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5일 일요일

10. 고종-순종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은 당시 12살이었으므로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부인 민씨사이에는 이재면, 이재선, 이재황 삼형제가 있었다. 철종이 승하하자 신정왕후 조대비는 즉각 어보을 점유하였고 흥선군과 사전에 조율하였던데로 흥선군의 셋째아들 재황을 옹위하여 등극시켰다. 한편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었다. 남연군의 부친은 은신군이었다. 은신군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들였었다. 은신군은 은언군의 동생으로서 모두 사도세자와 숙빈임씨사이의 소생이었다. 사도세자는 잘알다시피 영조의 소생이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대왕대비가 되어서 고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였으나 곧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였다. 흥선군은 당시 44세였다. 고종은 직계비속으로서가 아니라 종친으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현왕인 고종의 부친은 대원군이 된다. 일례로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의 부친인 전계군은 전계대원군이 되었었다. 어쨌든 당시 영의정은 김좌근이었고 좌의정은 68세의 조두순이었다. 이제 조정은 서인 노론계열의 장김세력이 하락하고 남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갑산부사 이석을 시켜서 동점에서 화폐 30만냥을 몰래 주조하도록 하였다. 동점이란 구리광산을 말한다. 이어서 흥선대원군은 김홍근의 삼계동 별장을 사취하였다. 당시 광통교의 지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종각 근처의 80여호를 불태웠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서원은 사설교육기관으로서 인재양성과 명현의 제사를 담당하였다.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그 최초였고 명종 때 소수서원은 왕으로부터 토지, 노비, 책을 하사받았고 면세, 면역이 되었으므로 점차 사원은 토색질을 일삼고 무법천지가 되어갔다. 당시 악명이 높았던 서원으로는 청주의 화양동 서원과 만동묘가 있었다. 화양동서원은 화양묵폐를 발행하여 세금을 거두었고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에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명나라는 멸망하였지만 조선은 명나라를 잇는 소중화를 자처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서원은 650개가 난립하고 있었는데 서원이 많다는 것은 군약신강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원군은 서원 45개를 제외하고 모두 폐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와 참언을 믿었는데 때마침 나라연장을 위해서는 경복궁을 중건하라는 참언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다. 대원군은 경복궁 건설에 착수하였고 먼저 재원조달을 위하여 장김 세력가들로부터 30만냥의 원납전을 거두었고 점차적으로 강제징수하였다. 또 노동력을 위하여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는데 부역민들에게 하루 1전씩을 지급하였다. 또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담시키고 각 호당 2냥의 균일세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당시 원납전 500냥이면 벼슬을 살 수 있었고 당백전이 사용되고 있었다. 당백전이란 화폐의 명목가치를 100배 인상한 화폐였다. 한편 대원군은 삼정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환곡을 사창제로 바꾸었다.

1866년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령을 포고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프랑스신부 12명이 들어와 포교하고 있었는데 날로 번창하여 신도 수가 23,000명에 이르렀다. 조선 지배층은 천국과 지옥의 가설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는 천주교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반발하고 있었다. 1월 21일 대원군은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도 색출에 나섰다.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는 천주교도였다. 한때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천주교의 포교을 인정해주는 대신 프랑스, 영국과 동맹하여 러사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1866년 2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의 왕비로서 민치록의 딸을 간택하였다. 고종은 15세였고 왕비 민씨는 16세였다. 왕비 명성왕후민씨는 9세 때 고아가 되었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59세였고 왕대비, 즉 쳘종비 철인왕후 김씨는 30세였다. 한편 청나라는 동치제가 즉위하였으나 공친왕이 섭정을 하고 있었다.

오가작통법이 실시되자 수 개월만에 조선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 리델은 살아남아서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리델 신부는 텐진주재 프랑스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이 처형 사실을 알렸다. 이 병인박해는 후일 병인양요의 불씨가 된다.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대동강변에 정박하였다. 제너널 셔먼호는 615톤이었고 선주는 미국인 프레스턴이었고 선장은 덴마크인 페이지였다.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와 통역인으로 중국인 이팔행과 선원 23명을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통상요구가 거부되자 난동을 부리고 조선군 이현익을 납치하여 감금하였다. 그러나 박춘권이 제너럴 샤먼호에 잠입하여 이현익을 구출하였다. 그런데 당시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수위가 높아졌고 배의 선체는 양각도에 걸렸다. 제너럴 셔면호 선원들은 불안하여 포격, 강도, 강탈하였는데 이 와중에 평양사람 7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포격을 명령하였다. 조선군은 대동강가에 식용유를 풀어서 제너럴 샤면호를 불태웠다. 제너럴 샤면호 선원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제너럴 샤먼호는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USS Princess Royal호 였다는 일설이 있으나 이것은 미 해군의 기록과는 다르다. 어쨌든 이 제너럴 샤먼호 격침사건은 5년 후 신미양요의 불씨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로즈제독은 군함 3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3명을 대동하고 인천 앞바다에 당도하였다. 로즈제독은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죽음에 대한 댓가로 조선인 9,000명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이제 한양의 도성 안은 혼란에 빠졌으므로 어영대장 이용희를 현장에 파견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로즈제독은 3척의 군함으로는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지형만을 관찰하고 일단 돌아갔다.

로즈제독은 한 달도 채 안돼서 군함 7척과 요코하마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병대를 포함하여 1,230 여 명을 대동하고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에 접근하였다. 곧 프랑스 함대는 강화성을 허물고 외규장각의 서적들을 약탈해갔다. 이어서 프랑스 해병은 조선군과 정족산성에서 조우하였고 프랑스군은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하여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로즈제독은 철군을 결심하였고 중국으로 철군하였다. 로즈제독은 강화성을 떠나면서 관아에 불을 질렀고 금괴 19상자와 보물, 서적, 무기 등을 약탈해갔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어쨌든 대원권은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므로 쇄국의지에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고수하게된다.

1868년 4월 고종과 후궁 귀인 이씨 사이에 완화군이 태어났다. 고종은 명성왕후 민씨와의 관계이전에 첫 왕자를 얻은 것이다.

1868년 7월 2일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착공한지 3년 4개월 만이었다. 총 774만 냥이 들어갔고 쌀 915석 그리고 연인원 수 십 만명이 동원되었다.

1868년 유대계 독일상인 오페르트와 프랑스신부 페롱은 충청도 아산만으로 잠입하여 덕산의 남원군의 묘를 파헤쳤다. 남원군은 흥선대원군의 부친이다. 오페르트는 2년 전에도 조선에 들어와서 통상요구를 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그 다음에 또 들어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그때는 병인양요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이번에 오페르트는 남연군의 시체를 가지고 통상협상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연군의 묘는 봉분만 훼손이 되었다. 왜냐하면 대원군은 30년 전에 부모상을 잇달아 당한 후에 부친 남연군의 묘를 충청도 덕산으로 이장하였다. 대원군은 풍수가의 말에 따라서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묘를 파고 철 수 만근을 녹여부었었다. 따라서 오페르트는 봉분의 윗부분만을 훼손한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 미국인 젠킨스도 오페르트와 합세하여 680톤 차아나호와 60톤 크레타호를 이끌고 서양인 8명과 중국인 100명과 말레이지아인을 대동하고 아산만에 들어왔었다. 이 남연군 묘 도굴사건이 본국인 독일과 미국에 알려지자 오페르트는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젠킨스는 기소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오랑케가 침입해도 싸우지 않는 것은 화이하는 것이고 화이는 곧 나라를 파는 것' 이라고 말하였다. 대원군의 쇄국의지가 더욱 강해진 것이었다.

1871년 청나라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미국특명전권공사가 되어서 제너럴 샤먼호 침몰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청하였다. 미 아시아 함대 로저스 제독은 전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미 전함 5척 중에 USS Colorado 프릿깃함은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바가 있었다. 미 해병대는 강화도에 상륙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유린하였다. 조선군은 완패하였다. 조선군은 243명이 전사하였고 부상자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반면에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하였다. 로우 공사는 통상교섭을 실시하였으나 조선의 강경한 척화론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군은 40일 만에 중국 산둥성으로 철군하였다.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 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그런데 원자는 항문이 없었다. 민씨부인은 구멍을 내서 통변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시아버지인 대원군은 탕제를 써야한다면서 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원자는 탕제를 먹고 5일만에 타계하였다. 이 일로 대원군과 명성왕후 민씨사이는 멀어져갔다.

이 당시 정감록이 유행했다. 정감록은 이씨왕조가 무너지고 정씨왕조가 들어선다는 속설이었다. 한편 대원군은 풍속개량을 실시하여 사대부 갓 테를 줄이고 도포의 소매도 줄이고 장죽길이도 반으로 줄였다. 그리고 기생 옷을 개량하였고 기생이 가마 타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 화대는 120냥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것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은 불만이었다.

1873년 고종10년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사이에 공주가 태어났다. 공주는 8개월 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명성왕후 민씨는 신정왕후 대왕대비 조씨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와 손잡고 서원철폐로 소외되었던 최익현을 등용하였다. 그러자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버렸다. 최익현에 따르면 왕은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곧 최익현은 파직되었다. 그런데 명성왕후 민씨는 최익현을 복귀시키고 이어서 그를 호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최익현은 다시 대원군의 부당성을 상소하였다.

1873년 11월 고종은 대원군이 궁궐로 출입하는 전용문을 폐쇄하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고종은 22세였다. 그 후 대원군과 명성왕후 민씨 및 민씨일족들은 수시로 갈등을 맺었다. 이 해에 원납전이 혁파되었고 성리학의 전당인 청주의 만동묘도 복구되었다. 또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을 금지시켰다. 12월에는 경복궁에 화재가 있었다. 명성왕후 민씨가 거처하는 자경전의 부속건물인 순회당에 폭약이 발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364간이 전소되었다.

1874년 2월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는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왕세자가 후일 순종황제이다.

1874년 12월 민씨 일족의 수장이자 명성왕후 민씨의 양오라비인 민승호는 어떤 승려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민승호가 그 선물상자를 여는 순간 폭발하였고 민승호와 그의 아들 및 그의 양어머니가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이 연루되었다는 설이 있었다.

1875년 9월 일본 군함인 245톤의 운요호는 강화도 근처의 난지도에 정박하였다. 일본선원은 보트에 분승하여 연안을 탐지하다가 조선군과 조우하였다. 이어서 조선군과 일본군사이에 전투가 벌여졌고 조선군이 완패하였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이 발생하였으나 일본군은 단지 경상 2명 뿐이었다. 일본은 이 전투의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면서 배상과 통상, 개항을 요구하였다.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간에 운요호사건과 관련하여 회담이 열렸다. 조선측 대표 신헌과 윤자승은 일본측 대표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와 부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회담하였다. 회담은 모두 세번 열렸다. 이때 일본측은 조선인 통역을 비롯하여 840명의 수행원을 대동하였다. 조선측은 흥선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장과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의사 그리고 중국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서 개국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이 강화도 조약은 12개조로 되어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하였다. 조선은 3개의 항구를 일본에 개항해 주었다.

