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5일 일요일

10. 고종-순종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은 당시 12살이었으므로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부인 민씨사이에는 이재면, 이재선, 이재황 삼형제가 있었다. 철종이 승하하자 신정왕후 조대비는 즉각 어보을 점유하였고 흥선군과 사전에 조율하였던데로 흥선군의 셋째아들 재황을 옹위하여 등극시켰다. 한편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었다. 남연군의 부친은 은신군이었다. 은신군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들였었다. 은신군은 은언군의 동생으로서 모두 사도세자와 숙빈임씨사이의 소생이었다. 사도세자는 잘알다시피 영조의 소생이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대왕대비가 되어서 고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였으나 곧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였다. 흥선군은 당시 44세였다. 고종은 직계비속으로서가 아니라 종친으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현왕인 고종의 부친은 대원군이 된다. 일례로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의 부친인 전계군은 전계대원군이 되었었다. 어쨌든 당시 영의정은 김좌근이었고 좌의정은 68세의 조두순이었다. 이제 조정은 서인 노론계열의 장김세력이 하락하고 남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갑산부사 이석을 시켜서 동점에서 화폐 30만냥을 몰래 주조하도록 하였다. 동점이란 구리광산을 말한다. 이어서 흥선대원군은 김홍근의 삼계동 별장을 사취하였다. 당시 광통교의 지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종각 근처의 80여호를 불태웠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서원은 사설교육기관으로서 인재양성과 명현의 제사를 담당하였다.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그 최초였고 명종 때 소수서원은 왕으로부터 토지, 노비, 책을 하사받았고 면세, 면역이 되었으므로 점차 사원은 토색질을 일삼고 무법천지가 되어갔다. 당시 악명이 높았던 서원으로는 청주의 화양동 서원과 만동묘가 있었다. 화양동서원은 화양묵폐를 발행하여 세금을 거두었고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에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명나라는 멸망하였지만 조선은 명나라를 잇는 소중화를 자처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서원은 650개가 난립하고 있었는데 서원이 많다는 것은 군약신강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원군은 서원 45개를 제외하고 모두 폐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와 참언을 믿었는데 때마침 나라연장을 위해서는 경복궁을 중건하라는 참언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다. 대원군은 경복궁 건설에 착수하였고 먼저 재원조달을 위하여 장김 세력가들로부터 30만냥의 원납전을 거두었고 점차적으로 강제징수하였다. 또 노동력을 위하여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는데 부역민들에게 하루 1전씩을 지급하였다. 또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담시키고 각 호당 2냥의 균일세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당시 원납전 500냥이면 벼슬을 살 수 있었고 당백전이 사용되고 있었다. 당백전이란 화폐의 명목가치를 100배 인상한 화폐였다. 한편 대원군은 삼정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환곡을 사창제로 바꾸었다.

1866년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령을 포고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프랑스신부 12명이 들어와 포교하고 있었는데 날로 번창하여 신도 수가 23,000명에 이르렀다. 조선 지배층은 천국과 지옥의 가설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는 천주교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반발하고 있었다. 1월 21일 대원군은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도 색출에 나섰다.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는 천주교도였다. 한때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천주교의 포교을 인정해주는 대신 프랑스, 영국과 동맹하여 러사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1866년 2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의 왕비로서 민치록의 딸을 간택하였다. 고종은 15세였고 왕비 민씨는 16세였다. 왕비 명성왕후민씨는 9세 때 고아가 되었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59세였고 왕대비, 즉 쳘종비 철인왕후 김씨는 30세였다. 한편 청나라는 동치제가 즉위하였으나 공친왕이 섭정을 하고 있었다.

오가작통법이 실시되자 수 개월만에 조선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 리델은 살아남아서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리델 신부는 텐진주재 프랑스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이 처형 사실을 알렸다. 이 병인박해는 후일 병인양요의 불씨가 된다.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대동강변에 정박하였다. 제너널 셔먼호는 615톤이었고 선주는 미국인 프레스턴이었고 선장은 덴마크인 페이지였다.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와 통역인으로 중국인 이팔행과 선원 23명을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통상요구가 거부되자 난동을 부리고 조선군 이현익을 납치하여 감금하였다. 그러나 박춘권이 제너럴 샤먼호에 잠입하여 이현익을 구출하였다. 그런데 당시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수위가 높아졌고 배의 선체는 양각도에 걸렸다. 제너럴 셔면호 선원들은 불안하여 포격, 강도, 강탈하였는데 이 와중에 평양사람 7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포격을 명령하였다. 조선군은 대동강가에 식용유를 풀어서 제너럴 샤면호를 불태웠다. 제너럴 샤면호 선원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제너럴 샤먼호는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USS Princess Royal호 였다는 일설이 있으나 이것은 미 해군의 기록과는 다르다. 어쨌든 이 제너럴 샤먼호 격침사건은 5년 후 신미양요의 불씨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로즈제독은 군함 3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3명을 대동하고 인천 앞바다에 당도하였다. 로즈제독은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죽음에 대한 댓가로 조선인 9,000명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이제 한양의 도성 안은 혼란에 빠졌으므로 어영대장 이용희를 현장에 파견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로즈제독은 3척의 군함으로는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지형만을 관찰하고 일단 돌아갔다.

로즈제독은 한 달도 채 안돼서 군함 7척과 요코하마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병대를 포함하여 1,230 여 명을 대동하고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에 접근하였다. 곧 프랑스 함대는 강화성을 허물고 외규장각의 서적들을 약탈해갔다. 이어서 프랑스 해병은 조선군과 정족산성에서 조우하였고 프랑스군은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하여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로즈제독은 철군을 결심하였고 중국으로 철군하였다. 로즈제독은 강화성을 떠나면서 관아에 불을 질렀고 금괴 19상자와 보물, 서적, 무기 등을 약탈해갔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어쨌든 대원권은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므로 쇄국의지에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고수하게된다.

1868년 4월 고종과 후궁 귀인 이씨 사이에 완화군이 태어났다. 고종은 명성왕후 민씨와의 관계이전에 첫 왕자를 얻은 것이다.

1868년 7월 2일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착공한지 3년 4개월 만이었다. 총 774만 냥이 들어갔고 쌀 915석 그리고 연인원 수 십 만명이 동원되었다.

1868년 유대계 독일상인 오페르트와 프랑스신부 페롱은 충청도 아산만으로 잠입하여 덕산의 남원군의 묘를 파헤쳤다. 남원군은 흥선대원군의 부친이다. 오페르트는 2년 전에도 조선에 들어와서 통상요구를 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그 다음에 또 들어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그때는 병인양요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이번에 오페르트는 남연군의 시체를 가지고 통상협상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연군의 묘는 봉분만 훼손이 되었다. 왜냐하면 대원군은 30년 전에 부모상을 잇달아 당한 후에 부친 남연군의 묘를 충청도 덕산으로 이장하였다. 대원군은 풍수가의 말에 따라서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묘를 파고 철 수 만근을 녹여부었었다. 따라서 오페르트는 봉분의 윗부분만을 훼손한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 미국인 젠킨스도 오페르트와 합세하여 680톤 차아나호와 60톤 크레타호를 이끌고 서양인 8명과 중국인 100명과 말레이지아인을 대동하고 아산만에 들어왔었다. 이 남연군 묘 도굴사건이 본국인 독일과 미국에 알려지자 오페르트는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젠킨스는 기소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오랑케가 침입해도 싸우지 않는 것은 화이하는 것이고 화이는 곧 나라를 파는 것' 이라고 말하였다. 대원군의 쇄국의지가 더욱 강해진 것이었다.

1871년 청나라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미국특명전권공사가 되어서 제너럴 샤먼호 침몰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청하였다. 미 아시아 함대 로저스 제독은 전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미 전함 5척 중에 USS Colorado 프릿깃함은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바가 있었다. 미 해병대는 강화도에 상륙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유린하였다. 조선군은 완패하였다. 조선군은 243명이 전사하였고 부상자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반면에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하였다. 로우 공사는 통상교섭을 실시하였으나 조선의 강경한 척화론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군은 40일 만에 중국 산둥성으로 철군하였다.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 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그런데 원자는 항문이 없었다. 민씨부인은 구멍을 내서 통변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시아버지인 대원군은 탕제를 써야한다면서 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원자는 탕제를 먹고 5일만에 타계하였다. 이 일로 대원군과 명성왕후 민씨사이는 멀어져갔다.

이 당시 정감록이 유행했다. 정감록은 이씨왕조가 무너지고 정씨왕조가 들어선다는 속설이었다. 한편 대원군은 풍속개량을 실시하여 사대부 갓 테를 줄이고 도포의 소매도 줄이고 장죽길이도 반으로 줄였다. 그리고 기생 옷을 개량하였고 기생이 가마 타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 화대는 120냥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것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은 불만이었다.

1873년 고종10년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사이에 공주가 태어났다. 공주는 8개월 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명성왕후 민씨는 신정왕후 대왕대비 조씨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와 손잡고 서원철폐로 소외되었던 최익현을 등용하였다. 그러자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버렸다. 최익현에 따르면 왕은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곧 최익현은 파직되었다. 그런데 명성왕후 민씨는 최익현을 복귀시키고 이어서 그를 호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최익현은 다시 대원군의 부당성을 상소하였다.

1873년 11월 고종은 대원군이 궁궐로 출입하는 전용문을 폐쇄하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고종은 22세였다. 그 후 대원군과 명성왕후 민씨 및 민씨일족들은 수시로 갈등을 맺었다. 이 해에 원납전이 혁파되었고 성리학의 전당인 청주의 만동묘도 복구되었다. 또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을 금지시켰다. 12월에는 경복궁에 화재가 있었다. 명성왕후 민씨가 거처하는 자경전의 부속건물인 순회당에 폭약이 발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364간이 전소되었다.

1874년 2월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는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왕세자가 후일 순종황제이다.

1874년 12월 민씨 일족의 수장이자 명성왕후 민씨의 양오라비인 민승호는 어떤 승려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민승호가 그 선물상자를 여는 순간 폭발하였고 민승호와 그의 아들 및 그의 양어머니가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이 연루되었다는 설이 있었다.

1875년 9월 일본 군함인 245톤의 운요호는 강화도 근처의 난지도에 정박하였다. 일본선원은 보트에 분승하여 연안을 탐지하다가 조선군과 조우하였다. 이어서 조선군과 일본군사이에 전투가 벌여졌고 조선군이 완패하였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이 발생하였으나 일본군은 단지 경상 2명 뿐이었다. 일본은 이 전투의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면서 배상과 통상, 개항을 요구하였다.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간에 운요호사건과 관련하여 회담이 열렸다. 조선측 대표 신헌과 윤자승은 일본측 대표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와 부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회담하였다. 회담은 모두 세번 열렸다. 이때 일본측은 조선인 통역을 비롯하여 840명의 수행원을 대동하였다. 조선측은 흥선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장과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의사 그리고 중국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서 개국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이 강화도 조약은 12개조로 되어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하였다. 조선은 3개의 항구를 일본에 개항해 주었다.

1876년 7월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후속조치로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곧 조선은 김기수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은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대리공사로 한성에 파견하였다.

1880년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사이의 소생인 완화군이 천연두로 타계하였다. 향년 13세였다. 영보당 귀인 이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실어증이 걸렸다.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갔던 지석영이 두묘 50병을 얻어와서 종두법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종두란 천연두 예방백신을 말한다 종두법에는 인두법과 우두법이 있다. 인두법은 면역백신을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고름으로부터 얻어서 접종하는 것인 반면에 지석영이 배우고 돌아왔던 우두법은 천연두에 걸린 소의 고름으로부터 면역백신을 추출해서 사람에게 접종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인두법이 보편적 예방법이었으나 1796년 영국인 제너가 우두법을 발견한 뒤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880년 12월 20일 고종은 내정계혁에 착수하였다. 고종은 의정부와 6조를 폐지하는 대신에 통리기무아문과 12사를 두었다. 12사의 우두머리는 총리가 되었다. 다음해에 고종은 별기군을 조직하여 양반자제를 사관생도로서 선발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5위영은 양영으로 개편하여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나누었다.

