속하여 극에 달하였고 마침내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성종과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의 감정 또한 정점에 달하였다. 그래서 1479년 중전 윤씨는 폐비되고 말았다. 폐비윤씨는 친정으로 쫒겨났지만 자신의 이복 형제들인 윤구, 윤우, 윤후 형제들의 도움으로 재기를 준비하면서 다시 입궁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악몽이었다. 성종은 폐비윤씨의 생활이 날로 사치해가는 것을 알게되었다. 소용엄씨는 수태하여 귀인엄씨가되어있던 차였다. 성종은 원각사에서 불공을 들이면서 후일을 도모하고 있던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폐비윤씨는 사약을 먹고 타계하였다. 성종은 윤후를 비롯한 폐비윤씨의 형제들도 제주도와 거제도 등에 유배보내었다. 나중에 성종13년이 되어서야 이들 형제들은 유배가 풀려서 해방된다.

성종 때의 유명한 요부로서 어우동이 있었다. 어우동은 왕족이었는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서자의 후손이었다. 어우동은 유학자들 뿐만 아니라 천민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1480년 교형되었다.

폐비윤씨가 사사되자 성종은 새 왕비로서 윤씨부인을 맞아들였다. 이 부인이 정현왕후 윤씨이다. 정현왕후 윤씨는 폐비윤씨의 원자인 연산군을 보살피는데 연산군은 이 정현왕후 윤씨를 친모로 알고 성장한다. 후일 정현왕후 윤씨는 성종과의 사이에 진성대군을 낳는다. 진성대군은 후일 반정군에 의하여 중종으로 등극한다.

성종은 창경궁을 확장하면서 중건하였다. 창경궁은 세종 때는 수강궁이었다. 창경궁은 세 대비를 모시기위한 궁이었는데 성종 때의 태평성대로 인하여 많은 연회가 여기서 열리곤 하였다. 한편 성종을 대신하여 7년 동안 수렴청정했던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가 창경궁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66세였다. 알다시피, 정희왕후 윤씨는 세조비로서 의경세자와 예종의 모친이었다. 어쟀든 나중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굶어죽는 일을 비롯하여 장희빈의 비극은 이곳 창경궁에서 벌어진다. 1911년 일본제국은 순종을 위로하는 구실로서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창경원으로 개명한다. 그후 1984년부터 복원이 시작된다.

경연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올렸다. 김종직은 이 조의제문에서 단종이 삼촌 세조에 의하여 폐위된 사실을 초나라의 의제에 비유하였다. 초나라 항우가 회왕 의제를 모시고 창의군을 일으키자 세력이 강대해졌다. 그러나 항우는 의제를 죽여서 물속에 버리고 패권을 독차지하였다. 단종이 죽임을 당했을때 단종의 시신은 숲속에 버려졌다. 까마귀가 날아와서 그 시체를 쪼아먹었다. 어느 동자가 그 시체를 거두었는데 물 속에 집어넣었는지 불속에 넣었는지 몰랐다. 한편 후일 경연관 김종직은 죽은지 6년 후인 연산군 때 이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서 부관참시된다. 김종직은 고려 때 정몽주, 길재, 김숙자의 학통을 이어받은 조선 사림의 시조였다. 사림이란 성리학에 능통한 선비를 말한다. 사림들은 조선초기에 개국공신과 세조의 공신들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조선중기 이후로 사림들의 천하가 되면서 사림간에 서로 붕당하고 댱쟁하면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사화이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때 기묘사화, 명종 때 을사사화는 훈구파가 사림들을 숙청한 사건이다.

성종이 세자 연산군의 세자빈으로서 신승선의 딸을 맞이하였다. 신승선은 머지않아 영의정에 승차한다.

1487년 성종 18년 한명회가 타계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이 타계하였다. 1494년 성종 25년 12월 24일에 성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38세였다. 성종은 직전 왕인 예종이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모친인 인수대비 한씨의 도움으로 왕위에 등극하였다. 성종의 부친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였지만 갑자기 요절했었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은 이미 타계하고 없었다.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 한씨는 당시 58세였다.

서양에서는 1492년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캐톨릭 공동황제였던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후원을 받고 신대륙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당시 유럽은 몽골족에 의하여 고립되었고 동로마제국의 평화가 오스만투르크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자 마르코 폴로 등 유럽인들이 이용하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막혀버렸다. 콜럼버스는 새 교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일본을 향하여 서쪽으로 항해하였다. 콜롬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바하마를 죽을때까지도 인도라고 믿었다. 한편 유럽은 공간을 아메리카로 확장하였고 후일 유럽인의 의식을 심고 국가를 세운다.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1494년 겨울이었다. 연산군의 부친은 성종이었고 모친은 사사된 폐비윤씨였다. 연산군의 왕비는 영의정 신승선의 딸인 신씨부인이었다. 연산군에게는 배다른 동생인 진성대군이 있었다.

실록청에서는 승하한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고 있었다. 당상과 낭청은 승정원일기와 사관들이 매일 기록해 둔 사초를 기초로하여 초초, 중초를 거치는 동안 교정과 삽입을 하고 마침내 정초를 완성하여 실록을 펴내게 된다. 사관 김일손은 조선 사림의 시조인 김종직의 문하였다. 김일손은 성종실록에 실리게 될 자신의 사초에 세조가 주살하였던 김종서와 황보인의 죽음을 절개있는 행위였다고 추켜세웠고 사육신을 애석한 일로서 풀이하여 써넣었다. 또한 자신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실으려고 하였다.

영의정 이극배의 동생은 이극돈이었다. 이극돈은 그때 당시 종1품인 의정부 좌찬성이었다. 유자광은 세조의 공신이었므로 훈구파였다. 유자광은 전라도 영광 출신의 서얼이었는데 김종직은 살아있을때 유자광의 출신을 문제 삼으며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던 터라 김종직과 유자광은 서로 앙숙이었었다.

훈구파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를 실록에서 삭제하려고 하자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들이 반발하였다. 이것을 기화로 유자광과 학문을 싫어했던 연산군은 사림파들을 제거하였다  이것이 1497년 무오년 4월에 있었던 무오사화이다. 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빚어낸 결과였는데 연산군의 덕으로 인하여 훈구파가 승리하였다. 이것으로 김종직은 경상도 선산에서 부관참시되었고 김일손은 능지처사되었다. 부관참시는 시체를 관에서 끌어내서 목을 치는 것이고 능지처사는 몸을 찢어서 죽이는 것이다. 깁굉필과 정여창 등도 귀양를 가게되었고 사림의 영남학파는 절맥위기에 다다랐다.

1499년 연산군 5년 연산군과 신씨부인 사이의 원자가 천연두에 걸렸으나 곧 나았다. 이어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신수근의 딸과 혼인하였다. 신수근은 신승선의 동생이었다. 신승선은 연산군의 장인이다.