1876년 7월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후속조치로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곧 조선은 김기수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은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대리공사로 한성에 파견하였다.

1880년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사이의 소생인 완화군이 천연두로 타계하였다. 향년 13세였다. 영보당 귀인 이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실어증이 걸렸다.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갔던 지석영이 두묘 50병을 얻어와서 종두법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종두란 천연두 예방백신을 말한다 종두법에는 인두법과 우두법이 있다. 인두법은 면역백신을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고름으로부터 얻어서 접종하는 것인 반면에 지석영이 배우고 돌아왔던 우두법은 천연두에 걸린 소의 고름으로부터 면역백신을 추출해서 사람에게 접종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인두법이 보편적 예방법이었으나 1796년 영국인 제너가 우두법을 발견한 뒤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880년 12월 20일 고종은 내정계혁에 착수하였다. 고종은 의정부와 6조를 폐지하는 대신에 통리기무아문과 12사를 두었다. 12사의 우두머리는 총리가 되었다. 다음해에 고종은 별기군을 조직하여 양반자제를 사관생도로서 선발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5위영은 양영으로 개편하여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나누었다.

1881년 조선 조정은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명성왕후 민씨측의 개화파로 나뉘어 있었다. 안기영과 권정호는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경기도 향시에 모인 유생들을 이용하여 고종과 명성왕후에 대하여 역모를 하여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였다. 이재선은 흥선대원군의 양아들이므로 고종의 이복형이다. 이 역모는 실패하였고 안기영과 권정호는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재선도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것이 이재선 추대사건이다. 위리안치란 유배지 처소에 죄인을 가두고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처소 둘레를 치는 것이다.

1882년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는 왕세자의 왕세자빈으로서 민태호의 딸을 맞이하였다. 왕세자는 9세였고 왕세자빈 민씨는 13살이었다.

1882년 조선전권대신 신헌, 김홍집과 미국 전권대신 슈펠트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은 청국의 사신인 마건충과 정여창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은 전권대사로서 민영익과 부관 홍영식, 서광범을 미국으로 파견하였고 초대 미국전권공사 푸트(Foote)가 한성에 들어왔다. 이어서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선은 영국과 독일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82년 구식군대의 군인들은 급료가 13개월간 미불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또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별기군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명성왕후 민씨와 그녀의 친족인 민겸호에 투사하였으므로 이제 난리가 임박하였다. 민겸호는 그당시 군인들의 급료를 관리하던 선혜청 당상이자 병조판서였다. 선혜청 도봉소에서는 전라도에서 조세미가 도착하자 우선 구식군대군인들에게 1개월 급료를 지불하였다. 그런데 군료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있었고 그 양도 절반밖에 안되었다. 그리하여 구식군대 군인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은 난동을 부렸고 순식간에 도봉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자 이들은 곧 포도청으로 잡혀갔고 사형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전파되었으므로 군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수감된 유복만의 동생인 유춘만과 김장손 등은 군인들을 끌어모으고 병조판서 민겸호의 집 앞에 몰려들어갔고 드디어 집안에 난입하여 가재도구를 파괴하면서 폭동에 들어갔다. 이어서 그들은 운현궁에 거처하는 대원군을 찾아가서 사태를 의논하였다. 또한 군인들은 동별영의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한 후에 포도청에 난입하였고 문제가 되었던 유복만, 김춘영 등을 구출하였다. 이어서 군인들은 의금부를 습격하여 척사론자인 백낙관 등 죄수를 석방하였고 민태호 등 개화파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이날 저녁 구식군대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였고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비롯하여 공관원들은 인천으로 피신하였다. 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불태웠고 별기군 병영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등 총 13명의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다음날인 1882년 7월 24일 폭동군인들은 대원군의 밀지에 따라서 이최응과 민창식을 살해하였다. 이최응은 대원군 이하응의 형이었다. 군인들은 창덕궁 돈화문에 진입하여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의 인솔하에 명성왕후 민씨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성왕후 민씨를 찾는 데 실패하였지만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살해하였다. 한편 명성왕후 민씨는 궁녀로 위장한 후에 무예별감 홍계훈과 함께 충주로 피신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 난리로 인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을 무위영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대원군은 자신의 심복인 허욱이 이끄는 200명의 군인들의 호위 속에 대궐로 입궁하였다. 대원군은 교지를 반포하고 사실상 조정을 장악하였다. 대원군은 별기군과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5군영을 복구하였다. 대원군은 남인계열을 등용하고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이어서 주전을 금지시키고 도고와 수세를 정비하였다. 대원군은 실종된 명성왕후를 타계한 것으로 추정하여 국장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영선사로 청나라에 가있던 김윤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의 마건충은 4,500명의 육군을 이끌고 한성에 당도하였다. 이틀 뒤에는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일본군 대대병력을 이끌고 한성에 입성하였다.그리고 청국의 해군제독 오장경은 김윤식과 정여창을 대동하고 남양만으로 들어왔다. 1882년 8월 25일 청국의 해군제독 오장경은 임오군란의 배후자로서 대원군을 지목하였으므로 대원군을 납치하여 텐진으로 이송하여 감금해버렸다. 대원군은 당시 63세였다.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제 명성왕후 민씨 조정이 부활하였다. 청군은 도성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인 350여 명을 살해하였다. 청국은 좌영 우영을 설치하여 청교관을 두고 한성에 청군 3,000명을 상주시켰다. 한편 일본국은 전영 후영을 설치하여 일교관을 두었다.

대원군이 청나라 텐진에 이송되고 임오군란이 마무리되자 명성왕후 민씨가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청국은 독일인 뮐렌도르프를 재정고문으로서 조선에 파견하였다. 뮐렌도르프는 당시 텐진 주재 독일 부영사였다. 한편 청국서 돌아온 김윤식과 조영하는 하수도정비를 위하여 치도국을 설치하고 치안을 위하여 순경국을 설치하였으나 온건개혁을 펼치고 있던 명성왕후 민씨 일파에 의하여 저지되고 말았다.

8월 30일 조선과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인한 일본인 재산과 인명피해와 관련하여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측 대표 김홍집은 일본측 대표 하나부사 공사에게 배상금 50만엔과 조선조정의 공식사과, 피해자 위로금 지불,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주둔, 사과사절단 파견 등을 약조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대일 배상금과 관련하여 일본외채를 받아 쓰기로 하는 밀약도 맺었다.

조선은 임오군란의 사과사절단으로서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민영익, 김옥균 등 15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들이 100일간 체류하는 동안 극진히 대접하였고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조선사절단 일행은 일본정부의 배려로 부산 세관의 수입과 사천의 사금광산을 담보로 하여 17만엔을 차입할 수 있었다.

조선 조정은 임오군랸을 계기로 친청파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 친청파 보수세력에는 명성왕후 민씨와 척족인 민영익, 민승호와 김홍집, 김만집, 어윤중 등이 있었다. 이 친청파 보수세력은 사대당이라고도 불리웠다. 반면에 이들에 대항하였던 개화당에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윤웅렬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매료된 자들이었다.

당시 재정고문으로서 중국에서 들어왔던 뮐렌도르프는 당오전을 발행하였다. 당오전은 화폐의 명목가치가 5배 증가된 화폐였다. 개화당의 김옥균은 근대산업을 진흥하고 재정난을 타계하기위하여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을 들여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당시 사대당의 일원으로서 중국에서 들어왔던 재정고문 윌렌도르프의 제안에 따라서 당오전과 당십전이 발행되었다. 당오전은 화폐의 명목가치가 5배 부풀려진 화폐였으므로 화폐가 정치자금으로 유용될 수 있었고 인플레이션의 위험도 따랐다.

1883년 10월 1일 한성순보가 창간하였다.

1884년 청국과 프랑스는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하였다. 결과는 청국의 완패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모의하여 조정의 실권자인 친청파 명성왕후 민씨에 대하여 역모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는 개국축하 만찬회가 열리고 있었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당 일당은 사대당 일당을 해치기로 되어있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옥균과 박영효는 창덕궁으로 달려가서 고종에게 청국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보고하고 고종을 경운궁으로 옮기고 사대당 민태호, 민영목, 한규직, 조영하 등을 살해하였다.

다음날 1884년 12월 5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한성주재 각국 공사와 영사에게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통고하고 새 내각을 발표하였다. 고종의 둘째 형인 이재원이 영의정이 되었고 우의정에 홍영식, 호조참판 김옥균, 한성판윤 겸 전후양영사에 서광범, 병조참판 겸 정령관에 서재필을 임명하였다. 새 내각은 14개 조의 신 강령을 작성하여 고종으로부터 윤허를 받았고 반포를 앞두고 있었다. 그 내용 중에는 단발령, 봉건신분제도 폐지. 국채모집 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친청파 명성왕후 일파는 청국 총독 위안 스카이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곧 청국 군사 1,500명이 당도하였으나 개화당의 군사는 150명에 불과하였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동원하기로 했던 일본군도 퇴각해버렸다. 그러자 김옥균과 짝하고 있던 고종은 명성왕후 민씨가 있는 북관종묘로 가버렸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역모의 주역들은 일본공사관에 숨어있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선박 천세환의 선장은 김옥균 등을 식당 마룻바닥에 숨겨줬다. 한편 김옥균의 부인과 딸은 음독자결하였다. 서재필의 부친도 음독자결하였다. 박영효의 부친은 옥사하였다.

이제 고종은 위안 스카이와 결탁하여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영의정 심순택, 좌의정 김홍집, 이조판서 이재원 등 이었다. 고종은 정변의 불씨였던 우정국을 폐지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을 5적으로 규정하여 비난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갑신정변으로 인한 일본군 희생자 40명을 위로하는 한편 일본과 한성조약을 맺었고 뮐렌도르프와 서상우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사죄하였다.

1885년 청나라 텐진에서 청국 대표 이홍장과 일본국 대표 이토 히로부미는 갑신정변의 마무리를 위하여 텐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청국과 일본국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기로 하였고 유사시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고지하도록 하였다.