1881년 조선 조정은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명성왕후 민씨측의 개화파로 나뉘어 있었다. 안기영과 권정호는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경기도 향시에 모인 유생들을 이용하여 고종과 명성왕후에 대하여 역모를 하여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였다. 이재선은 흥선대원군의 양아들이므로 고종의 이복형이다. 이 역모는 실패하였고 안기영과 권정호는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재선도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것이 이재선 추대사건이다. 위리안치란 유배지 처소에 죄인을 가두고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처소 둘레를 치는 것이다.

1882년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는 왕세자의 왕세자빈으로서 민태호의 딸을 맞이하였다. 왕세자는 9세였고 왕세자빈 민씨는 13살이었다.

1882년 조선전권대신 신헌, 김홍집과 미국 전권대신 슈펠트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은 청국의 사신인 마건충과 정여창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은 전권대사로서 민영익과 부관 홍영식, 서광범을 미국으로 파견하였고 초대 미국전권공사 푸트(Foote)가 한성에 들어왔다. 이어서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선은 영국과 독일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82년 구식군대의 군인들은 급료가 13개월간 미불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또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별기군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명성왕후 민씨와 그녀의 친족인 민겸호에 투사하였으므로 이제 난리가 임박하였다. 민겸호는 그당시 군인들의 급료를 관리하던 선혜청 당상이자 병조판서였다. 선혜청 도봉소에서는 전라도에서 조세미가 도착하자 우선 구식군대군인들에게 1개월 급료를 지불하였다. 그런데 군료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있었고 그 양도 절반밖에 안되었다. 그리하여 구식군대 군인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은 난동을 부렸고 순식간에 도봉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자 이들은 곧 포도청으로 잡혀갔고 사형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전파되었으므로 군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수감된 유복만의 동생인 유춘만과 김장손 등은 군인들을 끌어모으고 병조판서 민겸호의 집 앞에 몰려들어갔고 드디어 집안에 난입하여 가재도구를 파괴하면서 폭동에 들어갔다. 이어서 그들은 운현궁에 거처하는 대원군을 찾아가서 사태를 의논하였다. 또한 군인들은 동별영의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한 후에 포도청에 난입하였고 문제가 되었던 유복만, 김춘영 등을 구출하였다. 이어서 군인들은 의금부를 습격하여 척사론자인 백낙관 등 죄수를 석방하였고 민태호 등 개화파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이날 저녁 구식군대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였고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비롯하여 공관원들은 인천으로 피신하였다. 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불태웠고 별기군 병영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등 총 13명의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다음날인 1882년 7월 24일 폭동군인들은 대원군의 밀지에 따라서 이최응과 민창식을 살해하였다. 이최응은 대원군 이하응의 형이었다. 군인들은 창덕궁 돈화문에 진입하여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의 인솔하에 명성왕후 민씨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성왕후 민씨를 찾는 데 실패하였지만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살해하였다. 한편 명성왕후 민씨는 궁녀로 위장한 후에 무예별감 홍계훈과 함께 충주로 피신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 난리로 인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을 무위영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대원군은 자신의 심복인 허욱이 이끄는 200명의 군인들의 호위 속에 대궐로 입궁하였다. 대원군은 교지를 반포하고 사실상 조정을 장악하였다. 대원군은 별기군과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5군영을 복구하였다. 대원군은 남인계열을 등용하고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이어서 주전을 금지시키고 도고와 수세를 정비하였다. 대원군은 실종된 명성왕후를 타계한 것으로 추정하여 국장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영선사로 청나라에 가있던 김윤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의 마건충은 4,500명의 육군을 이끌고 한성에 당도하였다. 이틀 뒤에는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일본군 대대병력을 이끌고 한성에 입성하였다.그리고 청국의 해군제독 오장경은 김윤식과 정여창을 대동하고 남양만으로 들어왔다. 1882년 8월 25일 청국의 해군제독 오장경은 임오군란의 배후자로서 대원군을 지목하였으므로 대원군을 납치하여 텐진으로 이송하여 감금해버렸다. 대원군은 당시 63세였다.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제 명성왕후 민씨 조정이 부활하였다. 청군은 도성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인 350여 명을 살해하였다. 청국은 좌영 우영을 설치하여 청교관을 두고 한성에 청군 3,000명을 상주시켰다. 한편 일본국은 전영 후영을 설치하여 일교관을 두었다.

대원군이 청나라 텐진에 이송되고 임오군란이 마무리되자 명성왕후 민씨가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청국은 독일인 뮐렌도르프를 재정고문으로서 조선에 파견하였다. 뮐렌도르프는 당시 텐진 주재 독일 부영사였다. 한편 청국서 돌아온 김윤식과 조영하는 하수도정비를 위하여 치도국을 설치하고 치안을 위하여 순경국을 설치하였으나 온건개혁을 펼치고 있던 명성왕후 민씨 일파에 의하여 저지되고 말았다.

8월 30일 조선과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인한 일본인 재산과 인명피해와 관련하여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측 대표 김홍집은 일본측 대표 하나부사 공사에게 배상금 50만엔과 조선조정의 공식사과, 피해자 위로금 지불,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주둔, 사과사절단 파견 등을 약조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대일 배상금과 관련하여 일본외채를 받아 쓰기로 하는 밀약도 맺었다.

조선은 임오군란의 사과사절단으로서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민영익, 김옥균 등 15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들이 100일간 체류하는 동안 극진히 대접하였고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조선사절단 일행은 일본정부의 배려로 부산 세관의 수입과 사천의 사금광산을 담보로 하여 17만엔을 차입할 수 있었다.

조선 조정은 임오군랸을 계기로 친청파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 친청파 보수세력에는 명성왕후 민씨와 척족인 민영익, 민승호와 김홍집, 김만집, 어윤중 등이 있었다. 이 친청파 보수세력은 사대당이라고도 불리웠다. 반면에 이들에 대항하였던 개화당에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윤웅렬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매료된 자들이었다.

당시 재정고문으로서 중국에서 들어왔던 뮐렌도르프는 당오전을 발행하였다. 당오전은 화폐의 명목가치가 5배 증가된 화폐였다. 개화당의 김옥균은 근대산업을 진흥하고 재정난을 타계하기위하여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을 들여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당시 사대당의 일원으로서 중국에서 들어왔던 재정고문 윌렌도르프의 제안에 따라서 당오전과 당십전이 발행되었다. 당오전은 화폐의 명목가치가 5배 부풀려진 화폐였으므로 화폐가 정치자금으로 유용될 수 있었고 인플레이션의 위험도 따랐다.

1883년 10월 1일 한성순보가 창간하였다.

1884년 청국과 프랑스는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하였다. 결과는 청국의 완패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모의하여 조정의 실권자인 친청파 명성왕후 민씨에 대하여 역모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는 개국축하 만찬회가 열리고 있었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당 일당은 사대당 일당을 해치기로 되어있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옥균과 박영효는 창덕궁으로 달려가서 고종에게 청국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보고하고 고종을 경운궁으로 옮기고 사대당 민태호, 민영목, 한규직, 조영하 등을 살해하였다.

다음날 1884년 12월 5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한성주재 각국 공사와 영사에게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통고하고 새 내각을 발표하였다. 고종의 둘째 형인 이재원이 영의정이 되었고 우의정에 홍영식, 호조참판 김옥균, 한성판윤 겸 전후양영사에 서광범, 병조참판 겸 정령관에 서재필을 임명하였다. 새 내각은 14개 조의 신 강령을 작성하여 고종으로부터 윤허를 받았고 반포를 앞두고 있었다. 그 내용 중에는 단발령, 봉건신분제도 폐지. 국채모집 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친청파 명성왕후 일파는 청국 총독 위안 스카이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곧 청국 군사 1,500명이 당도하였으나 개화당의 군사는 150명에 불과하였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동원하기로 했던 일본군도 퇴각해버렸다. 그러자 김옥균과 짝하고 있던 고종은 명성왕후 민씨가 있는 북관종묘로 가버렸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역모의 주역들은 일본공사관에 숨어있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선박 천세환의 선장은 김옥균 등을 식당 마룻바닥에 숨겨줬다. 한편 김옥균의 부인과 딸은 음독자결하였다. 서재필의 부친도 음독자결하였다. 박영효의 부친은 옥사하였다.

이제 고종은 위안 스카이와 결탁하여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영의정 심순택, 좌의정 김홍집, 이조판서 이재원 등 이었다. 고종은 정변의 불씨였던 우정국을 폐지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을 5적으로 규정하여 비난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갑신정변으로 인한 일본군 희생자 40명을 위로하는 한편 일본과 한성조약을 맺었고 뮐렌도르프와 서상우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사죄하였다.

1885년 청나라 텐진에서 청국 대표 이홍장과 일본국 대표 이토 히로부미는 갑신정변의 마무리를 위하여 텐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청국과 일본국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기로 하였고 유사시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고지하도록 하였다.

그해 1885년 영국함대가 제주도와 여수사이에 있는 거문도(포트 해밀턴)을 점령하였다. 5월에 조선은 러시아와 조러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첫 공사로 웨베르가 한성에 부임하였다. 7월 말에는 청국에서 파견된 재정고문인 뮐렌도르프가 파직되었고 위안스카이의 위세가 높아졌다. 이어서 8월에는 중국으로 납치되었던 대원군이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위안스카이의 주선으로 자신의 큰아들인 이재면과 함께 납치 3년만에 입국하였던 것이다.

1884년 이후 1894년까지는 태평 10년 이다. 1885년 미선교사에 의하여 배재학당이 설립되었고 다음해 1886년에는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 그해 조선은 프랑스와 조불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887년 대원군은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 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므로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이준용을 옹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준용 옹립은 실패하였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첫째아들인 이재면의 장남이었다. 이재면이 유순한 반면에 이준용은 괄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손자인 이준용을 총애하였으므로 그후 몇차례 더 그를 옹립하려고 계획한다.

1892년 운현궁에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다. 운현궁은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 그리고 손자 이준용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황현은 이 사건의 배후로서 명성왕후 민씨를 지적하면서 그녀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려했다고 주장하였다.

1894년 1월 20일 전라도 고부군에 사는 동학의 접주 전봉준은 200여 명의 포를 이끌고 전라도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포란 동학신도의 무리를 말하고 접주란 포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그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40세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전봉준의 부친을 불경죄로 장살한 바가 있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자 전봉준의 부친은 부의금 2천냥을 걷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부친은 조병갑의 명령을 거부했었다. 한편 조병갑은 보를 만들어 징세하였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징세하기도 하였다. 불효죄와 음행죄를 명목으로 징세하였고 부친의 비각을 위하여 징세하기도 하였다. 또 조세로서 정백미를 받고 하등미를 서울로 올려보내어 차익을 얻기도 했다. 전봉준과 포는 고부관아의 곡식창고를 부수고 양곡을 꺼내어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정에서는 안핵사 이용태를 내려보냈고 농민군과 화약하였다. 이것이 동학 농민군의 1차 봉기이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이 봉기 가담자들을 역모죄로 몰아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영 등은 농민군 10,000여명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이다. 농민군은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을 물리치자 전주성을 향하였다. 이때 조선조정은 황급히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1894년 6월 8일 청군은 내란진압을 목적으로 아산만에 당도하였다. 그러자 일본 또한 텐진 조약에 따라서 자국민 보호를 목적으로 출병하기로 결정하였고 곧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6월 11일 농민군은 관군과 화약하였다. 이것이 전주화약이다. 전봉준은 12개조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 중에는 불량양반을 벌주고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등을 요구하였다. 한편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교도들은 남원 부사 이용헌을 살해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개혁적인 농민자치기구였다. 대원군은 2차 봉기의 주역인 김개남과 관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조선 조정의 영의정 심순택과 신응조, 김홍집 등은 일본이 요구한 5개조의 내정개혁안을 실행하기 위하여 교정청을 설치하여 내정개혁에 착수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4대문과 경복궁을 점거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명성왕후 민씨내각을 쫒아내고 친일내각을 구성하였다. 일본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섭정을 하게하였고 영의정 김홍집과 박정양, 민영달 등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힘을 합쳐서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갑오개혁의 주요내용으로는 과거제 폐지, 선거조례 제정, 은본위제, 지세의 금납화, 연좌제 폐지, 조혼금지, 공사노비혁파. 과부재혼 허가 등이었다. 이것이 제 1차 갑오개혁이다. 한편 조선은 청국과의 모든 조약을 파기한다는 통고와 함께 청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한편 일본은 아산만에 파견되어있던 청국의 북양함대를 몰아내기위하여 더 많은 군사를 조선에 파병하였다.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근해에서 일본 순양함 나니와호 선장 토고 헤이하치로는 청국의 2,134톤 가오슝호를 침몰시켰다. 이것이 풍도해전이다. 그리고 8월 1일 청국과 일본간에 공식적인 전쟁이 선포되었다. 이것이 청일 전쟁의 시작이었다.

