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6일 수요일

6. 선조-광해군

1567년은 선조가 즉위한 해이다. 선조는 직전왕인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후사가 없었으므로 명종의 방계혈족으로서 보위에 오른 것이었다. 선조는 중종과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원군이었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16살로 어렸으므로 인순왕후 심씨가 1년간 수렴첨정하게 되었다. 선조 2년인 1569년 선조는 왕비로서 박응순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15살이었고 의인왕후 박씨가 된다. 그녀는 후일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을 것이고 후사없이 타계할 것이다.

선조는 1574년에 후궁인 공빈김씨와의 사이에 임해군을 얻었고 3년 후에는 광해군을 얻었다. 그러나 공빈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후에 타계하였다. 향년 26세였다. 한편 1577년 선조는 또 하나의 후궁인 인빈김씨와의 사이에 의안군을 얻었고 그 다음해에는 신성군을 얻었으며  나중에는 정원군을 얻게 될 것이다. 후일에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은 인조가 될 것이다.

심의겸은 어린 선조를 대신해서 수렴청정했던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이었다. 당시 심의겸은 이조참의였다. 마침 이조정랑인 오건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김효원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소윤 윤원형이 계파였다는 것을 이유로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김효원은 우여곡절 속에서 다음해인 선조 6년 이조정랑에 승차하였다. 그런데 다음해인 선조 7년에 이조정랑 자리가 비게 되자 조정기가 자신의 후임으로 심충겸을 천거하였다. 그런데 심충겸은 심의겸의 동생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조정랑 김효원이 이것을 결사반대하였고 그리하여 심충겸은 낙마하고 대신에 이발이 승차하였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서 조정은 양쪽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쪽은 서인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동인이 되었다. 심의겸은 한양 서쪽인 정동에 살았으므로 서인이 되었고 김효원은 한양 동쪽인 건천동에 살았으므로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후일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동인은 이발의 북인과 우성전의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어서 동인의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1589년 선조22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정여립은 이이 문하의 서인이었는데 서인들 내에서 마찰을 일으킨 때문에 동인으로 이탈해나갔다. 그래서 정여립은 고향인 호남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거기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계를 조직해서 노비와 무사를 끌어모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는 왜구를 섬멸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고 자신의 세력을 황해도로 진출시켰다. 재미있게도 황해도 관찰사는 정여립이 선조에 대항하여 역모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말았다. 즉시 조정은 체포령을 내렸고 관련자들을 압송하였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의 토굴에서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은 또다른 파장을 가져왔다. 이것은 기축옥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인은 정여립을 역모로 몰았던 반면에 동인은 그것을 반박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희생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기축옥사이다. 당시 서인 송익필은 송사련의 아들이었다. 송사련은 중종때 신사무옥의 주모자였다. 이전에 송사련은 안당을  밀고하여 안당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일약 천민의 신분에서 당상관으로 승차하였었다. 그런데 선조가 즉위하면서 안당의 손자인 안로의 처 윤씨부인이 안당의 처사가 부당하였음을 상소하였고 선조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송사련의 70여 일족은 재산의 몰수되고 다시 천민이 되었었다.  이때 이발을 비롯하여 동인들이 많은 기여를 하였었다. 이제 송사련의 아들인 서인 송익필은 동인들을 경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송익필과 정철을 주축으로 한 서인들은 이 기축옥사를 톻하여 호남의 많은 동인들을 희생시켰다.