판내시부사 김처선이 양자로서 이공신을 맞아들였다. 내시는 환관 또는 내관, 환자라고도 불리는데 궁궐에서 살림을 맡아서 처리하였다. 내시의 기원은 중국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있어왔다. 내시가 되기 위해서는고환을 잘라내어야 했다. 고환을 잘라내는 이유는 궁궐내의 왕족을 비롯한 여인들을 겁탈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효자동의 원래 이름은 화자동이었는데 환관들은 거기서 집단거주하였다. 갑오개혁때는 내시제도가 폐지되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이다. 따라서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에게는 백부가 될 차례였다. 월산대군의 미망인이자 연산군의 백모인 박씨부인은 미모가 출중하였다. 연산군은 그녀를 연모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박씨부인이 임신까지 하는일이 있었다. 박씨부인은 연산군과의 관계가 탈로날까봐 두려웠던지 약을 먹고 자살해버렸다. 그런데 이 박씨부인의 동생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당시 우부승지였고 그의 부친은 세조 때의 공신 박중선이었으므로 훈구파였다. 박원종은 자신의 누님이 자살하자 이 일로 연산군을 경원하였는데 후일에는 역모한다.

연산군은 장녹수를 후궁으로 책봉하였다. 장녹수의 부친은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장한필이었는데 장녹수의 모친은 첩이었다. 장녹수는 원래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의 노비였다. 장녹수는 먹고살기 위해서 몸을 팔기도 했고 제안대군의 가노와 혼인하여 자식까지 두고 있던 몸이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자신의 오빠인 장복수를 양인의 신분으로 올려놓았다. 그런데 장복수는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여 연산군이 몰락하는 데에 일조하게된다. 나중에 장녹수는 중종반정 후에 참수된다.

연산군 6년 폭정이 극에 달해서였는지 민심이 흉흉하였고 흉년이었으므로 도적떼들이 출몰하였고 탐관오리들도 나타났다. 62세의 유자광은 미복차림으로 민정시찰을 나갔다. 충청도 언풍과 경상도 문경의 경계에는 새재가 있다. 이곳에서 의적으로 자처하는 홍첨지가 재물을 무상으로 거둬들이고 재분배한다고 하였다. 이 도적단은 중앙의 당상의 도움으로 중앙진출을 꾀하면서 전국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광해군 때의 인물이므로 이곳의 홍첨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곧 유자광은 서반직의 최고계급인 5위도총관에 승차하였다.

1504년 연산 10년 갑자년이 닥쳤다. 잘알다시피,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윤씨는 사사되었었다. 그후 폐비윤씨의 모친인 신씨부인과 윤우, 윤구 등 형제들은 유배를 갔다가 풀려났다. 연산군은 임사홍으로부터 이들 외가의 소식을 접하고 몸소 외할머니를 찾아갔다. 외할머니 신씨부인은 연산군에게 폐비윤씨가 피를 토하며 죽어갈때 남겨놓은 적삼을 내놓았다. 이 일을 기화로 피바람이 일게되었다. 임사홍과 더불어 훈구파 유자광이 부화뇌동하자 연산군은 폐비 윤씨와 앙숙관계였던 소용정씨와 소용엄씨를 주살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폐비윤씨을 폐출하려할 때 찬성하였던 사림파 김굉필과 이세좌를 처형하였고 이미 타계한 훈구파 한명회와 정창손, 남효은을 부관참시하였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훈구파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그해 1504년 4월 26일 아녀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내훈을 편찬하였던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 한씨가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연산군은 인수대비 한씨와 언쟁중에 밥상을 엎어서 그녀에게 던진적이 있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 한씨를 위하여 3년상 대신 25일 상을 치렀다.

연산군은 부친인 성종의 후궁들을 범하는 일이 있었다. 내시 김처선이 왕의 주색과 음주가무를 탓하자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을 주살하였다. 연산군은 채홍사와 채청사를 파견하여 소녀들과 말들을 징발하였고 경연과 사간원을 폐지하여 언로를 차단하였다. 또 연산군은 원각사를 폐쇄하고 성균관과 예문관, 홍문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기생을 불러들여 즐거이 만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한글로 된 투서가 들어오자 한글사용을 금지시켰다. 연산군은 백성들이 자신의 음란함을 목격할까봐 두려웠던지 성곽 주변의 민가를 부수고 그곳을 사냥터로 만들었는데 그때 쫓겨난 철거민들의 원성이 심하였다. 한편 임사홍의 아들 풍원위 임숭재가 화류병으로 타계하였다. 화류병은 지금의 성병이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2011년 6월 23일 목요일

3. 문종-단종-세조-예종

세종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였고 젊어서는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세종의 고질병은 등과 허리에 창이 생기는 풍질이었다. 이것은 통증은 물론 고열과 함께 어깨쑤심을 가져왔다. 세종은 중풍과 노안 등도 앓았는데 이 질병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온천을 종종 갔었다. 그러나 병세가 악화되자 왕세자 향, 즉 후일의 문종에게 섭정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445년이었다. 그리고나서 세종은 1450년 4월 8일 승하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세종은 태종의 세째아들이었다. 세종은 첫째아들인 왕세자 향, 즉 문종과 둘째아들 수양대군 그리고 셋째 안평대군 여섯째 금성대군 등을 남겼고 세손으로서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남겼다. 세종은 문종이 허약함으로 인해서 왕위를 오래 못버틸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므로 단종을 왕세손으로서 일찌감치 책봉하였었다. 단종의 모친이었던 승휘권씨가 단종을 낳은 다음날 타계하자 세종은 자신의 후궁인 혜빈양씨로 하여금 단종의 보모가 되도록 하였었다.

보위에 오른 문종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종의 왕세손을 세자로서 책봉하였다. 왕이 세자를 책봉하는 주된 이유는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 였다. 다음 왕권을 위한 경쟁과 분쟁의 원인을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좋은 방책이었는데 이와 비슷한 것으로서 제정로마제국에서는 공동황제제도가 있었다. 로마제국에서는 황제와 부황제가 있어서 로마제국의 동과 서는 한번에 4명의 황제가 있을 수 있었다.

1451년은 문종 원년이다. 문종이 즉위한 작년 1450년은 즉위년이었다. 문종 2년인 1452년은 세종대왕의 대상제가 있는 해였다. 문종은 왕세자로서 세종 말기에 섭정하는 동안 몸이 많이 나빠졌었다. 문종의 고질병 또한 종기였다. 중국에서는 조선사람들이 차고 날로 된 음식을 좋아하여 창종이 많다고 하였다. 문종의 즉위한 후에는 몸이 더 많이 나빠져서 재위 내내 병상에서 국무를 처리하였다. 문종은 즉위한 지 2년 후인1452년 5월 14일 6시에 승하하였다. 향년 39세였다. 문종은 세종의 장남으로서 외아들 단종과 경혜공주를 남겼는데 경혜공주의 남편은 영양위 정종이었다. 후일에 댠종은 나이가 비슷해서였던지 매형인 영양위 정종과 잘 어울린다.

