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15일 목요일

8. 경종-영조-정조

1720년 6월 23일 숙종과 희빈 장씨 소생의 왕세자 윤이 경종으로서 즉위하였다. 당시 경종은 33세였고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는 16세였다. 경종은 지난 4년간 직전 왕인 숙종을 대리청정했었다. 왜냐하면 당시 숙종이 건강이 아니 좋아서 몸져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종은 노론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전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었다. 한편 이전에 경종의 모친인 희빈장씨는 사약을 받아먹고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을 보고싶다고 한 일이 있었다. 희빈 장씨는 당시 14였던 경종을 보자 우습게도 그의 음부를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경종은 그 즉시 기절하였었다. 경종에게는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이 있었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최씨 소생으로서 후일 영조가 될 것이다.

경종 즉위 당시 조정은 서인 노론이 장악했다. 노론 4대신은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었다. 당시 서인 소론의 조태구는 우의정이 되었다.

1721년 경종 1년 경종은 자신의 뒤를 이를 원자를 대신하여 왕세제로서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책봉하였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최씨 사이의 아들로서 경종과는 세살 차이였다.

한편 노론 4대신은 경종이 병약함을 이유로 연잉군이 대리청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서인소론 김일경 일당들은 분노한 나머지 노론 4대신을 역모죄로 탄핵하였다. 그러자 이에 부화뇌동한 경종 또한 서인 노론 일당을 즉각 실각시키고 이 노론 4대신들을 거제도와 남해 등으로 유배보내었다. 이것이 신축옥사이다. 이제 서인소론 일당들은 조정을 장악하였고 서인소론 조태구는 영의정이 되었다.

1722년 서얼출신의 남인 목호룡은 경종시해음모를 고변하였다. 이 음모란 직전왕이었던 숙종이 승하하자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백망, 심상길, 홍의민 등이 이전에 왕세자였던 경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종시해음모의 주동자들은 재미있게도 한결같이 노론 4대신들의 아들들이거나 조카들이었다. 이제 경종은 그 아들들을 비롯하여 유배중이던 노론 4대신들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사사하였다. 반면에 이 서인소론 일당의 편에 서서 시해음모를 고변한 남인 목호룡은 훈작을 수여받았다. 이 경종시해음모사건은 서인소론 김일경 일당들과 남인 목호룡이 경종을 보호하는 동시에 정적들인 노론일당들과 연잉군을 확실히 억압하기 위한 자작극이었다. 이것이 임인옥사이다.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합쳐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1724년 경종 4년 경종이 동궁에서 올린 게장을 먹고난지 5일만에 승하하였다. 한의학에서는 게장과 곶감은 상극이라고 알려져있다. 경종은 왕세제인 연잉군이 직접 달인 인삼차를 마셨는데 그 날 승하하고 말았다. 한의학에서 인삼차는 식중독에는 최악이라고 알려져있다. 한편 경종과 왕비 선의왕후 어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언급했다시피 왕세제는 경종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이었다.

1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즉위하여 영조가 되었다. 영조의 왕비는 정성왕후 서씨였다. 영조는 연잉군시절 정빈이씨와의 사이에 경의군 즉 후일의 효장세자를 두고 있었지만 정빈이씨는 1721년 갑작스럽게 타계하였었다. 이해를 돕자면, 영조의 부친은 숙종이었고 모친은 후궁 숙빈최씨였다. 경종은 그의 이복 형이었다. 숙빈최씨는 입궐 당시 궁궐의 최하급로서 우물에서 물을 길던 무수리 출신이었다. 이제 경종비인 선의왕후 어씨는 왕대비가 되었고 창경궁의 저승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서인노론과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득세할 차례였다. 직전 왕인 경종의 배후에서 위세를 떨쳤던 소론의 거두인 김일경과 소론을 편들었던 남인 목호룡은 가시방석 위에 앉게 되었다. 영조는 직전왕 때의 조작사건과 관련하여 서인소론 김일경과 목호룡을 소환하였다. 재미있게도 서인소론 김일경은 고문을 받으면서 영조를 나으리라고 불렀다. 남인 목호룡은 참수되었는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거리에서 전시되었고 그가 거짓 밀고한 글은 불태워졌다.