서인 정철은 그후 좌의정이 되었다.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신성군의 모친인 의빈 김씨는 내심 신성군이 책봉이 되기를 바랬던 나머지 정철에 반발하였고 이에 부화뇌동하여 선조 또한 정철을 미워하게 되었다. 의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영의정인 동인 이산해는 마침내 서인 정철을 강계로 유배보내는 데 성공하면서 서인들을 보복하였다. 이것을 건저의 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동인들은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철을 죽여야한다는 북인과 살려두자는 남인으로 갈라졌는데 정철에 대하여 강경파였던 북인은 이산해와 정인홍 그리고 이발이었다. 다행히 정철이 유배를 가게되자 이발은 정철을 대신해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정철에 대하여 온건파였던 남인은 우성전과 유성룡 등이 있었다. 나중에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진다.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1583년 일본전토를 장악하였고 1585년에는 드디어 관백이 되었다. 관백이란 천황 바로 밑인 간바쿠로서 조선의 영의정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 간바쿠 밑에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있었는데 이 다이묘들 즉 지방의 영주들은 주어진 토지와 가신, 농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전 1336년 무로마치 막부시대가 열렸다. 세월이 흐르자 각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충성하고 있던 가신들이 하극상을 벌리고 다이묘들에게 대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혼란한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승전하였고 나중에는 큐슈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이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했던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되었다.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상문제로 겐소와 소 요시토시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따라 조선도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서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선통신사 일행들은 1590년 본국으로 돌아왔다. 조선통신사의 정사였던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곧 조선을 칠 것이므로 전쟁이 임박하였다고 말하였고 부사였던 동인 김성일은 이것을 부정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사체계는 제승방략이었다. 제승방략은 세종때 김종서가 함길도의 6진을 개척하면 사용했던 군사전략이었다. 진관법이 지역방어의 전략이라면 제승방략은 대인방어라고 볼 수 있다. 제승방략은 중앙의 순변사가 각 도의 병력을 특정한 곳에 집결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반면에 진관법은 각 도의 군사요충지인 진이 독자적인 병력과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유성룡은 선조에게 제승방략체계를 진관법체계로 바꿀것을 건의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은 총병력 28만을 16군으로 나누어서 제1군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를 필두로하고 제2군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필두로 하여 조선진출을 시작하였다. 또 제 16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마지막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출정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일본의 대의명분은 정명가도였다. 명나라를 치고자 하므로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에따라 왜구들은 일본상인들의 후원을 힘입어서 더더욱 명나라 해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임진년 4월14일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하였고 이어서 송상현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10일 후에는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을 상주에서 패퇴시키고 경상도를 장악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4월24일 충주의 탄금대에서 달천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치고있던 신립의 조선군대를 물리쳤다. 이때 신립과 부장 김여물은 자결하였다. 신립의 기병대는 이 날 비가 많이 왔으므로 땅이 질퍽해져서 파괴력있는 돌파를 하지 못하였다. 한편 제 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과 영천을 거처서 충주에 당도하였고 제 1군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합세해서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은 개전 20일만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이미 조선왕실과 조정은 피난을 떠나 평양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끌어모으는 한편 공명첩을 이욯하여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공명첩이란 곡식과 벼슬을 맞바꾸는 것이었는데 광해군은 이것을 합리적으로 매관매직에 이용하였다. 한편 한양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안도로 진격하였고 6월 13일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때 선조는 의주를 향하여 피난길을 떠나 있었다. 한편 일본군 제 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출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을 바탕으로 5월 사천해전, 6월 당포해전, 7월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병력보충과 물자 그리고 보급품 수송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청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었으나 금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곽재우와 김시민은 진주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금산성에서 전사하였고 김천일은 진주에서 전사하게 될 것이다. 정문부는 함경도 길주와 경성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었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과 그의 제자 유정은 1500여명의 승병을 끌어모아서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시민은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권율은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것으로 조선 최대 곡창지역인 전라도는 안전하게 보전되었다.

명나라의 신종, 즉 만력제는 조승훈과 병력 5천을 구원군으로서 조선에 파병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점령당한다면 명나라로서도 좋을 리가 없었다. 순망치한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릴 수밖에 없다. 만력제의 조선파병 결정은 명나라의 연장을 위한 자구책일 수도 있었다. 조승훈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서 이여송은 병력 4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드디어 탈환하였고 그러자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이때는 1593년 1월 이었다. 퇴각한 일본군은 경기도 벽제관에서 병력을 정비하면서 전력을 최상으로 끌어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일본군은 벽제관에서 이여송의 명나라군대를 상대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는 개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일본군은 성종의 묘인 선릉과 중종의 묘인 정릉을 파헤쳤는데 선릉에서는 시신이 없었다. 이어서 일본군은 함경도에서 후퇴하고 돌아온 가토 기요사마와 합세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 분전하여 승리하였다.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는 심유경을 보내어 화의를 추진하였다. 한양의 일본군 본진은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화의에 응하였고 4월에는 전군을 남하시켜서 서생포와 웅천, 즉 창원에 성을 쌓고 화의의 결과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병력 12만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진주성은 조선군 3천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9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함락되고 말았으나 일본군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이 전사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에서 가장 치열했던 제 2차 진주성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명나라와의 강화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훈련도감의 창설을 건의하였다. 훈련도감이란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들이 궁궐과 수도한양을 방위하는 관청이다. 병력은 10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포수와 사수, 살수로 나누어서 3개의 조직으로 만들었고 이것을 삼수병이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직업군인 예니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얀피부를 갖고 있었고 대부분 슬라브족 출신들이었다.

