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0일 화요일

9. 순조-헌종-철종

1800년 순조가 즉위하였다. 순조는 11살이었다. 순조의 부친은 정조였고 모친은 후궁인 수빈박씨였다. 순조가 어렸으므로 영조비였던 정순왕후 김씨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첨정을 하였다. 이전에 정순왕후 김씨가 영조의 계비로서 간택될 당시의 일화는 유명하였다. 영조는 간택될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거나 물이 깊다고 대답하였지만 당시 15세였던 정순왕후 김씨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대답하여 영조를 놀라게 했었다. 또 왕비 책봉이 된 이후에도 일화가 있었다. 상궁이 옷이 치수를 재기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요구하자 정순왕후 김씨는 네가 돌아서면 될 것이 아니냐면서 추상같이 답하였다.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1800년 2월 프랑스의 제 1통령인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다. 당시 알프스를 넘는일은 터부였으므로 참모들은 그를 만류하였었다. 나폴레옹은 그 당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마렝고전투이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강화제의를 받아들이고 강화조건으로서 라인강 주변 영토의 절반을 할양받았고 북이탈리아를 보호국으로 삼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세제도와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공업생산력을 진흥시켰다. 또 나폴레옹은 프랑스은행을 설립하였다.

1801년 천주교신자였던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서인노론 벽파와 짝하여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이전의 정조는 정학론을 펼치면서 정학이 바로서면 사학은 스스로 멸한다고 보고 천주교을 묵인했었다. 천주교도들 중에는 서인노론 시파와 남인들이 많이 있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오가작통법은 다섯집중 한집에서 천주교인이 나오면 전부 처벌하는 연좌제였다. 오가작통법은 성종때 한명회의 건의로 창설되었는데 흉년때 조세와 부역을 위하여 이용되었었고 숙종때는 비변사에서도 오가작통법을 이용하였다.

은언군은 자신은 물론 부인과 며느리도 천주교도였다. 은언군과 송씨부인은 강화도에 부처되었다.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은언군은 후일 강화도에서 태어나게 되는 철종의 할아버지였다. 천주교도 이승훈과 정약종은 참수되었고 권철신은 고문사하였고 이가환은 아사하였다. 그리고 남인 정약용은 유배를 떠났다. 그 해 4월 19일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처형되었다. 남인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은 당시 27세였는데 이같은 조선조정의 천주교탄압을 대외에 알리기 위하여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외국배와 청나라배 수백척과 군사 5만을 동원하여 조선조정을 위협하여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게 하라는 밀서였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이다. 이 밀서가 발각이 되자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황사영은 참수된 후에 육시되었고 그의 부인은 제주도로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갔다. 아들 황창한은 추자도로 귀양갔다.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1801년 프랑스의 천주교, 즉 로만 캐돌릭은 대혁명 이후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와 종교협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 내의 종교적 분쟁을 완화하였다. 또 각 지역의 관습법과 봉건법을 통일하여 프랑스민법전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나폴레옹법전이라고도 하는데 만인의 법앞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등의 가치관을 담고있다. 나폴레옹은 왕당파와 자코뱅파등 파벌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였다.

1802년 순조 2년 순조는 왕비로서 김조순의 딸을 맞이하였다. 순조는 13살이었고 왕비 순원왕후 김씨는 14살이었다. 곧 서인노론 시파 김조순은 훈련대장과 판돈령 부사가 되었다. 순조의 외조부인 박준원은 금위대장이 되었다.

1802년 나폴레옹은 아미앵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의 전쟁을 끝냈다. 영국은 그 당시 피트 수상이 물러난고로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03년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수렴정정을 거두었다. 이어서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부친인 서인노론 시파 김조순이 섭정을 시작하였다. 김조순은 서인노론 벽파 일당을 정조의 유지를 져버린 역적으로 몰아서 김관주와 자신의 친척인 김달순을 처형하였다. 또 서인노론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와 심환지를 삭탈관직하였다. 그리고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일족들도 숙정하였다.

