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3일 수요일

7. 인조-효종-현종-숙종

1623년 3월12일 밤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서인인 이귀, 김유, 김자점, 최명길은 광해군의 국정능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 서인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능통한 자들이었는데 명나라와의 의리명분과 소중화사상을 중요시 하였다.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은 자신의 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주살하였고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삭호하였었는데 이것은 서인들에게 반감의 계기가 되었다. 또 광해군은 후금과는 실리외교를 펼쳤는데 이것은 친명배금을 주장하고 있던 서인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서인들은 조정의 실권자들이었던 대북파와 광해군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무관들이었던 이서, 이중로, 김유는 병력을 끌어모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은 이괄을 대장으로 삼아서 이 군사들을 통솔하면서 창의문으로 진격하였다. 이흥립은 훈련대장이었는데 반정군과 내응하고 있었으므로 궁궐은 반정군에게 쉽게 점령이 되었다. 반정군은 유폐되어있던 인목대비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곧 반정군은 의관인 안국신의 집에 피신하여있던 광해군을 붙잡았고 왕비유씨 그리고 세자와 세자빈 박씨를 모두 강화도로 유배보내었다. 반정군은 대북파인 세자빈 박씨의 외할아버지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을 처형하였고 그외 200여명을 유배보내었다. 나중 일이지만 세자빈 박씨는 강화도에서 자결하였고 세자는 도망가다 잡히자 자결하고 말았다.  

곧 능양군은 즉위하여 인조가 되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면서 광해군의 조카였다. 인조는 광해군의 이복 동생인 정원군과 부인 구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정원군은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사이의 소생이었고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김씨와의 소생이었다. 인조는 당시 인렬왕후 한씨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두고 있었다.

인조는 반정에 공훈이 있는 자들에게 훈작을 수여하였다. 정난공신의 1등공신에는 김유, 이귀, 김자점, 신경진, 최명길 등이 추록되었고 2등공신에는 이괄, 김경징 등이 추록되었다.

1623년 7월에는 기자헌과 유몽인 등이 인조에 대하여 역모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해 10월에는 황현과 이유림 등이 역모를 하여 흥안군을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흥안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이괄은 정난공신의 2등 공신임에도 훈작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이괄은 부원수인 평안도 병사로 전직이 되었는데 나중에 조정의 중신들은 이괄과 그의 아들을 역모죄로 모함하였다. 조정은 체포령을 내렸고 이괄을 압송하기 위하여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이괄은 그들을 죽이고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인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의 반란군은 보름만에 개성을 지나 임진강을 건넜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공주를 향하여 몽진을 떠났다. 이것은 1624년 2월8일의 일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2월11일 한양에 입성하였고 흥안군을 옹립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흥안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다. 그 후 이괄은 길마재에서 임경업과 정만이 이끄는 관군과 조우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괄은 도망하였고 그의 부하인 기익헌과 이수백은 잠들어 있던 이괄과 이수 그리고 한명련등을 목베어 주살하였다. 한편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과 한택 형제는 도망하여 후금에 투항하였고 당시 후금에 있던 강홍립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들은 나중에 정묘호란의 불씨가 된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훈이 큰 자들에게 훈작을 수여하였는데 진무원중공신의 1등공신에 임경업 등을 추록하였고  2등공신에는 최명길과 조시준 등을 추록하였다.

1626년 인조 4년 호폐법을 실시하였다. 호폐법은 호구조사를 통하여 군역과 요역을 충실하게 할 수 있고 또 신분관계의 증명을 통하여 계급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 해 1월에는 영원성전투가 있었다. 명나라의 원숭환은 병력 1만을 이끌고 병력 10만의 누루하치군을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누르하치는 퇴각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이 해 8월 11일에는 후금의 칸인 누르하치가 부상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 누루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치는 봉견영주인 베이러의 8기중에 3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누르하치를 승계하여 후금의 칸이 되었다.

1627년 인조 5년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베이러, 즉 후금의 봉건영주인 아미타수에게 흉노족 3만을 내주어 조선을 치게 하였다.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광해군이 폐위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괄의 난 후에 후금으로 탈출하였던 한윤과 한택은 홍타이치에게 인조즉위의 부당성을 알렸던 것이다. 또한 홍타이치는 누르하치가 타계하였을 때 조선이 조문단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봉건영주 아미타수는 강홍립과 한윤과 한택 형제를 길잡이로 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를 침략하였다. 일부는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의 군대를 공략하였다. 모문룡은 이전에 광해군의 제의를 받고 요동수복을 위하여 가도에 병력 5천과 난민 1만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조선은 이들에게 군량미를 지급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후금을 자극하고 있었다.

1627년 1월 24일 아미타수의 후금군은 평양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인조와 왕실은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전주로 피난하였다. 한편 안주성에서 후금군과 결전을 벌이던 남이흥은 무기가 떨어지고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성에 불지르고 김언수, 함응수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조정은 강화도에서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라졌으나 후금의 아미타수는 강홍립의 주선으로 강화제의를 해왔다. 협상에 나선 후금은 조선에게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도록 하였고 의주에 중강개시를 열어서 자신들과 교역하도록 하였다. 또 가도에 있는 모문룡을 축출하도록 하였고 자신들의 풍습인 하늘에 맹세하고 맹약하는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후금은 왕실의 종친인 원창군을 볼모로 잡아갔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백성12,000명을 포로로 끌고갔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10년 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인조의 왕세자인 소현세자는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소현세자는 16살이었고 민회빈 강씨와의 사이에 3형제를 두게될 것이다.

1628년 인조 6년 유효립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유효립은 대북파들의 잔당과 규합해서 인성군을 새 왕위에 옹립하려고 하였다. 인성군은 선조와 후궁인 정빈 민씨와의 소생이었다. 역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인성군은 진도로 유배를 떠났다가 나중에 목을 매어 자진하고 말았다. 한편 후금으로 끌려갔던 포로 1만2천명 중에 3천명이 도망쳐서 돌아온 일이 있었다. 후금은 이들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도록 요구하였다.

1631년 인조 9년 인목대비가 49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였고 선조와의 사이에 영창대군을 두고 있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고 대북파들이 득세하자 소북파들은 숙청을 당하였고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된 후에 증살되었다. 증살은 불을 이용하여 쪄서 죽이는 것이다. 왕대비였던 인목대비는 유폐되었으나 후일에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환궁하였고 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를 왕위에 올려놓았었다.

1633년 인조 11년에는 상평청을 설치하여 주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상평청은 물가조절기구였는데 풍년에는 곡물값이 떨어지므로 곡물을 비싼값으로 사들여서 곡가를 올렸고 흉년에는 곡물값이 상승하므로 곡물을 싼값으로 방출하여 곡가를 내렸다.

1635년 12월 인조비인 인렬왕후 한씨가 4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렬왕후 한씨는 원자를 낳았는데 곧 죽어버렸고 인렬왕후 자신도 산후병으로 나흘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그녀는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이 되었다. 인렬왕후 한씨는 인조와의 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두고 있었다. 후일 인조는 계비로서 장렬왕후 조씨를 맞이한다.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청나라 홍타이지는 12만 연합대군을 몸소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청군 7만을 이끌었다. 그리고 후금에 투항했던 명나라의 공유덕과 경중명이 명군 2만을 이끌었으며 또한 몽고군 3만이 합세하였다. 이제 연합대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피하여 쳐들어왔고 우수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단, 10일만에 수도 한양을 위협하였다. 조선조정은 척화론의 김상헌과 주화론의 최명길로 갈라져있었다. 조정은 이조판서 주화파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버는 한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하여 비빈종실의 귀족들을 강화도에 먼저 피신하도록 하였다. 그후 인조와 소현세자와 조정중신들이 강화도를 향하여 출발했을 때에는 이미 피난 길이 청나라군대에 의해 막혀있던 터라 남한산성으로 몽진하게 되었다. 청군은 12월16일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성내에는 조선군사 1만 2천과 50일분의 식량 1만 4천여 섬이 있었다. 다음해 정월에는 청나라 태종인 홍타이지가 직접 북한강가에 도착하여 진을 쳤고 전군을 지휘하였다. 청군은 먼저 도르곤과그의 3만 군사가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곧 강화성은 무너졌고 수비대장인 김상용은 자결하였으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포로로 잡혔다. 이 소식은 남한산성 내에 전해졌고 주화파의 주장으로  45일만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인조는 성문을 열기전에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삼전도(송파)의 수항단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다. 인조는 땅바닥에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것으로 인조의 용안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청나라는 화약의 조건으로서 황금 100냥과 백은 1,000냥 그리고 각종 물품 20여종을 세폐로 바치도록 하였고 신하의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며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나라로부터 받은 고명책인을 헌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의 장자와 제 2왕자 그리고 대신들의 자녀들을 인질로 보내도록 하였고 일본과 무역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인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는 도르곤을 따라서 인질로 끌려갔고 척화파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는 인질로 끌려간 후에 참형을 당하였고 김상헌도 오랜 옥종생활을 하였다. 한편 당시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에서는 조선인 처녀와 마님 등 포로 60만명 이상이 인간시장에서 거래되었다.