한편 이 난리로 인하여 기근과 전염병이 퍼졌고 식인도 행하여졌다. 이때 말 한필 값이 쌀 서너말이었다. 쌀에 대한 수요는 과잉이었고 쌀의 공급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쌀의 실물가치는 급상승하였다.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이었던 것이다. 물가의 안정을 되찿기 위해서는 안정된 토지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쌀의 생산을 늘려야 했다.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이몽학은 전주이씨이자 왕가의 서얼이었는데 전쟁과 흉년, 전염병으로 민심이 사나와지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선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이몽학의 반란군은 수천명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홍주성을 빼앗앗다. 이에따라 도원수 권율은 관군을 이끌고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김경창이 이몽학을 주살하는 일이 있게 되면서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경창은 이몽학의 부하였다. 선조는 김덕령과 곽재우를 이 역모에 관련이 있다고 하여 친국하였는데 김덕령은 매를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일이었다.

1597년 일본군은 남해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것이 정유년 1월14일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가토 기요사마가 선봉군인 제1군으로서 부산으로 침략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 2군으로서 웅천 즉 창원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하삼도를 점령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가토 기요사마가 부산을 재침략하였을때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나가싸우라는 명령을 밭았음에도 이것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조선조정이 일본의 계략에 말려들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순신은 명령불복종으로 파면되었고 대신에 원균이 새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7월4일 원균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는데 크게 당하였다. 조선수군은 패주하였고 거북선을 포함하여 판옥선 300여척중에서 170여척이 매몰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칠천량해전인데 이것으로 남해안의 제해권은 일본군으로 넘어갔다.