세종의 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단종은 12살의 나이에 보위에 올랐다. 그의 부친인 문종은 이미 승하하였고 그의 모친인 승휘권씨 현덕왕후는 그를 낳고나서 다음날 타계했었다. 그는 자신의 할머니이자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단종의 즉위와 함께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나이어린 단종은 황표정치를 시행하였다. 의정부가 천거대상자들을 3배수로 천거해서 올리면 단종은 낙점될 자의 이름 위에 노란점을 찍어서 결재하였다. 조정의 김종서와 황보인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왕실의 권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에 위협을 느꼈던 왕실은 양녕대군을 비롯하여 저으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조숙하여 15살의 나이에 유곽을 출입하였었다. 그의 호탕함은 할아버지인 태종을 닮았다고도 하였다. 수양대군은 권남과 그의 친구인 한명회를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서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권남은 식년시 장원급제자로서 사헌부 감찰관이었고 한명회는 개국공신이었던 한상질의 손자였다. 한명회는 그의 모친이 임신한 지 일곱달만에 나온 칠삭동이었는데 어려서는 허약하였지만 그때 당시는 경덕궁 문지기였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도량과 판단력을 높이 샀다고 했다.

단종의 또다른 숙부는 안평대군이었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세째아들이었으므로 수양대군의 동생이었다. 조정의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는 떠오르는 수양대군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안평대군과 손을 잡고 왕실과 조정의 세력균형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제 김종서와 수양대군, 이 둘간의 목숨을 건 세력다툼이 임박해졌다.

단종 1년인 1453년 10월 10일 벌어졌던 계유정난은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과 김종서의 싸움이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와 권남과 더불어 모의를 짰다. 한명회의 친구였던 사복시 주부 홍윤성과 홍달손 등은 병력을 끌어모았다. 이어서 수양대군은 안평대군과 손을 잡고있던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였다. 곧바로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됨과 동시에 판이병조사가 되어서 군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좌의정은 정인지, 우의정은 수양대군의 사돈인 한확, 도승지는 최항, 우승지는 신숙주가 되었다. 논공행상과 공신책록이 이어졌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 난리로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던 안평대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한편 중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탸계하자 그의 손자가 어린나이에 건문제로서 황제가 되었다. 주원장의 넷째아들 연왕 주체는 자신의 조카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끝내 남경을 함락햐였다  이것이 1399년에 있었던 정난의 변이다. 이것으로 연왕이었던 주체는 건문제를 폐위하고 명나라 제 3대 황제인 성조가 되었다.

이징옥의 난이 일어났다. 이징옥은 그당시 김종서의 천거로 함경도절제사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반정으로 새 조정이 들어서자 그는 파직이 되어버렸다. 이징옥은 이에 불만을 품고 함길도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는 한편 여진족의 후원으로 대금국을 창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 반란은 단종의 매형인 영양위 정종이 술책을 써서 이징옥이 주살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세종의 충신이자 세조의 충신인 신숙주는 38세의 나이에 승정원 도승지에 승차하였다. 도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면서 왕을 보필한다. 이쯤에 신숙주의 아들과 한명회의 첫째딸이 혼인하였다. 한명회는 승정원 정3품 동부승지에 승차하였다.

단종은 판돈령부사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단종과 중전송씨 모두 16세 동갑이었다. 이때가 단종 3년인 1455년이었는데 이해의 6월 11일에는 수양대군의 위세와 억압에 눌린 단종이 스스로 수양대군에게 대보를 물려주면서 양위하였다.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고 세조는 보위에 등극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세종의 아들들인 금성대군과 화의군이 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아들이고 화의군은 세종의 서자이다. 이 역모가 실패로 끝나게 되자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 금성대군, 영양위 정종 등이 유배되었다.

세조는 세조 1년 1455년 자신의 즉위에 대한 공훈으로서 좌익공신의 1등공신에 한확, 한명회, 신숙주, 권남, 윤사로 등을 봉하였다.그리고 세조는고명과 책명을 위하여 신숙주를 주문사로 그리고 권남을 사은사로 하여 명나라로 보내었다.

세조 2년, 즉 1456년에 창덕궁에서는 명나라에서 온 사절단을 위한 피로연이 열리고 있었다. 이 날 성삼문은 적당한 기회를 잡아서 세조를 제거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경비가 삼엄하였다. 한명회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삼문, 박팽년, 유응부 등과 거사를 치루기로 되어 있었던 김질과 정창손은 똥끝타게 두려운 나머지 이 역모 사실을 밀고하고 말았다. 그러자 세조는 대노하였고 그때부터 피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집현전 출신의 좌부승지 성삼문과 그의 7형제 그리고 부친인 성승은 몰살되었다. 그리고 형조참판 박팽년, 장원급제자였던 하위지, 고려충신 이색의 증손자 이개, 그리고 무관이었던 유응부 등은 참수되거나 작형되었다. 작형은 불살라 죽이는 것이다. 그때 유성원은 자살하였다. 이것이 병자년의 옥사이다. 지금 청량리에는 이들을 모신 사육신 묘가 있다. 이 역모를 밀고했던 김질과 정창손은 후일에 영의정으로 승차한다.

세조는 이 역모의 배후에 상왕인 단종과 관련되었다고 보았으므로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내버렸다. 그런데 그때까지 경상도에 유배를 가있었던 금성대군이 다시 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이 되었다. 세조는 자기동생인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리고나서 세조는 유배되어있는 노산군, 즉 단종에게도 금부도사를 보내었다. 이어서 노산군은 세조의 명에 따라서 활줄에 목이 졸린채로 타계하였다. 향년 17세였다. 세종실록은 그가 스스로 자결하였다고 기록하고있다. 단종의 장인이었던 송현수는 관노가 되었고 대비 송씨부인은 갈 곳 없는 여승들이 모여 살았던 승방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후일 82세의 일기로 타계한다. 나중에 노산군과 사육신은 200년도 더 지난 1691년 숙종때가 되어서야 복위된다.

세조는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난리의 불씨었던 집현전을 혁파하였고 경연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집현전의 업무는 예문관과 홍문관에서 나누어서 하게되었다. 세조 5년에는 집현전의 학사 출신이었던 신숙주가 여진족과의 변경인 함길도의 함길도제찰사가 되었다. 그는 문관으로서 뿐만아니라 무관으로서도 명성이 있었다. 한편 세조는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세조는 닉랑부인 정희왕후 윤씨와의 사이에 얻었던 장남 도원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그때 왕세자 도원군은 수빈한씨와 혼인을 맺고 있었다. 왕세자 도원군 의경세자는 왕세자빈 수빈한씨와의 사이에 월산군과 차남 자산군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왕세자 도원군 의경세자가 20세의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나중에 수빈한씨는 자신과 의경세자 도원군 사이의 차남인 자산군이 성종으로서 보위에 오르게되자 인수대비가 되어서 수렴청정을 하게된다.

세조는 곧 자신의 둘째아들인 해양대군을 책봉하여 세자로 삼았다. 왕세자인 해양대군, 즉 후일의 예종은 한명회의 셋째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왕세자는 11살이었고 세자빈 한씨는 16살이었다. 다음해에 세자빈 한씨는 출산하여 원자인 분을 낳고 5일 만에 타계버린다. 그리고 묘하게도 원자인 분은 3살이 되었을 때 타계한다. 이어서 왕세자인 해양대군은 한백륜의 딸을 계비로서 맞이하였다.

한명회는 딸 넷을 두었는데 첫째는 신숙주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둘째는 윤사로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세째는 해양대군의 세자빈이 되었지만 원자를 낳고 5일만에 타계하였다. 넷째는 멀지않아 자산군, 즉 후일의 성종의 왕비가 될 것이다. 후일에 한명회는 성종의 장인으로서 국구가 될 것이다.