그해 1885년 영국함대가 제주도와 여수사이에 있는 거문도(포트 해밀턴)을 점령하였다. 5월에 조선은 러시아와 조러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첫 공사로 웨베르가 한성에 부임하였다. 7월 말에는 청국에서 파견된 재정고문인 뮐렌도르프가 파직되었고 위안스카이의 위세가 높아졌다. 이어서 8월에는 중국으로 납치되었던 대원군이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위안스카이의 주선으로 자신의 큰아들인 이재면과 함께 납치 3년만에 입국하였던 것이다.

1884년 이후 1894년까지는 태평 10년 이다. 1885년 미선교사에 의하여 배재학당이 설립되었고 다음해 1886년에는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 그해 조선은 프랑스와 조불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887년 대원군은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 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므로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이준용을 옹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준용 옹립은 실패하였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첫째아들인 이재면의 장남이었다. 이재면이 유순한 반면에 이준용은 괄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손자인 이준용을 총애하였으므로 그후 몇차례 더 그를 옹립하려고 계획한다.

1892년 운현궁에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다. 운현궁은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 그리고 손자 이준용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황현은 이 사건의 배후로서 명성왕후 민씨를 지적하면서 그녀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려했다고 주장하였다.

1894년 1월 20일 전라도 고부군에 사는 동학의 접주 전봉준은 200여 명의 포를 이끌고 전라도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포란 동학신도의 무리를 말하고 접주란 포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그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40세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전봉준의 부친을 불경죄로 장살한 바가 있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자 전봉준의 부친은 부의금 2천냥을 걷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부친은 조병갑의 명령을 거부했었다. 한편 조병갑은 보를 만들어 징세하였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징세하기도 하였다. 불효죄와 음행죄를 명목으로 징세하였고 부친의 비각을 위하여 징세하기도 하였다. 또 조세로서 정백미를 받고 하등미를 서울로 올려보내어 차익을 얻기도 했다. 전봉준과 포는 고부관아의 곡식창고를 부수고 양곡을 꺼내어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정에서는 안핵사 이용태를 내려보냈고 농민군과 화약하였다. 이것이 동학 농민군의 1차 봉기이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이 봉기 가담자들을 역모죄로 몰아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영 등은 농민군 10,000여명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이다. 농민군은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을 물리치자 전주성을 향하였다. 이때 조선조정은 황급히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1894년 6월 8일 청군은 내란진압을 목적으로 아산만에 당도하였다. 그러자 일본 또한 텐진 조약에 따라서 자국민 보호를 목적으로 출병하기로 결정하였고 곧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6월 11일 농민군은 관군과 화약하였다. 이것이 전주화약이다. 전봉준은 12개조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 중에는 불량양반을 벌주고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등을 요구하였다. 한편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교도들은 남원 부사 이용헌을 살해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개혁적인 농민자치기구였다. 대원군은 2차 봉기의 주역인 김개남과 관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조선 조정의 영의정 심순택과 신응조, 김홍집 등은 일본이 요구한 5개조의 내정개혁안을 실행하기 위하여 교정청을 설치하여 내정개혁에 착수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4대문과 경복궁을 점거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명성왕후 민씨내각을 쫒아내고 친일내각을 구성하였다. 일본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섭정을 하게하였고 영의정 김홍집과 박정양, 민영달 등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힘을 합쳐서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갑오개혁의 주요내용으로는 과거제 폐지, 선거조례 제정, 은본위제, 지세의 금납화, 연좌제 폐지, 조혼금지, 공사노비혁파. 과부재혼 허가 등이었다. 이것이 제 1차 갑오개혁이다. 한편 조선은 청국과의 모든 조약을 파기한다는 통고와 함께 청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한편 일본은 아산만에 파견되어있던 청국의 북양함대를 몰아내기위하여 더 많은 군사를 조선에 파병하였다.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근해에서 일본 순양함 나니와호 선장 토고 헤이하치로는 청국의 2,134톤 가오슝호를 침몰시켰다. 이것이 풍도해전이다. 그리고 8월 1일 청국과 일본간에 공식적인 전쟁이 선포되었다. 이것이 청일 전쟁의 시작이었다.

9월 16일 일본군은 15,000명의 청국군사가 사수하고 있던 평양을 탈환하였다. 청국군 사망자는 2,000명, 부상자 4,000명이었던데 반하여 일본군 사상자는 600명 이었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1894년 9월 17일 일본함대와 청국의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에서 조우하였다. 청국 군함 5척이 침몰하였고 4척이 파손되었으며 사망자는 850명이었다. 일본국은 군함 3척이 파손되었고 사망자는 90명 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청국의 북양함대는 뤼순으로 피신하였다. 이것이 황해해전이다.

1894년 10월 24일 일본군은 단동과 요동반도 남부를 점령하였고 청국의 북양함대가 있는 뤼순항을 포위하였다.

이달 동학군은 남접의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가 연합하여 연함군을 이끌고 우금치에서 조선 관군과 일본군 20,000명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과 조우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완패하고 말았다. 1만여 동학군 중 살아남은 자는 5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으로 동학농민운동은 종결되었다.

1894년 11월 21일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하고 6만여 명의 청국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뤼순대학살이다.

조선 조정의 김홍집과 박영효 연립내각은 일본식 내각과 7부를 도입하고 의정부와 8아문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8도에서 23부로 개정하고 사법권을 독립시키고 치안과 행정을 분리시켰다. 또 외국어학교 관제를 공포하고 신교육을 실시하였고 경찰권을 일원화하였다. 또 군대를 개편하여 신설대, 시위대, 훈련대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3도통제군과 각 도의 병영, 수영을 폐지하였다. 이것이 제 2차 갑오개혁이다. 이것은 제 2차 김홍집내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894년 12월 2일 전라도 순창에 피신해있던 전봉준은 자신의 부하였던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로 인하여 체포되어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곧 전봉준은 일본영사관에 수감되었다. 한신현은 현상금 1천냥을 받았고 나중에 금천군수가 되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75세의 수구파 대원군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가는 가운데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은 1895년 1월 7일 고종에게 홍범 14조를 반포해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내용은 자주독립, 왕위세습제, 조세법률주의, 국민의 재산과 생명 보호, 관제개혁, 인재양성 등이었다. 이 홍범 14조는 조선이 청국과 단절하고 자주독립을 선포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었다.

1895년 2월 12일 웨이하이웨이에 피신해있던 청국의 북양함대는 일본해군과 육군의 동시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1895년 3월 24일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개화파인 김학우를 암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손자를 살리기 위하여 이노우에 공사 등 각국 공사를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은 동학교도를 이용하여 고종과 개화파 인사들을 암살하고 현정부를 전복하려고 하였지만 이 계획이 발각이 되어서 사형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준용은 할아버지 대원군의 도움으로 종신형으로 감해지고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

1895년 3월 26일 일본군은 대만 근처의 펑후제도를 무혈점령하였다. 일본군 장교 가바야마 스케노리는 3일 후에 대만을 상륙하여 점령하였다.

1895년 3월 30일 전봉준은 의금부에서 교수형 당하였다. 향년 41세였다. 전봉준의 형제들 또한 연좌되어서 사형되었다. 전봉준의 후처는 노비가 되었다. 전 고부군수 조병갑은 사면되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청국대표 이홍장은 청일간의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국은 일본국에 배상금 2억냥을 지불하기로 하였고 대만과 랴오둥반도 및 펑후제도를 할양하였다. 한편 청국이 지급한 2억냥은 청국의 3년 세출예산액이고 일본의 4년 세출 예산액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또 청국은 쑤저우, 항저우 등을 일본에 개항해주었고 일본인들의 거주, 영업의 자유를 승인해주었다. 또 청국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였고 조선에 대한 조공 및 헌상 등은 더 이상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지 6일 후인 1895년 4월 23일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일본에 대하여 요동을 청국에 반환하도록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와 남만주 및 청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위협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3천만냥의 추가배상금을 조건으로 요동을 청국에 반환하였다.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한편 조선 정부는 삼국간섭 이후로 러시아의 세력이 높아지자 이완용, 민영환, 윤치호 등 정동파는 명성왕후 민씨의 세력을 업고 친러, 친미 정책을 시행하였다.

1895년 5월 총리대신 김홍집은 내각을 친일세력으로 개편하고 제 3차 갑오개혁인 을미개혁을 실시하였다. 김홍집은 단발령을 단행하였고 태양력을 도입하여 구정을 대신하여 신정을 실시하였고 새 우편제도를 위하여 우체사를 설립하였다. 또 연호로서 건양을 사용하였다.

1895년 9월 1일 새 일본공사에 미우라 고로가 부임하였다. 미우라 고로는 일본육군 중장 출신이었으나 조선에 온 후로 두문불출하고 불경만 외웠으므로 염불공사란 별명을 얻었다. 이어서 김홍집은 3차 개각을 단행하였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수시로 미우라 고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명성왕후 민씨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 30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일본인 낭인들은 일본군 수비대와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 250명과 함께 명성왕후 민씨가 거처하는 경복궁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는 미국인 다이가 이끄는 조선군 시위대 300명과 조우하였다.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250명은 우수한 화력을 이용하여 조선군시위대 300명을 궤멸하였다. 이어서 일본인 낭인들은 건천궁에서 궁녀복장을 한 명성왕후를 찾아내어 난자하였고 그녀의 국부를 검사한 후에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태웠다. 명성왕후 민씨는 향년 45세였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이어서 명성왕후 민씨는 대원군과 일본의 압력으로 폐비되었다. 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은 강화도 교동에서의 유배가 풀렸다.

1896년 1월 서재필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준비하였다. 독립협회는 지방에서 의병활동과 외세배격 운동을 하였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로 일본세력의 위협을 받고있었으므로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어서 고종은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 조희연을 을미 4적으로 규정하여 비난하였다. 고종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파직하고 총리대신 서리에 박정양을 임명하여 내각을 개편하였다. 이날 파직된 김홍집과 정병하는 군중들로부터 돌맞아 죽었고 어윤중은 고향인 보은에서 타살되었다. 유길준은 비밀리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한편 고종과 왕세자, 엄상궁은 다음해 1월까지 1년간 러사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그리고 고종은 대원군과 일본의 압력으로 폐비되었던 명성왕후 민씨를 복위하였다.

1896년 5월 러시아는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러사아와 일본은 서로 가까와지면서 로마노프 외상과 야마가타 사이의 비밀회담을 하였다. 그 내용은 러시아와 일본 양국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남북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서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경원과 경성의 광산 채굴권을 요구하였고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채굴권을 요구하였다. 러사아는 한성에 한로은행을 설치하였다.