1725년 영조는 타계한 정빈이씨와의 소생인 경의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다. 경의군은 이제 효장세자가 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숙종과 경종 때의 서인 일당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붕당하고 서로 당쟁하면서 모략하고 사화를 일으켰으므로 정치적으로 대단히 혼란하였다. 영조 자신도 신임사화를 몸소 지켜본 터였다. 중국 송나라때 구양수는 붕당과 관련하여 군자끼리는 도가 같으므로 붕하고 소인끼리는 이가 같으므로 붕한다고 하였다. 탕평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붕당하고 당쟁하는 것을 없애겠다는 것으로서 정치적 안정에 역점을 두겠다는 것이었다. 탕평의 기원은 서경의 홍범조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에 있다.

1726년 효장세자는 세자빈으로서 조문명의 딸을 맞이하였다. 효장세자는 8살이었고 세자빈 조씨는 13살이었다. 이 현빈은 나중에 효순왕후 조씨가 될 것이다.

1728년, 참형된 서인소론 김일경의 아들인 김영해와 이인좌는 영조에 대항하여 청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인좌는 대원수가 되었고 밀풍군 탄을 옹립하였다. 밀풍군 탄은 소현세자의 증손자였다. 경종비였던 선의왕후 어씨는 내통하고 있던 이인좌에게 비밀리에 언문 교서를 내렸다. 왕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잡아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관군은 곧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인좌 등 반란주모자들은 한앙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되었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의 훈작이 주어지는데 그 공신에는 이광좌, 박문수, 조현명, 조문명 등 이었다.

1728년 11월 16일 효장세자가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10세였다. 나중에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가 된다.

1735년 영조 12년 영조와 후궁 영빈이씨 사이에 원자가 출생하였다. 이 원자는 출생한지 1년 만에 세자로 책봉이 되었다. 왜냐하면 효장세자가 일찍 타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위로 화평옹주와 화협옹주를 두고 있었다. 곧 사도세자는 모친인 후궁 영빈이씨와 헤어지고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가 되었고 내시들과 나인들이 그를 보살폈다.

1741년 이인좌의 난때 공을 세웠던 박문수가 어영대장이 되었다. 어영청은 대궐을 숙위하고 도성의 치안을 담당한 부서였다.

1744년 영조 20년 사도세자는 홍봉한의 둘째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사도세자는 10살이었고 세자빈 홍씨는 11살이었다 이 세자빈 홍씨는 나중에 한중록을 쓰게되는 현경왕후 혜경궁 홍씨이다. 홍봉한은 다음해에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급제하였고 후일 어영대장을 거쳐 영의정에 승차한다.

1750년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5군영이 설치되자 조선의 양인 장정들은 군역을 위하여 1년의 2필의 군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영조는 1년 2필의 군포를 1포로 줄였고 이제까지 군포를 면제받던 부농층과 도고들에게는 선무군관이라는 명예직을 부여하여 군포를 거두었다. 또 균역청은 지주들의 토지1 결당 2말의 결작미를 군포로서 징수하였을 뿐만아니라 어세, 염세, 선박세를 징수하였다. 한편 도고란 독점판매 상인조직이었다. 도고는 농산물과 공산물 등을 매점매석하거나 독점하여 이윤를 극대화하였다. 도고는 자본력과 상술을 이용하여 생산자들에게 원료와 생산비를 선대하기도 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물가불안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1750년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 사이에 세손 정이 태어났다. 세손 정은 출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다.

1752년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세손 산을 출산하였다. 그는 후일 정조가 될 것이다.

1754년 사도세자는 숙빈임씨와의 사이에 은언군을 낳았다. 은언군은 후일 철종의 조부가 될 것이다. 1756년에는 은신군을 낳았다. 은신군은 후일 고종의 증조부가 될 것이다.