세조는 호폐법을 부활하여 권력을 중앙집권화 하였다. 세조는 1467년 세조 13년에 대원각사를 창건하였고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세웠다. 한편 이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하여 상부 3개층 옥개석이 지상으로 내려졌다. 이것을 5백년 가까이 지난 1946년에 미군정청 문교부장 유억겸이 미공병대에 부탁해서 원래대로 복원하였다. 이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지금 탑골공원 안에 있다. 세조는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불서들을 간행하였다. 정몽주의 문하였던 김종직은 세조가 성리학의 이념에 반하여 불교에 쏠리는 것에 반대하여 여러번 사직상소를 올리곤 하였다. 한편 세조는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시행하였다. 과전법과 직전법의 차이에 관하여는 이미 언급하였다. 수조권자인 전주와 경작권자인 전호 그리고 토지의 소유자인 왕과의 관계는 갑오경장을 지나서 대한제국기를 거쳐 을사조약 이후로 일본제국에 의한 토지조사업이 이루어지고 이것을 기초로 등기부등본이 만들어질 때 토지의 소유 또는 점유 그리고 보유에 관련하여 분쟁의 불씨가 된다.

세조는 몸에서 악취가 날 정도로 종기 때문에 고생하였다. 세조는 그것 때문에 온천욕을 자주 다녔다. 1467년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 도원군의 아들인 자산군이 한명회의 넷째딸과 혼인하였다. 자산군은 11살이었고 한명회의 넷째딸은 12살이었다. 그해 5월 16일에는 전 회령절제사 이시애가 함길도 길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중앙의 관리를 지방으로 파견하였는데 지방의 유항소를 기반으로 하는 호족들이 중앙의 정책에 대립하면서 마찰을 빚게되었다. 세조는 자신의 동생인 임영대군의 아들, 즉 자신의 조카인 귀성군을 병마도총사로 삼고 파병하였다. 곧 관군은 반란군을 진압하였고 여진으로 도피하려는 이시애를 붙잡고 참수하였다. 유자광은 이때 공을 세우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다음해인 1468년 귀성군은 영의정이 되었다. 그의 나이30세였다. 그리고 유자광은 서자였음에도 세조의 은총으로 온양별시의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29세였다.

세조는 1467년 9월 7일 승하하였다. 향년 54세였다. 세조는 자신의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빼앗아서 그를 주살하였고 자신의 동생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주살하였다. 세조의 장남인 왕세자 도원군, 의경세자가 갑작스럽게 타계하였고 세자빈이자 한명회의 세째딸은 출산 직후에 타계하였고 그녀의 원자는 세살 때 타게하고 말았다. 세조는 둘째아들 왕세자 해양대군, 즉 후일의 예종을 남겼고, 도원군 의경세자와 세자빈 수빈한씨와의 소생인 손자 자산군을 남겼다. 자산군은 후일 성종이 될 것이고 수빈한씨는 인수대비로서 세조의 왕비인 닉랑부인 정희왕후 윤씨와 함께 수렴청정하게 될 것이다.

세조의 왕세자 해양대군이 보위에 올라서 예종이 되었다. 예종은 그때 19살이었는데 그의 모친인 낙랑부인 윤씨 즉 정희왕후가 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였다.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궁궐에서 숙직을 서고 있었는데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위한 징조다' 라고 읖조렸다. 우연히 이 말을 듣고 있었던 유자광은 남이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예종에게 일러바쳤다. 예종은 세자 때부터 남이와의 사이가 안좋았었는데 이것을 기화로 남이를 제거하고 말았다. 이 '남이의 옥'으로 유자광, 한명회, 신숙주는 익대공신의 1등공신이 되었다.

에종은 삼포 즉 부산포, 염포, 제포에서의 일본과의 교역을 금지하였다. 예종은 역둔토의 일부를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역둔토란 병영에 딸려있는 논과 밭을 말한다. 예종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였다. 재위 2년만인 1469년 그의 나이 20세였다.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왕세자로서 책봉이 아니된 상태였다. 수렴청정을 하고있던 왕대비 정희왕후 윤씨는 당일날 즉각 한명회와 결탁하여 수빈한씨와 도원군 의경세자 소생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을 왕위에 올렸다. 이로써 정희왕후 윤씨는 대왕대비가 되고 예종비인 안순왕후 한씨는 왕대비가 되고 수빈한씨는 인수대비로서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할 것이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2011년 6월 21일 화요일

2. 세종

세종은 집현전을 강화하였다. 집현전은 고서를 수집하고 경서를 편찬, 간행하고 왕에게 경연하는 기구로서 대제학, 제학, 직제학 등의 직급이 있었다. 그리고 세종은 주자소를 확장하고 자치통감강목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자치통감강목은 송나라때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다가 강과 목을 붙여서 새롭게 분류해서 내용을 재정리한 역사서이다. 자치통감은 주나라에서부터 송나라까지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294권으로 되어있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 내용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제환공이 관중을 얻어서 패업을 이루었고 진목공이 백리해를 구하고 빛났다. 한편 통감이란 거울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귀족의 자녀들은 천자문에서 시작하여 명심보감과 소학을 학습하고나서 자치통감 순으로 학습하였다.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우박을 맞고나서 신열을 크게 앓았다. 그리고 곧 승하하였다. 1422년 5월 10일 이었고 향년 56세였다.

세종이 총애하였던 장영실은 동래 관노였다. 그의 부친은 원나라 항저우 사람이었고 모친은 동래 기생이었다. 그는 세종의 명으로 명나라 유학을 갔다온 후에 흠경각과 물시계등을 만들었다. 장영실은 노비의 신분에서 일약 정3품 상호군까지 도약하였지만 그의 말로는 불행하였다. 그는 세종이 타고 다니는 어가의 제작을 감독하였는데 세종이 강원도 이천에 있는 온천으로 휴양를 가는 중에 어가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불경죄로 기소되었고 곤장 수십대를 맞고 파면되고 말았다.

장영실은 이순지와 더불어 천문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흠경각은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모형으로 제작한 것인데 시간과 계절을 알 수 있도록 햐였고 천체의 운행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였다. 또 아랍인과 함께 달력의 제작에도 참가하였다. 수시력은 원나라때 곽수경이 제작한 것인데 장영실은 수시력을 바탕으로 우리실정에 맞도록 달력 편찬하였는데 이것이 칠정산 내편이다. 칠정이란 해와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말한다. 한편 수시력은 일년의 길이를 365.24일, 그리고 한달의 길이를 29.53일로 나타내었는데 우리가 현재 쓰고있는 기준값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그리고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도입하여 만든 것인데 원주를 360도, 1도를 60분으로 나타내었다. 이것은 그리스 수학에서 따온 것이다.

장영실이 노비의 신분이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매매, 상속, 기증, 공출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거주이전의 자유는 없었으나 면천은 가능하였다. 신역의 고통 때문에 도망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은 고려시대의 노비제도를 답습하였다. 고조선때 8조금법에는 남의 물건을 훔친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한편 천자수모법은 천민의 신분을 모계에 좇아서 결정짓는 법이다. 고려광종때 노비안검범은 원래 양인이었던 자들과 전쟁포로, 빚등 금전관계로 인하여 노비된 자를 면천하여 양인화 하였지만 고려셩종때는 노비환천법을 시행하여 그들을 다시 천민화 한 적이 있었다.