9월 16일 일본군은 15,000명의 청국군사가 사수하고 있던 평양을 탈환하였다. 청국군 사망자는 2,000명, 부상자 4,000명이었던데 반하여 일본군 사상자는 600명 이었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1894년 9월 17일 일본함대와 청국의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에서 조우하였다. 청국 군함 5척이 침몰하였고 4척이 파손되었으며 사망자는 850명이었다. 일본국은 군함 3척이 파손되었고 사망자는 90명 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청국의 북양함대는 뤼순으로 피신하였다. 이것이 황해해전이다.

1894년 10월 24일 일본군은 단동과 요동반도 남부를 점령하였고 청국의 북양함대가 있는 뤼순항을 포위하였다.

이달 동학군은 남접의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가 연합하여 연함군을 이끌고 우금치에서 조선 관군과 일본군 20,000명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과 조우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완패하고 말았다. 1만여 동학군 중 살아남은 자는 5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으로 동학농민운동은 종결되었다.

1894년 11월 21일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하고 6만여 명의 청국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뤼순대학살이다.

조선 조정의 김홍집과 박영효 연립내각은 일본식 내각과 7부를 도입하고 의정부와 8아문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8도에서 23부로 개정하고 사법권을 독립시키고 치안과 행정을 분리시켰다. 또 외국어학교 관제를 공포하고 신교육을 실시하였고 경찰권을 일원화하였다. 또 군대를 개편하여 신설대, 시위대, 훈련대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3도통제군과 각 도의 병영, 수영을 폐지하였다. 이것이 제 2차 갑오개혁이다. 이것은 제 2차 김홍집내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894년 12월 2일 전라도 순창에 피신해있던 전봉준은 자신의 부하였던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로 인하여 체포되어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곧 전봉준은 일본영사관에 수감되었다. 한신현은 현상금 1천냥을 받았고 나중에 금천군수가 되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75세의 수구파 대원군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가는 가운데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은 1895년 1월 7일 고종에게 홍범 14조를 반포해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내용은 자주독립, 왕위세습제, 조세법률주의, 국민의 재산과 생명 보호, 관제개혁, 인재양성 등이었다. 이 홍범 14조는 조선이 청국과 단절하고 자주독립을 선포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었다.

1895년 2월 12일 웨이하이웨이에 피신해있던 청국의 북양함대는 일본해군과 육군의 동시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1895년 3월 24일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개화파인 김학우를 암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손자를 살리기 위하여 이노우에 공사 등 각국 공사를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은 동학교도를 이용하여 고종과 개화파 인사들을 암살하고 현정부를 전복하려고 하였지만 이 계획이 발각이 되어서 사형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준용은 할아버지 대원군의 도움으로 종신형으로 감해지고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

1895년 3월 26일 일본군은 대만 근처의 펑후제도를 무혈점령하였다. 일본군 장교 가바야마 스케노리는 3일 후에 대만을 상륙하여 점령하였다.

1895년 3월 30일 전봉준은 의금부에서 교수형 당하였다. 향년 41세였다. 전봉준의 형제들 또한 연좌되어서 사형되었다. 전봉준의 후처는 노비가 되었다. 전 고부군수 조병갑은 사면되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청국대표 이홍장은 청일간의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국은 일본국에 배상금 2억냥을 지불하기로 하였고 대만과 랴오둥반도 및 펑후제도를 할양하였다. 한편 청국이 지급한 2억냥은 청국의 3년 세출예산액이고 일본의 4년 세출 예산액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또 청국은 쑤저우, 항저우 등을 일본에 개항해주었고 일본인들의 거주, 영업의 자유를 승인해주었다. 또 청국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였고 조선에 대한 조공 및 헌상 등은 더 이상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지 6일 후인 1895년 4월 23일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일본에 대하여 요동을 청국에 반환하도록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와 남만주 및 청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위협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3천만냥의 추가배상금을 조건으로 요동을 청국에 반환하였다.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한편 조선 정부는 삼국간섭 이후로 러시아의 세력이 높아지자 이완용, 민영환, 윤치호 등 정동파는 명성왕후 민씨의 세력을 업고 친러, 친미 정책을 시행하였다.

1895년 5월 총리대신 김홍집은 내각을 친일세력으로 개편하고 제 3차 갑오개혁인 을미개혁을 실시하였다. 김홍집은 단발령을 단행하였고 태양력을 도입하여 구정을 대신하여 신정을 실시하였고 새 우편제도를 위하여 우체사를 설립하였다. 또 연호로서 건양을 사용하였다.

1895년 9월 1일 새 일본공사에 미우라 고로가 부임하였다. 미우라 고로는 일본육군 중장 출신이었으나 조선에 온 후로 두문불출하고 불경만 외웠으므로 염불공사란 별명을 얻었다. 이어서 김홍집은 3차 개각을 단행하였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수시로 미우라 고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명성왕후 민씨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 30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일본인 낭인들은 일본군 수비대와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 250명과 함께 명성왕후 민씨가 거처하는 경복궁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는 미국인 다이가 이끄는 조선군 시위대 300명과 조우하였다.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250명은 우수한 화력을 이용하여 조선군시위대 300명을 궤멸하였다. 이어서 일본인 낭인들은 건천궁에서 궁녀복장을 한 명성왕후를 찾아내어 난자하였고 그녀의 국부를 검사한 후에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태웠다. 명성왕후 민씨는 향년 45세였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이어서 명성왕후 민씨는 대원군과 일본의 압력으로 폐비되었다. 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은 강화도 교동에서의 유배가 풀렸다.

1896년 1월 서재필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준비하였다. 독립협회는 지방에서 의병활동과 외세배격 운동을 하였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로 일본세력의 위협을 받고있었으므로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어서 고종은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 조희연을 을미 4적으로 규정하여 비난하였다. 고종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파직하고 총리대신 서리에 박정양을 임명하여 내각을 개편하였다. 이날 파직된 김홍집과 정병하는 군중들로부터 돌맞아 죽었고 어윤중은 고향인 보은에서 타살되었다. 유길준은 비밀리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한편 고종과 왕세자, 엄상궁은 다음해 1월까지 1년간 러사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그리고 고종은 대원군과 일본의 압력으로 폐비되었던 명성왕후 민씨를 복위하였다.

1896년 5월 러시아는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러사아와 일본은 서로 가까와지면서 로마노프 외상과 야마가타 사이의 비밀회담을 하였다. 그 내용은 러시아와 일본 양국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남북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서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경원과 경성의 광산 채굴권을 요구하였고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채굴권을 요구하였다. 러사아는 한성에 한로은행을 설치하였다.

1896년 9월 29일 고종은 조칙을 내려서 한성판윤 이채연과 왕실재정고문인 영국인 맥레비 브라운에게 도시계획을 실시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서 도로가 정비되었고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리고 탑골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였다. 덕수궁은 이전의 경운궁을 수리한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8월 17일 고종은 조선을 대한으로 개명하고 연호를 광무로 하여 칭제건원하였다. 이것이 대한제국이다. 고종 황제는 전국의 23부를 13도로 개편하였다.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왕세자와 왕세자빈 민씨는 황태자와 황태자빈으로 격상되었다.

10월 22일 고종황제와 엄상궁 사이에서 태자가 태어났다. 이 태자가 이은이다. 엄상궁은 엄귀인으로 승격되었다. 이은은 후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태자인 의민태자가 된다.

1897년 12월 러시아는 청국과 협정을 맺고 뤼순항(포트 아서)과 대련만을 조차하였다. 러시아는 이로써 부동항을 얻을 수 있었고 다음해에는 하얼빈과 심양 그리고 뤼순항을 연결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민씨 부인이 타계하였다. 이어서 다음 달에는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의 별장인 아소당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79세였다. 고종은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명성왕후의 시해사건과 관련되었다고 보았다.

1898년 3월 1일 국고금과 세납금을 관리할 목적으로 한아은행이 개점되었다.

러시아어 통역관 김홍륙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권력을 남용하다가 뇌물사건에 휘말렸다. 김홍륙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기 전에 고종이 즐겨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어서 시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곧 김홍륙은 역모죄로 참수되었다. 김홍륙은 함경도 천민 출신이었다.

독립협회는 종로 네거리에서 종종 군중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정부시책을 비판하고 외세를 규탄하면서 여론을 형성하였다. 이것이 만민공동회이다. 독립협회는 이 만민공동회를 이용하여 한아은행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내의 수구파는 독립협회를 모함하였다.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하고 공화국을 세우려한다고 모함하였다. 이것이 익명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하도록 명하였다. 한편 독립협회는 지주와 상인계층이 중심이 되었는데 관세철폐와 자유무역을 옹호하였다. 반면에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자생적 민간주도의 상업활동을 옹호하였다.

1899년 고종 36년 광무 3년 한성에 전차운행이 시작되었다. 동아시아 최초였다.

1899년 중국 허베이 지방의 농민들이 외세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서태후가 이 농민봉기를 배후에서 사주하였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연합군은 텐진과 베이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여순역과 대련역이 화재로 소실되자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병력을 만주에 진출시켰다. 이것이 의화단 사건이다.

1901년 엄귀인이 고종 황제의 왕비로서 책봉되었다.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엄귀인 왕비책봉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지만 오히려 고종 황제는 이준용이 명성왕후암살에 관련되어있다고 믿었으므로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해 제주도에서는 민란이 일어났다. 당시 천주교는 대한제국 내에서 세력이 확장되었을 뿐만아니라 상당한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다. 성당은 치외법권적인 구역이 되어갔다. 죄를 짓고 성당에 들어가 은거할 경우에 죄수를 인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제주민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커져가는 천주교 세력과 징세를 남발하는 봉세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제주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천주교도로 자처하는 300여명을 처형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신부들은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어서 프랑스 함대가 파견되었다. 신임 제주목사 또한 함께 도착하였다. 민란은 더이상 확전되지 않았고 이재수와 주동자들은 처형되었다. 참고로 제주도는 천주교도가 개신교에 비해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이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 상업적 이익을 지키고 영국은 중국에서 이익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때 동맹국으로서 합세하기로 했다. 이것이 제 1차 영일동맹이다.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만주에서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3년 후 제 2차 영일동맹를 맺게되는데 그 직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 조약에 따라서 영국을 돕기 위하여 전쟁에 참전하게된다.

1903년 고종의 왕비 엄씨는 황제비가 되었다. 이 황제비 엄씨가 순헌황귀비이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뤼순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함대를 공격하였다. 다음날 일본은 제물포항의 러시아군함 2척을 공격하였다. 다음날인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것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이 요청해옴에 따라서 공수동맹을 위하여 한일의정서를 조인하였다. 외무대신 이지용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체결하였다. 처음에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사이에서 국외중립을 희망하였지만 실패하였다. 3월 17알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하였다. 한편 일본은 백동화를 주조하여 대한제국에서 유통시켰고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유통시키고 결제하였지만 금화결제는 하지않았다.
 
7월 13일 보안회가 결성되었다. 보안회는 일본인 나카모리가 조선의 황무지 개간권을 확보하려는 것을 저지하였다.