1638년 인조는 계비로서 조창원의 딸을 맞이하였다. 인조는 44세였고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는 15세였다.

1641년 인조 19년 광해군이 승하하였다. 향년 67세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사이의 소생으로서 선조를 승계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친명배금과 소중화사상을 중시한 서인들의 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았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옹립하였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능양군은 즉위하여 인조가 되었던 것이다.그후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제주도 애월로 이송되어 거기서 유배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8년간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몽골어를 배웠고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에 거류하고 있던 50만 이상의 조선인들을 보호햐는데 심려를 기울이기도 하였고 조선에서 끌려와 재판을 받고 있던 김상헌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청나라 섭정인 도르곤이 명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는 소현세자도 함께 동행하였고 베이징에서 70일간 체류하면서 예수교 선교사였던 독일인 신부 아담샬과 교류하며 서양문물과 캐돌릭 등을 접하였다.

1643년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명나라 출정을 위한 만찬모임에서 연회를 베푼후에 갑자기 타계하였다.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한편 도르곤은 8기체의 베일러 봉건영주 합의체에서 다음 황제의 승계자로서 홍타이치의 아들인 복임을 강력하게 추천하였고 그 뜻을 이루었다. 복임은 순치제로서 즉위하였고 당시 그의 나이는 6살이었으므로 그의 삼촌들인 호격과 도르곤이 좌우섭정을 맡았다.

명나라의 이자성은 군사를 일으켜서 서안을 점령하였고 국호를 대순으로 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 대순의 황제가 된 이자성은 대순 15년인 1644년 군대를 이끌고 북경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명나라 숭정제는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써 276년을 이어왔던 명나라는 망했다. 한편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후금에 투항하면서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도르곤은 병력을 이끌고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었고 북경으로 치고들어가 이자성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재미있게도 도르곤은 운좋게 어부지리로 중국대륙을 통일했던 것이다.

1644년 좌의정인 심기원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심기원은 조정중신들을 잔치에 초대하여 거사를 치른 후에 회인군을 옹립하기로 하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심기원은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두달만인  4월26일에 타계하였다. 향년 34세였다. 소현세자의 시신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7혈에서 선혈이 흘러나왔으므로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사람 같았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사이에는 석린, 석견, 석출 3형제가 있었다.

후금, 즉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3만 여명의 조선마님과 처녀들이 환향하였다. 이 여인들은 각 가정에서 이혼 등의 문제로 인하여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조선조정은 각 도에 회절강을 지정하였고 면죄의식을 거행한 후에 이 부녀들을 각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한편 회절강은 한강, 예성강, 낙동강, 소양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등이었다.

1645년 6월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인조는 즉시 새 왕세자로서 봉림대군을 책봉하였다. 한편 8월에는 소현세자빈인 민회빈 강씨의 동생인 강문성이 소현세자의 장사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에게 찾아가서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것을 듣고 불쾌하였다. 인조는 강문성, 강문명 형제를 제주도와 진도에 부처하였다. 나중에 이들은 장살당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민회빈 강씨의 궁녀들인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그녀들을 옥에서 죽였다. 민회빈 강씨 또한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별궁에 유치했다. 그런데 당시 김자점은 민회빈 강씨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그녀를 무고하였다. 그녀는 물증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되고 말았다. 민회빈 강씨의 나이는 36세였고 귀국 후 1년만이었다. 그녀의 아들들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석철은 장살당하였고 석린은 병으로 죽었다. 막내인 석린은 다음 왕으로 효종이 즉위하면서 복위될 것이다.

1646년 임경업은 포로로서 청나라의 심양으로 호송되어 있었다. 임경업은 명나라 말기에 숭정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후금의 정벌에 나섰지만 명나라가 망하면서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한편 인조는 임경업이 심기원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설을 확인하기위하여 청나라에 그의 송환을 요청하였다. 이전에 좌의정 심기원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사되었었다. 곧 인조는 송환된 임경업을 친국하였으나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은 그를 국법위반과 배신을 근거로 하여 문초하였는데 임경업은 문초중에 등뼈가 부러지면서 죽고말았다. 김자점은 열열한 친청파였고 임경업은 열열한 친명파였다.

1647년 주화파 최명길이 6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55세 였다. 인조는 능양군시절에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삼촌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인조는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의 소생인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였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이 있었지만 소현세자는 청나라로부터 귀국한 지 2달만에 타계했었다. 인조는 둘째 아들인 봉립대군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자 즉각 그를 세자로 책봉했다. 인조는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당시 장렬왕후, 즉 자의대비 조씨는 24세였다.

1649년 5월31일 31세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원래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가 일찍 타계한 까닭에 원손을 대신하여 세자위를 승계하였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는 원손을 두고 있었는데 그가 후일의 현종이다.

효종 초기의 조정은 서인이 주도하였다. 공서파는 인조반정에 공훈이 있었던 서인들이었다. 반면에 청서파는 인조반정에 참가하지 않았던 서인들이다. 김자점은 공서파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송시열은 청서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효종의 스승이었다. 한편 효종은 즉위하자 김자점을 영의정으로 중용하였다.

1649년 영국에서는 찰스 1세가 처형되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직전 왕인 제임스 1세의 차남이었다. 찰스 1세의 왕비는 프랑스 앙리 4세의 딸인 앙리에뜨 마리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된 이유는 청교도 혁명에 따른 내전에서 왕당파가 의회파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찰스 1세가 더햄과 뉴캐슬을 점령한 스코틀랜드 군대를 치기 위한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11년간 폐지되어왔던 의회를 소집하면서 비롯되었다. 의회가 열리자 의원들은 찰스 1세 에게 요구사항을 건의하였다. 그것은 11년(1629-1640)간 참주정을 도왔던 켄터베리 대주교 라우드(William Laud)와 스태포드(Stafford) 백작을 처형하도록 하고 또 선박세를 과세하는 것이 불법임을 인정하고 또한 의회의 동의없이 의회를 해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못박아 주기를 바랐다. 찰스 1세는 전제군주 성향의 왕이었다. 찰스 1세는 곧 격노하였고 자신에 대항하는 의원 5명을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재빠르게 도망가 버렸다. 도망간그들은 청교도들을 끌어모으고 절대군주에  대항하여 내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럼, 왜 스코틀랜드는 뉴캐슬을 점령하여 청교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는가. 찰스 1세는 매우 종교적인 왕이었다. 찰스 1세는 교회 의식이 웅장하고 형식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간단하고 단순한 스코틀랜드인들은 기도서의 장황함에 반발하여 그것을 시정해 주도록 영국의 뉴캐슬과 더햄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불쾌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치기위하여 전쟁비용이 필요했고 상공인들과 재력가들을 등에 업은 의회 의원들의 힘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찰스 1세가 처형되자 영국은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크롬웰의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크롬웰이 죽자 1660년 왕정이 복고되고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즉위하게된다.