 세종의 충신인 맹사성은 음을 바로잡고 정악을 정돈하면 백성의 마음이 순화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음악의 도가 넘치면 환락적이 되고 음탕하여진다고 하였다. 맹사성은 박연으로 하여금 악기를 정비하여 아악을 정립하도록 하였다. 악학별좌 박연은 편경의 제작에 필요한 희귀한 경석을 우리 땅에서 발견하였고 편경을 국산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편경은 중국의 것보다도 훨씬 더 맑고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고품질이었다고 한다. 이 편경은 그때부터 모든 악기의 조율을 위한 절대표준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황종12율이 정립되었는데 그것은 황종관의 음높이의 비율에 따라서 조율한 것이었다. 이 황종12율은 피타고라스 음율과 동일하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사대부 중에 권채라는 자가 있었다. 덕금이는 사대부 권채의 하녀였다. 권채의 부인인 정씨가 덕금이와 권채의 로맨스 또는 불륜을 알게 되자 분노가 불같이 일었다. 정씨부인은 덕금이를 광에 가두고 며칠을 굶긴후에 밥 대신 똥오줌을 먹게 하였다. 불쌍한 덕금이는  며칠동안 그렇게 식사를 해결하여야 했다. 한편 정씨부인은 덕금이의 똥에서 구더기가 생기자 덕금이에게 구더기 생긴 똥을 먹게 해 보았지만 먹이기가 여간 쉽지가 않았다.그런데 그녀는 기어이 덕금이의 항문을 바늘로 찔러가면서까지 끝내 성공해내고야 말았다. 그러나 의금부가 이 일을 알게 되자 권채는 칙첩이 회수되었고 정씨부인은 곤장 90대를 맞고야 말았다. 한편 공자가어는 아내를 쫓아낼 수 있는 일곱가지의 이유를 정당화하고 있는데 첫째 투기, 둘째 음란, 셋째 도둑질, 넷째 수다, 다섯째 교만, 여섯째 무자식, 일곱째 나쁜 병이다. 그러나 예외로서 삼불출의 규정도 있었다. 첫째는 내쫓아도 갈 곳이 없을때 둘째는 부모의 3년상을 함께 치른 경우 셋째는 혼인 전에 가난하였으나 혼인 후에 부자가 된 경우가 있었다.

조선은 유교문화 사회였다. 유교는 공자의 발명품으로서 한마디로 수신하고 제가하고 치국하여 평천하하는 것이다. 다분히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색채를 띠고있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간이 이루어야 할 최고선은 '인'이었다. 이 인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은 '덕'이었으므로 진정한 군자들은 덕을 쌓는 데에 많은 관심을 가져야했다. 그래서 조선의 소년소녀들은 남녀칠세부동석이 몸에 베어 있었다. 그것은 유교사회의 질서 안에서 덕을 행히는수행이었고 인을 완성하기 위한 수양이었다. 한편 공자와 동시대의 서양인으로서는 그리스의 탈레스가 있었다. 그는 만물이 근원이 되는 물질을 '물'이라고 보았다. 즉 모든 사물의 본질은 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는데 춘추전국시대의 막바지였던 노나라 사람이었고 춘추를 남겼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서이다.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기록한 '역사'를 남겼는데 그는 기원전 480년 사람이었다. 한편 공자의 윤리학은 나중에 송나라때에 와서 도교의 형이상학과 합쳐지면서 성리학이 되었다.

병조판서 조말생은 뇌물사건때문에 충청도 회인으로 부처되었다. 그는 뇌물 780관을 수수하였지만 세종은 그를 복직시키기에 이르렀다. 조말생은 복직이 되자 세종에게 조세법의 개혁을 주청하였다. 과전법의 바탕위에서 시행되던 수손급손법은 그 해의 작황이 흉작일 경우에 수확의 손실량에 따라서 조세를 감면해주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것을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위임함으로써 뇌물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조말생은 이것을 공법으로 바꾸어서 토지의 등급에 따라서 세곡을 거두도록 건의하였던 것이다. 세종은 관리들을 각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여론을 수집해오도록 하였다. 이것으로 나중에 새 공법이 등장하게 된다.

한편 과전법은 조선의 토지조세제도였는데 왕은 왕실과 조정의 관료들에게 생계수단으로서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과전이란 토지의 양을 말하는 것인데 1과에서부터 18과로 나누어서 그 양을 차별화 한 것이다. 그리하여 1과는 그 양 또는 크기가 180결이었고 18과는 10결이었다. 한편 과전을 받은 관료는 수조권을 가졌고 노동력을 고용하여 그 토지를 경작하게 하였는데 경작자는 수확량의 10분의 1을 수조권자인 관료에게 바쳤다. 수확량의 10분의 1이란 토지 1결당 현미 30두를 말하는 것인데 이 조를 받은 수조권자 관료는 왕에게 백미 2두를 세금으로서 바쳤다. 또 이 관료가 죽으면 부인과 자식은 댱대에 한하여 이 토지의 수조권자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을 수신전과 휼량전이라고 하였다. 이 과전법은 세조때에 가서 직전법으로 바뀐다. 직전법은 다름아니라 수신전과 휼랴전이 제거된 것이므로 관료가 죽으면 그의 과전인 토지는 왕에게 복귀한다.

세종의 맏아들 왕세자 향 즉 후일의 문종은 세자빈으로서 김오문의 딸을 맞이하였다. 이 휘빈김씨는 질투심이 대단하였다. 왕세자 향이 여러 후궁들과 어울리면서 자기와의 사이가 소원해가자 그 후궁들을 시기하기 시작하였다. 세지빈 휘빈김씨는 압승술을 써서라도 왕세자와의 사랑을 회복하고 싶었다. 그녀는 자신의 하녀인 호초로 하여금 왕세자가 사랑하는 후궁의 신을 빼앗아 오게 하였고 그것을 잘라 불태웠다. 그녀의 압승술은 그 태운 후에 남은  재를 왕세자가 음복하여야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탄로가 났고 휘빈김씨는 폐비되고 말았다. 그리고 호초의 부친이었던 원주목사 아무개는 삭탈관직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세자빈으로서 봉씨부인이 책봉되었는데 이 순빈봉씨는 색녀였고 동성애의 기질도 갖추고 있었다. 이 순빈봉씨는 궁녀인 소쌍과 신나게 동성애를 하다가 발각이 되고말았다. 그리하여 순빈봉씨 또한 폐비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한나라때 광무제와 당나라때 현종이 각각 아내를 내친적이 있었다. 여복이 박복했던 후일의 문종이 될 왕세자 향은 후궁이었던 권씨부인과의 사이에 경혜공주와 후일의 단종을 두게 된다.