8월 10일 러사아함대 제독 빌헬름 비트게프트는 뤼순항을 출발하여 황해를 지나 제주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시도하였다. 일본함대의 도고 제독은 러시아함대와 조우하였다. 비트게프트 제독은 교전중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러시아 함대는 뤼순항으로 되돌아갔다. 이어서 일본 육군은 뤼순항을 포격하여 함락시켰다. 9월 일본은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하여 울릉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였다.

8월 18일 송병준과 이용구는 일진회를 결성하여 보안회와 대립을 시작하였다. 한때 송병준은 민씨일족의 억압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에 망명했었다. 송병준은 망명 10년만에 일본군 오타니 소장의 통역관으로서 귀국하였다. 송병준은 당시 47세였다. 이용구는 동학교도였다.

1904년 8월 22일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고문정치를 실시하기 위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외무대신서리 윤치호와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재정고문으로 일본인 메카다 다네타로를 추천하였고 외교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슨을 추천하였다. 일본은 그외에도 궁내부고문, 군사고문, 경무고문, 학무고문을 추천하였다. 이것이 한일 의정서이다. 제 1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한일 의정서 전문 4조에는 대한제국의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일본국은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인 재정고문 메카다 다네타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왔고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조선의 은행들은 점점 일본은행에 종속되어갔다. 다음해 일본은 한일 의정서, 즉 제 1차 한일협약에 따라 러시아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의 독도를 일본의 시마네 현에 편입한다.

9월 28일 황태자비 민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33세였다.

1905년 1월 2일 뤼순의 러시아 주둔군 지휘관은 상부의 허락없이 뤼순항을 일본에 양도하였다. 한편 러시아의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발트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아시아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함대와의 대전투가 임박하였다.

이 해 1월 28일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고등경찰제도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현행범체포가 가능해졌다.

1905년 2월 22일 일본정부는 독도를 시마네 현이 관할하는 다케시마로 명명하고 일본영토로 편입하였다. 제 1차 한일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이 해 8월 일본은 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 독도편입은 일본이 제 2차 대전에서 패망후 전승국이었던 미국과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에서 대한민국과의 소유권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국은 조약에 따라서 한반도와 제주도와 거문도 울릉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트 함대(제 2태평양함대)는 전함, 구축함, 순양함 등 38척을 대동하고 쓰시마 근해에서 일본함대와 조우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함대는 완패하였다. 러시아함대는 8척의 전함을 상실하고 5,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은 3척의 어뢰정과 116명이 전사하였다.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은 테프트-가쓰라 비밀협약을 맺고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인정해주기로 하였다.

1905년 9월 5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종결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경비로서 17억원을 사용하였다. 이중 14억원은 공채를 발행하여 충당하였고 나머지 3억원은 외채였다. 이로써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 우위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 일로 인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한성에 당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면서 일본천황의 친서를 바쳤고 일본정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신하여 행사할 것을 조약하자고 하였다. 고종황제는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내각를 소집하고 대신들에게 조약체결의 가부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 3명은 조약체결 불가라고 결정하였고 나머지 5명의 대신은 조약체결 찬성을 결정하였다. 을사 5적이란 이들 5명의 대신들을 말한다. 이들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대신 8대신 중에 5대신이 찬성하였으므로 조약이 가결되었음을 선언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선의 외교권에 대한 조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이것이 제 2차 한일협약이다. 을사조약이라고도 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정부를 경유하게 되었고 고종황제 바로 밑에 통감을 두게되었다. 대한 제국 제 1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이다. 이로써 한성에 주재하던 모든 외국공사관은 철수하였다.

12월 20일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 장지연은 이 일로 투옥되었고 황성신문은 정간되었다.

1906년 2월 1일 일본헌병대는 행정, 사법, 경찰권을 장악하고 무단정치를 시작하였다.

1907년 황태자는 새 황태자비로서 윤택영의 딸을 맞이하였다. 황태자는 33세였고 황태자비 윤씨는 14세였다.

1907년 1월 대구에 사는 서상돈과 김광제는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 1,300만원을 갚기 위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았다. 일본은 일진회를 동원하여 방해하였고 주동자인 양기탁을 구속함으로써 사실상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상류층과 부자들의 의지 부족도 한 몫 했다.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Hague Convention)가 열렸다. 이 회의는 처음 1899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제안에 따라 전쟁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국과 독일 등의 군비축소와 영토분쟁에 대한 중재재판소 설립에 대한 국제회의였다. 고종은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인하여 참가하지 못했다. 이것이 헤이그 밀사사건이다. 이준은 전 평리원 검사였고 이상설은 전 의정부참찬으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중이었다. 그리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크주재 전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그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었고 일본이 대신하여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1907년 7월 20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헤이그주재 일본공사가 일본외무성에 긴급전문을 보냈고 이어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질 것을 요구하였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송병준, 이병무는 고종에게 양위하도록 종용하였다. 고종은 양위를 결심하였고 양위식을 거행하였다. 양위식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직접하지 않았고 내관들이 대신하였다. 고종은 당시 56세였다. 이완용은 고종양위를 계기로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나중에 고종은 이완용에게 집을 장만해주면서 황실소유의 저택을 하사하였다. 사실 을사조약 이후로 매국노로서 박제순이 더 유명했다. 한편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과 정미 7조약을 체결하였다. 순종은 이 조약을 윤허하였다. 정미 7조약에 따라서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에서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을 간섭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인 관리를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법권이 일본통감에게 넘어갔고 내각의 차관과 경찰간부는 일본인이 아니면 아니되게 되었다. 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으므로 관동, 관서, 영남지방에는 의병이 봉기하여 무장항일투쟁이 시작되었다.

1907년 8월 7일 순종황제는 황태자로서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황비 엄씨소생의 이은을 책봉하였다. 이은은 당시 11세였다.

1907년 고종 44년이자 광무 11년, 순종1년이자 융희 1년인 8월 27일 순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순종황제는 34세였다. 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는 14세였다.

12월 15일 황태자 이은은 일본의 학습원 수학을 위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슨을 저격하였다. 왜냐하면 스티븐슨은 대한제국의 통감정치를 찬양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인환은 금고 25년을 선고받았으나 10년 후에 석방되었고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08년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징옥, 윤휴, 윤원형, 밀풍군 탄, 김익순(김삿갓의 부친), 이인좌의 난 때 관련자 등 77명을 복권하였다.

1909년 봄 일본총리 가쓰라 타로와 외무상 고무라는 대한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상의하여 조선과 일본의 합병을 동의하였다.

1909년 6월 14일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통감직을 사임하고 일본의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추밀원은 일본천황의 자문기구로서 추밀고문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제 2대 대한제국 통감으로서 소네 아라스케가 부임하였다.

1909년 7월 1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조약을 체결하여 사법권과 교도행정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사법부, 재판소, 형무소는 전부 폐지되었고 새롭게 통감부 사법청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기유약조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의 의병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안중근은 31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과다출혈로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와 회담하기로 되어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화학을 공부하였고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또 그는 일본제국헌법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초대 일본 내각 총리를 역임하였고 그 후 제5대, 7대, 10대 내각 총리를 역임한 후에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었다. 순종황제는 그에게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909년 12월 일진회 소속 동학교도 이용구는 보부상들과 유생들을 매수하여 한일합방을 촉진하는 100만 회원 연명칭을 전개하면서 송병준과 함께 한일합방 성명서와 청원서를 준비하였다.

1909년 12월 12일 이완용은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회에 참가하려고 종현천주교회(명동성당)에 가는 길에 이재명에게 피습되었다.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에 칼을 맞았고 왼쪽 폐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2개월 후에 회복되었다. 이재명은 다음해에 교수형되었다.

1910년 3월 16일 안중근이 처형되었다. 안중근은 히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에 러시아 공안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일본제국 정부에 넘겨진 후에 당시 일본의 조차지인 뤼순 감옥에 갇혔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안중근은 16세때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친과 함께 참전하기도 했었고 17세 때 천주교세례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바울이라고 부른다.

1910년 5월 30일 제 3대 대한제국 통감으로서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부임하였다.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육군대장 출신이었다.

1910년 6월 24일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서리 박제순과 경찰사무위탁 한일약정 각서를 체결하여 경찰권을 위탁받았다

1910년 8월 16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한일합방 각서를 작성하였다. 국호는 조선으로 하기로 하였고 순종 황제를 이왕 전하로 칭하기로 하였다.

8월 18일 이완용 내각의 대신들은 만장일치로 한일합방안을 통과시켰다.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황제는 대한제국의 통치를 일본황제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여 추인하였다. 한일합방조약이 승인된 것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 4년, 융희 4년 대한제국 내각은 공식적으로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하였다. 조선창업 519년 만이었다. 당시 퇴위한 고종은 59세였고 순종은 37세였고 황태자 이은은 14세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카백과. 조선편.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9. 순조-헌종-철종

1800년 순조가 즉위하였다. 순조는 11살이었다. 순조의 부친은 정조였고 모친은 후궁인 수빈박씨였다. 순조가 어렸으므로 영조비였던 정순왕후 김씨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첨정을 하였다. 이전에 정순왕후 김씨가 영조의 계비로서 간택될 당시의 일화는 유명하였다. 영조는 간택될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거나 물이 깊다고 대답하였지만 당시 15세였던 정순왕후 김씨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대답하여 영조를 놀라게 했었다. 또 왕비 책봉이 된 이후에도 일화가 있었다. 상궁이 옷이 치수를 재기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요구하자 정순왕후 김씨는 네가 돌아서면 될 것이 아니냐면서 추상같이 답하였다.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1800년 2월 프랑스의 제 1통령인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다. 당시 알프스를 넘는일은 터부였으므로 참모들은 그를 만류하였었다. 나폴레옹은 그 당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마렝고전투이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강화제의를 받아들이고 강화조건으로서 라인강 주변 영토의 절반을 할양받았고 북이탈리아를 보호국으로 삼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세제도와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공업생산력을 진흥시켰다. 또 나폴레옹은 프랑스은행을 설립하였다.

1801년 천주교신자였던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서인노론 벽파와 짝하여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이전의 정조는 정학론을 펼치면서 정학이 바로서면 사학은 스스로 멸한다고 보고 천주교을 묵인했었다. 천주교도들 중에는 서인노론 시파와 남인들이 많이 있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오가작통법은 다섯집중 한집에서 천주교인이 나오면 전부 처벌하는 연좌제였다. 오가작통법은 성종때 한명회의 건의로 창설되었는데 흉년때 조세와 부역을 위하여 이용되었었고 숙종때는 비변사에서도 오가작통법을 이용하였다.

은언군은 자신은 물론 부인과 며느리도 천주교도였다. 은언군과 송씨부인은 강화도에 부처되었다.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은언군은 후일 강화도에서 태어나게 되는 철종의 할아버지였다. 천주교도 이승훈과 정약종은 참수되었고 권철신은 고문사하였고 이가환은 아사하였다. 그리고 남인 정약용은 유배를 떠났다. 그 해 4월 19일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처형되었다. 남인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은 당시 27세였는데 이같은 조선조정의 천주교탄압을 대외에 알리기 위하여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외국배와 청나라배 수백척과 군사 5만을 동원하여 조선조정을 위협하여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게 하라는 밀서였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이다. 이 밀서가 발각이 되자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황사영은 참수된 후에 육시되었고 그의 부인은 제주도로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갔다. 아들 황창한은 추자도로 귀양갔다.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1801년 프랑스의 천주교, 즉 로만 캐돌릭은 대혁명 이후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와 종교협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 내의 종교적 분쟁을 완화하였다. 또 각 지역의 관습법과 봉건법을 통일하여 프랑스민법전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나폴레옹법전이라고도 하는데 만인의 법앞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등의 가치관을 담고있다. 나폴레옹은 왕당파와 자코뱅파등 파벌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였다.

1802년 순조 2년 순조는 왕비로서 김조순의 딸을 맞이하였다. 순조는 13살이었고 왕비 순원왕후 김씨는 14살이었다. 곧 서인노론 시파 김조순은 훈련대장과 판돈령 부사가 되었다. 순조의 외조부인 박준원은 금위대장이 되었다.