1651년 김육은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효종에게 건의하였다. 각 지방은 공납으로서 특산물을 중앙에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현지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공납으로서 지방에 부과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간관리들은 공납을 대신하여 중앙에 바치고 농민들에게 방납을 거두어 충당하였는데 중간착취의 폐단이 되었다. 이것은 중앙과 농민들 모두에게 이롭지 못하였다. 그런데 대동법은 이 공납을 특산물이 아니라 쌀로 통일하였고 그것도 각 호당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의 결단위에 따라 부과하였다.

한편 김자점은 인조의 후궁이었던 귀인조씨와 함께 효종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김자점은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끌어모으게 하였고 송시열과 김집 그리고 원두표 등을 제거한 후에 귀인조씨의 아들인 숭선군을 옹립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사전에 탄로가 나서 실패하고 말았다. 김자점과 귀인조씨는 서로 친족관계였다.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은 귀인조씨의 딸인 효명공주와 혼인하고 있었다. 이 역모사건으로 인하여 김자점은 1651년 12월21일 참수되었고 귀인조씨는 사사되었다.

1652년 효종은 훈련도감의 대장에 이완을 임명하였고 비밀리에 북벌계획을 진행하였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은헤를 갚고 청나라에 대한 치욕을 씻겠다는 명분론을 강조하였는데 문에는 송시열, 무에는 이완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이들을 아꼈다. 훈련대장 이완은 어영청에 소속된 군사를 2만명으로 늘렸고 이들에게 지급되는 군보도 종전의 1보에서 3보로 늘리는 한편 안산의 덕물도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이완은 현종대까지 16년동안 그 직책을 유지하는데 한성부판윤과 공조판서, 형조판서, 포도대장을 겸임하였다. 한편 이해에는 난리때 척화파였던 김상헌이 8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1653년 1월 10일 하멜과 그의 일행 36인은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에 제주도 근해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하였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고 있던 박연이 제주도에 급파되었다. 박연의 본명은 웰터브레였고 그 또한 1628년에 제주도에 표착하였었다. 곧 하멜과 그의 일행는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나중에 이들은 분산 수용되어 생활하다가 대부분 병사하였다. 그후 하멜을 포함한 7인은 탈출에 성공하였고  제주도 표착 15년만에 일본을 거쳐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654년 효종은 청나라 강희제의 요청으로 대장 변급과 조총군 150명을 흑룡강(아므르강) 유역의 아르바진에 파견하였다. 아르바진은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였다. 러시아는 이반대제 이후에 지금은 짜르 알렉세이 1세가 집권하고 있었다. 짜르는 영토를 계속 동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는데 야쿠츠크와 오호츠크에 이어서 1648년에는 캄차카를 건설하였다. 러시아의 짜르는 1651년에는 몽고 땅인 바이칼호 근처에 이르크츠크를 건설하였고 계속 남하하여 청나라의 영토인 아르바진을 위협하였다. 이전 러시아는 1613년에 이반 4세가 타계하자 전국회의인 젬스키 소보르에서 미하일 로마노비치를 짜르로 선출하였는데 이로써 로마노프왕조가 시작이 되었었다. 이 미하일 1세는 봉건제를 강화하였고 권력을 중앙집권화하였다. 1645년 미하일 1세가 타계하자 그의 아들인 알렉세이1세가 짜르가 되었다. 알렉세이 1세는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와의 권력다툼에서 승리하였고 황제권의 우위를 확립하였다. 한편 효종은 1658년 2차로 조총부대를 파견하였다. 후일에 러시아와 청나라는 네르친스크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하였는데 분쟁지역인 아르바진은 버려진채 파괴되었다.

1658년 효종 10년 40세의 건장한 왕인 효종이 승하하였다. 효종의 귀밑 볼에 종기가 있었는데 점점 커졌다. 어의 신가귀가 침을 놓았는데 침을 빼자 피가 멈추지 않았다.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는데 나중에 교수형을 당하였다. 한편 송시열은 효종의 시신을 소렴하였는데 느슨하게 한 까닭에 시신이 부풀어서 관에 들여놓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널판을 이어서 관을 늘리고 시신을 입관하였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으로서 병자호란 후에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었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그가 왕세자가 되었고 인조를 이어서 왕위를 승계하였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사이에는 청나라 심양의 조선관에서 태어난 원자가 있었는데 그 원자가 왕세자가 되었고 이제 현종으로서 즉위할 것이다.

1659년 5월 9일 현종이 즉위하였다.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사이의 아들로서 청나라 심양의 조선관에서 태어났다. 19세의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에는 아직 원자가 없었다.

1660년 3월에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 즉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이 문제가 되었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는 38세였는데 전에 소현세자가 타계하였을 때 3년복을 하였었다. 서인들은 효종이 봉림대군으로서 제 2왕자였으므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은 기년설 즉 만1년설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남인 허목은 송시열에 대항하여 3년설을 주장하면서 서인들을 맹공격하였다. 또한 남인 윤휴와 윤선도도 효종이 왕위를 승계하였으므로 적장자와 다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3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송시열의 기년설이 채택이 되었고 이것으로 서인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이다. 한편 윤휴가 3년복을 주장한 근거는 의례 참죄장의 주석이었는데 거기에는 제1장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제2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라고 쓰여있다.

1661년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가 후일의 숙종이다

현종대의 초기에는 홍수가 있었는데 이어서 흉년이 들었고 그러자 돌림병이 돌았다. 5만 여명이  장티푸스와 콜레라에 감염되어서 고열과 신음속에서 고통받다가 그 중 1,000여명이 죽었다. 이 때 환자를 길바닥에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고 환자를 추행하는 일도 있었으며 소돌림병까지 있었다.

1665년 현종 6년 남한산성에 화약 1,500근이 폭발하는 일이 있었다. 한편 송시열은 현종에게 건의하여 동성동본 통혼의 금지를 건의하였다.

1671년 현종12년에도 기근과 역질이 있었다. 이 해의 전국의 가구수는 138만 5408호였고 인구수는 472만 5189명이었다. 한편 여주의 효종능에는 호석이 갈라지고 양마석이 떨어져나가는 일이있었는데 효종의 능을 세종의 영릉 동편으로 천장하였다.

1674년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모친인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57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이때 인선왕후 장씨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가 문제가 되었다. 예조에서는 경국대젼의 예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해놓았다가 나중에 대공복 즉, 9개월복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인 허목은 원래 정해 놓았던 대로 기년복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번에는 남인이 주장하는대로 기년복이 채택이 되었고 남인이 득세하였는데 이것이 제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1674년 13살의 왕세자가 보위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직전왕인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의 외아들이었다. 숙종과 16살의 인경왕후 김씨사이에는 원자가 없었다. 숙종은 나이가 어렸음에도 섭정을 세우지 않았다. 숙종은 자신의 할머니이자 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타계하자 장례 복제에 관련하여 자신의 증조할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는 기년복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남인 허목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9개월의 대공복을 주장하였던 서인들은 물러났고 남인정권이 수립되었다.

1680년 숙종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타계하였다. 발병 20일 만이었는데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녀의 부친은 김만기였는데 김만기의 동생은 구운몽으로 유명한 김만중이었다. 한편 숙종과 인경왕후 김씨사이에는 두 공주가 있었다.

1680년에 숙종은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허적을 불러서 그의 조부인 허잠에게 시호를 내렸다. 허적은 이 경사를 위하여 연회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마침 연회 당일날 비가 왔다. 허적은 궁궐에서 천막을 가져갔다. 그러나 숙종은 허적이 허락도 없이 천막을 가져간 것을 알게 되자 대노하였다. 숙종은 철원에 귀양가있던 김수항을 영의정에 임명하였고 조종의 요직들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었다. 김수항은 척화론자였던 김상헌의 손자였다. 한편 영의정에서 낙마한 허적에게는 서자인 허견이 있었다. 허견은 성질이 급하여 자신의 처형을 때려서 이빨을 부러뜨리기도 했었다. 허적은 복선군과 의논하여 숙종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복선군은 인평대군의 아들이었는데 역모에 성공하면 그를 옹립하기로 계획하였지만 사전에 발각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허견이 참수되었고 복선군은 교살되었다. 남인의 영수인 허적과 윤휴는 사사됨으로써 남인이 몰락하였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한다.