1804년 프랑스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3백 6십여만 표의 다수로 제 1통령 나폴레옹을 황제로 선출하였다.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의 황제즉위식에서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관을 썼고 비오 7세로부터 전통적 관례인 축복기도를 받는 대신에 그를 포옹해주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부르봉왕조가 아닌 로마제국의 계승자임을 선포하였다.

1805년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1세였다. 서인노론 벽파를 후원하고 있던 정순왕후 대왕대비 경주 김씨가 타계함으로써 이제 서인노론 벽파와 서인노론 시파 및 남인 사이의 붕당은 끝이 났고 안동김씨 김조순이 세도로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이 아미앵조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 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아우스터리츠 전쟁이다. 그러나 프랑스해군은 넬슨이 이끄는 영국해군을 상대로 트라팔가해전에서 완패당함으로써 영국상륙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대륙을 장악하였으므로 나폴리의 국왕으로서 자신의 형인 조세프를 임명하였고 네덜란드 국왕에는 자신의 동생인 루이를 임명하였다. 따라서 이제까지 1000년 동안 이어왔던 신성로마제국은 거의 붕괴되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성장에 위협을 받았으므로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함께 제 4차 대프랑스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곧 전쟁에 돌입하였고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려서 대륙의 국가들이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시켰다. 원래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략할 계획이었으나 프랑스의 해군력은 영국에 상대가 아니되었으므로 대신에 영국을 유럽과의 교역으로부터 봉쇄시키면서 먼저 경제적으로 궤멸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국력 또한 막강하였다. 나중에 러시아는 이 프랑스와 체결한 대륙봉쇄령을 위반하여 영국과 교역을 하였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는 불씨가 되었다. 후일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퇴각하면서 급격히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구원하기위하여 파병하였다. 나폴레옹은 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일부와 폴란드를 하나로 묶어서 바르샤바 대공국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를 베스트팔렌 왕으로 임명하였다. 또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쫒고 스페인을 통치하였다. 스페인 백성들은 반발하였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나중에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아르헨티나로서 독립하게 된다.

1809년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는 3년 후에 왕세자로서 책봉이 되는데 그가 바로 효명세자이다.

1810년 1월10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14년간 같이 살아온 황녀 조세핀과 이혼하고 마리 루이즈와 혼인하였다.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는 로마왕 나폴레옹을 낳았다.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곡산 부사는 순조의 외삼촌이었던 박중신이었다. 당시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해져가자 수탈과 지대, 조세의 폐단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말 평안도 다복동 출신의 홍경래는  대자본을 쥐고있던 상인들과 부농들의 후원과 일부 양반들의 합세로 군졸들을 끌어모으고 봉기하였다. 홍경래는 서북인들의 관직진출이 제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관군은 곧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때 부녀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1917명이 참수되었다. 이 홍경래의 난은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등 이전의 난리와 구별되는 민중들에 의한 역모였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하였다. 러시아는 퇴각하면서 도시와 양곡에 불을 질렀다. 나폴레옹은 쉽게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피하기 위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궤멸하였다. 이제 프로이센은 유렵의 각국에 호소하여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1813년 홍경래의 난에 자극을 받은 제주의 토호 양제해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양제해는 사전에 계를 조직하였는데 이 친목계가 난리의 불씨가 되었다. 양제해 등은 장사를 모으고 병기와 군량을 모았고 제주의 3현에서 동시에 봉기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었으므로 일당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813년 나폴레옹은 대 러시아전쟁에서 프랑스군인 수십만을 희생시켰음에도 다시 청년들을 강제징집하였다.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동맹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의 평화협정을 거절하였다. 이어서 라치프찌히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대패하였고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도망갔다.

1814년 연합군은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3월13일에는 파리를 점령하였다. 나폴레옹은 강제퇴위를 당하였고 지중해의 엘바섬의 영주로서 추방되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가 복구되어 루이 18세가 즉위하였다. 유럽대륙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보수반동적인 빈체제를 설립하였다.