1802년 나폴레옹은 아미앵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의 전쟁을 끝냈다. 영국은 그 당시 피트 수상이 물러난고로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03년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수렴정정을 거두었다. 이어서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부친인 서인노론 시파 김조순이 섭정을 시작하였다. 김조순은 서인노론 벽파 일당을 정조의 유지를 져버린 역적으로 몰아서 김관주와 자신의 친척인 김달순을 처형하였다. 또 서인노론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와 심환지를 삭탈관직하였다. 그리고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일족들도 숙정하였다.

1804년 프랑스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3백 6십여만 표의 다수로 제 1통령 나폴레옹을 황제로 선출하였다.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의 황제즉위식에서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관을 썼고 비오 7세로부터 전통적 관례인 축복기도를 받는 대신에 그를 포옹해주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부르봉왕조가 아닌 로마제국의 계승자임을 선포하였다.

1805년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1세였다. 서인노론 벽파를 후원하고 있던 정순왕후 대왕대비 경주 김씨가 타계함으로써 이제 서인노론 벽파와 서인노론 시파 및 남인 사이의 붕당은 끝이 났고 안동김씨 김조순이 세도로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이 아미앵조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 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아우스터리츠 전쟁이다. 그러나 프랑스해군은 넬슨이 이끄는 영국해군을 상대로 트라팔가해전에서 완패당함으로써 영국상륙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대륙을 장악하였으므로 나폴리의 국왕으로서 자신의 형인 조세프를 임명하였고 네덜란드 국왕에는 자신의 동생인 루이를 임명하였다. 따라서 이제까지 1000년 동안 이어왔던 신성로마제국은 거의 붕괴되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성장에 위협을 받았으므로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함께 제 4차 대프랑스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곧 전쟁에 돌입하였고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려서 대륙의 국가들이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시켰다. 원래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략할 계획이었으나 프랑스의 해군력은 영국에 상대가 아니되었으므로 대신에 영국을 유럽과의 교역으로부터 봉쇄시키면서 먼저 경제적으로 궤멸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국력 또한 막강하였다. 나중에 러시아는 이 프랑스와 체결한 대륙봉쇄령을 위반하여 영국과 교역을 하였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는 불씨가 되었다. 후일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퇴각하면서 급격히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구원하기위하여 파병하였다. 나폴레옹은 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일부와 폴란드를 하나로 묶어서 바르샤바 대공국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를 베스트팔렌 왕으로 임명하였다. 또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쫒고 스페인을 통치하였다. 스페인 백성들은 반발하였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나중에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아르헨티나로서 독립하게 된다.

1809년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는 3년 후에 왕세자로서 책봉이 되는데 그가 바로 효명세자이다.

1810년 1월10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14년간 같이 살아온 황녀 조세핀과 이혼하고 마리 루이즈와 혼인하였다.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는 로마왕 나폴레옹을 낳았다.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곡산 부사는 순조의 외삼촌이었던 박중신이었다. 당시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해져가자 수탈과 지대, 조세의 폐단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말 평안도 다복동 출신의 홍경래는  대자본을 쥐고있던 상인들과 부농들의 후원과 일부 양반들의 합세로 군졸들을 끌어모으고 봉기하였다. 홍경래는 서북인들의 관직진출이 제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관군은 곧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때 부녀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1917명이 참수되었다. 이 홍경래의 난은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등 이전의 난리와 구별되는 민중들에 의한 역모였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하였다. 러시아는 퇴각하면서 도시와 양곡에 불을 질렀다. 나폴레옹은 쉽게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피하기 위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궤멸하였다. 이제 프로이센은 유렵의 각국에 호소하여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1813년 홍경래의 난에 자극을 받은 제주의 토호 양제해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양제해는 사전에 계를 조직하였는데 이 친목계가 난리의 불씨가 되었다. 양제해 등은 장사를 모으고 병기와 군량을 모았고 제주의 3현에서 동시에 봉기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었으므로 일당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813년 나폴레옹은 대 러시아전쟁에서 프랑스군인 수십만을 희생시켰음에도 다시 청년들을 강제징집하였다.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동맹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의 평화협정을 거절하였다. 이어서 라치프찌히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대패하였고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도망갔다.

1814년 연합군은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3월13일에는 파리를 점령하였다. 나폴레옹은 강제퇴위를 당하였고 지중해의 엘바섬의 영주로서 추방되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가 복구되어 루이 18세가 즉위하였다. 유럽대륙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보수반동적인 빈체제를 설립하였다.

1815년 청송과 영양 등 경상도 산악지방에서 은거하고 있던 천주교도 3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 30여 명이 처형되어다. 이것이 을해교난이다.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중이었던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집필하였다. 남인이자 실학 사상가였던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여전제를 주장하였다. 여전제란 토지를 공동분배하고 분배받은 토지를 공동경작하자는 이론이었다. 이 여전제는 현실성이 많이 부족하였다. 나중에 정약용은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정전제란 우물 정자처럼 토지를 9등분하고 가운데 있는 토지를 공동경작하여 조세로 납부하자는 이론이었다. 정약용은 그 외에도 수령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와 형벌에 관한 흠흠신서도 저술하였다. 한편 베트남의 건국 지도자인 호치민든 목민심서를 손에 들고 다니며 애독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에 입성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헌법을 반포하고 연합국에게는 강화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강화는 불발되었으므로 전쟁을 재개하였다. 나폴레옹은 초반에 승세를 탔지만 나중에 워털루에서 프로이센, 영국 동맹군에게 완패당함으로써 백일천하는 끝이 났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투항하였고 웰링턴 장군의 제안에 따라서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었다.

1818년 황해도와 평안도에 10만여 명이 역질로 사망하였다. 그 해 대홍수로 인하여 수재가 발생하였다. 이 역질이 있기 전에 인도의 벵골에서 콜레라가 발발하였었다.

혜빈 홍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81세였다. 1815년의 일이었다. 혜빈 홍씨는 영조의 며느리로서 사도세자의 세자빈이자 정조의 모친이었다. 보통 혜경궁 홍씨로 알려져 있다. 정조 즉위 초기의 세도였던 홍국영은 그녀와 11촌 간 이었다. 혜빈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회갑때 한중록을 지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3대 궁중소설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한중록이다.

효명세자가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1819년의 일이었다. 효명세자는 11살이었고 세자빈은 12살이었다. 이 세자빈은 후일의 신정왕후 조씨이다.

1821년 5월 5일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던 나폴레옹이 타계하였다. 향년 52세였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그의 모발에서는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다.

1824년 프랑스왕 루이 18세는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루이 18세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인 66세의 샤를이 샤를 10세로서 즉위하였다.

1826년 김병연은 강원도 영월의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날의 시제는 김익순을 비판하라는 시제였다.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때 선천부사였다. 김익순은 불운하게도 홍경래의 반란군에 항복했었다. 장원급제한 김병연은 자신의 모친으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김병연은 그 사실을 알게되자 충격을 받았고 삿갓을 쓰고 방랑을 떠났다. 김삿갓은 그 후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영영 이별하였다.

1826년 교황청의 포교장관 카페랄리 추기경은 조선의 천주교 교구를 북경관할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북경교구는 포르투갈 세력권이었지만 이제 조선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세력이 점점 켜져가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는 도미니크 수도회가 관장한다.

순조 27년인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효명제자는 자신의 장인어른(빙부)인 조만영를 어영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조만영의 풍양 조씨 일가가 세도하게 되었다. 그 해 전라도 충정도 경상도에서 천주교도 500여명이 체포되었고 10여명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정해교난이다.

그 해 효명세자와 세자빈 조씨 사이에 세손이 태어났다. 이 세손은 100일이 되기 전에 능히 걸어다녔다.

1830년 5월 6일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3년 만에 타계하였다. 향년 22세였다. 효명세자가 타계하자 풍양 조씨의 세도도 추락하였고 안동 김씨가 다시 세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효명세자의 아들은 4살로서 왕세자위를 승계하였다. 이 왕세자가 훗날의 헌종이다.

안동 김씨일족은 김정희를 탄핵하였다. 김정희는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친족이었고 북학파 박제가의 제자였다. 안동 김씨일족은 먼저 윤상도를 사주하여 상소문을 쓰게 하였다. 순조는 상소문을 검토하면서 배후에 안동김씨가 사주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지만 윤상도를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이 윤상도의 옥은 10년 후에 다시 문제가 된다.

1830년 프랑스의 샤를 10세는 새법령을 공포하여 하원을 해산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선거법을 개정하였으므로 이전 유권자의 4분의 3이 선거권을 상실하였다. 그러자 자유주의자들이 반발하였고 파업과 항의를 시작하였다. 곧 왕정군은 출동하였지만 그들을 억압하는데는 실패하였다.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도피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샤를 10세의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립을 옹립하였다. 이제 프랑스 왕권은 부르봉가에서 오를레앙가로 넘어갔다. 루이필립은 전제군주정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여 특별재판소를 폐지시키고 상원을 세습직에서 선출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국왕과 교회사이의 동맹관계도 깨버렸다. 이것이 프랑스 7월 혁명이다. 한편 이때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러나 루이 필립은 기대와는 반대로 폴란드를 지원하지 않았으므로 폴란드는 러시아에 의하여 잔인하게 진압되고 병합되고 말았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도 역모가 일어났는데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단 벨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분리 독립을 성취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2년 후에는 유럽국가로부터 독립국가로서 승인받았다.

1831년 교황청의 카페랄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 16세로 즉위하였다. 그레고리 16세는 조선교구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고 초대주교에 브뤼기에르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주교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임명을 받고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요동에서 뇌일혈로 타계하고 말았다. 향년 43세였다.

순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43세였다. 1834년의 일이었다. 순조는 정조와 후궁인 수빈박씨 사이의 왕자였다. 순조는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으므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대리청정을 했었다. 그리고 순조의 왕세자인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중에 22세의 나이로 타계했었다.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4살때 왕세자위를 승계하였다. 그 아들은 헌종이 될 것이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하였다. 헌종의 나이는 8세였다. 순조비인 순원왕후 안동 김씨가 대왕대비가 되었고 효명세자빈이자 헌종의 모친인 풍양 조씨가 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되어서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헌종 즉위 초 영의정은 안동김씨 인척인 심상규가 되었고 좌의정은 풍양조씨 외척인 풍산 홍씨 홍석주가 되었다. 우의정은 안동 김씨와 결탁을 하고 있었던 반남 박씨 박중훈이 되었다.

순원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은 유진길로부터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므로 천주교에 관대하였다. 천주교는 날로 세력이 번창해 갔다. 제 2대 조선 주교 엥베르가 들어와서 전도하였고 모방 신부와 샤스턍 신부도 들어와서 교세확장에 일조를 하였다.

헌종은 왕비로서 김조근의 딸을 맞이하였다. 김조근은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와 김유근과는 6촌 형제였다. 헌종은 11살이었고 왕비 효현왕후 김씨는 10살이었다. 이것은 1837년의 일이었다.

183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이 병으로 인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자 영의정 이지연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사학을 멸하자면서 천주교 척결을 건의하였다. 이제 조정은 다시 오가작통법을 시행하여 천주교도 색출에 들어갔다. 김순성은 천주교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김순성이 밀고를 하자 유진길, 정하상 등이 잡혀들어왔고 엥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하였다. 이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는 모두 효수되었다. 엥베르 주교는 43세였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 였다. 유진길과 정하상도 참형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천주교도 100여 명이 참형을 당하였다. 이것이 기해박해이다.

1839년 중국황제는 관리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당시 중국과 영국은 서로 차와 모직물을 교역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차를 좋아하였으므로 수요가 급증하였다. 중국은 영국에 대하여 무역흑자였다. 그런데 영국은 이 차 대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인도산 아편을 중국의 하층민들에게 공급하였다. 하층민들은 아편을 좋아하게 되었고 아편대금인 은이 유출이 과잉되기 시작하였다. 임칙서는 광저우에 도착하자 아편의 소지를 금지시키고 또 외국상관을 봉쇄하여 아편을 몰수하고 파기하였다. 이때 영국상인들은 본국에 원정군을 요청하였다. 이어서 사사로운 민사사건과 관련하여 영국과 청국사이에 시비가 붙었고 영국의 무역감독관 찰스 엘리엇의 함대와 중국함대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중국 함대는 완패당하였다. 이 제 1차 아편전쟁으로 인하여 난징조약과 그에 따른  부수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중국은 홍콩을 할양하였고 배상금 2,100만 달러지불,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푸, 샹하이 개항, 개항장에 영사설치, 공행상인폐지, 통상항구에 군함파견, 순찰, 그리고 개항장에 땅을 빌려서 영원히 거주 가능하도록 보장해주었다.