1681년에 숙종은 새 왕비를 맞이하였는데 민유중과 송씨부인 사이의 딸이었다. 그녀는 15살이었고 인현왕후 민씨이다. 인현왕후 민씨의 모친인 송씨부인은 송준길의 딸이었다. 따라서 송준길은 인현왕후 민씨의 외조부였다. 송시열은 송준길보다 1살 어렸는데 친족상 숙부인 송준길을 형이라고 불렀다.

1682년에 허새의 옥사가 일어났다. 서인인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기위하여 남인인 허새를 끌어들여 역모를 조작하도록 하였고 서인인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 일당들을 역모죄로 몰살하기로 계획하였다 김석주는 대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이었고 김익훈은 타계한 인경왕후 김씨의 종조부였다. 이 날조사건은 사전에 발각이 되었는데 서인인 윤증은 이 역모를 조작한 김석주와 김익훈을 처벌하도록 강하게 주장했던 반면에 같은 서인인 송시열은 처벌을 반대하였다. 따라서 서인들 내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는데 노론들은 정적인 남인 일당들에 대하여 온건한 태도를 취하였던 무리들이었고 반면에 소론은 남인 일당들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던 무리들이었다. 노론은 영수인 송시열과 김수항, 김만기 등 노장파였다. 그리고 소론은 영수인 윤증과 남구만, 박세채, 조지겸, 한태동 등 소장파였다.

소론의 영수인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다. 윤증의 부친은 윤선거였는데 윤선거와 송시열은 서로 동문수학한 친구사이였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을 갔었는데 그때 당시 서인 사대부들과 부녀자들은 모두 자결을 선택하였으나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후 윤선거가 타계하자 아들인 윤증은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송시열은 묘비명에 윤서거가 병자호란 때 살아서 돌아온 것을 두고 그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면서 야유하듯 써버렸다. 이것에 격노한 소론 윤증은 노론 송시열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것을 시정해주도록 요구하였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것을 회니의 시비라고 하는데 노론 송시열의 집은 회덕에 있었고 소론 윤증의 집은 이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1683년 12월5일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가 4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청나라의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의 왕비였고 현종이 승하하자 자신의 아들인 숙종이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고 자신은 왕대비가 되었었다. 숙종의 즉위 초기에 명성왕후 김씨는 자신의 부친인 김우명과 짜고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였던 인평대군의 세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무고하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고 모함하면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이 홍수의 변이다.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이 무고로 밝혀지자 주모자인 김우명은 무고죄로 처벌받게 되었는데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인 숙종을 다그치면서 불륜은 사실이었다면서 억지를 부렸다. 숙종은 외조부인 김우명을 처벌하지 않았고, 대신에 인평대군의 세아들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 적이 있었다. 그후 김우명은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다가 홧병으로 타계했다. 한편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인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자 무당의 조언에 따라서 추운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홑치마만 입은 채로 물벼락을 맞으면서 아들의 쾌유를 기원하였다. 결국 그녀의 아들인 숙종은 완쾌가 되었으나 정작 자신은 독감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명성왕후 김씨가 타계한 다음해에는 그녀의 척족인 서인 노론 김석주가 타계하였다.  

1686년 자의대비 조씨는 장옥정을 재입궁시켰다. 장옥정은 후일의 희빈장씨, 즉 장희빈으로서 후일 경종의 모친이다. 원래 장옥정은 자의대비의 나인출신었으나 숙종비인 인경왕후가 타계하자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는 장옥정이 천민출신이었으므로 숙종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를 궁궐 밖으로 쫓아냈었다. 장옥정의 모친은 서인 노론 조사석의 가비였는데 한번은 조사석이 뱀에 물리자 그 상처를 입으로 빨았으므로 대댠한 총애를 받았었다. 자의대비 조씨의 사촌동생이 바로 조사석이었다. 한편 장옥정이 재입궁하자 이제는 인현왕후 민씨의 반발이 격렬하였는데 그 이유는 숙종이 장옥정을 너무도 총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들과 결탁해서 후궁을 들이기로 했는데 영빈김씨를 간택하였다. 후궁 영빈김씨는 서인 노론의 영수인 영의정 김수항의 증손녀였다.

1687년 인현왕후 민씨의 부친인 민유중이 57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한편 장옥정은 숙원에서 소의로 품계가 상승하였다. 그리고 1688년 8월 장렬왕후이자 자의대비인 조씨가 64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같은해 10월27에는 숙종과 소의장씨 장옥정사이에 원자인 윤이 태어났다. 숙종은 다음해인 1689년 1월에 왕자 윤을 원자로 봉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소의장씨 장옥정을 빈으로서 책봉하였다.

서인 노론 송시열은 후궁의 소생이 원자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상소하였다. 중국 송나라 때 신종은 28세 때 후궁으로부터 철종을 낳았으나 후궁의 아들이었으므로 번왕에 책봉하였다가 나중에 신종이 적자가 없이 죽은 후에야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을 승계한 전례가 있었다. 서인 노론 송시열은 이 역사적 사실을 숙종에게 상기시키면서 정빈인 인현왕후 민씨가 아직 젊기 때문에 후궁소생의 원자 책봉을 늦추어주기를 탄원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하여 송시열이 왈가왈부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또한 남인들은 이제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숙종은 서인 노론 송시열을 파직하고 제주도로 유배보내었고  또 서인 노론 김수항을 진도로 유배를 보내었다. 그리고 인경왕후 김씨의 숙부인 서인 김만중을 남해에 유배보내었고 또 인현왕후 민씨의 중부인 민정중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시켰다. 이렇게 서인들이 쫓겨나게 되자 남인들이 정권을 재집권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 기사환국으로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 장옥정과 남인 일당이 득세하였다.

 1688년 11월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암은 영국의 데본Devon에 당도하였고 현직 왕인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1689년1월 오렌지공 윌리암3세는 의회를 소집하고 혁명에 필요한 법안을 성공적으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다. 1689년 2월 13일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오렌지공 윌리암 3세와 그의 부인인 메리를 공동왕으로 선포하였다. 윌리암 3세의 부친은 네덜란드의 왕자인 윌리암 2세였고 그의 모친은 청교도 혁명과 내전의 패배로 인하여 처형된 찰스 1세의 딸이었다. 한편 공동왕이자 왕비인 메리의 부친인 제임스 2세는 이미 프랑스로 도피하였고 지금 막 폐위되었다. 제임스 2세는 재위동안 로만캐돌릭을 영국에서 다시 국교화하고자 시도하였지만 토리당과 휘그당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웠다. 결국 의회는 개신교도이자 당시 네덜란드에 있었던 찰스 1세의 외손자인 오렌지공 윌리암 3세를 초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으로 인하여 영국은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하였다.

1689년 5월 4일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비하여 사가로 폐출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인 4월23일은 인현왕후 민씨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기간이었으므로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에게 생일하례와 선물을 생략하도록 당부하였지만 대신들은 인현왕후 민씨에게 생일 하례편지와 선물을 전달하였다. 숙종은 어명이 지켜지지 않는것에 분노하였고 그 다음날 인현왕후 민씨를 서궁에 유폐하였었다. 한편 후궁 귀인김씨도 인현왕후와 밀접한 관계라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후궁 귀인김씨의 부친도 귀양을 떠났다. 6뤌에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송시열을 한양으로 압송하도록 하였는데 송시열은 한양으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왕명에 따라 사사되었다.

1690년 10월 22일 숙종은 희빈장씨 장옥정을 왕비로서 책봉하였다. 숙종은 왕비 장씨의 부친을 비롯하여 3대에 걸쳐서 정승을 추증하였다. 왕비 장씨의 이복 오빠인 장희재는 포도대장을 거쳐서 나중에는 한성부 좌윤에 승차한다.