1896년 9월 29일 고종은 조칙을 내려서 한성판윤 이채연과 왕실재정고문인 영국인 맥레비 브라운에게 도시계획을 실시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서 도로가 정비되었고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리고 탑골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였다. 덕수궁은 이전의 경운궁을 수리한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8월 17일 고종은 조선을 대한으로 개명하고 연호를 광무로 하여 칭제건원하였다. 이것이 대한제국이다. 고종 황제는 전국의 23부를 13도로 개편하였다.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왕세자와 왕세자빈 민씨는 황태자와 황태자빈으로 격상되었다.

10월 22일 고종황제와 엄상궁 사이에서 태자가 태어났다. 이 태자가 이은이다. 엄상궁은 엄귀인으로 승격되었다. 이은은 후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태자인 의민태자가 된다.

1897년 12월 러시아는 청국과 협정을 맺고 뤼순항(포트 아서)과 대련만을 조차하였다. 러시아는 이로써 부동항을 얻을 수 있었고 다음해에는 하얼빈과 심양 그리고 뤼순항을 연결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민씨 부인이 타계하였다. 이어서 다음 달에는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의 별장인 아소당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79세였다. 고종은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명성왕후의 시해사건과 관련되었다고 보았다.

1898년 3월 1일 국고금과 세납금을 관리할 목적으로 한아은행이 개점되었다.

러시아어 통역관 김홍륙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권력을 남용하다가 뇌물사건에 휘말렸다. 김홍륙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기 전에 고종이 즐겨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어서 시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곧 김홍륙은 역모죄로 참수되었다. 김홍륙은 함경도 천민 출신이었다.

독립협회는 종로 네거리에서 종종 군중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정부시책을 비판하고 외세를 규탄하면서 여론을 형성하였다. 이것이 만민공동회이다. 독립협회는 이 만민공동회를 이용하여 한아은행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내의 수구파는 독립협회를 모함하였다.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하고 공화국을 세우려한다고 모함하였다. 이것이 익명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하도록 명하였다. 한편 독립협회는 지주와 상인계층이 중심이 되었는데 관세철폐와 자유무역을 옹호하였다. 반면에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자생적 민간주도의 상업활동을 옹호하였다.

1899년 고종 36년 광무 3년 한성에 전차운행이 시작되었다. 동아시아 최초였다.

1899년 중국 허베이 지방의 농민들이 외세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서태후가 이 농민봉기를 배후에서 사주하였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연합군은 텐진과 베이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여순역과 대련역이 화재로 소실되자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병력을 만주에 진출시켰다. 이것이 의화단 사건이다.

1901년 엄귀인이 고종 황제의 왕비로서 책봉되었다.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엄귀인 왕비책봉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지만 오히려 고종 황제는 이준용이 명성왕후암살에 관련되어있다고 믿었으므로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해 제주도에서는 민란이 일어났다. 당시 천주교는 대한제국 내에서 세력이 확장되었을 뿐만아니라 상당한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다. 성당은 치외법권적인 구역이 되어갔다. 죄를 짓고 성당에 들어가 은거할 경우에 죄수를 인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제주민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커져가는 천주교 세력과 징세를 남발하는 봉세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제주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천주교도로 자처하는 300여명을 처형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신부들은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어서 프랑스 함대가 파견되었다. 신임 제주목사 또한 함께 도착하였다. 민란은 더이상 확전되지 않았고 이재수와 주동자들은 처형되었다. 참고로 제주도는 천주교도가 개신교에 비해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이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 상업적 이익을 지키고 영국은 중국에서 이익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때 동맹국으로서 합세하기로 했다. 이것이 제 1차 영일동맹이다.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만주에서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3년 후 제 2차 영일동맹를 맺게되는데 그 직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 조약에 따라서 영국을 돕기 위하여 전쟁에 참전하게된다.

1903년 고종의 왕비 엄씨는 황제비가 되었다. 이 황제비 엄씨가 순헌황귀비이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뤼순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함대를 공격하였다. 다음날 일본은 제물포항의 러시아군함 2척을 공격하였다. 다음날인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것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이 요청해옴에 따라서 공수동맹을 위하여 한일의정서를 조인하였다. 외무대신 이지용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체결하였다. 처음에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사이에서 국외중립을 희망하였지만 실패하였다. 3월 17알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하였다. 한편 일본은 백동화를 주조하여 대한제국에서 유통시켰고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유통시키고 결제하였지만 금화결제는 하지않았다.
 
7월 13일 보안회가 결성되었다. 보안회는 일본인 나카모리가 조선의 황무지 개간권을 확보하려는 것을 저지하였다.

8월 10일 러사아함대 제독 빌헬름 비트게프트는 뤼순항을 출발하여 황해를 지나 제주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시도하였다. 일본함대의 도고 제독은 러시아함대와 조우하였다. 비트게프트 제독은 교전중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러시아 함대는 뤼순항으로 되돌아갔다. 이어서 일본 육군은 뤼순항을 포격하여 함락시켰다. 9월 일본은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하여 울릉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였다.

8월 18일 송병준과 이용구는 일진회를 결성하여 보안회와 대립을 시작하였다. 한때 송병준은 민씨일족의 억압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에 망명했었다. 송병준은 망명 10년만에 일본군 오타니 소장의 통역관으로서 귀국하였다. 송병준은 당시 47세였다. 이용구는 동학교도였다.

1904년 8월 22일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고문정치를 실시하기 위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외무대신서리 윤치호와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재정고문으로 일본인 메카다 다네타로를 추천하였고 외교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슨을 추천하였다. 일본은 그외에도 궁내부고문, 군사고문, 경무고문, 학무고문을 추천하였다. 이것이 한일 의정서이다. 제 1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한일 의정서 전문 4조에는 대한제국의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일본국은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인 재정고문 메카다 다네타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왔고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조선의 은행들은 점점 일본은행에 종속되어갔다. 다음해 일본은 한일 의정서, 즉 제 1차 한일협약에 따라 러시아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의 독도를 일본의 시마네 현에 편입한다.

9월 28일 황태자비 민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33세였다.

1905년 1월 2일 뤼순의 러시아 주둔군 지휘관은 상부의 허락없이 뤼순항을 일본에 양도하였다. 한편 러시아의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발트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아시아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함대와의 대전투가 임박하였다.

이 해 1월 28일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고등경찰제도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현행범체포가 가능해졌다.

1905년 2월 22일 일본정부는 독도를 시마네 현이 관할하는 다케시마로 명명하고 일본영토로 편입하였다. 제 1차 한일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이 해 8월 일본은 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 독도편입은 일본이 제 2차 대전에서 패망후 전승국이었던 미국과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에서 대한민국과의 소유권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국은 조약에 따라서 한반도와 제주도와 거문도 울릉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트 함대(제 2태평양함대)는 전함, 구축함, 순양함 등 38척을 대동하고 쓰시마 근해에서 일본함대와 조우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함대는 완패하였다. 러시아함대는 8척의 전함을 상실하고 5,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은 3척의 어뢰정과 116명이 전사하였다.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은 테프트-가쓰라 비밀협약을 맺고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인정해주기로 하였다.

1905년 9월 5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종결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경비로서 17억원을 사용하였다. 이중 14억원은 공채를 발행하여 충당하였고 나머지 3억원은 외채였다. 이로써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 우위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 일로 인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한성에 당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면서 일본천황의 친서를 바쳤고 일본정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신하여 행사할 것을 조약하자고 하였다. 고종황제는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내각를 소집하고 대신들에게 조약체결의 가부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 3명은 조약체결 불가라고 결정하였고 나머지 5명의 대신은 조약체결 찬성을 결정하였다. 을사 5적이란 이들 5명의 대신들을 말한다. 이들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대신 8대신 중에 5대신이 찬성하였으므로 조약이 가결되었음을 선언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선의 외교권에 대한 조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이것이 제 2차 한일협약이다. 을사조약이라고도 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정부를 경유하게 되었고 고종황제 바로 밑에 통감을 두게되었다. 대한 제국 제 1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이다. 이로써 한성에 주재하던 모든 외국공사관은 철수하였다.

12월 20일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 장지연은 이 일로 투옥되었고 황성신문은 정간되었다.

1906년 2월 1일 일본헌병대는 행정, 사법, 경찰권을 장악하고 무단정치를 시작하였다.

1907년 황태자는 새 황태자비로서 윤택영의 딸을 맞이하였다. 황태자는 33세였고 황태자비 윤씨는 14세였다.

1907년 1월 대구에 사는 서상돈과 김광제는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 1,300만원을 갚기 위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았다. 일본은 일진회를 동원하여 방해하였고 주동자인 양기탁을 구속함으로써 사실상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상류층과 부자들의 의지 부족도 한 몫 했다.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Hague Convention)가 열렸다. 이 회의는 처음 1899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제안에 따라 전쟁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국과 독일 등의 군비축소와 영토분쟁에 대한 중재재판소 설립에 대한 국제회의였다. 고종은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인하여 참가하지 못했다. 이것이 헤이그 밀사사건이다. 이준은 전 평리원 검사였고 이상설은 전 의정부참찬으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중이었다. 그리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크주재 전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그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었고 일본이 대신하여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1907년 7월 20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헤이그주재 일본공사가 일본외무성에 긴급전문을 보냈고 이어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질 것을 요구하였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송병준, 이병무는 고종에게 양위하도록 종용하였다. 고종은 양위를 결심하였고 양위식을 거행하였다. 양위식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직접하지 않았고 내관들이 대신하였다. 고종은 당시 56세였다. 이완용은 고종양위를 계기로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나중에 고종은 이완용에게 집을 장만해주면서 황실소유의 저택을 하사하였다. 사실 을사조약 이후로 매국노로서 박제순이 더 유명했다. 한편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과 정미 7조약을 체결하였다. 순종은 이 조약을 윤허하였다. 정미 7조약에 따라서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에서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을 간섭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인 관리를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법권이 일본통감에게 넘어갔고 내각의 차관과 경찰간부는 일본인이 아니면 아니되게 되었다. 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으므로 관동, 관서, 영남지방에는 의병이 봉기하여 무장항일투쟁이 시작되었다.

1907년 8월 7일 순종황제는 황태자로서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황비 엄씨소생의 이은을 책봉하였다. 이은은 당시 11세였다.

1907년 고종 44년이자 광무 11년, 순종1년이자 융희 1년인 8월 27일 순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순종황제는 34세였다. 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는 14세였다.

12월 15일 황태자 이은은 일본의 학습원 수학을 위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슨을 저격하였다. 왜냐하면 스티븐슨은 대한제국의 통감정치를 찬양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인환은 금고 25년을 선고받았으나 10년 후에 석방되었고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08년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징옥, 윤휴, 윤원형, 밀풍군 탄, 김익순(김삿갓의 부친), 이인좌의 난 때 관련자 등 77명을 복권하였다.