1815년 청송과 영양 등 경상도 산악지방에서 은거하고 있던 천주교도 3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 30여 명이 처형되어다. 이것이 을해교난이다.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중이었던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집필하였다. 남인이자 실학 사상가였던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여전제를 주장하였다. 여전제란 토지를 공동분배하고 분배받은 토지를 공동경작하자는 이론이었다. 이 여전제는 현실성이 많이 부족하였다. 나중에 정약용은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정전제란 우물 정자처럼 토지를 9등분하고 가운데 있는 토지를 공동경작하여 조세로 납부하자는 이론이었다. 정약용은 그 외에도 수령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와 형벌에 관한 흠흠신서도 저술하였다. 한편 베트남의 건국 지도자인 호치민든 목민심서를 손에 들고 다니며 애독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에 입성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헌법을 반포하고 연합국에게는 강화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강화는 불발되었으므로 전쟁을 재개하였다. 나폴레옹은 초반에 승세를 탔지만 나중에 워털루에서 프로이센, 영국 동맹군에게 완패당함으로써 백일천하는 끝이 났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투항하였고 웰링턴 장군의 제안에 따라서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었다.

1818년 황해도와 평안도에 10만여 명이 역질로 사망하였다. 그 해 대홍수로 인하여 수재가 발생하였다. 이 역질이 있기 전에 인도의 벵골에서 콜레라가 발발하였었다.

혜빈 홍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81세였다. 1815년의 일이었다. 혜빈 홍씨는 영조의 며느리로서 사도세자의 세자빈이자 정조의 모친이었다. 보통 혜경궁 홍씨로 알려져 있다. 정조 즉위 초기의 세도였던 홍국영은 그녀와 11촌 간 이었다. 혜빈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회갑때 한중록을 지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3대 궁중소설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한중록이다.

효명세자가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1819년의 일이었다. 효명세자는 11살이었고 세자빈은 12살이었다. 이 세자빈은 후일의 신정왕후 조씨이다.

1821년 5월 5일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던 나폴레옹이 타계하였다. 향년 52세였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그의 모발에서는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다.

1824년 프랑스왕 루이 18세는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루이 18세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인 66세의 샤를이 샤를 10세로서 즉위하였다.

1826년 김병연은 강원도 영월의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날의 시제는 김익순을 비판하라는 시제였다.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때 선천부사였다. 김익순은 불운하게도 홍경래의 반란군에 항복했었다. 장원급제한 김병연은 자신의 모친으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김병연은 그 사실을 알게되자 충격을 받았고 삿갓을 쓰고 방랑을 떠났다. 김삿갓은 그 후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영영 이별하였다.

1826년 교황청의 포교장관 카페랄리 추기경은 조선의 천주교 교구를 북경관할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북경교구는 포르투갈 세력권이었지만 이제 조선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세력이 점점 켜져가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는 도미니크 수도회가 관장한다.

순조 27년인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효명제자는 자신의 장인어른(빙부)인 조만영를 어영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조만영의 풍양 조씨 일가가 세도하게 되었다. 그 해 전라도 충정도 경상도에서 천주교도 500여명이 체포되었고 10여명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정해교난이다.

그 해 효명세자와 세자빈 조씨 사이에 세손이 태어났다. 이 세손은 100일이 되기 전에 능히 걸어다녔다.

1830년 5월 6일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3년 만에 타계하였다. 향년 22세였다. 효명세자가 타계하자 풍양 조씨의 세도도 추락하였고 안동 김씨가 다시 세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효명세자의 아들은 4살로서 왕세자위를 승계하였다. 이 왕세자가 훗날의 헌종이다.

안동 김씨일족은 김정희를 탄핵하였다. 김정희는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친족이었고 북학파 박제가의 제자였다. 안동 김씨일족은 먼저 윤상도를 사주하여 상소문을 쓰게 하였다. 순조는 상소문을 검토하면서 배후에 안동김씨가 사주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지만 윤상도를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이 윤상도의 옥은 10년 후에 다시 문제가 된다.