1840년 대사헌 김홍근은 10년 전의 윤상도의 옥 사건을 재심하자고 하였다. 곧 국청이 열렸다. 그런데 심문중에 윤상도는 또 거짓으로 김정희를 고변하였다. 김정희는 다행히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김정희는 유배중에 우리 전통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을 연구하는 중에 추사체를 발명하였다.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는 고려 태조의 비가 아니라 진흥왕의 비라고 고증하였다. 김정희는 금석학에도 능했다. 고대 비문을 고증하는 것도 금석학의 일분야이다.

1841년 헌종 7년 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숙부인 조인영이 영의정이 되었다. 좌의정은 김흥근이 되었고 우의정은 정원용이 되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은 작년에 중풍과 실어증으로 타계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력이 후퇴한 것이었다.

헌종의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16세였다. 1843년의 일이었다

헌종은 그 해 계비로서 홍재룡의 딸을 맞이하였다. 헌종은 17세였고 계비 효정왕후 홍씨는 14세였다. 곧 홍재룡은 금위대장에 승차하였다.

1846년 마카오에서 신학수업을 받고있던 김대건은 조선 제 3대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입국시키기 위하여 비밀 항로를 찾다가 마침내 항로를 발견하여 그것을 중국어선에 넘겨주려고 하는 찰나 조선 관헌에게 잡히고 말았다. 김대건은 한양의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26세였다. 프랑스 제독 세실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이어서 김대건과 관련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이 후사가 없으므로 김재청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헌종은 21세 였고 후궁 경빈김씨는 17세 였다. 1847년의 일이었다.

1848년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보수내각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곧 보통선거가 실시되었고 의회는 온건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이 불만을 품고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정부군은 곧  폭동을 진압하였다. 이제 7월 입헌군주정은 붕괴되었고 공화정의 대통령으로서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조카였다. 이것이 2월 혁명이다. 3월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메테르니히는 물러났고 빈체제 또한 붕괴되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23세였다. 헌종의 부친은 효명세자였고 모친은 신정왕후 조씨였다. 헌종은 부친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타계하자 왕세자위를 승계하였고 할아버지인 순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었다. 헌종은 방사와 여색을 밝혔음에도 후사가 없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다음 후계자로서 강화도의 도령을 지명하였다.  1849년 6월 9일 그 도령은 철종으로서 즉위하였다. 철종은 당시 19세였다.  철종의 부친은 전계군이었다. 전계군은 은원군의 셋째아들이었다. 은원군은 천주교신자로서 기유사옥 때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거기서 사사되었었다. 은원군은 사도세자와 숙빈임씨 사이의 왕자였으므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한편 철종의 모친은 용담 염씨부인이었다. 철종의 이름은 이원범이었다. 이원범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있었고 천민출신의 처녀와 혼약을 맺고있었다. 철종은 왕이 된 후로 그녀를 그리워하였지만 한번도 못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철종 즉위 초 순원왕후 김씨가 대리청정하였다.

1851년 철종은 왕비로서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맞이하였다. 김문근은 김조순의 7촌 조카였다. 그러므로 순원왕후 김씨와는 6촌간 이었다. 철종은 21세였고 이제 왕비가 된 철인왕후 김씨는 15세였다.

1852년 순원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제 철종은 친정을 시작하였다.

1853년 영의정에 김좌근이 되었다. 김좌근은 김유근과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었다. 우의정에는 서인노론 조태채의 5대 손인 조두순이 되었다.

황해도에 사는 김웅도와 채희재 등은 철종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들은 역모에 성공하면 이명섭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이명섭의 부친은 이정현이었다. 이정현의 부친은 황해도 풍천의 초도로 귀양간 이항석이었다. 이항석의 부친은 이인좌가 영조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키으면서 옹립하기로 했으나 난이 실패함으로써 사사되었던 밀풍군 탄이었다. 밀풍군 탄의 부친은 임창군이었다. 임창군의 부친은 경안군이었다. 경안군은 자신의 형들인 경선군, 경완군과 함께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을때 형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음에도 홀로 살아남았었다. 경안군의 부친은 소현세자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귀국한지 몇 달만에 타계하였으므로 왕세자위가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승계되었고 봉림대군은 곧 효종으로 즉위하였었다. 소현세자의 부친은 인조이다. 인조는 자신의 백부인 광해군에 대항하여 반정에 성공하여 왕위에 올랐었다. 한편 이명섭 추대역모사건은 고성욱이 밀고함으로써 발각이 되었다. 이명섭은 능지처사되었다.

1856년 10월 8일 중국관헌들은 주강에 정박하고 있던 애로우호에 들이닥쳐서 승무원들을 해적혐의로 체포하였다. 광저우의 영국영사는 즉시 승무원을 송환하고 영국 국기가 함부로 내려진 것에 대하여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양광총독 엽명침은 말하기를 애로우호는 중국배이고 영국국기는 걸려있지도 않았다고 항변하였다. 애로우호는 사실 홍콩선적, 중국인 소유, 영국인 선장, 중국인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중국측은 승무원들을 돌려보냈으나 영국영사는 접수를 거부하였다. 다음날 영국은 광저우를 공격하고 총독관저에 침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프랑스도 영국에 합세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인 선교사가 그해 중국관헌에 의하여 처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해 영국과 프랑스는 광저우에 괴뢰정부를 세웠으나 청나라조정은 관망만 하였다. 이어서 영국 프랑스군은 북상하여 텐진으로 진격하였고 중국과 텐진조약을 맺고 10개 항구를 개항시키고 군함진입권을 확보하였다. 또 내지에서의 여행 포교권, 영사재판권의 확대, 아편무역의 승인, 관세율 고정, 통과세 인하등을 보장받았다. 한편 이 텐진조약은 베이징에서 비준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중국조정이 상하이에서 비준하려들자 영국 프랑스군은 비준을 강행하기 위하여 북상하다가 중국군 포대의 공격을 받고 대파되었다(1859.6). 그러자 영국 프랑스군은 그 다음해 베이징을 함락하고 베이징조약을 맺었다. 중국은 텐진조약에 덧붙여 증액된 배상금을 납부하여야 했고 교회가 토지와 교회건물을 임차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1857년 8월 4일 순원왕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었던 순원왕후는 순조의 왕비로서 효명세자를 낳았고 세자빈으로서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을 간택하였는데 그녀가 신정왕후 조씨였다. 효명세자는 순조를 대리청정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였고 그 후 순조도 승하하였다. 이어서 효명세자의 아들, 즉 자신의 손자가 헌종으로서 즉위하자 순원왕후 김씨는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였다. 그리고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 김씨는 강화도에 살고있던 사도세자의 증손자를 철종으로서 지명하였었다. 순원왕후 김씨는 철종즉위 초 대리청정하였었다.

경기도 파주에 염종수라는 자가 있었다. 염종수는 파주염씨였다. 철종의 모친은 용담염씨였다. 염종수는 용담염씨가 원래 파주 염씨라면서 족보를 고쳤고 자신은 철종의 외삼촌이 될 차례라고 상소하였다. 의지가지가 없었던 철종은 이 상소문을 보자 매우 기뻐하였고 염종수에게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파주 사람이 고변하자 용담 염씨가 원래 파주 염씨라는 사실은 날조라는 것이 밝혀졌다. 염종수는 능지처사되었고 그의 아들은 제주도의 노비로 보내졌다.

1858년 10월 17알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냤다. 그런데 이 원자는 5개월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1860년 돈의문, 즉 서대문에 괘서가 나붙었다. 왕을 비방하는 내용으로서 금극목金克木이니 김金가가 이李가를 누르고 나라를 빼앗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포도청에서는 범인 검거에 나섰지만 범인을 잡을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좌포도대장 허계와 우포도대장 신관호는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떠났다.

삼정, 즉 전정, 군정,  환곡이 점점 문란해져가고 있었다. 전정이란 토지 조세를 말한다. 아전들은 토지대장 등 제반서류를 이용하여 부가세를 만들고 착복하였다. 군정이란 군역을 말한다. 당시 조선은 양반을 제외한 16세부터 60세 사이의 모든 백성은 군역의 의무가 있었고 군포로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반서류가 위조되었으므로 죽은자에게도 징세가 되었다. 그것을 백골징 또는 족징이라고 하였다. 환정이란 춘궁기때 백성들에게 양곡을 대여하고 추수기때 원곡에 덧붙여 모곡을 회수하는 것이다. 아전들은 문서를 위조하여 비상식량으로 분배하거나 식량이 회수된 것처럼 문서를 위조하였고 또 사사로이 이자를 착복하였다. 옛말에 덕으로 못다스리면 창칼로 다스리게 되고 곪은 것은 터뜨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당시 인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총 호수는 158만 9038호였댜. 남자는 393만 34명이었고 여자는 335만 4204명으로 총 675만 여명이었다.

토호란 향반과 토반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향반은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낙향하여 위세를 부리던 양반이었다. 이들 토호들은 관아의 비호아래 백성들을 가렴주구하였다. 토호들의 강탈수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혼권은 소장을 아문에 제출하고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장권은 하졸이 사사로이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옥권은 옥에 갇혔을때 뇌물여부로 야로를 부리는 것이었다. 저권은 수확기에 쌀, 보리, 목화 등을 구걸하거나 강제로 착복하는 것이었다. 포권은 체포령이 내리면 당사자외에 인근 주민까지 위협, 공갈하는 것이었다.  
          
1862년 진주의 몰락양반 유계춘과 향반 이명윤은 도결과 환포의 부당함에 분기하여 경상우병사 백낙신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도결이란 세금을 법정액수 이상 책정하여 공전과 군포를 횡령하는 것을 말한다. 농민들은 점차로 폭도화되어갔다. 조정은 백낙신을 제주도에 위리안치시키고 진주목사 채병원을 파직하였고 안핵사로서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를 파견하여다. 민란을 주도한 유계춘은 참수되었다. 이것이 진주민란이다. 이 진주민란은 임술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임술년 농민봉기는 경상도에서 15차례, 전라도에서 8차례, 충청도에서 9차례, 경기, 황해, 함경도에서 각각 1차례씩 일어났다.

김순성은 도정 이하전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고 철종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도정 이하전은 덕흥대원군의 13대 손이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부친이었다.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안씨 사이의 왕자였다. 명종은 후사가 없었으므로 중종의 손자인 선조를 다음 왕으로서 지명하였던 것이다. 이 역모는 실패로 끝났고 김순성은 효수되었고 도정 이하전은 제주도로 위라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제주 대정현의 농민 강제검은 과도한 장세와 군역과 부역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당시 제주는 산림개간을 금지할 목적으로 화전민에게 화전세를 과세하고 있었다. 또 군역의 경우에는 내륙에서 군포로 대신하였지만 제주민은  군정 1인당 쌀 6두로 납부하고 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쌀 6두를 돈으로 환산하여 납부하였는데 환산과정에서 부정과 폐해가 있었다.