1909년 봄 일본총리 가쓰라 타로와 외무상 고무라는 대한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상의하여 조선과 일본의 합병을 동의하였다.

1909년 6월 14일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통감직을 사임하고 일본의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추밀원은 일본천황의 자문기구로서 추밀고문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제 2대 대한제국 통감으로서 소네 아라스케가 부임하였다.

1909년 7월 1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조약을 체결하여 사법권과 교도행정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사법부, 재판소, 형무소는 전부 폐지되었고 새롭게 통감부 사법청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기유약조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의 의병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안중근은 31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과다출혈로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와 회담하기로 되어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화학을 공부하였고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또 그는 일본제국헌법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초대 일본 내각 총리를 역임하였고 그 후 제5대, 7대, 10대 내각 총리를 역임한 후에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었다. 순종황제는 그에게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909년 12월 일진회 소속 동학교도 이용구는 보부상들과 유생들을 매수하여 한일합방을 촉진하는 100만 회원 연명칭을 전개하면서 송병준과 함께 한일합방 성명서와 청원서를 준비하였다.

1909년 12월 12일 이완용은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회에 참가하려고 종현천주교회(명동성당)에 가는 길에 이재명에게 피습되었다.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에 칼을 맞았고 왼쪽 폐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2개월 후에 회복되었다. 이재명은 다음해에 교수형되었다.

1910년 3월 16일 안중근이 처형되었다. 안중근은 히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에 러시아 공안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일본제국 정부에 넘겨진 후에 당시 일본의 조차지인 뤼순 감옥에 갇혔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안중근은 16세때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친과 함께 참전하기도 했었고 17세 때 천주교세례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바울이라고 부른다.

1910년 5월 30일 제 3대 대한제국 통감으로서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부임하였다.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육군대장 출신이었다.

1910년 6월 24일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서리 박제순과 경찰사무위탁 한일약정 각서를 체결하여 경찰권을 위탁받았다

1910년 8월 16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한일합방 각서를 작성하였다. 국호는 조선으로 하기로 하였고 순종 황제를 이왕 전하로 칭하기로 하였다.

8월 18일 이완용 내각의 대신들은 만장일치로 한일합방안을 통과시켰다.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황제는 대한제국의 통치를 일본황제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여 추인하였다. 한일합방조약이 승인된 것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 4년, 융희 4년 대한제국 내각은 공식적으로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하였다. 조선창업 519년 만이었다. 당시 퇴위한 고종은 59세였고 순종은 37세였고 황태자 이은은 14세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카백과. 조선편.





2012년 3월 20일 화요일

9. 순조-헌종-철종

1800년 순조가 즉위하였다. 순조는 11살이었다. 순조의 부친은 정조였고 모친은 후궁인 수빈박씨였다. 순조가 어렸으므로 영조비였던 정순왕후 김씨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첨정을 하였다. 이전에 정순왕후 김씨가 영조의 계비로서 간택될 당시의 일화는 유명하였다. 영조는 간택될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거나 물이 깊다고 대답하였지만 당시 15세였던 정순왕후 김씨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대답하여 영조를 놀라게 했었다. 또 왕비 책봉이 된 이후에도 일화가 있었다. 상궁이 옷이 치수를 재기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요구하자 정순왕후 김씨는 네가 돌아서면 될 것이 아니냐면서 추상같이 답하였다.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비의 체통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1800년 2월 프랑스의 제 1통령인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다. 당시 알프스를 넘는일은 터부였으므로 참모들은 그를 만류하였었다. 나폴레옹은 그 당시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말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마렝고전투이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강화제의를 받아들이고 강화조건으로서 라인강 주변 영토의 절반을 할양받았고 북이탈리아를 보호국으로 삼을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조세제도와 행정제도를 정비하고 공업생산력을 진흥시켰다. 또 나폴레옹은 프랑스은행을 설립하였다.

1801년 천주교신자였던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서인노론 벽파와 짝하여 천주교 탄압에 나섰다. 이전의 정조는 정학론을 펼치면서 정학이 바로서면 사학은 스스로 멸한다고 보고 천주교을 묵인했었다. 천주교도들 중에는 서인노론 시파와 남인들이 많이 있었다.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시작하였다. 오가작통법은 다섯집중 한집에서 천주교인이 나오면 전부 처벌하는 연좌제였다. 오가작통법은 성종때 한명회의 건의로 창설되었는데 흉년때 조세와 부역을 위하여 이용되었었고 숙종때는 비변사에서도 오가작통법을 이용하였다.

은언군은 자신은 물론 부인과 며느리도 천주교도였다. 은언군과 송씨부인은 강화도에 부처되었다. 은언군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고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은언군은 후일 강화도에서 태어나게 되는 철종의 할아버지였다. 천주교도 이승훈과 정약종은 참수되었고 권철신은 고문사하였고 이가환은 아사하였다. 그리고 남인 정약용은 유배를 떠났다. 그 해 4월 19일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처형되었다. 남인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은 당시 27세였는데 이같은 조선조정의 천주교탄압을 대외에 알리기 위하여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외국배와 청나라배 수백척과 군사 5만을 동원하여 조선조정을 위협하여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게 하라는 밀서였다. 이것이 황사영 백서이다. 이 밀서가 발각이 되자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은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황사영은 참수된 후에 육시되었고 그의 부인은 제주도로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갔다. 아들 황창한은 추자도로 귀양갔다. 이것이 신유박해이다.

1801년 프랑스의 천주교, 즉 로만 캐돌릭은 대혁명 이후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7세와 종교협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 내의 종교적 분쟁을 완화하였다. 또 각 지역의 관습법과 봉건법을 통일하여 프랑스민법전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나폴레옹법전이라고도 하는데 만인의 법앞의 평등, 국가의 세속성, 종교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 등의 가치관을 담고있다. 나폴레옹은 왕당파와 자코뱅파등 파벌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였다.

1802년 순조 2년 순조는 왕비로서 김조순의 딸을 맞이하였다. 순조는 13살이었고 왕비 순원왕후 김씨는 14살이었다. 곧 서인노론 시파 김조순은 훈련대장과 판돈령 부사가 되었다. 순조의 외조부인 박준원은 금위대장이 되었다.

1802년 나폴레옹은 아미앵조약을 체결하여 영국과의 전쟁을 끝냈다. 영국은 그 당시 피트 수상이 물러난고로 강화조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803년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는 수렴정정을 거두었다. 이어서 왕비 순원왕후 김씨의 부친인 서인노론 시파 김조순이 섭정을 시작하였다. 김조순은 서인노론 벽파 일당을 정조의 유지를 져버린 역적으로 몰아서 김관주와 자신의 친척인 김달순을 처형하였다. 또 서인노론벽파의 당수였던 김종수와 심환지를 삭탈관직하였다. 그리고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일족들도 숙정하였다.

1804년 프랑스에서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3백 6십여만 표의 다수로 제 1통령 나폴레옹을 황제로 선출하였다. 12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의 황제즉위식에서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관을 썼고 비오 7세로부터 전통적 관례인 축복기도를 받는 대신에 그를 포옹해주었다. 나폴레옹은 스스로 부르봉왕조가 아닌 로마제국의 계승자임을 선포하였다.

1805년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1세였다. 서인노론 벽파를 후원하고 있던 정순왕후 대왕대비 경주 김씨가 타계함으로써 이제 서인노론 벽파와 서인노론 시파 및 남인 사이의 붕당은 끝이 났고 안동김씨 김조순이 세도로서 등장하게 될 것이다.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영국이 아미앵조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 3차 대프랑스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아우스터리츠 전쟁이다. 그러나 프랑스해군은 넬슨이 이끄는 영국해군을 상대로 트라팔가해전에서 완패당함으로써 영국상륙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대륙을 장악하였으므로 나폴리의 국왕으로서 자신의 형인 조세프를 임명하였고 네덜란드 국왕에는 자신의 동생인 루이를 임명하였다. 따라서 이제까지 1000년 동안 이어왔던 신성로마제국은 거의 붕괴되었다.

1806년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성장에 위협을 받았으므로 영국, 러시아, 스웨덴과 함께 제 4차 대프랑스동맹을 맺었다. 나폴레옹은 곧 전쟁에 돌입하였고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물리치고 베를린에 입성하였다. 이어서 나폴레옹은 대륙봉쇄령을 내려서 대륙의 국가들이 영국과의 무역을 금지시켰다. 원래 나폴레옹은 영국을 침략할 계획이었으나 프랑스의 해군력은 영국에 상대가 아니되었으므로 대신에 영국을 유럽과의 교역으로부터 봉쇄시키면서 먼저 경제적으로 궤멸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영국은 산업혁명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국력 또한 막강하였다. 나중에 러시아는 이 프랑스와 체결한 대륙봉쇄령을 위반하여 영국과 교역을 하였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하는 불씨가 되었다. 후일 나폴레옹은 러시아에서 퇴각하면서 급격히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1807년 나폴레옹은 폴란드를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프로이센을 구원하기위하여 파병하였다. 나폴레옹은 일라우 전투와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하였다.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와 틸지트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일부와 폴란드를 하나로 묶어서 바르샤바 대공국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자신의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를 베스트팔렌 왕으로 임명하였다. 또 나폴레옹은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쫒고 스페인을 통치하였다. 스페인 백성들은 반발하였고 프랑스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에 들어갔다. 나중에 스페인령 리오 데 라플라타는 아르헨티나로서 독립하게 된다.

1809년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는 3년 후에 왕세자로서 책봉이 되는데 그가 바로 효명세자이다.

1810년 1월10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14년간 같이 살아온 황녀 조세핀과 이혼하고 마리 루이즈와 혼인하였다.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즈는 로마왕 나폴레옹을 낳았다.

1811년 황해도 곡산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곡산 부사는 순조의 외삼촌이었던 박중신이었다. 당시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해져가자 수탈과 지대, 조세의 폐단이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 해 말 평안도 다복동 출신의 홍경래는  대자본을 쥐고있던 상인들과 부농들의 후원과 일부 양반들의 합세로 군졸들을 끌어모으고 봉기하였다. 홍경래는 서북인들의 관직진출이 제한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관군은 곧 반란군을 제압하였다. 이때 부녀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1917명이 참수되었다. 이 홍경래의 난은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 등 이전의 난리와 구별되는 민중들에 의한 역모였다.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하였다. 러시아는 퇴각하면서 도시와 양곡에 불을 질렀다. 나폴레옹은 쉽게 모스크바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혹독한 러시아의 겨울을 피하기 위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궤멸하였다. 이제 프로이센은 유렵의 각국에 호소하여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하였다.