1830년 프랑스의 샤를 10세는 새법령을 공포하여 하원을 해산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선거법을 개정하였으므로 이전 유권자의 4분의 3이 선거권을 상실하였다. 그러자 자유주의자들이 반발하였고 파업과 항의를 시작하였다. 곧 왕정군은 출동하였지만 그들을 억압하는데는 실패하였다.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도피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샤를 10세의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립을 옹립하였다. 이제 프랑스 왕권은 부르봉가에서 오를레앙가로 넘어갔다. 루이필립은 전제군주정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여 특별재판소를 폐지시키고 상원을 세습직에서 선출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국왕과 교회사이의 동맹관계도 깨버렸다. 이것이 프랑스 7월 혁명이다. 한편 이때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러나 루이 필립은 기대와는 반대로 폴란드를 지원하지 않았으므로 폴란드는 러시아에 의하여 잔인하게 진압되고 병합되고 말았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도 역모가 일어났는데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단 벨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분리 독립을 성취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2년 후에는 유럽국가로부터 독립국가로서 승인받았다.

1831년 교황청의 카페랄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 16세로 즉위하였다. 그레고리 16세는 조선교구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고 초대주교에 브뤼기에르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주교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임명을 받고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요동에서 뇌일혈로 타계하고 말았다. 향년 43세였다.

순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43세였다. 1834년의 일이었다. 순조는 정조와 후궁인 수빈박씨 사이의 왕자였다. 순조는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으므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대리청정을 했었다. 그리고 순조의 왕세자인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중에 22세의 나이로 타계했었다.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4살때 왕세자위를 승계하였다. 그 아들은 헌종이 될 것이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하였다. 헌종의 나이는 8세였다. 순조비인 순원왕후 안동 김씨가 대왕대비가 되었고 효명세자빈이자 헌종의 모친인 풍양 조씨가 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되어서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헌종 즉위 초 영의정은 안동김씨 인척인 심상규가 되었고 좌의정은 풍양조씨 외척인 풍산 홍씨 홍석주가 되었다. 우의정은 안동 김씨와 결탁을 하고 있었던 반남 박씨 박중훈이 되었다.

순원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은 유진길로부터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므로 천주교에 관대하였다. 천주교는 날로 세력이 번창해 갔다. 제 2대 조선 주교 엥베르가 들어와서 전도하였고 모방 신부와 샤스턍 신부도 들어와서 교세확장에 일조를 하였다.

헌종은 왕비로서 김조근의 딸을 맞이하였다. 김조근은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와 김유근과는 6촌 형제였다. 헌종은 11살이었고 왕비 효현왕후 김씨는 10살이었다. 이것은 1837년의 일이었다.

183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이 병으로 인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자 영의정 이지연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사학을 멸하자면서 천주교 척결을 건의하였다. 이제 조정은 다시 오가작통법을 시행하여 천주교도 색출에 들어갔다. 김순성은 천주교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김순성이 밀고를 하자 유진길, 정하상 등이 잡혀들어왔고 엥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하였다. 이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는 모두 효수되었다. 엥베르 주교는 43세였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 였다. 유진길과 정하상도 참형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천주교도 100여 명이 참형을 당하였다. 이것이 기해박해이다.

1839년 중국황제는 관리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당시 중국과 영국은 서로 차와 모직물을 교역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차를 좋아하였으므로 수요가 급증하였다. 중국은 영국에 대하여 무역흑자였다. 그런데 영국은 이 차 대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인도산 아편을 중국의 하층민들에게 공급하였다. 하층민들은 아편을 좋아하게 되었고 아편대금인 은이 유출이 과잉되기 시작하였다. 임칙서는 광저우에 도착하자 아편의 소지를 금지시키고 또 외국상관을 봉쇄하여 아편을 몰수하고 파기하였다. 이때 영국상인들은 본국에 원정군을 요청하였다. 이어서 사사로운 민사사건과 관련하여 영국과 청국사이에 시비가 붙었고 영국의 무역감독관 찰스 엘리엇의 함대와 중국함대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중국 함대는 완패당하였다. 이 제 1차 아편전쟁으로 인하여 난징조약과 그에 따른  부수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중국은 홍콩을 할양하였고 배상금 2,100만 달러지불,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푸, 샹하이 개항, 개항장에 영사설치, 공행상인폐지, 통상항구에 군함파견, 순찰, 그리고 개항장에 땅을 빌려서 영원히 거주 가능하도록 보장해주었다.