조선조정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인 7월22일 이순신을 새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군이 전라도까지 침입해 있었고 일본군은 방화와 약탈,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남원성에서는 소금에 절인 조선인의 코가 5만 이상이나 되었고 10만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중 대부분은 도공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쓰마주에게 명령하여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오도록 하였던 것인데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들 조선포로중에 일부는 포르투갈의 노예시장에 팔려나갔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였고 마침내 직산에서 조선 명나라 연합군과 조우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대패하였고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진도의 울돌목 명량에서 조선수군 13척을 가지고  일본수군 133척을 대파하였고 그러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1598년 9월 조선 명나라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과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왜성, 가토 기요사마의 울산왜성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때 조선 명나라 육군과 수군이 서로 협력하면서 공격하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일본군은 철병하기 시작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을 숨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향년 62세였다. 이순신과 명나라 도독 진린은 조명연합수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퇴로를 노량에서 차단하였다. 1598년 11월19일 새벽 4시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그날 낮 12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 함대 500여척 중에서 450여척을 파괴하였다.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지 못한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안타깝게도 이 순신은 이 노량해전 전투에서 일본함대를 추격하던 중에 적병의 총탄을 맞고 타계하였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세살 연하였는데 같은 하회마을 출신이었다. 이것으로 7년간 이어졌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한편 서양에서는 1571년 레판토 해전이 일어났다. 스페인과 베네치아, 제노바 등 신성동맹국은 갤리선 203척을 이끌고 오스만 투르크의 갤리선 함대 230척에 대항하여 그리스의 고린트만 레판토에서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전에 오스만 투르크의 알리 파샤는 지중해의 키프로스를 점령하였고 서진을 계속하여 이탈리아를 침략하려고 하고있었다. 이때 교황 비오 5세와 스페인왕 필립2세가 중심이 되어서 연합군을 형성하였고 오스만투르크의 서진을 성공적으로 막아서 이탈리아를 보호할 수 있었다. 레판토 해전은 10월 7일 아침에 교전하여 5시간만에 끝이 났다. 신성동맹군은 7500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12척의 갤리선을 상실한 반면에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는 2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갤리선 137척이 나포되었고 50척이 침몰되었다. 한편 이때 돈키호테를 지은 작가인 세르반테스도 신성동맹군으로서 참전하였는데 부상을 당하여 그후 평생 왼손을 쓸 수가 없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함대에 의해 궤멸당하였다. 스페인 왕 필립 2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왕권을 무너뜨리려고 영국침공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의 후원자이었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캐톨릭국인 스페인으로서는 영국의 지원을 차단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영국으로부터 보호하여야 했다. 또한 스페인 편이었던 교황 식스투스 5세도 스페인군이 영국에 상륙할 경우에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스페인을 지원하였다. 초반에 영국함대는 선제 기습공격을 하였으므로 프랑스와 네덜란드 경계에 정뱍해있던 스페인 함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무적함대는 6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영국함대의 전사자는 100여명이었다. 그러자 스페인은 본토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는데 퇴로인 영국해협이 영국함대에 의해 차단되었으므로 멀리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함대는 퇴각을 시작하였고 다행히 스코틀랜드를 무사히 지났지만 아일랜드 북부에서 큰 폭풍을 만나서 24척의 배가 난파되었고 150척중에서 50여척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때 2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로인하여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이용하여 영국을 침략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경복궁을 비롯한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들이 소실되었고 역대 실록을 보관해왔던 사고 중에 유일하게 전주사고 만이 남았다. 일본은 고추와 담배를 전래하였는데 조선은 종래의 동치미와는 맛과 모양이 다른 김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은 사서오경을 필사해 주었는데 이것은 조선주자학을 일본에 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권력승계를 놓고 전투가 벌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정략결혼을 시켰두고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파들에 대항해서 세끼가하라 전쟁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바쿠후가 되어서 에도시대를 열었다. 한편 고니시 유끼나가는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당하였고 시마즈 요시하라도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로 영지를 보장받았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교역을 중단하는 등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1602년 선조는 51세였다. 선조는 두 해 전에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후사없이 타계하였으므로 새 왕비를 맞이하였다. 새 왕비는 김제남의 딸이었는데 16세였다. 그녀는 계비 인목왕후 김씨로서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장자가 된다. 광해군은 차기 왕권과 관련하여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조는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경작지가 줄어들었므로 각 지방에 어사를 파견하여 양전을 실시하였고 납속책을 실시하여 재정을 확보하였다. 납속이란 곡식을 받고 벼슬을 주는 것으로서 납속수직이라고도 하였는데 양반이 쌀 백섬을 기부하면 동반 정3품에 승차할 수 있었고 서얼이 쌀 100섬을 기부하면 동반 6품에 승차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납속책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었다. 또 선조는 시전, 염분, 어전을 왕자와 옹주들에게 경제적 편의를 위하여 나누어줬는데 이것은 궁방전의 기초가 되었다.

선조는 1604년 유정을 일본에 보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협정을 맺게 하였고 왜관에 시장을 상설해서 통상하기로 하였다. 한편 유정은 일본에 끌려간 조선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57세였다. 선조는 중종과 후궁 창빈안씨와이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원군이었다.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 박씨는 전란중에 후사없이 타계하였고 후궁인 공빈김씨와의 사이에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두었고 또다른 후궁인 인빈김씨와의사이에는 신성군과 정원군 등을 두었다. 나중에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은 인조가 된다. 또 선조는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적자인 영창대군을 두었다.

광해군은 왕세자이긴 하였지만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남으로 해서 저으기 불안하였다. 광해군 자신은 후궁의 소생이었으므로 세자위가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책봉을 구하고 확인을 받아오는, 즉 고명책봉하는 처지였으므로 광해군은 왕위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정당한 승계위치에 있어야 했다.

1608년 2월2일 광해군이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사이의 둘째아들이었고 전란중이었던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형이었다. 광해군은 왕비 유씨와의 사이에 원자를 두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강홍립 등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파를 중용하였다. 한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소북파는 유영경을 중심으로 적통론을 내세우면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었다.