1691년에 서인 김만중은 경상도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만중은 인현왕후 민씨가 폐비된 것은 부당한 처사였음을 알리기 위하여 <사씨남정기>를 집필하였다. <사씨남정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사대부 유현수라는 자가 있었다. 유현수의 부인은 사씨였는데 자식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유현수 주변의 사람들은 소실을 얻도록 권하였다. 유현수는 교씨 성를 가진 첩을 구하였는데 그 교씨 첩은 얼굴이 예쁘기는 하였으나 마음씨는 나빴다. 이윽고 교씨 첩은 드디어 사씨 부인을 쫓아내버렸다. 한편 유현수는 쫒겨난 사씨 부인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마침내는 교씨를 쫓아내고 사씨를 찾아내어 다시 행복하게 같이 살았다. 이 <사씨남정기>는 언문으로 되어있었으나 나중에는 한문본으로도 간행하였다. 김만중은 이 소설에서 숙종을 유현수에 빗대었고 사씨부인을 인현왕후 민씨에 빗대었던 것이다. 김만중은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채 1692년 유배지인 남해에서 타계하고 말았다.

1694년 서인 노론인 김춘택과 서인 소론인 한중혁은 폐비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하였다. 김춘택은 서인 노론 김만기의 손자이므로 이미 타계한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의 조카였다. 한편 남인의 영수이자 우의정인 민암은 이번 기회에 서인 일당들을 모조리 제거하고자 서인들인 김춘택과 한중혁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숙종은 오히려 남인 영의정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해버렸다. 그리고 숙종은 서인 소론인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등용하였다. 이어서 숙종은 남인 일당과 결탁하고 있던 왕비 장씨 장옥정을 빈으로 강등하였고 그녀의 오빠인 한성판윤 장희재를 제주도에 부처하였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이 갑술환국으로 인하여 이전의 기사환국으로 조정을 거머쥐었던 남인 일당들은 몰락하였고 다시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이제 숙종은 폐비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로서 복위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서인 노론인 송시열, 민정중, 김석주, 김익훈, 김수항, 조사석 등을 복작하였다. 한편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는 불결한 환경에서 생활했던 탓인지 허리와 디리에 종기가 많이 피었다. 한의학에서는 담경에 문제가 있으면 종기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해, 즉 1694년에 숙종과 후궁인 숙원 최씨사이에 아들 연잉군이 태어났다. 그리하여 후궁인 최씨는 숙빈으로 계급이 상승하였고 연잉군은 후일 영조가 될 것이다.

1696년 4월 희빈 장씨의 부친인 장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왕세자 윤을 저주하는 목패와 칼 찬 인형 두개가 발견되었다. 장희재의 가노가 이것을 고변하였는데 재미있게도 그 가노가 오히려 귀양을 갔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장희재의 자작극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묘소 작변의 사건이다.

9살이 된 왕세자 윤은 11살의 심호의 딸을 세자빈으로서 맞이하였다. 그녀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12대 손이고 명종의 장인인 심강의 7대 손이고 동서분당의 원인을 제공했던 심충겸의 6대 손이다. 세자빈 심씨는 왕세자 윤이 경종으로서 즉위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타계한다. 세자빈 심씨는 병약하여 가례당일에도 복통을 일으키는 소동이 있었다.

1701년 숙종 27년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된지 8년만에 이름모를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35세였다. 인현왕후 민씨의 부친은 서인 노론의 민유중이었고 모친은 송준길의 딸이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더불어 서인노론의 거두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타계하고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숙종의 계비가 되었지만 원자를 생산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차에 희빈장씨가 왕자 윤을 생산하자 서인 노론 송시열은 이 왕자 윤이 원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기사환국(1689)을 맞이하게 되었었다. 집권한 남인 일당은 숙원 장씨가 희빈이 되는데 일조하였고 또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는데 일조하였었다. 그후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되었지만 폐비복위 운동이 일어나고 갑술환국(1694)이 성공하자 폐비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되었고 왕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희빈장씨는 앙숙 관계였던 인현왕후 민씨의 단명을 기원하면서 방술에 심여를 기울였다. 희빈 장씨는 취선당 별채의 대청에 인현왕후 민씨의 화상을 걸어 놓았는데 그 화상은 화살자국으로 가득하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죽기전에 희빈장씨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3대 궁중소설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한중록이다.

숙종은 곧 제주도에 부처되어있던 장희재를 한양으로 압송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런데 희빈 장씨는 이 사약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이제 상궁들은 발광하는 희빈 장씨의 팔다리를 붙들고 막대기로 그녀의 입을 벌리고 사약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나이 43세 였다. 그때 왕세자 윤은 죽어가는 모친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서인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메달리는 왕세자를 외면했다. 한편 서인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말하기를 죽음으로써 세자의 은혜를 갚겠노라고 하였다. 한편 서울로 압송된 쟝희재는 군기시에서 사사되었고 그의 친구인 동평군 이항도 사사되었다. 이것이 무고의 옥이다. 이때 서인 소론 남구만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렸갔다. <청구영언>에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로 시작하는 남구만의 시 한수가 실려있다.

1702년 숙종은 새 왕비로서 김주신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인원왕후 김씨가  되었다.

1704년 숙종과 숙빈 최씨사이의 왕자인 11살의 연잉군은 서종제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녀는 당시 13살로 후일 정성왕후 서씨가 될 것이다.

1714년 숙종 44년 왕세자 윤의 세자빈 심씨부인이 갑자기 혼절하여 돌연사하였다. 향년 33세었다. 왕세자 윤과 심씨부인 사이에는 원자가 없었다. 31세의 왕세자 윤은 새 세자빈으로서 14살의 어유구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후일 선의왕후 어씨가 될 것이다. 한편 어유구는 그때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김창집의 제자였다.

숙종 46년인 1720년 6월 8일 숙종이 타계하였다. 향년 60세였다. 숙종은 청나라에서 태어난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의 외아들이었다. 숙종의 재위동안은 붕당과 댱쟁의 전성기였다.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한 경신대출척, 남인이 득세한 기사환국, 서인 소론이 득세한 갑술환국등이 있었다.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의 왕세자 윤은 곧 숙종을 승계하여 경종으로서 즉위할 것이고 숙종과 숙원 최씨 사이의 연잉군 또한 경종을 승계하여 영조로서 즉위하게 될 것이다.

한편, 중국 송나라 때 구양수는 붕당의 갈등을 합리화하였는데 붕당 때문에 난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난정 때문에 붕당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나라 때 한비자는 군주는 말에 따라서 신하에게 일을 맡기고 말과 일이 다를때 신하를 벌준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2011년 7월 6일 수요일

6. 선조-광해군

1567년은 선조가 즉위한 해이다. 선조는 직전왕인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후사가 없었으므로 명종의 방계혈족으로서 보위에 오른 것이었다. 선조는 중종과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원군이었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16살로 어렸으므로 인순왕후 심씨가 1년간 수렴첨정하게 되었다. 선조 2년인 1569년 선조는 왕비로서 박응순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15살이었고 의인왕후 박씨가 된다. 그녀는 후일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을 것이고 후사없이 타계할 것이다.

선조는 1574년에 후궁인 공빈김씨와의 사이에 임해군을 얻었고 3년 후에는 광해군을 얻었다. 그러나 공빈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후에 타계하였다. 향년 26세였다. 한편 1577년 선조는 또 하나의 후궁인 인빈김씨와의 사이에 의안군을 얻었고 그 다음해에는 신성군을 얻었으며  나중에는 정원군을 얻게 될 것이다. 후일에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은 인조가 될 것이다.