1840년 대사헌 김홍근은 10년 전의 윤상도의 옥 사건을 재심하자고 하였다. 곧 국청이 열렸다. 그런데 심문중에 윤상도는 또 거짓으로 김정희를 고변하였다. 김정희는 다행히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김정희는 유배중에 우리 전통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을 연구하는 중에 추사체를 발명하였다.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는 고려 태조의 비가 아니라 진흥왕의 비라고 고증하였다. 김정희는 금석학에도 능했다. 고대 비문을 고증하는 것도 금석학의 일분야이다.

1841년 헌종 7년 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숙부인 조인영이 영의정이 되었다. 좌의정은 김흥근이 되었고 우의정은 정원용이 되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은 작년에 중풍과 실어증으로 타계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력이 후퇴한 것이었다.

헌종의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16세였다. 1843년의 일이었다

헌종은 그 해 계비로서 홍재룡의 딸을 맞이하였다. 헌종은 17세였고 계비 효정왕후 홍씨는 14세였다. 곧 홍재룡은 금위대장에 승차하였다.

1846년 마카오에서 신학수업을 받고있던 김대건은 조선 제 3대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입국시키기 위하여 비밀 항로를 찾다가 마침내 항로를 발견하여 그것을 중국어선에 넘겨주려고 하는 찰나 조선 관헌에게 잡히고 말았다. 김대건은 한양의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26세였다. 프랑스 제독 세실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이어서 김대건과 관련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이 후사가 없으므로 김재청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헌종은 21세 였고 후궁 경빈김씨는 17세 였다. 1847년의 일이었다.

1848년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보수내각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곧 보통선거가 실시되었고 의회는 온건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이 불만을 품고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정부군은 곧  폭동을 진압하였다. 이제 7월 입헌군주정은 붕괴되었고 공화정의 대통령으로서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조카였다. 이것이 2월 혁명이다. 3월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메테르니히는 물러났고 빈체제 또한 붕괴되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23세였다. 헌종의 부친은 효명세자였고 모친은 신정왕후 조씨였다. 헌종은 부친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타계하자 왕세자위를 승계하였고 할아버지인 순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었다. 헌종은 방사와 여색을 밝혔음에도 후사가 없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다음 후계자로서 강화도의 도령을 지명하였다.  1849년 6월 9일 그 도령은 철종으로서 즉위하였다. 철종은 당시 19세였다.  철종의 부친은 전계군이었다. 전계군은 은원군의 셋째아들이었다. 은원군은 천주교신자로서 기유사옥 때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거기서 사사되었었다. 은원군은 사도세자와 숙빈임씨 사이의 왕자였으므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한편 철종의 모친은 용담 염씨부인이었다. 철종의 이름은 이원범이었다. 이원범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있었고 천민출신의 처녀와 혼약을 맺고있었다. 철종은 왕이 된 후로 그녀를 그리워하였지만 한번도 못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철종 즉위 초 순원왕후 김씨가 대리청정하였다.

1851년 철종은 왕비로서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맞이하였다. 김문근은 김조순의 7촌 조카였다. 그러므로 순원왕후 김씨와는 6촌간 이었다. 철종은 21세였고 이제 왕비가 된 철인왕후 김씨는 15세였다.

1852년 순원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제 철종은 친정을 시작하였다.

1853년 영의정에 김좌근이 되었다. 김좌근은 김유근과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었다. 우의정에는 서인노론 조태채의 5대 손인 조두순이 되었다.

황해도에 사는 김웅도와 채희재 등은 철종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들은 역모에 성공하면 이명섭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이명섭의 부친은 이정현이었다. 이정현의 부친은 황해도 풍천의 초도로 귀양간 이항석이었다. 이항석의 부친은 이인좌가 영조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키으면서 옹립하기로 했으나 난이 실패함으로써 사사되었던 밀풍군 탄이었다. 밀풍군 탄의 부친은 임창군이었다. 임창군의 부친은 경안군이었다. 경안군은 자신의 형들인 경선군, 경완군과 함께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을때 형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음에도 홀로 살아남았었다. 경안군의 부친은 소현세자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귀국한지 몇 달만에 타계하였으므로 왕세자위가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승계되었고 봉림대군은 곧 효종으로 즉위하였었다. 소현세자의 부친은 인조이다. 인조는 자신의 백부인 광해군에 대항하여 반정에 성공하여 왕위에 올랐었다. 한편 이명섭 추대역모사건은 고성욱이 밀고함으로써 발각이 되었다. 이명섭은 능지처사되었다.