1813년 홍경래의 난에 자극을 받은 제주의 토호 양제해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대항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양제해는 사전에 계를 조직하였는데 이 친목계가 난리의 불씨가 되었다. 양제해 등은 장사를 모으고 병기와 군량을 모았고 제주의 3현에서 동시에 봉기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비밀이 누설되었으므로 일당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1813년 나폴레옹은 대 러시아전쟁에서 프랑스군인 수십만을 희생시켰음에도 다시 청년들을 강제징집하였다. 나폴레옹은 군대를 이끌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동맹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과의 평화협정을 거절하였다. 이어서 라치프찌히 전투가 벌어졌고 프랑스군은 대패하였고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도망갔다.

1814년 연합군은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3월13일에는 파리를 점령하였다. 나폴레옹은 강제퇴위를 당하였고 지중해의 엘바섬의 영주로서 추방되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부르봉 왕조가 복구되어 루이 18세가 즉위하였다. 유럽대륙은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보수반동적인 빈체제를 설립하였다.

1815년 청송과 영양 등 경상도 산악지방에서 은거하고 있던 천주교도 300여 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 30여 명이 처형되어다. 이것이 을해교난이다.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중이었던 정약용이 경세유표를 집필하였다. 남인이자 실학 사상가였던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여전제를 주장하였다. 여전제란 토지를 공동분배하고 분배받은 토지를 공동경작하자는 이론이었다. 이 여전제는 현실성이 많이 부족하였다. 나중에 정약용은 정전제를 주장하였다. 정전제란 우물 정자처럼 토지를 9등분하고 가운데 있는 토지를 공동경작하여 조세로 납부하자는 이론이었다. 정약용은 그 외에도 수령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와 형벌에 관한 흠흠신서도 저술하였다. 한편 베트남의 건국 지도자인 호치민든 목민심서를 손에 들고 다니며 애독했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에 입성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적인 새헌법을 반포하고 연합국에게는 강화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강화는 불발되었으므로 전쟁을 재개하였다. 나폴레옹은 초반에 승세를 탔지만 나중에 워털루에서 프로이센, 영국 동맹군에게 완패당함으로써 백일천하는 끝이 났다. 나폴레옹은 영국에 투항하였고 웰링턴 장군의 제안에 따라서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었다.

1818년 황해도와 평안도에 10만여 명이 역질로 사망하였다. 그 해 대홍수로 인하여 수재가 발생하였다. 이 역질이 있기 전에 인도의 벵골에서 콜레라가 발발하였었다.

혜빈 홍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81세였다. 1815년의 일이었다. 혜빈 홍씨는 영조의 며느리로서 사도세자의 세자빈이자 정조의 모친이었다. 보통 혜경궁 홍씨로 알려져 있다. 정조 즉위 초기의 세도였던 홍국영은 그녀와 11촌 간 이었다. 혜빈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회갑때 한중록을 지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3대 궁중소설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한중록이다.

효명세자가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1819년의 일이었다. 효명세자는 11살이었고 세자빈은 12살이었다. 이 세자빈은 후일의 신정왕후 조씨이다.

1821년 5월 5일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던 나폴레옹이 타계하였다. 향년 52세였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그의 모발에서는 다량의 비소가 검출되었다.

1824년 프랑스왕 루이 18세는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루이 18세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인 66세의 샤를이 샤를 10세로서 즉위하였다.

1826년 김병연은 강원도 영월의 백일장에서 20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날의 시제는 김익순을 비판하라는 시제였다. 김익순은 홍경래의 난때 선천부사였다. 김익순은 불운하게도 홍경래의 반란군에 항복했었다. 장원급제한 김병연은 자신의 모친으로부터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 김병연은 그 사실을 알게되자 충격을 받았고 삿갓을 쓰고 방랑을 떠났다. 김삿갓은 그 후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영영 이별하였다.

1826년 교황청의 포교장관 카페랄리 추기경은 조선의 천주교 교구를 북경관할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북경교구는 포르투갈 세력권이었지만 이제 조선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세력이 점점 켜져가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는 도미니크 수도회가 관장한다.

순조 27년인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효명제자는 자신의 장인어른(빙부)인 조만영를 어영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조만영의 풍양 조씨 일가가 세도하게 되었다. 그 해 전라도 충정도 경상도에서 천주교도 500여명이 체포되었고 10여명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정해교난이다.

그 해 효명세자와 세자빈 조씨 사이에 세손이 태어났다. 이 세손은 100일이 되기 전에 능히 걸어다녔다.

1830년 5월 6일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3년 만에 타계하였다. 향년 22세였다. 효명세자가 타계하자 풍양 조씨의 세도도 추락하였고 안동 김씨가 다시 세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효명세자의 아들은 4살로서 왕세자위를 승계하였다. 이 왕세자가 훗날의 헌종이다.

안동 김씨일족은 김정희를 탄핵하였다. 김정희는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친족이었고 북학파 박제가의 제자였다. 안동 김씨일족은 먼저 윤상도를 사주하여 상소문을 쓰게 하였다. 순조는 상소문을 검토하면서 배후에 안동김씨가 사주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였지만 윤상도를 유배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이 윤상도의 옥은 10년 후에 다시 문제가 된다.

1830년 프랑스의 샤를 10세는 새법령을 공포하여 하원을 해산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선거법을 개정하였으므로 이전 유권자의 4분의 3이 선거권을 상실하였다. 그러자 자유주의자들이 반발하였고 파업과 항의를 시작하였다. 곧 왕정군은 출동하였지만 그들을 억압하는데는 실패하였다. 샤를 10세는 영국으로 도피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샤를 10세의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립을 옹립하였다. 이제 프랑스 왕권은 부르봉가에서 오를레앙가로 넘어갔다. 루이필립은 전제군주정을 입헌군주정으로 전환하여 특별재판소를 폐지시키고 상원을 세습직에서 선출직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국왕과 교회사이의 동맹관계도 깨버렸다. 이것이 프랑스 7월 혁명이다. 한편 이때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러나 루이 필립은 기대와는 반대로 폴란드를 지원하지 않았으므로 폴란드는 러시아에 의하여 잔인하게 진압되고 병합되고 말았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도 역모가 일어났는데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단 벨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분리 독립을 성취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였고 2년 후에는 유럽국가로부터 독립국가로서 승인받았다.

1831년 교황청의 카페랄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 16세로 즉위하였다. 그레고리 16세는 조선교구를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독립시키고 초대주교에 브뤼기에르를 주교로 임명하였다. 천주교 조선교구 초대주교인 브뤼기에르 주교는 임명을 받고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요동에서 뇌일혈로 타계하고 말았다. 향년 43세였다.

순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43세였다. 1834년의 일이었다. 순조는 정조와 후궁인 수빈박씨 사이의 왕자였다. 순조는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으므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대리청정을 했었다. 그리고 순조의 왕세자인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중에 22세의 나이로 타계했었다. 효명세자와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4살때 왕세자위를 승계하였다. 그 아들은 헌종이 될 것이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하였다. 헌종의 나이는 8세였다. 순조비인 순원왕후 안동 김씨가 대왕대비가 되었고 효명세자빈이자 헌종의 모친인 풍양 조씨가 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되어서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헌종 즉위 초 영의정은 안동김씨 인척인 심상규가 되었고 좌의정은 풍양조씨 외척인 풍산 홍씨 홍석주가 되었다. 우의정은 안동 김씨와 결탁을 하고 있었던 반남 박씨 박중훈이 되었다.

순원왕후 대왕대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은 유진길로부터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므로 천주교에 관대하였다. 천주교는 날로 세력이 번창해 갔다. 제 2대 조선 주교 엥베르가 들어와서 전도하였고 모방 신부와 샤스턍 신부도 들어와서 교세확장에 일조를 하였다.

헌종은 왕비로서 김조근의 딸을 맞이하였다. 김조근은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와 김유근과는 6촌 형제였다. 헌종은 11살이었고 왕비 효현왕후 김씨는 10살이었다. 이것은 1837년의 일이었다.

1839년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이 병으로 인하여 정계에서 은퇴하자 영의정 이지연은 대왕대비 순원왕후에게 사학을 멸하자면서 천주교 척결을 건의하였다. 이제 조정은 다시 오가작통법을 시행하여 천주교도 색출에 들어갔다. 김순성은 천주교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김순성이 밀고를 하자 유진길, 정하상 등이 잡혀들어왔고 엥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도 자수하였다. 이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는 모두 효수되었다. 엥베르 주교는 43세였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 였다. 유진길과 정하상도 참형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천주교도 100여 명이 참형을 당하였다. 이것이 기해박해이다.

1839년 중국황제는 관리 임칙서를 광저우에 파견하였다. 당시 중국과 영국은 서로 차와 모직물을 교역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차를 좋아하였으므로 수요가 급증하였다. 중국은 영국에 대하여 무역흑자였다. 그런데 영국은 이 차 대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인도산 아편을 중국의 하층민들에게 공급하였다. 하층민들은 아편을 좋아하게 되었고 아편대금인 은이 유출이 과잉되기 시작하였다. 임칙서는 광저우에 도착하자 아편의 소지를 금지시키고 또 외국상관을 봉쇄하여 아편을 몰수하고 파기하였다. 이때 영국상인들은 본국에 원정군을 요청하였다. 이어서 사사로운 민사사건과 관련하여 영국과 청국사이에 시비가 붙었고 영국의 무역감독관 찰스 엘리엇의 함대와 중국함대사이에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중국 함대는 완패당하였다. 이 제 1차 아편전쟁으로 인하여 난징조약과 그에 따른  부수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중국은 홍콩을 할양하였고 배상금 2,100만 달러지불,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푸, 샹하이 개항, 개항장에 영사설치, 공행상인폐지, 통상항구에 군함파견, 순찰, 그리고 개항장에 땅을 빌려서 영원히 거주 가능하도록 보장해주었다.

1840년 대사헌 김홍근은 10년 전의 윤상도의 옥 사건을 재심하자고 하였다. 곧 국청이 열렸다. 그런데 심문중에 윤상도는 또 거짓으로 김정희를 고변하였다. 김정희는 다행히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김정희는 유배중에 우리 전통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을 연구하는 중에 추사체를 발명하였다. 김정희는 북한산 순수비는 고려 태조의 비가 아니라 진흥왕의 비라고 고증하였다. 김정희는 금석학에도 능했다. 고대 비문을 고증하는 것도 금석학의 일분야이다.