당시 조선인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총 인구는 731만 여명 이었다. 남자는 353만이었고 여자는 378먄 이었다.

1757년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가 타계하였다. 정성왕후 서씨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일 때 혼인했던 정비였다. 영조와 정성왕후 서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향년 66세였다. 그로부터 40일후에는 대왕대비이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71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원왕후 김씨는 연잉군이 왕세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왕세제가 된 연잉군을 양자로 입적하기도 했다.

1759년 영조는 새왕비로서 김한구의 딸인 김문주를 맞아들였다. 영조는 66세였고 김문주는 15세였다. 그녀는 정순왕후 김씨가 되었다.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거가 물이 깊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여 영조를 감동시켰다.

1759년 사도세자는 경빈 박씨와의 사이에 은전군을 낳았다. 후일 은전군은 자신의 이복형인 정조에 대항하여 역모한다. 그리고 역모가 실패하자 사사된다.

1762년 2월 세손인 산은 세손빈으로서 김시묵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손인 산은 11살이었다. 세손빈은 10살이다 그녀는 효의왕후 김씨가 될 것이다.

1762년 5월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인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가 세자빈을 칼로 찔러 죽이려 한 일과 여승을 궁궐에 끌어들여 질서를 어지럽힌 일, 또 20일간 평양을 미행했던 일 등 이었다. 사도세자는 의대증이 있었는데 옷을 입을 때 몸이 원할하게 움직이지 못하여 옷이 자주 찢어졌고 따라서 옷감에 상당히 민감하였다. 사도세자는 옷을 입다가 발작을 하면 옷 착용을 도와주는 궁녀나 내관들을 죽였고 나중에 후회하곤 했다. 나경언의 상소와 더불어 노론일당들인 김한구, 김상로, 홍계희, 윤동도 등도 사도세자가 환관들과 함께 영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1762년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세자하고 창경궁 홍화문의 오른편의 뒤주에 가두고 망치질을 하였다. 사도세자는 7일 동안 갇혀있다가 굶어죽었다. 향년 27세였다.

1764년 영조는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 사이의 세손인 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다.

1770년 영조는 반계수록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저서로서 26권으로 되어있다. 유형원은 효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성리학과 농업을 연구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토지조세제도, 군사제도, 관리제도를 실증적으로 비판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토지를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고 자작농을 육성하자는 균전제를 제안하였고 과거제도 대신 천거제의 일종인 공거제를 옹호하였다. 또 3정승 중에 영의정만을 남겨두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하였고 군사면에서는 병농일치와 무기개량, 성곽축성을 제안하였다. 또 노비제도로서 종모법을 실시하여 노비수를 점차적으로 줄여나가자고 하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적 토대라고 보겠다.

한편 이익은 유형원의 제자였는데 성호사설을 저술하였다. 이익은 토지제도로서 한전제를 주장하였다. 한전제란 농민들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토지로서 영업전을 두고 그 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하자는 것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천문학을 다루었고 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백두대간, 풍수설에 대하여도 서술하였다. 재미있게도 이익은 삼한사회 백성들의 기원을 중국 전국시대의 한나라에서 찾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을 쓰면서 방법론적으로 고증학을 사용하였다 고증학이란 틀린 사실을 객관적 자료에 비추어서 수정하는 것이다.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은 성호사설을 요약한 성호사설유선을 저술하였다.

1775년 미국의 조지 워싱턴은 제 2차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개 주의 대륙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각 주에 군사와 전쟁물자를 요구하면서 대영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에 들어갔다. 이전에 대영제국은 프랑스와 인디안을 상대로 승리하여 일부의 땅을 차지하기는 하였지만 전쟁비용이 많이들었다. 영국의 의회는 비용을 벌충하기 위하여 식민지 미국에 과세하였고 영국왕 조지 3세는 이러한 식민지 대표들의 동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승인하였다. 이제 미국인들은 대표없이는 과세없다면서 반발하였다. 당시 대영제국은 항해법을 이용하여 미국의 경제를 억압하고 있었는데 미국인들은 보스턴에 정박중이던 영국상선의 홍차를 바다에 내다버려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되자 대영제국은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영제국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1776년 7월 4일 식민지 13개주의 대표들은 미국의 독립선언에 서명하면서 U.S.A를 착공하였다. 미국은 이어서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또 스페인과 네델란드와도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사라토가 전투와 요크타운 전투(1781)에서 영국군에 승리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1783년 영국과 강화하고 파리조약을 체결하여 독립 U.S.A를 준공하였다.