1856년 10월 8일 중국관헌들은 주강에 정박하고 있던 애로우호에 들이닥쳐서 승무원들을 해적혐의로 체포하였다. 광저우의 영국영사는 즉시 승무원을 송환하고 영국 국기가 함부로 내려진 것에 대하여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양광총독 엽명침은 말하기를 애로우호는 중국배이고 영국국기는 걸려있지도 않았다고 항변하였다. 애로우호는 사실 홍콩선적, 중국인 소유, 영국인 선장, 중국인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중국측은 승무원들을 돌려보냈으나 영국영사는 접수를 거부하였다. 다음날 영국은 광저우를 공격하고 총독관저에 침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프랑스도 영국에 합세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인 선교사가 그해 중국관헌에 의하여 처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해 영국과 프랑스는 광저우에 괴뢰정부를 세웠으나 청나라조정은 관망만 하였다. 이어서 영국 프랑스군은 북상하여 텐진으로 진격하였고 중국과 텐진조약을 맺고 10개 항구를 개항시키고 군함진입권을 확보하였다. 또 내지에서의 여행 포교권, 영사재판권의 확대, 아편무역의 승인, 관세율 고정, 통과세 인하등을 보장받았다. 한편 이 텐진조약은 베이징에서 비준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중국조정이 상하이에서 비준하려들자 영국 프랑스군은 비준을 강행하기 위하여 북상하다가 중국군 포대의 공격을 받고 대파되었다(1859.6). 그러자 영국 프랑스군은 그 다음해 베이징을 함락하고 베이징조약을 맺었다. 중국은 텐진조약에 덧붙여 증액된 배상금을 납부하여야 했고 교회가 토지와 교회건물을 임차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1857년 8월 4일 순원왕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었던 순원왕후는 순조의 왕비로서 효명세자를 낳았고 세자빈으로서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을 간택하였는데 그녀가 신정왕후 조씨였다. 효명세자는 순조를 대리청정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였고 그 후 순조도 승하하였다. 이어서 효명세자의 아들, 즉 자신의 손자가 헌종으로서 즉위하자 순원왕후 김씨는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였다. 그리고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 김씨는 강화도에 살고있던 사도세자의 증손자를 철종으로서 지명하였었다. 순원왕후 김씨는 철종즉위 초 대리청정하였었다.

경기도 파주에 염종수라는 자가 있었다. 염종수는 파주염씨였다. 철종의 모친은 용담염씨였다. 염종수는 용담염씨가 원래 파주 염씨라면서 족보를 고쳤고 자신은 철종의 외삼촌이 될 차례라고 상소하였다. 의지가지가 없었던 철종은 이 상소문을 보자 매우 기뻐하였고 염종수에게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파주 사람이 고변하자 용담 염씨가 원래 파주 염씨라는 사실은 날조라는 것이 밝혀졌다. 염종수는 능지처사되었고 그의 아들은 제주도의 노비로 보내졌다.

1858년 10월 17알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냤다. 그런데 이 원자는 5개월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1860년 돈의문, 즉 서대문에 괘서가 나붙었다. 왕을 비방하는 내용으로서 금극목金克木이니 김金가가 이李가를 누르고 나라를 빼앗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포도청에서는 범인 검거에 나섰지만 범인을 잡을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좌포도대장 허계와 우포도대장 신관호는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떠났다.