세종은 집현전의 부제학인 설순으로 하여금 삼강행실도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삼강이란 군신,부자, 부부인데 아녀자들에게 도덕적인 행실이 될만한 충신과 효자, 열녀들을 뽑아서 이야기를 덧붙여서 만든 그림책이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식년시라고 해서 자, 묘, 오, 유의 해에 3년마다 시행하는 정기시가 있었고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의 비정기시가 있었다. 종류에 따라서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는데 문과는 순서에 따라서 초시, 복시, 전시가 있었다. 초시는 각 도에서 인구비례로 뽑았고 복시에서는 그들 중에서 33인을 추려내었고 마지막 전시는 왕 앞에서 시험을 치르고 순위를 정하였다. 태조 2년에 처음 식년시가 시행되었고 태종 8년에는 무과인 용호방이 시행되었다.

세종은 여진족들이 압록강을 넘어서 침범해오자 최윤덕을 보내서 그들을 내쫓고 거기다가 4개의  고을을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4군이다. 또 그 다음해엔 함경도 절제사인 김종서로 하여금 함경도의 동북면에 온성, 회령, 경흥 등 6개의 신도시를 건설하게 되는데 이것이 6진이다. 세종은 이 신도시들에 대거 이주민을 들여보냈다. 이주자들에게는 여러 특혜가 주어졌는데 옥중에 있는자가 이주를 희망할 경우에는 사면이 되었고 노비였던 자는 평민으로 신분상승이 되었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의 황무지를 개간하였고 세금이 면제되었다. 당나라때 태종 또한 남쪽지방의 죄수들을 요동지방에 이주시켰던 적이 있다. 한편 여진족은 퉁구스계로서 말갈족의 후예이다. 요나라의 거란족들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발해의 주민이었던 흑수말갈족들은 만주 동부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길림성의 숙여진은 온화하였으나 조선의 국경 가까이 있었던 생여진은 호전적이었다. 그리고 완안부의 우야소 동생인 아골타는 1115년에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아골타는 스스로 칸이 되었고  남송과 국경을 마주할 정도로 강성해젔다. 그러나 1189년에는 남쪽의 남송과 북쪽의 몽고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었는데 1234년에 강력한 몽고의 징기스칸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후일에 건주여진족의 누르하치는 만주족으로 개명하였고 그의 아들 홍타이치는 청나라를 세우게 된다.

세종이 보위에 오르면서 7년 가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다. 세종은 기우제를 지냈다. 사직단과 소격전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사직단은 땅신을 위한 제사장소였고 소격전은 하늘신을 위한 제사장소였다. 엄밀히 따지면 소격전에서의 제사는 이민족의 풍습이었고 도교의 관습이었다. 이 소격서의 소격전에서의 제사는 중종때 조광조가 시비를 제기하면서 논란이 된다.

세종의 총신 신숙주는 외국어 능통자였다. 그는 중국어, 이두, 왜어, 몽고어, 여진어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을 완성하는 데에 공헌을 하였다. 훈민정음의 자음은 발성의 모양을 본떠서 만든 것인데 목구멍소리(후음, ㅇ), 어금니소리(아음, ㄱ), 혓소리(설음,  ), 잇소리(치음, ㅅ), 입술소리(순음, ㅁ)로 구성되어 있다. 모음은 천, 지, 인을 본뜬 것인데 천은 ㅏ, ㅗ 지는 ㅓ, ㅜ, ㅡ 인은 ㅣ로 되어 있다. 이 훈민정음은 1443년 12월 30일 반포되었다. 이어서 동국정운을 간행되었다. 동국정운은 중국의 홍무정운을 우리말로 정리한 것이다.  한편 홍무정운은 13000여 한자를 평성, 상성, 거성, 입성 등 4성으로 운을 달아서 정리한 운서이다.

정인지는 치평요람을 편찬하였는데 주나라에서 원나라까지 그리고 기자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와 풍속을 150권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 정인지가 서문을 써서 용비어천가를 편찬하였는데 조선건국의 정당성과 선왕들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세종의 왕비인 공비심씨 소헌왕후가 52세로 타계하였다. 세종 28년 이었다. 세종은 소헌왕후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을 짓게 하여 한문과 언문으로 간행하게 하였다. 석보상절은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인데 월인천강지곡은 이것을 노래가사로 엮은 것이다. 한편 석가모니는 지금의 네팔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타르타를 말한다. 그는 공자와 동시대인으로서 55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어느 왕국의 왕자였는데 우연히 궁궐 밖을 나가게 되었고 농부들이 노역하는 모습을 보고서 존재의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의 감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초라하게 늙은 노인을 보게되자 인생이 무상함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번뇌를 극복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을까 하여 출가하였다. 그리고 고타마는 마침내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도를 깨달았고 번뇌에서 해방되었다. 한편 그가 깨달은 도는 '자타불이'였다. 자타불이란 너와 나, 자아와 타자, 즉자와 대자의 구별을 무차별화하는 것이다. 이 자타불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인연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다고 한다. 이 자타불이를 현실속에서 실천하는 것을 자비라고 한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1. 태조-정종-태종

고려말 우왕의 왕통에 대한 정통성 시비가 있었다. 우왕은 사생활이 도덕적으로 문란하다고 알려졌다. 게다가 그의 부친은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이었다는 것이다. 토지제도 또한 혼란하였다. 토지를 기반으로 경제와 정치가 묶여돌아가는 지배와 피지배의 사회구조에 위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권문세가의 가렴주구와 우왕의 음란이 정체의 정당성을 흔들었고 지배층 전반의 덕성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이때쯤 중국은 원나라 말기였다. 불교도들인 백련교도들이 난을 일으키고 또한 홍건적들로 인하여 사회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1368년 주원장이 경제력을 장악하여 북경을 차지하자 원 순제는 내몽고로 후퇴하였다. 고려에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도전과 이성계 등의 친명파와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친원파가 대의명분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위세를 과시하면서 함경남북도의 옛 쌍성총관부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압박하였다. 한마디로 속주를 설치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고려조정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왕은 맞대결을 위해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그리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여 이제 막 싹튼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하도록 내보냈지만 이성계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압록강의 위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이끌고 회군해버렸다. 그 후 이성계는 쿠데타를 이용하여 조정의 실권자가 되었고  최영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위리안치시켰고 우왕의 아들을 창왕으로서 옹립해버렸다. 고려조정은 사전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토지측량을 시작하였지만 이에 반대하는 수구 반대세력도 없지 않았다. 토지를 제일의 생산수단으로 삼았던 농본주의의 봉건제도 하에서 토지의 소유권 또는 점유권의 변경은 지배, 피지배 계층을 통틀어 대단한 사회적 파장이요 변화였고 계급의 변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고려조정은 우왕에 이어 창왕까지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붙여 논하면서 마침내는 창왕을 폐위시켰버렸고 신왕의 7대손인 정창군을 공양왕으로서 옹립하였다. 공양왕은 논공행상으로써 이성계에게 작위와 더불어 토지와 노비등을 하사하였다. 이성계는 점차 고려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공전 사전의 문서들이 새롭게 작성되었던 것은 물론이겠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대의명분을 놓고 고려충신 정몽주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편인 조영규로 하여금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주살케 하였다. 곧이어 공양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새 왕조가 세워졌다. 1392년 7월 17일 이었다. 이성계의 곁에는 그의 친한 여진족 친구인 퉁두란이 있었다. 또우란 티무르는 그의 본명 이었고  이성계는 그에게 이지란이란 이름과 과부 하나를 하사하였다. 나중에 또우란 티무르는 불승이 되었고 자신의 소원대로  고향인 몽고땅에 묻히게 된다.