1862년 중국은 태평천국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증국번을 난징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영국계 외인부대도 합세하였다. 태평천국의 교주 홍수전은 꿈에서 본대로 자신을 여호와의 둘째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하였다. 홍수전은 하층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겠다면서 교도들을 끌어모았고 그 세력이 커지면서 난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33세였다. 철종은 주색을 가까이 하다가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철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신정왕후 조씨는 재빨리 어보(어세+옥보)를 챙긴 후에 '흥선군의 제 2자인 명복을 익성군에 봉하여 익종의 대통을 잇게하라.'고 반포하였다. 익종은 신정왕후 조씨가 세자빈이었을때 자신의 남편이었던 효명세자를 말한다. 그리고 흥선군은 이하응을 말하는것으로서 이하응의 부친은 남연군이었다. 남연군의 부친은 은신군이었다. 은신군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 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군이고 흥선군의 아들이 명복이다. 한편 은신군의 형은 은연군으로서 은연군의 증손자가 철종이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은연군과 은신군의 부모는 모두 사도세자와 숙빈임씨였다. 사도세자의 부친은 잘알다시피 영조이다. 이제, 흥선군의 제 2자인 명복이 신정왕후 조씨의 낙점을 받고 고종으로서 등극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2012년 3월 15일 목요일

8. 경종-영조-정조

1720년 6월 23일 숙종과 희빈 장씨 소생의 왕세자 윤이 경종으로서 즉위하였다. 당시 경종은 33세였고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는 16세였다. 경종은 지난 4년간 직전 왕인 숙종을 대리청정했었다. 왜냐하면 당시 숙종이 건강이 아니 좋아서 몸져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종은 노론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전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었다. 한편 이전에 경종의 모친인 희빈장씨는 사약을 받아먹고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을 보고싶다고 한 일이 있었다. 희빈 장씨는 당시 14였던 경종을 보자 우습게도 그의 음부를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경종은 그 즉시 기절하였었다. 경종에게는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이 있었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최씨 소생으로서 후일 영조가 될 것이다.

경종 즉위 당시 조정은 서인 노론이 장악했다. 노론 4대신은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었다. 당시 서인 소론의 조태구는 우의정이 되었다.

1721년 경종 1년 경종은 자신의 뒤를 이를 원자를 대신하여 왕세제로서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책봉하였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최씨 사이의 아들로서 경종과는 세살 차이였다.

한편 노론 4대신은 경종이 병약함을 이유로 연잉군이 대리청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서인소론 김일경 일당들은 분노한 나머지 노론 4대신을 역모죄로 탄핵하였다. 그러자 이에 부화뇌동한 경종 또한 서인 노론 일당을 즉각 실각시키고 이 노론 4대신들을 거제도와 남해 등으로 유배보내었다. 이것이 신축옥사이다. 이제 서인소론 일당들은 조정을 장악하였고 서인소론 조태구는 영의정이 되었다.

1722년 서얼출신의 남인 목호룡은 경종시해음모를 고변하였다. 이 음모란 직전왕이었던 숙종이 승하하자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백망, 심상길, 홍의민 등이 이전에 왕세자였던 경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종시해음모의 주동자들은 재미있게도 한결같이 노론 4대신들의 아들들이거나 조카들이었다. 이제 경종은 그 아들들을 비롯하여 유배중이던 노론 4대신들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사사하였다. 반면에 이 서인소론 일당의 편에 서서 시해음모를 고변한 남인 목호룡은 훈작을 수여받았다. 이 경종시해음모사건은 서인소론 김일경 일당들과 남인 목호룡이 경종을 보호하는 동시에 정적들인 노론일당들과 연잉군을 확실히 억압하기 위한 자작극이었다. 이것이 임인옥사이다.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합쳐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1724년 경종 4년 경종이 동궁에서 올린 게장을 먹고난지 5일만에 승하하였다. 한의학에서는 게장과 곶감은 상극이라고 알려져있다. 경종은 왕세제인 연잉군이 직접 달인 인삼차를 마셨는데 그 날 승하하고 말았다. 한의학에서 인삼차는 식중독에는 최악이라고 알려져있다. 한편 경종과 왕비 선의왕후 어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언급했다시피 왕세제는 경종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이었다.

1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즉위하여 영조가 되었다. 영조의 왕비는 정성왕후 서씨였다. 영조는 연잉군시절 정빈이씨와의 사이에 경의군 즉 후일의 효장세자를 두고 있었지만 정빈이씨는 1721년 갑작스럽게 타계하였었다. 이해를 돕자면, 영조의 부친은 숙종이었고 모친은 후궁 숙빈최씨였다. 경종은 그의 이복 형이었다. 숙빈최씨는 입궐 당시 궁궐의 최하급로서 우물에서 물을 길던 무수리 출신이었다. 이제 경종비인 선의왕후 어씨는 왕대비가 되었고 창경궁의 저승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서인노론과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득세할 차례였다. 직전 왕인 경종의 배후에서 위세를 떨쳤던 소론의 거두인 김일경과 소론을 편들었던 남인 목호룡은 가시방석 위에 앉게 되었다. 영조는 직전왕 때의 조작사건과 관련하여 서인소론 김일경과 목호룡을 소환하였다. 재미있게도 서인소론 김일경은 고문을 받으면서 영조를 나으리라고 불렀다. 남인 목호룡은 참수되었는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거리에서 전시되었고 그가 거짓 밀고한 글은 불태워졌다.

1725년 영조는 타계한 정빈이씨와의 소생인 경의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다. 경의군은 이제 효장세자가 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숙종과 경종 때의 서인 일당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붕당하고 서로 당쟁하면서 모략하고 사화를 일으켰으므로 정치적으로 대단히 혼란하였다. 영조 자신도 신임사화를 몸소 지켜본 터였다. 중국 송나라때 구양수는 붕당과 관련하여 군자끼리는 도가 같으므로 붕하고 소인끼리는 이가 같으므로 붕한다고 하였다. 탕평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붕당하고 당쟁하는 것을 없애겠다는 것으로서 정치적 안정에 역점을 두겠다는 것이었다. 탕평의 기원은 서경의 홍범조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에 있다.

1726년 효장세자는 세자빈으로서 조문명의 딸을 맞이하였다. 효장세자는 8살이었고 세자빈 조씨는 13살이었다. 이 현빈은 나중에 효순왕후 조씨가 될 것이다.

1728년, 참형된 서인소론 김일경의 아들인 김영해와 이인좌는 영조에 대항하여 청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인좌는 대원수가 되었고 밀풍군 탄을 옹립하였다. 밀풍군 탄은 소현세자의 증손자였다. 경종비였던 선의왕후 어씨는 내통하고 있던 이인좌에게 비밀리에 언문 교서를 내렸다. 왕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잡아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관군은 곧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인좌 등 반란주모자들은 한앙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되었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의 훈작이 주어지는데 그 공신에는 이광좌, 박문수, 조현명, 조문명 등 이었다.

1728년 11월 16일 효장세자가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10세였다. 나중에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가 된다.

1735년 영조 12년 영조와 후궁 영빈이씨 사이에 원자가 출생하였다. 이 원자는 출생한지 1년 만에 세자로 책봉이 되었다. 왜냐하면 효장세자가 일찍 타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위로 화평옹주와 화협옹주를 두고 있었다. 곧 사도세자는 모친인 후궁 영빈이씨와 헤어지고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가 되었고 내시들과 나인들이 그를 보살폈다.

1741년 이인좌의 난때 공을 세웠던 박문수가 어영대장이 되었다. 어영청은 대궐을 숙위하고 도성의 치안을 담당한 부서였다.

1744년 영조 20년 사도세자는 홍봉한의 둘째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사도세자는 10살이었고 세자빈 홍씨는 11살이었다 이 세자빈 홍씨는 나중에 한중록을 쓰게되는 현경왕후 혜경궁 홍씨이다. 홍봉한은 다음해에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급제하였고 후일 어영대장을 거쳐 영의정에 승차한다.

1750년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5군영이 설치되자 조선의 양인 장정들은 군역을 위하여 1년의 2필의 군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영조는 1년 2필의 군포를 1포로 줄였고 이제까지 군포를 면제받던 부농층과 도고들에게는 선무군관이라는 명예직을 부여하여 군포를 거두었다. 또 균역청은 지주들의 토지1 결당 2말의 결작미를 군포로서 징수하였을 뿐만아니라 어세, 염세, 선박세를 징수하였다. 한편 도고란 독점판매 상인조직이었다. 도고는 농산물과 공산물 등을 매점매석하거나 독점하여 이윤를 극대화하였다. 도고는 자본력과 상술을 이용하여 생산자들에게 원료와 생산비를 선대하기도 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물가불안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1750년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 사이에 세손 정이 태어났다. 세손 정은 출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다.

1752년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세손 산을 출산하였다. 그는 후일 정조가 될 것이다.

1754년 사도세자는 숙빈임씨와의 사이에 은언군을 낳았다. 은언군은 후일 철종의 조부가 될 것이다. 1756년에는 은신군을 낳았다. 은신군은 후일 고종의 증조부가 될 것이다.

당시 조선인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총 인구는 731만 여명 이었다. 남자는 353만이었고 여자는 378먄 이었다.

1757년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가 타계하였다. 정성왕후 서씨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일 때 혼인했던 정비였다. 영조와 정성왕후 서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향년 66세였다. 그로부터 40일후에는 대왕대비이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71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원왕후 김씨는 연잉군이 왕세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왕세제가 된 연잉군을 양자로 입적하기도 했다.

1759년 영조는 새왕비로서 김한구의 딸인 김문주를 맞아들였다. 영조는 66세였고 김문주는 15세였다. 그녀는 정순왕후 김씨가 되었다.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거가 물이 깊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여 영조를 감동시켰다.

1759년 사도세자는 경빈 박씨와의 사이에 은전군을 낳았다. 후일 은전군은 자신의 이복형인 정조에 대항하여 역모한다. 그리고 역모가 실패하자 사사된다.

1762년 2월 세손인 산은 세손빈으로서 김시묵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손인 산은 11살이었다. 세손빈은 10살이다 그녀는 효의왕후 김씨가 될 것이다.

1762년 5월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인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가 세자빈을 칼로 찔러 죽이려 한 일과 여승을 궁궐에 끌어들여 질서를 어지럽힌 일, 또 20일간 평양을 미행했던 일 등 이었다. 사도세자는 의대증이 있었는데 옷을 입을 때 몸이 원할하게 움직이지 못하여 옷이 자주 찢어졌고 따라서 옷감에 상당히 민감하였다. 사도세자는 옷을 입다가 발작을 하면 옷 착용을 도와주는 궁녀나 내관들을 죽였고 나중에 후회하곤 했다. 나경언의 상소와 더불어 노론일당들인 김한구, 김상로, 홍계희, 윤동도 등도 사도세자가 환관들과 함께 영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1762년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세자하고 창경궁 홍화문의 오른편의 뒤주에 가두고 망치질을 하였다. 사도세자는 7일 동안 갇혀있다가 굶어죽었다. 향년 27세였다.

1764년 영조는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 사이의 세손인 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다.

1770년 영조는 반계수록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저서로서 26권으로 되어있다. 유형원은 효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성리학과 농업을 연구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토지조세제도, 군사제도, 관리제도를 실증적으로 비판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토지를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고 자작농을 육성하자는 균전제를 제안하였고 과거제도 대신 천거제의 일종인 공거제를 옹호하였다. 또 3정승 중에 영의정만을 남겨두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하였고 군사면에서는 병농일치와 무기개량, 성곽축성을 제안하였다. 또 노비제도로서 종모법을 실시하여 노비수를 점차적으로 줄여나가자고 하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적 토대라고 보겠다.

한편 이익은 유형원의 제자였는데 성호사설을 저술하였다. 이익은 토지제도로서 한전제를 주장하였다. 한전제란 농민들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토지로서 영업전을 두고 그 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하자는 것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천문학을 다루었고 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백두대간, 풍수설에 대하여도 서술하였다. 재미있게도 이익은 삼한사회 백성들의 기원을 중국 전국시대의 한나라에서 찾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을 쓰면서 방법론적으로 고증학을 사용하였다 고증학이란 틀린 사실을 객관적 자료에 비추어서 수정하는 것이다.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은 성호사설을 요약한 성호사설유선을 저술하였다.