1841년 헌종 7년 왕대비 신정왕후 조씨의 숙부인 조인영이 영의정이 되었다. 좌의정은 김흥근이 되었고 우의정은 정원용이 되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의 오라비인 김유근은 작년에 중풍과 실어증으로 타계하였다. 안동 김씨의 세력이 후퇴한 것이었다.

헌종의 왕비인 효현왕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16세였다. 1843년의 일이었다

헌종은 그 해 계비로서 홍재룡의 딸을 맞이하였다. 헌종은 17세였고 계비 효정왕후 홍씨는 14세였다. 곧 홍재룡은 금위대장에 승차하였다.

1846년 마카오에서 신학수업을 받고있던 김대건은 조선 제 3대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입국시키기 위하여 비밀 항로를 찾다가 마침내 항로를 발견하여 그것을 중국어선에 넘겨주려고 하는 찰나 조선 관헌에게 잡히고 말았다. 김대건은 한양의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향년 26세였다. 프랑스 제독 세실은 김대건을 구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이어서 김대건과 관련된 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병오박해이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이 후사가 없으므로 김재청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헌종은 21세 였고 후궁 경빈김씨는 17세 였다. 1847년의 일이었다.

1848년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보수내각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곧 보통선거가 실시되었고 의회는 온건 공화파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때 사회주의자들이 불만을 품고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정부군은 곧  폭동을 진압하였다. 이제 7월 입헌군주정은 붕괴되었고 공화정의 대통령으로서 루이 나폴레옹이 당선되었다. 루이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조카였다. 이것이 2월 혁명이다. 3월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메테르니히는 물러났고 빈체제 또한 붕괴되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23세였다. 헌종의 부친은 효명세자였고 모친은 신정왕후 조씨였다. 헌종은 부친인 효명세자가 젊은 나이에 타계하자 왕세자위를 승계하였고 할아버지인 순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었다. 헌종은 방사와 여색을 밝혔음에도 후사가 없었다.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다음 후계자로서 강화도의 도령을 지명하였다.  1849년 6월 9일 그 도령은 철종으로서 즉위하였다. 철종은 당시 19세였다.  철종의 부친은 전계군이었다. 전계군은 은원군의 셋째아들이었다. 은원군은 천주교신자로서 기유사옥 때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거기서 사사되었었다. 은원군은 사도세자와 숙빈임씨 사이의 왕자였으므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한편 철종의 모친은 용담 염씨부인이었다. 철종의 이름은 이원범이었다. 이원범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있었고 천민출신의 처녀와 혼약을 맺고있었다. 철종은 왕이 된 후로 그녀를 그리워하였지만 한번도 못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철종 즉위 초 순원왕후 김씨가 대리청정하였다.

1851년 철종은 왕비로서 안동 김씨 김문근의 딸을 맞이하였다. 김문근은 김조순의 7촌 조카였다. 그러므로 순원왕후 김씨와는 6촌간 이었다. 철종은 21세였고 이제 왕비가 된 철인왕후 김씨는 15세였다.

1852년 순원왕후 김씨는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제 철종은 친정을 시작하였다.

1853년 영의정에 김좌근이 되었다. 김좌근은 김유근과 순원왕후 김씨의 동생이었다. 우의정에는 서인노론 조태채의 5대 손인 조두순이 되었다.

황해도에 사는 김웅도와 채희재 등은 철종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들은 역모에 성공하면 이명섭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이명섭의 부친은 이정현이었다. 이정현의 부친은 황해도 풍천의 초도로 귀양간 이항석이었다. 이항석의 부친은 이인좌가 영조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키으면서 옹립하기로 했으나 난이 실패함으로써 사사되었던 밀풍군 탄이었다. 밀풍군 탄의 부친은 임창군이었다. 임창군의 부친은 경안군이었다. 경안군은 자신의 형들인 경선군, 경완군과 함께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을때 형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음에도 홀로 살아남았었다. 경안군의 부친은 소현세자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귀국한지 몇 달만에 타계하였으므로 왕세자위가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승계되었고 봉림대군은 곧 효종으로 즉위하였었다. 소현세자의 부친은 인조이다. 인조는 자신의 백부인 광해군에 대항하여 반정에 성공하여 왕위에 올랐었다. 한편 이명섭 추대역모사건은 고성욱이 밀고함으로써 발각이 되었다. 이명섭은 능지처사되었다.

1856년 10월 8일 중국관헌들은 주강에 정박하고 있던 애로우호에 들이닥쳐서 승무원들을 해적혐의로 체포하였다. 광저우의 영국영사는 즉시 승무원을 송환하고 영국 국기가 함부로 내려진 것에 대하여 사과할 것을 요구하였다. 양광총독 엽명침은 말하기를 애로우호는 중국배이고 영국국기는 걸려있지도 않았다고 항변하였다. 애로우호는 사실 홍콩선적, 중국인 소유, 영국인 선장, 중국인 승무원이 탑승하고 있었다. 중국측은 승무원들을 돌려보냈으나 영국영사는 접수를 거부하였다. 다음날 영국은 광저우를 공격하고 총독관저에 침입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였다. 프랑스도 영국에 합세하였다. 왜냐하면 프랑스인 선교사가 그해 중국관헌에 의하여 처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해 영국과 프랑스는 광저우에 괴뢰정부를 세웠으나 청나라조정은 관망만 하였다. 이어서 영국 프랑스군은 북상하여 텐진으로 진격하였고 중국과 텐진조약을 맺고 10개 항구를 개항시키고 군함진입권을 확보하였다. 또 내지에서의 여행 포교권, 영사재판권의 확대, 아편무역의 승인, 관세율 고정, 통과세 인하등을 보장받았다. 한편 이 텐진조약은 베이징에서 비준되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중국조정이 상하이에서 비준하려들자 영국 프랑스군은 비준을 강행하기 위하여 북상하다가 중국군 포대의 공격을 받고 대파되었다(1859.6). 그러자 영국 프랑스군은 그 다음해 베이징을 함락하고 베이징조약을 맺었다. 중국은 텐진조약에 덧붙여 증액된 배상금을 납부하여야 했고 교회가 토지와 교회건물을 임차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1857년 8월 4일 순원왕후 김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안동김씨 김조순의 딸이었던 순원왕후는 순조의 왕비로서 효명세자를 낳았고 세자빈으로서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을 간택하였는데 그녀가 신정왕후 조씨였다. 효명세자는 순조를 대리청정하는 중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였고 그 후 순조도 승하하였다. 이어서 효명세자의 아들, 즉 자신의 손자가 헌종으로서 즉위하자 순원왕후 김씨는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였다. 그리고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순원왕후 김씨는 강화도에 살고있던 사도세자의 증손자를 철종으로서 지명하였었다. 순원왕후 김씨는 철종즉위 초 대리청정하였었다.

경기도 파주에 염종수라는 자가 있었다. 염종수는 파주염씨였다. 철종의 모친은 용담염씨였다. 염종수는 용담염씨가 원래 파주 염씨라면서 족보를 고쳤고 자신은 철종의 외삼촌이 될 차례라고 상소하였다. 의지가지가 없었던 철종은 이 상소문을 보자 매우 기뻐하였고 염종수에게 전라우도 수군 절도사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파주 사람이 고변하자 용담 염씨가 원래 파주 염씨라는 사실은 날조라는 것이 밝혀졌다. 염종수는 능지처사되었고 그의 아들은 제주도의 노비로 보내졌다.

1858년 10월 17알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냤다. 그런데 이 원자는 5개월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1860년 돈의문, 즉 서대문에 괘서가 나붙었다. 왕을 비방하는 내용으로서 금극목金克木이니 김金가가 이李가를 누르고 나라를 빼앗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포도청에서는 범인 검거에 나섰지만 범인을 잡을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좌포도대장 허계와 우포도대장 신관호는 파직을 당하고 유배를 떠났다.

삼정, 즉 전정, 군정,  환곡이 점점 문란해져가고 있었다. 전정이란 토지 조세를 말한다. 아전들은 토지대장 등 제반서류를 이용하여 부가세를 만들고 착복하였다. 군정이란 군역을 말한다. 당시 조선은 양반을 제외한 16세부터 60세 사이의 모든 백성은 군역의 의무가 있었고 군포로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반서류가 위조되었으므로 죽은자에게도 징세가 되었다. 그것을 백골징 또는 족징이라고 하였다. 환정이란 춘궁기때 백성들에게 양곡을 대여하고 추수기때 원곡에 덧붙여 모곡을 회수하는 것이다. 아전들은 문서를 위조하여 비상식량으로 분배하거나 식량이 회수된 것처럼 문서를 위조하였고 또 사사로이 이자를 착복하였다. 옛말에 덕으로 못다스리면 창칼로 다스리게 되고 곪은 것은 터뜨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당시 인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총 호수는 158만 9038호였댜. 남자는 393만 34명이었고 여자는 335만 4204명으로 총 675만 여명이었다.

토호란 향반과 토반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향반은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낙향하여 위세를 부리던 양반이었다. 이들 토호들은 관아의 비호아래 백성들을 가렴주구하였다. 토호들의 강탈수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혼권은 소장을 아문에 제출하고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장권은 하졸이 사사로이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옥권은 옥에 갇혔을때 뇌물여부로 야로를 부리는 것이었다. 저권은 수확기에 쌀, 보리, 목화 등을 구걸하거나 강제로 착복하는 것이었다. 포권은 체포령이 내리면 당사자외에 인근 주민까지 위협, 공갈하는 것이었다.  
          
1862년 진주의 몰락양반 유계춘과 향반 이명윤은 도결과 환포의 부당함에 분기하여 경상우병사 백낙신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켰다. 도결이란 세금을 법정액수 이상 책정하여 공전과 군포를 횡령하는 것을 말한다. 농민들은 점차로 폭도화되어갔다. 조정은 백낙신을 제주도에 위리안치시키고 진주목사 채병원을 파직하였고 안핵사로서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를 파견하여다. 민란을 주도한 유계춘은 참수되었다. 이것이 진주민란이다. 이 진주민란은 임술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임술년 농민봉기는 경상도에서 15차례, 전라도에서 8차례, 충청도에서 9차례, 경기, 황해, 함경도에서 각각 1차례씩 일어났다.