1776년 영조 52년 3월 5일 영조가 83세의 일기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의 숙빈최씨 사이의 원자였고 자신의 이복형인 경종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세제가 되었다. 경종이 승하하자 그를 대신하여 왕위를 승계하였었다.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의 소생인 효장세자는 유년시절에 요절하였고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의 소생인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서 7일만에 굶어죽었다. 사도세자의 장남은 3살때 요절하였으므로 차남인 산이 왕세자위를 승계하였었다. 영조는 붕당을 억제하고자 탕평책을 실시하였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였다. 또 떠오르는 부농층과 도고 상인들에게도 군역을 부담시켜다

1776년 3월 10일 26세의 왕세자 산이 정조로서 즉위하였다. 세자빈 김씨는 효의왕후 김씨가 되었다. 정조의 할아버지는 영조였고 정조의 부친은 뒤주에서 타계한 사도세자였다. 정조의 모친인 혜빈 혜경궁 홍씨는 당시 43세였다.

정조는 즉위 3일만에 홍국영을 승정원의 동부승지에 임명하였다. 홍국영은 정조의 모친인 혜빈 혜경궁 홍씨와 11촌 간이었다. 정조는 이제 노론 벽파의 숙정에 들어갔다. 노론벽파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죽도록 힘을 모았던 반사도세자파였다. 반면에 노론 시파는 사도세자와 세손인 지금의 정조를 보호하고자 하였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타계하자 노론시파의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이제 정조가 즉위하게되자 노론벽파 일당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꼴이 되었다. 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동생인 노론벽파 김귀주와 홍인한은 각각 흑산도와 고금도에 위리안치되었다. 한편 위기에 몰린 노론벽파 홍계희 일족은 정조를 암살하려고 모반을 꾸몄지만 사전에 발각이 되고말았다. 반란은 성공하면 반정이 되지만 실패하면 역모가 된다. 노론벽파 홍계희 일족과 정후겸, 문성국 등은 사사되었다

정조는 즉위 초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28개 별자리중 규성은 인재를 뜻한다. 규장각이란 인재들이 모인 곳이란 뜻이다.

1777년 홍상범은 정조를 시해한 후에 은전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음모를 꾸몄다. 은전군은 사도세자와 경빈박씨 사이의 아들로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은전군은 평소 사냥을 좋아하고 여색을 즐겼다. 장사 전흥문은 비수를 품고 대궐로 들어가려다 수문장에 걸려서 포도청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였고 모든 사실을 실토하였다. 이것이 은전군 추대사건이다. 홍상범 일당은 죽음을 당하였고 은전군 또한 사사되었다.

1778년 정조는 홍낙춘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다. 이 원빈홍씨는 당시 세도였던 홍국영의 누이동생이었다. 원빈홍씨는 다음해에 괴질로 온몸에 반점이 퍼지면서 타계할 것이다.

1779년 홍국영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홍국영의 세도 3년간 전정, 군정, 환곡이 많이 문란해졌다. 2년 후 홍국영은 34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1780년 서얼출신 박제가는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박제가는 2년 전 사은사인 채제공을 따라서 연경(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청나라의 선진문물에 느낀 것이 많았다. 박제가는 우리의 농업 도구와 건축 기술은 청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므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실용적으로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 2년후 박지원은 청나라 여행을 기록한 열하일기를 간행하였다. 박지원도 인정했다시피 그 내용은 기존의 성리학적인 관념론과는 동떨어진 실사구시의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것으로 박제가의 북학의와 맥을 같이한다.