1775년 미국의 조지 워싱턴은 제 2차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개 주의 대륙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각 주에 군사와 전쟁물자를 요구하면서 대영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에 들어갔다. 이전에 대영제국은 프랑스와 인디안을 상대로 승리하여 일부의 땅을 차지하기는 하였지만 전쟁비용이 많이들었다. 영국의 의회는 비용을 벌충하기 위하여 식민지 미국에 과세하였고 영국왕 조지 3세는 이러한 식민지 대표들의 동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승인하였다. 이제 미국인들은 대표없이는 과세없다면서 반발하였다. 당시 대영제국은 항해법을 이용하여 미국의 경제를 억압하고 있었는데 미국인들은 보스턴에 정박중이던 영국상선의 홍차를 바다에 내다버려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되자 대영제국은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영제국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1776년 7월 4일 식민지 13개주의 대표들은 미국의 독립선언에 서명하면서 U.S.A를 착공하였다. 미국은 이어서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또 스페인과 네델란드와도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사라토가 전투와 요크타운 전투(1781)에서 영국군에 승리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1783년 영국과 강화하고 파리조약을 체결하여 독립 U.S.A를 준공하였다.

1776년 영조 52년 3월 5일 영조가 83세의 일기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의 숙빈최씨 사이의 원자였고 자신의 이복형인 경종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세제가 되었다. 경종이 승하하자 그를 대신하여 왕위를 승계하였었다.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의 소생인 효장세자는 유년시절에 요절하였고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의 소생인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서 7일만에 굶어죽었다. 사도세자의 장남은 3살때 요절하였으므로 차남인 산이 왕세자위를 승계하였었다. 영조는 붕당을 억제하고자 탕평책을 실시하였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였다. 또 떠오르는 부농층과 도고 상인들에게도 군역을 부담시켜다

1776년 3월 10일 26세의 왕세자 산이 정조로서 즉위하였다. 세자빈 김씨는 효의왕후 김씨가 되었다. 정조의 할아버지는 영조였고 정조의 부친은 뒤주에서 타계한 사도세자였다. 정조의 모친인 혜빈 혜경궁 홍씨는 당시 43세였다.

정조는 즉위 3일만에 홍국영을 승정원의 동부승지에 임명하였다. 홍국영은 정조의 모친인 혜빈 혜경궁 홍씨와 11촌 간이었다. 정조는 이제 노론 벽파의 숙정에 들어갔다. 노론벽파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죽도록 힘을 모았던 반사도세자파였다. 반면에 노론 시파는 사도세자와 세손인 지금의 정조를 보호하고자 하였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타계하자 노론시파의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이제 정조가 즉위하게되자 노론벽파 일당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꼴이 되었다. 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동생인 노론벽파 김귀주와 홍인한은 각각 흑산도와 고금도에 위리안치되었다. 한편 위기에 몰린 노론벽파 홍계희 일족은 정조를 암살하려고 모반을 꾸몄지만 사전에 발각이 되고말았다. 반란은 성공하면 반정이 되지만 실패하면 역모가 된다. 노론벽파 홍계희 일족과 정후겸, 문성국 등은 사사되었다

정조는 즉위 초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28개 별자리중 규성은 인재를 뜻한다. 규장각이란 인재들이 모인 곳이란 뜻이다.

1777년 홍상범은 정조를 시해한 후에 은전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음모를 꾸몄다. 은전군은 사도세자와 경빈박씨 사이의 아들로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은전군은 평소 사냥을 좋아하고 여색을 즐겼다. 장사 전흥문은 비수를 품고 대궐로 들어가려다 수문장에 걸려서 포도청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였고 모든 사실을 실토하였다. 이것이 은전군 추대사건이다. 홍상범 일당은 죽음을 당하였고 은전군 또한 사사되었다.

1778년 정조는 홍낙춘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다. 이 원빈홍씨는 당시 세도였던 홍국영의 누이동생이었다. 원빈홍씨는 다음해에 괴질로 온몸에 반점이 퍼지면서 타계할 것이다.

1779년 홍국영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홍국영의 세도 3년간 전정, 군정, 환곡이 많이 문란해졌다. 2년 후 홍국영은 34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1780년 서얼출신 박제가는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박제가는 2년 전 사은사인 채제공을 따라서 연경(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청나라의 선진문물에 느낀 것이 많았다. 박제가는 우리의 농업 도구와 건축 기술은 청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므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실용적으로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 2년후 박지원은 청나라 여행을 기록한 열하일기를 간행하였다. 박지원도 인정했다시피 그 내용은 기존의 성리학적인 관념론과는 동떨어진 실사구시의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것으로 박제가의 북학의와 맥을 같이한다.

1781년 정조 5년 정조는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모두 서자출신이었고 서로 친구였다. 규장각이란 28개의 별자리중 규성에서 따온 것으로 규성이란 인재를 뜻한는 것이므로 규장각이란 인재들이 모인 곳을 말한다. 규장각은 고서들을 수집, 보관하였고 도서를 출판하였다. 또 과거시험을 주관하였고 문신들을 교육하였다. 정조는 즉위한 1776년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설치하였었다. 정조는 1782년 강화도에 새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이것이 외규장각이다. 후일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외규장각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일부 문헌들은 약탈되어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1782년 정조의 궁녀 성씨가 왕자를 출산하였다. 이 왕자는 3개월 만에 원자로 봉해졌고 궁녀 성씨는 정식으로 소용 성씨로서 후궁이 되었고 곧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2년 후에 이 원자는 왕세자로서 책봉이 되었다. 이 왕세자는 문효세자이다.

1783년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출판금지시켰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전통적인 문체와는 다르게 파격적이고 개성 넘치는 문체를 구사한 것이 그 이유였다. 이것이 정조가 주도했던 문체반정이다.

1784년 29세의 이승훈은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서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을 받고 천주교 서적을 구입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북경 남천주당의 그라몽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다음해 성서와 묵주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벽, 이가환 그리고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3형제 등과 함께 지금의 명동인 명례방에 조선 최초로 천주교회를 설립하여 미사와 강론을 행하고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천주실의는 포교의 기초가 되었다. 천주실의는 명나라 말기때 마태오 리치가 명나라 포교를 위해서 지은 책이다. 천주실의는 인간의 영혼불멸과 성선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범신론적 일신론을 비난하였다. 천주교는 사물의 근원이 천주에 있다고 말한다. 한편 유교에서 만물의 근원은 태극에 있다. 불교에서는 현상하는 모든 것은 공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교에서는 모든 사물은 무에서부터 나온다고 강조한다.

1786년 5월 11일 왕세자인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5세였다. 그로부터 3개월후 문효세자의 모친인 의빈 성씨는 출산을 앞두고 갑자기 타계하였다.

1787년 정조는 후궁으로서 좌찬성 박준원의 딸을 맞이하였다. 정조는 36세였고 새 후궁인 수빈박씨는 18세였다. 수빈박씨는 다음 해에 원자를 생산하였다. 이 원자가 후일 순조이다.

1789년 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프랑스군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성직자와 귀족에게 토지세를 부과하려고 명사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성직자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토지가 과세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루이 16세는 평민들이 포함된 삼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삼부회의는 성직자 대표와 귀족 대표 그리고 평민대표로 구성되어있는데 1614년 태양왕 루이14세때 이후로 150여년 개최되지 않았었다. 이 삼부회의에서 성직자 대표와 귀족 대표는 신분별 표결방식을 주장했으나 평민대표는 머리 수로 표결하자고 대항하여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평민대표들은 루이 16세의 실내 테니스코트에 따로 모여서 새로운 의회를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는 진보적인 캐돌릭 성직자와 자유주의 귀족도 합세하였다. 이들은 7월 9일 국민헌법의회(National Constituent Assembly)를 구성하고 프랑스 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였다. 7월 14일 왕당파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 국민헌법의회를 억압하려고하자 파리시민들은 관군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의 저항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8월 14일 국민헌법의회는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8월 26일에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당초 이것들을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흉작으로 인한 물가불안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루이 16세는 마지못해 그것들을 승인하였다.

1791년 채제공은 금난전권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금난전권은 일종의 독점권이었다. 채제공은 시전상인들의 폐해가 심하므로 난전을 인정해주자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정조 즉위 초부터 상공업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백성들의 욕구도 증가해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시전상인들은 전안에 등록되었다는 특권만을 이유로 갖가지 물품들, 즉 포목, 종이, 약초등을 독점판매해 왔다. 이러한 독점판매는 금난전권으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었는데 상공업발전의 저해와 물가상승을 가져왔다. 정조는 즉각 모든 상인들에게 판매권을 인정해주었다. 단, 육의전 상인들은 여전히 독점판매권을 유지하였으므로 다른 상인들은 육의전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품은 거래할 수 없었다. 이것이 신해통공이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은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유교식 장례를 행하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아니하였다. 또 모친의 유언대로 캐돌릭 장례식을 행하였고 집안의 신주도 불살랐다. 이를 보고 분개한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에 탄핵상소문을 올렸다. 조정의 서인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윤지충를 사형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정조는 윤지충의 사형을 윤허하였다. 윤지충는 전주 남문 밖에서 사회도덕을 문란케했다는 죄목으로 참수되었다. 그는 순교자의 피는 신심이 씨앗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신해박해이다. 진산사건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서인노론시파의 조언에 따라서 천주교의 교주역할을 하고있던 권철신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였다. 이후로 천주교는 지하화되었다. 그런데 조정은 이 천주교 사건과 관련하여 남인 채제공의 신서파와 홍의호의 공서파로 나뉘어져서 신유박해까지 10년 동안 서로 대립한다.

당시 조선천주교는 북경 교구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수도사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수도회는 먼저 중국대륙에 들어간 예수회와는 다르게 제사를 엄격하게 규제하였으므로 조선 천주교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후일 1965년 바티칸공의회는 '전교지의 문화와 풍습에 따라서 전교하라.'고 명하였다.

1791년 프랑스 입법의회는 입헌군주헌법을 제정하였고 곧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결과는 푀양파와 지롱드파 그리고 자코뱅파가 다수당이 되었다. 푀양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고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는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1792년 입법의회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 수행해나가기 위하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9월 20일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승리를 거두었다. 곧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1793년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입헌군주제는 붕괴되었다. 곧 국민공회는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하였다. 1월 21일 루이 16세는 2만 여 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콩코드광장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후에 처형되었다. 영국과 스페인 그리고 사르디나 왕국은 충격을 받았고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하여 군대를 소집하였다. 한편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는 의회에서 지롱드당을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재판소와 공안의원회를 설치하여 공포정치를 실시하면서 에베르파와 당통파를 숙정하기 시작하였다.

1794년 제주도에서는 가을태풍이 몰아닥치고 대흉년이 들어서 600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조정은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을 보냈다. 그런데 식량을 수송하는 선박이 도항중에 침몰하고 말았다. 제주여인 김만덕은 재산을 풀어서 쌀 500석을 사들이고 그 중 450석을 기부하였다. 당시 김만덕은 전라도의 양곡과 제주도의 약초와 해산물을 거래하던 객주였다. 정조는 김만덕의 선행을 알게되자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김만덕은 당시 섬의 출륙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한편 객주란 상품 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매매하거나 알선하는 중간상인이다. 객주들은 상품보관을 위한 창고업, 상품이전을 위한 수송업, 상품대금 융통과 어음발행 등 금융업 그리고 식사와 잠자리등 여관업도 겸하였다. 객주들은 거대 자본력을 바탕으로 동업조합을 형성하였고 이윤을 위한 도고(독점)와 매점매석도 행하였다.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탈리앵의 탄핵을 받았다. 그 다음날 로베스피에르와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하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이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1795년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총재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이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이다. 이때 나폴레옹이 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곧 나폴레옹 장군은 이집트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고 시민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96년 수원 화성이 준공되었다. 착공 2년 만이었다. 이 수원성은 정약용이 제안한 거중기를 사용하였으므로 노동력을 절감하고 생산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었다. 화성은 화강암과 함께 벽돌을 쌓아올려서 지었다.

1799년 나폴레옹 장군은 브뤼메르 18일에 쿠네타를 일으키고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 1대 대통령이 되었다. 프랑스의 제 1공화국이 10년도 안되서 붕괴된 것이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49세였고 등에 종기가 있었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서 굶어죽은 부친인 사도세자를 승계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정조는 수빈박씨와의 사이의 원자인 공을 왕세자로 책봉했었다. 왕세자 공은 순조가 될 것이다. 정조대에는 관념적인 성리학보다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실학이 융성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