고려는 끝났고 조선은 시작되었다. 충신 불사이군이라고 하였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려 충신 중에 성리학자였던 야은 길재는 낙향하였다. 그리고 두문동에서는 72학사들이 모여서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생활하였다. 또한 고려왕조의 왕족인 왕씨들은 정책상 거제도와 강화도에 분산 수용되어서 생활하게 되었다. 일부는 이송 도중에 수장되었는데 이방원의 계략이 있었다고 한다. 새 왕조는 특정한 고려왕조의 후손에게는 전 왕조의 제사를 담당케 하였다. 그들 중에 대댜수는 왕씨의 성을 버리고 전씨 또는 옥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 고려는 망했다. 한때 괴승 신돈은 비행과 방종으로 고려조정을 장악했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공민왕은 자제위에 의해 시해되었다. 자제위의 원래 목적은 뽑혀온 공신의 자제들이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가 타계한 후로는 미소년들로 채워졌다. 한편 공민왕 다음의 우왕과 창왕은 왕위 정통성에 관한 시비에 휘말리면서 폐위되었다. 왕조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실제로 공민왕의 직게혈족이 아니었다.

근동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제국을 궤멸시키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1388년에 코소보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자 발칸반도의 일부가 그들 무슬림들에게 떨어졌다. 그 후 술탄 메메드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였고 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 내의 토지와 각종 동산과 부동산의 소유권과 그리고 제국 내의 백성들에 대한 모든 지배권은 오스만 제국의 주권자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동로마 정교회는 무슬림들의 배려로 명맥을 이어갔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서 책봉하였다. 방석은 현비 즉 경처인 강씨부인의 소생이었다. 그런데 책봉 과정에서 유목민 풍습인 말자상속이 실행됨으로 인해서 논란이 일었다. 이방원은 이 말자상속 때문에 심히 괴로웠다. 이것은 나중에 피를 부르는 난리로 이어지게 된다. 세자 의안군 방석은 12살때 빈궁 유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6살 이었다. 나중에 빈궁 유씨는 내시에게 겁탈당하는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서 마침내는 폐비가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후 일이지만 세자 방석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주살된다.

태조는 한양 천도를 위해서 경복궁의 창건을 지시하였다. 고려의 수도는 개성이었고 개성에는 수창궁과 경덕궁이 있었다. 고려왕조의 불교 수도사들이었던 중들은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인구의 십분의 삼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을 뿐만아니라 고급 건축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잉여인구와 노동력과 기술은 경복궁의 창건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

조선은 종묘사직이다. 종묘는 왕실어른의 위폐를 모시는 것이고 사직이란 지신, 농업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여진족이나 몽고족은 하늘에 맹세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 관습이면서 정체의 형식이었다. 조선은 주자의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썼지만 조선왕실 내에서는 불교가 고려왕조에 이어서 그 명맥을 꿋꿋이 이어갔다. 태조 이성계의 곁에는 무학대사가 있었다. 그는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의 묘자리를 봐주었었고 이성계의 꿈도 해몽해 주었었다. 이성계가 꿈을 꾸었는데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서까래 세개를 지고 나오는 꿈이었다. 사람이 서까래 세개를 지고 나오는 모양은 임금 왕 자와 같은 형상이다. 나중 일이지만 태조 이성계는 절 하나를 짓고 그것을 석왕사라고 이름하였다. 참고로, 개국 초기의 병력은 보병과 기마병을 합하여 30만 이었고 그 중에 10만은 역리와 향리에 배치되었다.

개국한지 4년이 채 안돼서 태조의 현비 즉 경처였던 강씨부인이 타계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향처인 첫째부인 한씨에게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막 타계한 현비 강씨부인에게서 경순공주, 방번과 방석을 두었다. 막내인 의안군 방석은 세자로서 다음 보위의 승계자였다. 그런데 첫째부인 한씨의 소생인 다섯째 방원은 장자에게 세자위가 승계되지 않는 말자상속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방원은 자신과 갈등을 빚고있었던 친세자파인 정도전를 주살하고 왕세자 방석 또한 주살하였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1398년 무인정사라고도 한다. 이 때의 일로 하윤이 득세하였다. 이것으로서 후일 정종이 되는 둘째아들 방과가 세자에 오르게 되었다. 첫째아들인 방우는 일찍 죽고 없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세자인 영안군 방과에게 양위하게 되니 그가 조선 제 2대 왕 정종이었다. 그런데 정종이 세자를 책봉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피바람이 일게 되었다. 정종과 그의 왕비인 덕비 김씨부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세자가 아니라 세제로서 보위가 승계되어야 할 판이었다. 이번에는 세제위의 물망에 오르고 있던 넷째아들 방간이 동생인 방원에 의해서 주살되었다. 이것이 제 2차 왕자의 난이다. 정종은 다음 보위를 이어갈 세자로서 방원을 왕세제로서 책봉하였다. 왕세제인 정안군 방원에게는  나중에 정빈이 되는 민씨부인이 있었다. 이 민씨부인은 양녕대군과 세종의 모친이 된다.

1401년은 태종 1년이다. 지난해에는 정종이 자신의 보위를 동생이자 왕세자였던 정안군 방원에게 양위하는 즉위식이 있었다. 정종이 보위에 오른지 2년 만 이었다. 정종은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수도를 개경으로 옮겼는데 또 다시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였었다. 왕세자 정안군 방원은 조선의 제 3대 왕인 태종이 되었다. 이것으로서 정종은 상왕으로서 퇴위하였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한편 심덕부에게는 아들 심온이 있었다. 심온의 딸은 태종의 아들인 충녕대군 즉 후일의 세종과 혼인을 맺게 된다.

태종은 관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문하부가 의정부로 개편되었고 낭사가 사간원으로 개편되고 무과 과거시험도 시행하였다. 태종은 주자소를 확장하였다. 활자와 인쇄의 발달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 주자소는 세조때 교서관 그리고 정조때 규장각으로 발전 진화하면서 우리나라 활자문화가 꽃을 피우는데 기여하게 된다. 한편 태종과 태상왕 이성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골은 함흥차사 사건으로 깊어져갔다. 태종은 함경도 함흥에 은거하고 있던 태상왕 이성계를 한양으로 환궁시키고자 신하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매번 불귀의 객이 되어서 돌아왔다. 태상왕의 친구였고 이때는 불승이었던 퉁두란은 몸소 찾아가서 환궁을 요청하였지만 이성계의 고집을 꺽지 못하였다. 한번은 박순이 말과 망아지를 함께 이끌고 이성계를 찾아가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태상왕은 새끼와 함께있는 말을 보고 감동한 바가 있었던지 자신의 의지와 태종과 신하들을 비롯한 조정의 의지 사이에서 합일점을 찾게되는 기회를 맞이한다. 그러나 태상왕 이성계의 환궁은 자신의 의지만큼 쉽지 않았다. 이제까지 태상왕을 따르고 있었던 조사의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의는 자신의 노력에 따라서 태상왕을 옹립하여 새 왕위를 재창출할 만큼 충분한 가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분명 자신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역모였다. 태종은 태상왕 이성계를 사이에 두고 조사의와의 한판 결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조사의는 여진족인 올량합 부족과 동맹을 맺고 조영무가 이끄는 관군에 대항하여 분전하였다. 그러나 조사의는 결국 조영무가 이끄는 관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것이 조사의의 난이다. 조사의는 이성계의 둘째부인 경처 강씨부인 즉 신덕왕후의 외척이었다. 그 후 조정의 중신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영의정은 조준,  좌의정은 하윤, 우의정은 조영무였다, 왕명을 출납하는 대인 즉 후일 승지는 맹사성 이었다. 그는 최영의 손주사위였다. 황희는 후일에 지신사, 즉 도승지가 될 것이다.