1781년 정조 5년 정조는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모두 서자출신이었고 서로 친구였다. 규장각이란 28개의 별자리중 규성에서 따온 것으로 규성이란 인재를 뜻한는 것이므로 규장각이란 인재들이 모인 곳을 말한다. 규장각은 고서들을 수집, 보관하였고 도서를 출판하였다. 또 과거시험을 주관하였고 문신들을 교육하였다. 정조는 즉위한 1776년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설치하였었다. 정조는 1782년 강화도에 새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이것이 외규장각이다. 후일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외규장각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일부 문헌들은 약탈되어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1782년 정조의 궁녀 성씨가 왕자를 출산하였다. 이 왕자는 3개월 만에 원자로 봉해졌고 궁녀 성씨는 정식으로 소용 성씨로서 후궁이 되었고 곧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2년 후에 이 원자는 왕세자로서 책봉이 되었다. 이 왕세자는 문효세자이다.

1783년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출판금지시켰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전통적인 문체와는 다르게 파격적이고 개성 넘치는 문체를 구사한 것이 그 이유였다. 이것이 정조가 주도했던 문체반정이다.

1784년 29세의 이승훈은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서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을 받고 천주교 서적을 구입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북경 남천주당의 그라몽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다음해 성서와 묵주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벽, 이가환 그리고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3형제 등과 함께 지금의 명동인 명례방에 조선 최초로 천주교회를 설립하여 미사와 강론을 행하고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천주실의는 포교의 기초가 되었다. 천주실의는 명나라 말기때 마태오 리치가 명나라 포교를 위해서 지은 책이다. 천주실의는 인간의 영혼불멸과 성선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범신론적 일신론을 비난하였다. 천주교는 사물의 근원이 천주에 있다고 말한다. 한편 유교에서 만물의 근원은 태극에 있다. 불교에서는 현상하는 모든 것은 공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교에서는 모든 사물은 무에서부터 나온다고 강조한다.

1786년 5월 11일 왕세자인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5세였다. 그로부터 3개월후 문효세자의 모친인 의빈 성씨는 출산을 앞두고 갑자기 타계하였다.

1787년 정조는 후궁으로서 좌찬성 박준원의 딸을 맞이하였다. 정조는 36세였고 새 후궁인 수빈박씨는 18세였다. 수빈박씨는 다음 해에 원자를 생산하였다. 이 원자가 후일 순조이다.

1789년 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프랑스군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성직자와 귀족에게 토지세를 부과하려고 명사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성직자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토지가 과세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루이 16세는 평민들이 포함된 삼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삼부회의는 성직자 대표와 귀족 대표 그리고 평민대표로 구성되어있는데 1614년 태양왕 루이14세때 이후로 150여년 개최되지 않았었다. 이 삼부회의에서 성직자 대표와 귀족 대표는 신분별 표결방식을 주장했으나 평민대표는 머리 수로 표결하자고 대항하여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평민대표들은 루이 16세의 실내 테니스코트에 따로 모여서 새로운 의회를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는 진보적인 캐돌릭 성직자와 자유주의 귀족도 합세하였다. 이들은 7월 9일 국민헌법의회(National Constituent Assembly)를 구성하고 프랑스 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였다. 7월 14일 왕당파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 국민헌법의회를 억압하려고하자 파리시민들은 관군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의 저항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8월 14일 국민헌법의회는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8월 26일에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당초 이것들을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흉작으로 인한 물가불안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루이 16세는 마지못해 그것들을 승인하였다.