심의겸은 어린 선조를 대신해서 수렴청정했던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이었다. 당시 심의겸은 이조참의였다. 마침 이조정랑인 오건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김효원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소윤 윤원형이 계파였다는 것을 이유로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김효원은 우여곡절 속에서 다음해인 선조 6년 이조정랑에 승차하였다. 그런데 다음해인 선조 7년에 이조정랑 자리가 비게 되자 조정기가 자신의 후임으로 심충겸을 천거하였다. 그런데 심충겸은 심의겸의 동생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조정랑 김효원이 이것을 결사반대하였고 그리하여 심충겸은 낙마하고 대신에 이발이 승차하였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서 조정은 양쪽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쪽은 서인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동인이 되었다. 심의겸은 한양 서쪽인 정동에 살았으므로 서인이 되었고 김효원은 한양 동쪽인 건천동에 살았으므로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후일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동인은 이발의 북인과 우성전의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어서 동인의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1589년 선조22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정여립은 이이 문하의 서인이었는데 서인들 내에서 마찰을 일으킨 때문에 동인으로 이탈해나갔다. 그래서 정여립은 고향인 호남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거기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계를 조직해서 노비와 무사를 끌어모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는 왜구를 섬멸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고 자신의 세력을 황해도로 진출시켰다. 재미있게도 황해도 관찰사는 정여립이 선조에 대항하여 역모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말았다. 즉시 조정은 체포령을 내렸고 관련자들을 압송하였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의 토굴에서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은 또다른 파장을 가져왔다. 이것은 기축옥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인은 정여립을 역모로 몰았던 반면에 동인은 그것을 반박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희생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기축옥사이다. 당시 서인 송익필은 송사련의 아들이었다. 송사련은 중종때 신사무옥의 주모자였다. 이전에 송사련은 안당을  밀고하여 안당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일약 천민의 신분에서 당상관으로 승차하였었다. 그런데 선조가 즉위하면서 안당의 손자인 안로의 처 윤씨부인이 안당의 처사가 부당하였음을 상소하였고 선조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송사련의 70여 일족은 재산의 몰수되고 다시 천민이 되었었다.  이때 이발을 비롯하여 동인들이 많은 기여를 하였었다. 이제 송사련의 아들인 서인 송익필은 동인들을 경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송익필과 정철을 주축으로 한 서인들은 이 기축옥사를 톻하여 호남의 많은 동인들을 희생시켰다.

서인 정철은 그후 좌의정이 되었다.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신성군의 모친인 의빈 김씨는 내심 신성군이 책봉이 되기를 바랬던 나머지 정철에 반발하였고 이에 부화뇌동하여 선조 또한 정철을 미워하게 되었다. 의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영의정인 동인 이산해는 마침내 서인 정철을 강계로 유배보내는 데 성공하면서 서인들을 보복하였다. 이것을 건저의 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동인들은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철을 죽여야한다는 북인과 살려두자는 남인으로 갈라졌는데 정철에 대하여 강경파였던 북인은 이산해와 정인홍 그리고 이발이었다. 다행히 정철이 유배를 가게되자 이발은 정철을 대신해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정철에 대하여 온건파였던 남인은 우성전과 유성룡 등이 있었다. 나중에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진다.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1583년 일본전토를 장악하였고 1585년에는 드디어 관백이 되었다. 관백이란 천황 바로 밑인 간바쿠로서 조선의 영의정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 간바쿠 밑에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있었는데 이 다이묘들 즉 지방의 영주들은 주어진 토지와 가신, 농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전 1336년 무로마치 막부시대가 열렸다. 세월이 흐르자 각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충성하고 있던 가신들이 하극상을 벌리고 다이묘들에게 대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혼란한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승전하였고 나중에는 큐슈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이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했던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되었다.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상문제로 겐소와 소 요시토시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따라 조선도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서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선통신사 일행들은 1590년 본국으로 돌아왔다. 조선통신사의 정사였던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곧 조선을 칠 것이므로 전쟁이 임박하였다고 말하였고 부사였던 동인 김성일은 이것을 부정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사체계는 제승방략이었다. 제승방략은 세종때 김종서가 함길도의 6진을 개척하면 사용했던 군사전략이었다. 진관법이 지역방어의 전략이라면 제승방략은 대인방어라고 볼 수 있다. 제승방략은 중앙의 순변사가 각 도의 병력을 특정한 곳에 집결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반면에 진관법은 각 도의 군사요충지인 진이 독자적인 병력과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유성룡은 선조에게 제승방략체계를 진관법체계로 바꿀것을 건의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은 총병력 28만을 16군으로 나누어서 제1군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를 필두로하고 제2군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필두로 하여 조선진출을 시작하였다. 또 제 16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마지막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출정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일본의 대의명분은 정명가도였다. 명나라를 치고자 하므로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에따라 왜구들은 일본상인들의 후원을 힘입어서 더더욱 명나라 해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임진년 4월14일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하였고 이어서 송상현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10일 후에는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을 상주에서 패퇴시키고 경상도를 장악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4월24일 충주의 탄금대에서 달천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치고있던 신립의 조선군대를 물리쳤다. 이때 신립과 부장 김여물은 자결하였다. 신립의 기병대는 이 날 비가 많이 왔으므로 땅이 질퍽해져서 파괴력있는 돌파를 하지 못하였다. 한편 제 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과 영천을 거처서 충주에 당도하였고 제 1군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합세해서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은 개전 20일만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이미 조선왕실과 조정은 피난을 떠나 평양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끌어모으는 한편 공명첩을 이욯하여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공명첩이란 곡식과 벼슬을 맞바꾸는 것이었는데 광해군은 이것을 합리적으로 매관매직에 이용하였다. 한편 한양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안도로 진격하였고 6월 13일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때 선조는 의주를 향하여 피난길을 떠나 있었다. 한편 일본군 제 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출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을 바탕으로 5월 사천해전, 6월 당포해전, 7월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병력보충과 물자 그리고 보급품 수송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청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었으나 금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곽재우와 김시민은 진주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금산성에서 전사하였고 김천일은 진주에서 전사하게 될 것이다. 정문부는 함경도 길주와 경성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었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과 그의 제자 유정은 1500여명의 승병을 끌어모아서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시민은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권율은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것으로 조선 최대 곡창지역인 전라도는 안전하게 보전되었다.

명나라의 신종, 즉 만력제는 조승훈과 병력 5천을 구원군으로서 조선에 파병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점령당한다면 명나라로서도 좋을 리가 없었다. 순망치한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릴 수밖에 없다. 만력제의 조선파병 결정은 명나라의 연장을 위한 자구책일 수도 있었다. 조승훈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서 이여송은 병력 4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드디어 탈환하였고 그러자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이때는 1593년 1월 이었다. 퇴각한 일본군은 경기도 벽제관에서 병력을 정비하면서 전력을 최상으로 끌어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일본군은 벽제관에서 이여송의 명나라군대를 상대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는 개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일본군은 성종의 묘인 선릉과 중종의 묘인 정릉을 파헤쳤는데 선릉에서는 시신이 없었다. 이어서 일본군은 함경도에서 후퇴하고 돌아온 가토 기요사마와 합세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 분전하여 승리하였다.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는 심유경을 보내어 화의를 추진하였다. 한양의 일본군 본진은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화의에 응하였고 4월에는 전군을 남하시켜서 서생포와 웅천, 즉 창원에 성을 쌓고 화의의 결과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병력 12만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진주성은 조선군 3천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9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함락되고 말았으나 일본군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이 전사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에서 가장 치열했던 제 2차 진주성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명나라와의 강화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훈련도감의 창설을 건의하였다. 훈련도감이란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들이 궁궐과 수도한양을 방위하는 관청이다. 병력은 10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포수와 사수, 살수로 나누어서 3개의 조직으로 만들었고 이것을 삼수병이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직업군인 예니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얀피부를 갖고 있었고 대부분 슬라브족 출신들이었다.