태종은 창덕궁을 창건하였고 태상왕의 거처로서 덕수궁 즉 후일 창경궁을 건축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1408년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출생한 이후 그의 나이 74세였다.

태종과 정빈 민씨부인 사이에는 첫째, 왕세자인 양녕대군 둘째, 불교에 심취한 효령대군 셋째,  세종이 될 충녕대군 넷째, 일찍 타계하게 될 성령대군이 있었다. 첫째딸 정순공주는 이거이의 아들인 이백강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둘째딸 경정공주는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과 혼인하였다. 민씨부인에게는 민무구와 민무질 두 오라비가 있었다. 한편 외척이 득세하고 조정이 외척들의 손에 좌지우지 되어가자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을 제주도에 부처하고 얼마 후에는 자진케 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이들의 동생들이었던 민무회와 민무휼 두형제가 형들에 대한 탄원을 하다가 외지에 부처되는 일이 있었다. 태종은 이들에게도 명을 내려서 자진하게 하였다.

태종은 호패법을 시행하였다. 1413년 10월 1일 이었다. 16세 이상의 남자는 벼슬, 성명, 얼굴색 등이 기재된 호패를 차고다녀야 했다. 이 때문에 자작목, 잡목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였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인구의 이동을 파악할 수 있었고 군역, 요역, 조세징수 등을 명확하게 할 수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세조때인 이징옥의 난때 그리고 광해군때 이 제도가 부활하게 된다. 한편 태종 17년 즉 1417년 명나라 성조인 영락제가 조선에 후궁울 요청하자 조정은 한확의 누이를 명나라로 보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한확의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인 왕세자 도원군 장, 즉 의경세자와 혼약을 맺게되고 후에 인수대비가 된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세자임에도 여색에 취해 있었다. 한고조는 여색과 재색을 탐하였지만 천하를 평정하였고 진나라의 광은 어질었음에도 나라는 망하였다. 중국은 그러하였다. 양녕대군은 애첩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녀와의 정사도 대단히 즐겼다. 태종은 마침내 자유분망한 양녕을 폐세자하고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서 책봉하였다. 그러면서 태종은 곧 양위하였다. 1418년 8월 10일에는 충녕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세종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왕권을 양위하면서 병권만은 자신이 소유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불씨가 되어서 피바람을 몰고오게 된다.

병조참판 강상인은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의 공신이었으므로 태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강상인은 병권이 왕권에서 분리되는 것을 줄기차게 반대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영의정 심온 또한 병권은 주상인 세종에게 되돌려져야 한다고 한사코 주장하였다. 영의정 심온의 입장에서는 확실하고 명확하고 일관된 전제군주권의 양위없이는 왕실과 조정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왕의 권력이 두 군데서 즉 대권이 두 왕에게서 나온다면 조정이 입장에서는 조정의 분열이 불가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상왕 태종은 대노하였고 심온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심온은 세종비인 공비심씨의 부친이었으므로 국구였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심온의 동생인 심청도 이때 참수되었고 일가족은 관노비가 되어서 처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병조참판 강상인은 수레참형을 당하였고 그의 가족들은 노비가 되었다. 이것이 강상인의 옥이다. 한편 1418년에 벌어진 일로서 기해동정이 있다. 대마도에 대흉년이 들자 왜구들은 서해안에 몰려와서 해적질을 하였다.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였다. 최윤덕은 왕명에 따라서 병력을 이끌고  3군도절제사로서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이때 당시 이종무는 3군도제찰사였다.

세종 1년 즉 1419년부터 가뭄이 사작되었다. 농사는 7년 흉년이었으므로 보릿고개가 7년 동안 이어졌다. 세종은 금주령을 내려서 양곡을 아끼는 정책을 썼다. 세종은 격물치지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비파와 거문고를 잘 다루는 등 음의 명인이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3대 악성은 신라의 우륵, 고구려의 왕산악 그리고 조선의 박연이다. 우리의 아악은 명나라의 것을 모방하였다. 그 당시 '예는 변계량이요 악은 맹사성이다' 라는 말이 있었다. 그 맹사성은 우리 고유의 향악이 너무 속되다고 하였다.

야은 길재가 66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과 더불어 3은으로 불렸던 성리학자로서 조선창건을 반대하였었다. 한편 성리학은 12세기 송나라때 주희가 수집정리한 학문으로서 4서 즉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특히 중요시하는 학문이면서 신유학이라고도 불리운다. 격물치지, 즉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서 앎에 도착하는 자기수양을 우선으로 하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와 물리적인 기가 조화롭게 맞물리면서 태극과 음양오행이 합일하도록 서로 침투하게 해서 보편과 개별간의 구분과 차별이 사라지도록 도를 닦아내는 자기수양의 학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지고 들어왔다. 한편 명나라의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선천적인 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양명학을 개시하였다. 조선 성리학은 시대 전반을 통틀어서 합리성을 중시하였으므로 직관을 강조한 양명학을 이단시 할 수밖에 없였다.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국가이념으로서 국가정의의 근본이었고 정당화의 실체였다.

세종과 공비 심씨부인 사이에는 첫째아들 향과 둘째아들 유가 있었다. 향은 왕세자가 될 것이고 후일에 문종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유는 수양대군으로서 후일에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게 된다.

궁녀는 궁중여관의 준말이다. 궁녀들은 원칙적으로 2인 1실을 쓰게 되어있다보니 동성애가 문제가 되고는 하였다. 궁녀들 중에는 운좋게 왕의 눈에 띄어서 계급이 수직상승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명부에는 비, 빈, 귀인, 숙위, 소의, 소용 등의 계급이 있었는데 원자 즉 왕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생산하게 되면 계급이 수직상승하게 될뿐만 아니라 원자가 왕세자로서 책봉이 되고 보위를 승게하는 날이면 그녀는 대비가 되어서 외척을 거느릴 수 있는 권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므로 그 가치를 놓고 이들간의 암투와 모략이 암암리에 벌어졌다.

세종이 경희루 동편에 삼간초옥을 짓고 도량에 전념하는 중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정종이 승하하였다.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아들이고 태종의 형님이면서 자신의 보위를 태종에게 양위하였었다. 그리고 세종의 백부이기도 하다. 1419년 향년 63세 였다. 이어서 대비 민씨 즉 세종의 모친이자 태종의 왕비가 학질즉 재귀열로 타계하였으니 향년 56세 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