1791년 채제공은 금난전권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금난전권은 일종의 독점권이었다. 채제공은 시전상인들의 폐해가 심하므로 난전을 인정해주자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정조 즉위 초부터 상공업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백성들의 욕구도 증가해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시전상인들은 전안에 등록되었다는 특권만을 이유로 갖가지 물품들, 즉 포목, 종이, 약초등을 독점판매해 왔다. 이러한 독점판매는 금난전권으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었는데 상공업발전의 저해와 물가상승을 가져왔다. 정조는 즉각 모든 상인들에게 판매권을 인정해주었다. 단, 육의전 상인들은 여전히 독점판매권을 유지하였으므로 다른 상인들은 육의전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품은 거래할 수 없었다. 이것이 신해통공이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은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유교식 장례를 행하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아니하였다. 또 모친의 유언대로 캐돌릭 장례식을 행하였고 집안의 신주도 불살랐다. 이를 보고 분개한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에 탄핵상소문을 올렸다. 조정의 서인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윤지충를 사형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정조는 윤지충의 사형을 윤허하였다. 윤지충는 전주 남문 밖에서 사회도덕을 문란케했다는 죄목으로 참수되었다. 그는 순교자의 피는 신심이 씨앗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신해박해이다. 진산사건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서인노론시파의 조언에 따라서 천주교의 교주역할을 하고있던 권철신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였다. 이후로 천주교는 지하화되었다. 그런데 조정은 이 천주교 사건과 관련하여 남인 채제공의 신서파와 홍의호의 공서파로 나뉘어져서 신유박해까지 10년 동안 서로 대립한다.

당시 조선천주교는 북경 교구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수도사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수도회는 먼저 중국대륙에 들어간 예수회와는 다르게 제사를 엄격하게 규제하였으므로 조선 천주교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후일 1965년 바티칸공의회는 '전교지의 문화와 풍습에 따라서 전교하라.'고 명하였다.

1791년 프랑스 입법의회는 입헌군주헌법을 제정하였고 곧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결과는 푀양파와 지롱드파 그리고 자코뱅파가 다수당이 되었다. 푀양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고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는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1792년 입법의회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 수행해나가기 위하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9월 20일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승리를 거두었다. 곧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1793년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입헌군주제는 붕괴되었다. 곧 국민공회는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하였다. 1월 21일 루이 16세는 2만 여 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콩코드광장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후에 처형되었다. 영국과 스페인 그리고 사르디나 왕국은 충격을 받았고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하여 군대를 소집하였다. 한편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는 의회에서 지롱드당을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재판소와 공안의원회를 설치하여 공포정치를 실시하면서 에베르파와 당통파를 숙정하기 시작하였다.

1794년 제주도에서는 가을태풍이 몰아닥치고 대흉년이 들어서 600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조정은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을 보냈다. 그런데 식량을 수송하는 선박이 도항중에 침몰하고 말았다. 제주여인 김만덕은 재산을 풀어서 쌀 500석을 사들이고 그 중 450석을 기부하였다. 당시 김만덕은 전라도의 양곡과 제주도의 약초와 해산물을 거래하던 객주였다. 정조는 김만덕의 선행을 알게되자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김만덕은 당시 섬의 출륙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한편 객주란 상품 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매매하거나 알선하는 중간상인이다. 객주들은 상품보관을 위한 창고업, 상품이전을 위한 수송업, 상품대금 융통과 어음발행 등 금융업 그리고 식사와 잠자리등 여관업도 겸하였다. 객주들은 거대 자본력을 바탕으로 동업조합을 형성하였고 이윤을 위한 도고(독점)와 매점매석도 행하였다.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탈리앵의 탄핵을 받았다. 그 다음날 로베스피에르와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하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이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1795년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총재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이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이다. 이때 나폴레옹이 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곧 나폴레옹 장군은 이집트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고 시민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96년 수원 화성이 준공되었다. 착공 2년 만이었다. 이 수원성은 정약용이 제안한 거중기를 사용하였으므로 노동력을 절감하고 생산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었다. 화성은 화강암과 함께 벽돌을 쌓아올려서 지었다.

1799년 나폴레옹 장군은 브뤼메르 18일에 쿠네타를 일으키고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 1대 대통령이 되었다. 프랑스의 제 1공화국이 10년도 안되서 붕괴된 것이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49세였고 등에 종기가 있었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서 굶어죽은 부친인 사도세자를 승계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정조는 수빈박씨와의 사이의 원자인 공을 왕세자로 책봉했었다. 왕세자 공은 순조가 될 것이다. 정조대에는 관념적인 성리학보다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실학이 융성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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