임해군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한다는 설이 있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자신의 형인 임해군을 전라도 진도에 부처하였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고명책봉에 시비를 걸면서 엄일괴와 민애민 등 차관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엄일괴는 왕권의 적통자로서 임해군을 염두해 두고 있었으므로 전라도 진도에서 강화도 교동으로 부처되어 있던 임해군과 몸소 면담하였다. 재미있게도 임해군은 그자리에서 의자를 들어서 엄일괴를 향하여 던져버렸다. 광해군으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고 위기를 모면한 순간이었다. 한편 광해군의 애첩이자 상궁이었던 김개시는 은 오천량과 인삼 50근을 엄일괴에게 뇌물로 주었다. 임해군은 그 다음해인 1609년 음독하여 타계하였다.

광해군 1년인 1609년 조선조정은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고 통상을 재개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1년에 세사미두 100석을 대마도에 하사하였고 대마도는 세견선 20척에 한하여 조선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대마도주는 부산포에 한하여 교역할 수 있었다. 광해군 2년에는 허준이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나중에 동의보감은 18세기 일본과 청나라에서 번역출판된다. 한편 광해군은 전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기 시작하였는데 백성들의 원성이 적지 않았다.

1611년 광해군은 왕세자의 세자빈으로서 박자흥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자는 그때나이 14살 이었다. 한편 박자흥은 대사헌 박승종의 아들이면서 대북파인 이이첨의 사위였다.

1612년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성균관 학유였던 김직재와 아들 김백함 부자가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들은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을 옹립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순화군은 선조의 서자였다. 그런데 이 역모사건은 김직재가 고문도중에 매를 이기지 못하여 잘못 발설한 것으로서 사실은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위하여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 무고사건으로 인하여 김직재는 참형을 당하였고 진릉군은 위리안치되었다. 그리고 소북파 100명도 처벌받았다.

광해군때 강변칠우는 북한강변에서 술과 시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던 일곱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고관대작의 아들들이었는데 모두 서얼 출신이었으므로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영의정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와 사양갑, 김평손 등이었는데 그들은 세상을 비웃으면서 자신들을 중국의 죽림칠현에 비유해서 강변칠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돈이 떨어지자 유흥비 마련을 위하여 새재에서 은상인을 살해하고 은 수백냥을 약탈했는데 다음해에 포도청에 잡혀왔다. 그들은 포도청에서 진술하기를 김제남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짓진술하였다. 김제남은 영창대군의 외조부였다. 이것을 기화로 대북파들은 소북파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밀어내려고 결심하였다. 광해군은 김제남을 사사하였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 유배보내버렸다.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김씨는 서궁, 즉 경운궁에 유폐되었다.또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은 사사되었다. 그리고 정온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되었다. 한편 강화도에 유배를 가 있던 영창대군은 강화부사 강항에 의하여 증살되었다. 향년 9세였다. 증살이란 아궁이에 불을 높인 후 쪄서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1613년에 있었던 계축옥사이다.

광해군 초기에 세도를 누렸던 인물들은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였던 이이첨과 세자빈 박씨의 조부였던 박승종 그리고 광해군의 왕비인 중전유씨의 부친이었던 유희분 등 이었다.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일어났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아들이었는데 정원군의 부친은 선조였다. 신경희는 서인이었는데 능창군을 옹립하면서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이 되었고 주동자 신경희는 참수되었고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목매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정원군은 아들이 죽은 이 사건 때문에 화병으로 탸계하였다. 나중에 정원군의 첫째아들인 능양군은 반정에 성공하여 인조가 될 것이다.

1616년 광해군 8년에 이이첨은 해주사람 박이빈을 사주하여 소북파인 박승종과 유희빈 등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상소하도록하였다. 해주목사 최기는 박이빈을 문초하는과정에서 이 역모가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으나 발설하지는 않았다. 재미있게도 이이첨은 해주목사 최기를 역모의 괴수로서 몰아붙여서 마침내 그를 때려죽여버렸다. 이 사건으로 소북파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616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을 통일하여 후금을 건국하였다. 누르하치는 대패륵과 소패륵의 합의체에서 칸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후금의 팔기제도는 맹안모극제에서 유래한 것인데 팔기를 구성하는 각기의 수장은 대패륵이 되었고 이들의 합의하에 칸을 추대하였다. 평화시에는 팔기가 사법과 행정 그리고 토지를 관할하는 기준이 되었다.