한편 이 난리로 인하여 기근과 전염병이 퍼졌고 식인도 행하여졌다. 이때 말 한필 값이 쌀 서너말이었다. 쌀에 대한 수요는 과잉이었고 쌀의 공급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쌀의 실물가치는 급상승하였다.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이었던 것이다. 물가의 안정을 되찿기 위해서는 안정된 토지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쌀의 생산을 늘려야 했다.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이몽학은 전주이씨이자 왕가의 서얼이었는데 전쟁과 흉년, 전염병으로 민심이 사나와지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선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이몽학의 반란군은 수천명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홍주성을 빼앗앗다. 이에따라 도원수 권율은 관군을 이끌고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김경창이 이몽학을 주살하는 일이 있게 되면서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경창은 이몽학의 부하였다. 선조는 김덕령과 곽재우를 이 역모에 관련이 있다고 하여 친국하였는데 김덕령은 매를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일이었다.

1597년 일본군은 남해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것이 정유년 1월14일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가토 기요사마가 선봉군인 제1군으로서 부산으로 침략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 2군으로서 웅천 즉 창원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하삼도를 점령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가토 기요사마가 부산을 재침략하였을때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나가싸우라는 명령을 밭았음에도 이것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조선조정이 일본의 계략에 말려들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순신은 명령불복종으로 파면되었고 대신에 원균이 새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7월4일 원균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는데 크게 당하였다. 조선수군은 패주하였고 거북선을 포함하여 판옥선 300여척중에서 170여척이 매몰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칠천량해전인데 이것으로 남해안의 제해권은 일본군으로 넘어갔다.

조선조정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인 7월22일 이순신을 새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군이 전라도까지 침입해 있었고 일본군은 방화와 약탈,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남원성에서는 소금에 절인 조선인의 코가 5만 이상이나 되었고 10만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중 대부분은 도공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쓰마주에게 명령하여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오도록 하였던 것인데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들 조선포로중에 일부는 포르투갈의 노예시장에 팔려나갔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였고 마침내 직산에서 조선 명나라 연합군과 조우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대패하였고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진도의 울돌목 명량에서 조선수군 13척을 가지고  일본수군 133척을 대파하였고 그러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1598년 9월 조선 명나라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과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왜성, 가토 기요사마의 울산왜성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때 조선 명나라 육군과 수군이 서로 협력하면서 공격하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일본군은 철병하기 시작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을 숨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향년 62세였다. 이순신과 명나라 도독 진린은 조명연합수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퇴로를 노량에서 차단하였다. 1598년 11월19일 새벽 4시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그날 낮 12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 함대 500여척 중에서 450여척을 파괴하였다.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지 못한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안타깝게도 이 순신은 이 노량해전 전투에서 일본함대를 추격하던 중에 적병의 총탄을 맞고 타계하였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세살 연하였는데 같은 하회마을 출신이었다. 이것으로 7년간 이어졌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한편 서양에서는 1571년 레판토 해전이 일어났다. 스페인과 베네치아, 제노바 등 신성동맹국은 갤리선 203척을 이끌고 오스만 투르크의 갤리선 함대 230척에 대항하여 그리스의 고린트만 레판토에서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전에 오스만 투르크의 알리 파샤는 지중해의 키프로스를 점령하였고 서진을 계속하여 이탈리아를 침략하려고 하고있었다. 이때 교황 비오 5세와 스페인왕 필립2세가 중심이 되어서 연합군을 형성하였고 오스만투르크의 서진을 성공적으로 막아서 이탈리아를 보호할 수 있었다. 레판토 해전은 10월 7일 아침에 교전하여 5시간만에 끝이 났다. 신성동맹군은 7500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12척의 갤리선을 상실한 반면에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는 2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갤리선 137척이 나포되었고 50척이 침몰되었다. 한편 이때 돈키호테를 지은 작가인 세르반테스도 신성동맹군으로서 참전하였는데 부상을 당하여 그후 평생 왼손을 쓸 수가 없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함대에 의해 궤멸당하였다. 스페인 왕 필립 2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왕권을 무너뜨리려고 영국침공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의 후원자이었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캐톨릭국인 스페인으로서는 영국의 지원을 차단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영국으로부터 보호하여야 했다. 또한 스페인 편이었던 교황 식스투스 5세도 스페인군이 영국에 상륙할 경우에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스페인을 지원하였다. 초반에 영국함대는 선제 기습공격을 하였으므로 프랑스와 네덜란드 경계에 정뱍해있던 스페인 함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무적함대는 6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영국함대의 전사자는 100여명이었다. 그러자 스페인은 본토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는데 퇴로인 영국해협이 영국함대에 의해 차단되었으므로 멀리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함대는 퇴각을 시작하였고 다행히 스코틀랜드를 무사히 지났지만 아일랜드 북부에서 큰 폭풍을 만나서 24척의 배가 난파되었고 150척중에서 50여척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때 2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로인하여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이용하여 영국을 침략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경복궁을 비롯한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들이 소실되었고 역대 실록을 보관해왔던 사고 중에 유일하게 전주사고 만이 남았다. 일본은 고추와 담배를 전래하였는데 조선은 종래의 동치미와는 맛과 모양이 다른 김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은 사서오경을 필사해 주었는데 이것은 조선주자학을 일본에 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권력승계를 놓고 전투가 벌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정략결혼을 시켰두고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파들에 대항해서 세끼가하라 전쟁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바쿠후가 되어서 에도시대를 열었다. 한편 고니시 유끼나가는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당하였고 시마즈 요시하라도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로 영지를 보장받았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교역을 중단하는 등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1602년 선조는 51세였다. 선조는 두 해 전에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후사없이 타계하였으므로 새 왕비를 맞이하였다. 새 왕비는 김제남의 딸이었는데 16세였다. 그녀는 계비 인목왕후 김씨로서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장자가 된다. 광해군은 차기 왕권과 관련하여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조는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경작지가 줄어들었므로 각 지방에 어사를 파견하여 양전을 실시하였고 납속책을 실시하여 재정을 확보하였다. 납속이란 곡식을 받고 벼슬을 주는 것으로서 납속수직이라고도 하였는데 양반이 쌀 백섬을 기부하면 동반 정3품에 승차할 수 있었고 서얼이 쌀 100섬을 기부하면 동반 6품에 승차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납속책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었다. 또 선조는 시전, 염분, 어전을 왕자와 옹주들에게 경제적 편의를 위하여 나누어줬는데 이것은 궁방전의 기초가 되었다.

선조는 1604년 유정을 일본에 보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협정을 맺게 하였고 왜관에 시장을 상설해서 통상하기로 하였다. 한편 유정은 일본에 끌려간 조선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57세였다. 선조는 중종과 후궁 창빈안씨와이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원군이었다.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 박씨는 전란중에 후사없이 타계하였고 후궁인 공빈김씨와의 사이에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두었고 또다른 후궁인 인빈김씨와의사이에는 신성군과 정원군 등을 두었다. 나중에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은 인조가 된다. 또 선조는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적자인 영창대군을 두었다.

광해군은 왕세자이긴 하였지만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남으로 해서 저으기 불안하였다. 광해군 자신은 후궁의 소생이었으므로 세자위가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책봉을 구하고 확인을 받아오는, 즉 고명책봉하는 처지였으므로 광해군은 왕위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정당한 승계위치에 있어야 했다.

1608년 2월2일 광해군이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사이의 둘째아들이었고 전란중이었던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형이었다. 광해군은 왕비 유씨와의 사이에 원자를 두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강홍립 등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파를 중용하였다. 한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소북파는 유영경을 중심으로 적통론을 내세우면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었다.

임해군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한다는 설이 있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자신의 형인 임해군을 전라도 진도에 부처하였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고명책봉에 시비를 걸면서 엄일괴와 민애민 등 차관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엄일괴는 왕권의 적통자로서 임해군을 염두해 두고 있었으므로 전라도 진도에서 강화도 교동으로 부처되어 있던 임해군과 몸소 면담하였다. 재미있게도 임해군은 그자리에서 의자를 들어서 엄일괴를 향하여 던져버렸다. 광해군으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고 위기를 모면한 순간이었다. 한편 광해군의 애첩이자 상궁이었던 김개시는 은 오천량과 인삼 50근을 엄일괴에게 뇌물로 주었다. 임해군은 그 다음해인 1609년 음독하여 타계하였다.