삼정, 즉 전정, 군정,  환곡이 점점 문란해져가고 있었다. 전정이란 토지 조세를 말한다. 아전들은 토지대장 등 제반서류를 이용하여 부가세를 만들고 착복하였다. 군정이란 군역을 말한다. 당시 조선은 양반을 제외한 16세부터 60세 사이의 모든 백성은 군역의 의무가 있었고 군포로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반서류가 위조되었으므로 죽은자에게도 징세가 되었다. 그것을 백골징 또는 족징이라고 하였다. 환정이란 춘궁기때 백성들에게 양곡을 대여하고 추수기때 원곡에 덧붙여 모곡을 회수하는 것이다. 아전들은 문서를 위조하여 비상식량으로 분배하거나 식량이 회수된 것처럼 문서를 위조하였고 또 사사로이 이자를 착복하였다. 옛말에 덕으로 못다스리면 창칼로 다스리게 되고 곪은 것은 터뜨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당시 인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총 호수는 158만 9038호였댜. 남자는 393만 34명이었고 여자는 335만 4204명으로 총 675만 여명이었다.

토호란 향반과 토반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향반은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낙향하여 위세를 부리던 양반이었다. 이들 토호들은 관아의 비호아래 백성들을 가렴주구하였다. 토호들의 강탈수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혼권은 소장을 아문에 제출하고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장권은 하졸이 사사로이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옥권은 옥에 갇혔을때 뇌물여부로 야로를 부리는 것이었다. 저권은 수확기에 쌀, 보리, 목화 등을 구걸하거나 강제로 착복하는 것이었다. 포권은 체포령이 내리면 당사자외에 인근 주민까지 위협, 공갈하는 것이었다.  
          
1862년 진주의 몰락양반 유계춘과 향반 이명윤은 도결과 환포의 부당함에 분기하여 경상우병사 백낙신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도결이란 세금을 법정액수 이상 책정하여 공전과 군포를 횡령하는 것을 말한다. 농민들은 점차로 폭도화되어갔다. 조정은 백낙신을 제주도에 위리안치시키고 진주목사 채병원을 파직하였고 안핵사로서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를 파견하여다. 민란을 주도한 유계춘은 참수되었다. 이것이 진주민란이다. 이 진주민란은 임술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임술년 농민봉기는 경상도에서 15차례, 전라도에서 8차례, 충청도에서 9차례, 경기, 황해, 함경도에서 각각 1차례씩 일어났다.

김순성은 도정 이하전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고 철종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도정 이하전은 덕흥대원군의 13대 손이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부친이었다.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안씨 사이의 왕자였다. 명종은 후사가 없었으므로 중종의 손자인 선조를 다음 왕으로서 지명하였던 것이다. 이 역모는 실패로 끝났고 김순성은 효수되었고 도정 이하전은 제주도로 위라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제주 대정현의 농민 강제검은 과도한 장세와 군역과 부역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당시 제주는 산림개간을 금지할 목적으로 화전민에게 화전세를 과세하고 있었다. 또 군역의 경우에는 내륙에서 군포로 대신하였지만 제주민은  군정 1인당 쌀 6두로 납부하고 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쌀 6두를 돈으로 환산하여 납부하였는데 환산과정에서 부정과 폐해가 있었다.

1862년 중국은 태평천국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증국번을 난징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영국계 외인부대도 합세하였다. 태평천국의 교주 홍수전은 꿈에서 본대로 자신을 여호와의 둘째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하였다. 홍수전은 하층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겠다면서 교도들을 끌어모았고 그 세력이 커지면서 난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33세였다. 철종은 주색을 가까이 하다가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철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신정왕후 조씨는 재빨리 어보(어세+옥보)를 챙긴 후에 '흥선군의 제 2자인 명복을 익성군에 봉하여 익종의 대통을 잇게하라.'고 반포하였다. 익종은 신정왕후 조씨가 세자빈이었을때 자신의 남편이었던 효명세자를 말한다. 그리고 흥선군은 이하응을 말하는것으로서 이하응의 부친은 남연군이었다. 남연군의 부친은 은신군이었다. 은신군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 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군이고 흥선군의 아들이 명복이다. 한편 은신군의 형은 은연군으로서 은연군의 증손자가 철종이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은연군과 은신군의 부모는 모두 사도세자와 숙빈임씨였다. 사도세자의 부친은 잘알다시피 영조이다. 이제, 흥선군의 제 2자인 명복이 신정왕후 조씨의 낙점을 받고 고종으로서 등극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댓글 1개:

  1.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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