인목대비 김씨의 모친인 노씨부인은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 김씨가 하루빨리 복위되기를 바라면서 불당에서 발원하였다. 내수사에서는 노씨부인의 생계를 위하여 양곡을 비밀리에 지급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노씨부인을 제주도로 유배보내버렸다. 제주도에 도착한 노씨부인은 생계를 위하여 주점을 열었는데 끼니 때에는 탁주를 걸러낸 찌거기인 모주를  밥 대신 먹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술에 쩔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주모라고 불렀다. 어원상 노씨부인은 조선 최초의 주모였다.

명황제 신종, 즉 만력제는 후금의 누륵하치가 강성해가자 위기감을 느꼈고 신하들에게 조선을 고무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명나라에 협조할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치도록 하였다. 1618년 도원수 강홍립은 조선병 13,000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밀지를 전달하였는데 현지에서 명과 여진의 형세를 보아서 향배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1618년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인 페르디난드 2 세는 전 해에 페르디난드 1세를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는 열렬한 캐돌릭교도었으므로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교도들 즉 루터교파들은 1555년에 있었던 아욱스부르크조약으로 인하여 캐돌릭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종교적 자유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제 그 수가  더 늘어나서 칼뱅파와 재세례파도 등장하면서 캐돌릭을 위협하고 있었다. 한편 황제 페르디난드 2세는 국정에 관여하게 될 대표 3명을 보헤미아에 보냈다. 그런데 보헤미아인들은 그 대표들을 불신하였고 약식재판을 한 후에 그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이것이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다. 이 보헤미아인들의 반란을 기화로 하여 캐돌릭교도와 개신교도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나중에는 덴마크가 개신교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였다. 뒤를 이어서 스웨덴이 개신교편에 서서 전쟁에 등장하였지만 캐돌릭 황제인 페르디난드 2세는 독일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의 지원을 통하여 그들을 무찔렀다. 한편 프랑스는 캐돌릭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캐돌릭과 개신교와의 전쟁에서 개신교를 편들기 위하여 전쟁에 참가하였다. 프랑스의 실권자인 리슐리외와 후임자인 마자랭은 개신교편에 서서 캐돌릭국가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하여 전쟁에 참가하였고 마침내 승리하여 베스트팔렌조약을 맺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은 인구의 4분의 1을 상실하였고 유럽의 지배력은 독일의 합스부르크가에서 프랑스의 부르봉가로 넘어갔다. 또한 개신교국인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을 끝내어 독립을 이루어냈고 스위스도 독립국가가 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도 개신교국을 지원했었고 캐돌릭국인 폴란드와 전쟁을 해서 승리하였었다.

1619년 명나라의 10만 군대는 조선군 1만2천의 군대와 더불어 후금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젼투는 3월 1일의 사르후 전투부터 시작하였다. 강홍립은 명나라 동로군의 장군인 유정과 함께 부차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후금 군대를 상대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강홍립은 남은 군사 5,000을 이끌고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한편 명나라는 이 전투의 패배로 만주를 후금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누르하치는 요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1620년 명나라 만력제, 즉 신종이 타계하였다. 그러자 그의 20세의 아들인 광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광종은 즉위 29일만에 타게하고 말았다. 그는 알악 2개를 먹었는데 급사하고 말았다. 새 황제로서 그의 아들인 천계제, 즉 희종이 즉위하였다. 희종은 문맹이었으므로 국정을 환관에게 넘겨주었고 자신은 취미인 목공일을 하였다. 그로부터 7년후, 희종의 동생이 황제에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즉 의종이다.

광해군은 인목대비 김씨를 유폐했었는데 이번에는 삭호까지 하였다. 삭호란 관작을 삭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목대비 김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광해군의 애첩인 김상궁은 매관매직을 통하여 재물을 확보하였는데 그녀는 장사꾼에게 돈을 빌려서 전결의 세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인 이이첨과 애첩 김상궁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반대파들을 혹독하게 탄압하였으므로 조정은 신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편 강홍립이 오랑케 후금에 투항하자 광해군은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광해군은 조정중신들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삭탈관직하였으나 그의 가족들을 구금하지는 못하게 하였다.

신경진은 임진왜란때의 도원수인 신립의 아들이었는데 한때 부친의 공으로 무관의 일종인 선전관이 되었었다. 그런데 신경진은 광해군과 대북파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귀와 역모모의를 하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그때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왕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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