광해군 1년인 1609년 조선조정은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고 통상을 재개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1년에 세사미두 100석을 대마도에 하사하였고 대마도는 세견선 20척에 한하여 조선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대마도주는 부산포에 한하여 교역할 수 있었다. 광해군 2년에는 허준이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나중에 동의보감은 18세기 일본과 청나라에서 번역출판된다. 한편 광해군은 전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기 시작하였는데 백성들의 원성이 적지 않았다.

1611년 광해군은 왕세자의 세자빈으로서 박자흥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자는 그때나이 14살 이었다. 한편 박자흥은 대사헌 박승종의 아들이면서 대북파인 이이첨의 사위였다.

1612년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성균관 학유였던 김직재와 아들 김백함 부자가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들은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을 옹립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순화군은 선조의 서자였다. 그런데 이 역모사건은 김직재가 고문도중에 매를 이기지 못하여 잘못 발설한 것으로서 사실은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위하여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 무고사건으로 인하여 김직재는 참형을 당하였고 진릉군은 위리안치되었다. 그리고 소북파 100명도 처벌받았다.

광해군때 강변칠우는 북한강변에서 술과 시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던 일곱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고관대작의 아들들이었는데 모두 서얼 출신이었으므로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영의정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와 사양갑, 김평손 등이었는데 그들은 세상을 비웃으면서 자신들을 중국의 죽림칠현에 비유해서 강변칠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돈이 떨어지자 유흥비 마련을 위하여 새재에서 은상인을 살해하고 은 수백냥을 약탈했는데 다음해에 포도청에 잡혀왔다. 그들은 포도청에서 진술하기를 김제남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짓진술하였다. 김제남은 영창대군의 외조부였다. 이것을 기화로 대북파들은 소북파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밀어내려고 결심하였다. 광해군은 김제남을 사사하였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 유배보내버렸다.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김씨는 서궁, 즉 경운궁에 유폐되었다.또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은 사사되었다. 그리고 정온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되었다. 한편 강화도에 유배를 가 있던 영창대군은 강화부사 강항에 의하여 증살되었다. 향년 9세였다. 증살이란 아궁이에 불을 높인 후 쪄서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1613년에 있었던 계축옥사이다.

광해군 초기에 세도를 누렸던 인물들은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였던 이이첨과 세자빈 박씨의 조부였던 박승종 그리고 광해군의 왕비인 중전유씨의 부친이었던 유희분 등 이었다.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일어났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아들이었는데 정원군의 부친은 선조였다. 신경희는 서인이었는데 능창군을 옹립하면서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이 되었고 주동자 신경희는 참수되었고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목매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정원군은 아들이 죽은 이 사건 때문에 화병으로 탸계하였다. 나중에 정원군의 첫째아들인 능양군은 반정에 성공하여 인조가 될 것이다.

1616년 광해군 8년에 이이첨은 해주사람 박이빈을 사주하여 소북파인 박승종과 유희빈 등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상소하도록하였다. 해주목사 최기는 박이빈을 문초하는과정에서 이 역모가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으나 발설하지는 않았다. 재미있게도 이이첨은 해주목사 최기를 역모의 괴수로서 몰아붙여서 마침내 그를 때려죽여버렸다. 이 사건으로 소북파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616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을 통일하여 후금을 건국하였다. 누르하치는 대패륵과 소패륵의 합의체에서 칸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후금의 팔기제도는 맹안모극제에서 유래한 것인데 팔기를 구성하는 각기의 수장은 대패륵이 되었고 이들의 합의하에 칸을 추대하였다. 평화시에는 팔기가 사법과 행정 그리고 토지를 관할하는 기준이 되었다.

인목대비 김씨의 모친인 노씨부인은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 김씨가 하루빨리 복위되기를 바라면서 불당에서 발원하였다. 내수사에서는 노씨부인의 생계를 위하여 양곡을 비밀리에 지급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노씨부인을 제주도로 유배보내버렸다. 제주도에 도착한 노씨부인은 생계를 위하여 주점을 열었는데 끼니 때에는 탁주를 걸러낸 찌거기인 모주를  밥 대신 먹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술에 쩔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주모라고 불렀다. 어원상 노씨부인은 조선 최초의 주모였다.

명황제 신종, 즉 만력제는 후금의 누륵하치가 강성해가자 위기감을 느꼈고 신하들에게 조선을 고무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명나라에 협조할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치도록 하였다. 1618년 도원수 강홍립은 조선병 13,000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밀지를 전달하였는데 현지에서 명과 여진의 형세를 보아서 향배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1618년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인 페르디난드 2 세는 전 해에 페르디난드 1세를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는 열렬한 캐돌릭교도었으므로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교도들 즉 루터교파들은 1555년에 있었던 아욱스부르크조약으로 인하여 캐돌릭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종교적 자유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제 그 수가  더 늘어나서 칼뱅파와 재세례파도 등장하면서 캐돌릭을 위협하고 있었다. 한편 황제 페르디난드 2세는 국정에 관여하게 될 대표 3명을 보헤미아에 보냈다. 그런데 보헤미아인들은 그 대표들을 불신하였고 약식재판을 한 후에 그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이것이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다. 이 보헤미아인들의 반란을 기화로 하여 캐돌릭교도와 개신교도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나중에는 덴마크가 개신교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였다. 뒤를 이어서 스웨덴이 개신교편에 서서 전쟁에 등장하였지만 캐돌릭 황제인 페르디난드 2세는 독일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의 지원을 통하여 그들을 무찔렀다. 한편 프랑스는 캐돌릭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캐돌릭과 개신교와의 전쟁에서 개신교를 편들기 위하여 전쟁에 참가하였다. 프랑스의 실권자인 리슐리외와 후임자인 마자랭은 개신교편에 서서 캐돌릭국가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하여 전쟁에 참가하였고 마침내 승리하여 베스트팔렌조약을 맺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은 인구의 4분의 1을 상실하였고 유럽의 지배력은 독일의 합스부르크가에서 프랑스의 부르봉가로 넘어갔다. 또한 개신교국인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을 끝내어 독립을 이루어냈고 스위스도 독립국가가 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도 개신교국을 지원했었고 캐돌릭국인 폴란드와 전쟁을 해서 승리하였었다.

1619년 명나라의 10만 군대는 조선군 1만2천의 군대와 더불어 후금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젼투는 3월 1일의 사르후 전투부터 시작하였다. 강홍립은 명나라 동로군의 장군인 유정과 함께 부차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후금 군대를 상대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강홍립은 남은 군사 5,000을 이끌고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한편 명나라는 이 전투의 패배로 만주를 후금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누르하치는 요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1620년 명나라 만력제, 즉 신종이 타계하였다. 그러자 그의 20세의 아들인 광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광종은 즉위 29일만에 타게하고 말았다. 그는 알악 2개를 먹었는데 급사하고 말았다. 새 황제로서 그의 아들인 천계제, 즉 희종이 즉위하였다. 희종은 문맹이었으므로 국정을 환관에게 넘겨주었고 자신은 취미인 목공일을 하였다. 그로부터 7년후, 희종의 동생이 황제에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즉 의종이다.

광해군은 인목대비 김씨를 유폐했었는데 이번에는 삭호까지 하였다. 삭호란 관작을 삭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목대비 김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광해군의 애첩인 김상궁은 매관매직을 통하여 재물을 확보하였는데 그녀는 장사꾼에게 돈을 빌려서 전결의 세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인 이이첨과 애첩 김상궁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반대파들을 혹독하게 탄압하였으므로 조정은 신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편 강홍립이 오랑케 후금에 투항하자 광해군은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광해군은 조정중신들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삭탈관직하였으나 그의 가족들을 구금하지는 못하게 하였다.

신경진은 임진왜란때의 도원수인 신립의 아들이었는데 한때 부친의 공으로 무관의 일종인 선전관이 되었었다. 그런데 신경진은 광해군과 대북파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귀와 역모모의를 하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그때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왕조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