김순성은 도정 이하전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고 철종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도정 이하전은 덕흥대원군의 13대 손이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부친이었다. 덕흥대원군은 중종과 창빈안씨 사이의 왕자였다. 명종은 후사가 없었으므로 중종의 손자인 선조를 다음 왕으로서 지명하였던 것이다. 이 역모는 실패로 끝났고 김순성은 효수되었고 도정 이하전은 제주도로 위라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제주 대정현의 농민 강제검은 과도한 장세와 군역과 부역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당시 제주는 산림개간을 금지할 목적으로 화전민에게 화전세를 과세하고 있었다. 또 군역의 경우에는 내륙에서 군포로 대신하였지만 제주민은  군정 1인당 쌀 6두로 납부하고 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쌀 6두를 돈으로 환산하여 납부하였는데 환산과정에서 부정과 폐해가 있었다.

1862년 중국은 태평천국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증국번을 난징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영국계 외인부대도 합세하였다. 태평천국의 교주 홍수전은 꿈에서 본대로 자신을 여호와의 둘째아들이고 예수의 동생이라고 주장하였다. 홍수전은 하층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겠다면서 교도들을 끌어모았고 그 세력이 커지면서 난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33세였다. 철종은 주색을 가까이 하다가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철종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신정왕후 조씨는 재빨리 어보(어세+옥보)를 챙긴 후에 '흥선군의 제 2자인 명복을 익성군에 봉하여 익종의 대통을 잇게하라.'고 반포하였다. 익종은 신정왕후 조씨가 세자빈이었을때 자신의 남편이었던 효명세자를 말한다. 그리고 흥선군은 이하응을 말하는것으로서 이하응의 부친은 남연군이었다. 남연군의 부친은 은신군이었다. 은신군은 자식이 없었으므로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 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맞이하였던 것이다. 남연군의 아들이 흥선군이고 흥선군의 아들이 명복이다. 한편 은신군의 형은 은연군으로서 은연군의 증손자가 철종이었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은연군과 은신군의 부모는 모두 사도세자와 숙빈임씨였다. 사도세자의 부친은 잘알다시피 영조이다. 이제, 흥선군의 제 2자인 명복이 신정왕후 조씨의 낙점을 받고 고종으로서 등극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2012년 3월 15일 목요일

8. 경종-영조-정조

1720년 6월 23일 숙종과 희빈 장씨 소생의 왕세자 윤이 경종으로서 즉위하였다. 당시 경종은 33세였고 왕비인 선의왕후 어씨는 16세였다. 경종은 지난 4년간 직전 왕인 숙종을 대리청정했었다. 왜냐하면 당시 숙종이 건강이 아니 좋아서 몸져 누워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종은 노론 대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전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었다. 한편 이전에 경종의 모친인 희빈장씨는 사약을 받아먹고 죽기 전에 자신의 아들을 보고싶다고 한 일이 있었다. 희빈 장씨는 당시 14였던 경종을 보자 우습게도 그의 음부를 확 잡아당겼다. 그러자 경종은 그 즉시 기절하였었다. 경종에게는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이 있었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최씨 소생으로서 후일 영조가 될 것이다.

경종 즉위 당시 조정은 서인 노론이 장악했다. 노론 4대신은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었다. 당시 서인 소론의 조태구는 우의정이 되었다.

1721년 경종 1년 경종은 자신의 뒤를 이를 원자를 대신하여 왕세제로서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책봉하였다. 연잉군은 숙종과 숙빈최씨 사이의 아들로서 경종과는 세살 차이였다.

한편 노론 4대신은 경종이 병약함을 이유로 연잉군이 대리청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서인소론 김일경 일당들은 분노한 나머지 노론 4대신을 역모죄로 탄핵하였다. 그러자 이에 부화뇌동한 경종 또한 서인 노론 일당을 즉각 실각시키고 이 노론 4대신들을 거제도와 남해 등으로 유배보내었다. 이것이 신축옥사이다. 이제 서인소론 일당들은 조정을 장악하였고 서인소론 조태구는 영의정이 되었다.

1722년 서얼출신의 남인 목호룡은 경종시해음모를 고변하였다. 이 음모란 직전왕이었던 숙종이 승하하자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백망, 심상길, 홍의민 등이 이전에 왕세자였던 경종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종시해음모의 주동자들은 재미있게도 한결같이 노론 4대신들의 아들들이거나 조카들이었다. 이제 경종은 그 아들들을 비롯하여 유배중이던 노론 4대신들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사사하였다. 반면에 이 서인소론 일당의 편에 서서 시해음모를 고변한 남인 목호룡은 훈작을 수여받았다. 이 경종시해음모사건은 서인소론 김일경 일당들과 남인 목호룡이 경종을 보호하는 동시에 정적들인 노론일당들과 연잉군을 확실히 억압하기 위한 자작극이었다. 이것이 임인옥사이다.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를 합쳐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1724년 경종 4년 경종이 동궁에서 올린 게장을 먹고난지 5일만에 승하하였다. 한의학에서는 게장과 곶감은 상극이라고 알려져있다. 경종은 왕세제인 연잉군이 직접 달인 인삼차를 마셨는데 그 날 승하하고 말았다. 한의학에서 인삼차는 식중독에는 최악이라고 알려져있다. 한편 경종과 왕비 선의왕후 어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언급했다시피 왕세제는 경종의 이복 동생인 연잉군이었다.

1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즉위하여 영조가 되었다. 영조의 왕비는 정성왕후 서씨였다. 영조는 연잉군시절 정빈이씨와의 사이에 경의군 즉 후일의 효장세자를 두고 있었지만 정빈이씨는 1721년 갑작스럽게 타계하였었다. 이해를 돕자면, 영조의 부친은 숙종이었고 모친은 후궁 숙빈최씨였다. 경종은 그의 이복 형이었다. 숙빈최씨는 입궐 당시 궁궐의 최하급로서 우물에서 물을 길던 무수리 출신이었다. 이제 경종비인 선의왕후 어씨는 왕대비가 되었고 창경궁의 저승당에서 지내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서인노론과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득세할 차례였다. 직전 왕인 경종의 배후에서 위세를 떨쳤던 소론의 거두인 김일경과 소론을 편들었던 남인 목호룡은 가시방석 위에 앉게 되었다. 영조는 직전왕 때의 조작사건과 관련하여 서인소론 김일경과 목호룡을 소환하였다. 재미있게도 서인소론 김일경은 고문을 받으면서 영조를 나으리라고 불렀다. 남인 목호룡은 참수되었는데 그의 머리는 3일 동안 거리에서 전시되었고 그가 거짓 밀고한 글은 불태워졌다.

1725년 영조는 타계한 정빈이씨와의 소생인 경의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다. 경의군은 이제 효장세자가 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숙종과 경종 때의 서인 일당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붕당하고 서로 당쟁하면서 모략하고 사화를 일으켰으므로 정치적으로 대단히 혼란하였다. 영조 자신도 신임사화를 몸소 지켜본 터였다. 중국 송나라때 구양수는 붕당과 관련하여 군자끼리는 도가 같으므로 붕하고 소인끼리는 이가 같으므로 붕한다고 하였다. 탕평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붕당하고 당쟁하는 것을 없애겠다는 것으로서 정치적 안정에 역점을 두겠다는 것이었다. 탕평의 기원은 서경의 홍범조 ''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에 있다.

1726년 효장세자는 세자빈으로서 조문명의 딸을 맞이하였다. 효장세자는 8살이었고 세자빈 조씨는 13살이었다. 이 현빈은 나중에 효순왕후 조씨가 될 것이다.

1728년, 참형된 서인소론 김일경의 아들인 김영해와 이인좌는 영조에 대항하여 청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이인좌는 대원수가 되었고 밀풍군 탄을 옹립하였다. 밀풍군 탄은 소현세자의 증손자였다. 경종비였던 선의왕후 어씨는 내통하고 있던 이인좌에게 비밀리에 언문 교서를 내렸다. 왕의 씨가 바뀌었으니 바로잡아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관군은 곧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이인좌 등 반란주모자들은 한앙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밀풍군 탄도 사사되었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 난리를 평정한 공으로 분무공신의 훈작이 주어지는데 그 공신에는 이광좌, 박문수, 조현명, 조문명 등 이었다.

1728년 11월 16일 효장세자가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10세였다. 나중에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가 된다.

1735년 영조 12년 영조와 후궁 영빈이씨 사이에 원자가 출생하였다. 이 원자는 출생한지 1년 만에 세자로 책봉이 되었다. 왜냐하면 효장세자가 일찍 타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위로 화평옹주와 화협옹주를 두고 있었다. 곧 사도세자는 모친인 후궁 영빈이씨와 헤어지고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가 되었고 내시들과 나인들이 그를 보살폈다.

1741년 이인좌의 난때 공을 세웠던 박문수가 어영대장이 되었다. 어영청은 대궐을 숙위하고 도성의 치안을 담당한 부서였다.

1744년 영조 20년 사도세자는 홍봉한의 둘째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사도세자는 10살이었고 세자빈 홍씨는 11살이었다 이 세자빈 홍씨는 나중에 한중록을 쓰게되는 현경왕후 혜경궁 홍씨이다. 홍봉한은 다음해에 실시된 과거시험에서 급제하였고 후일 어영대장을 거쳐 영의정에 승차한다.

1750년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5군영이 설치되자 조선의 양인 장정들은 군역을 위하여 1년의 2필의 군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영조는 1년 2필의 군포를 1포로 줄였고 이제까지 군포를 면제받던 부농층과 도고들에게는 선무군관이라는 명예직을 부여하여 군포를 거두었다. 또 균역청은 지주들의 토지1 결당 2말의 결작미를 군포로서 징수하였을 뿐만아니라 어세, 염세, 선박세를 징수하였다. 한편 도고란 독점판매 상인조직이었다. 도고는 농산물과 공산물 등을 매점매석하거나 독점하여 이윤를 극대화하였다. 도고는 자본력과 상술을 이용하여 생산자들에게 원료와 생산비를 선대하기도 하여 생산력의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물가불안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1750년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 사이에 세손 정이 태어났다. 세손 정은 출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다.

1752년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는 세손 산을 출산하였다. 그는 후일 정조가 될 것이다.

1754년 사도세자는 숙빈임씨와의 사이에 은언군을 낳았다. 은언군은 후일 철종의 조부가 될 것이다. 1756년에는 은신군을 낳았다. 은신군은 후일 고종의 증조부가 될 것이다.

당시 조선인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총 인구는 731만 여명 이었다. 남자는 353만이었고 여자는 378먄 이었다.

1757년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가 타계하였다. 정성왕후 서씨는 영조가 연잉군 시절일 때 혼인했던 정비였다. 영조와 정성왕후 서씨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다. 향년 66세였다. 그로부터 40일후에는 대왕대비이자 숙종의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가 71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원왕후 김씨는 연잉군이 왕세자가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왕세제가 된 연잉군을 양자로 입적하기도 했다.

1759년 영조는 새왕비로서 김한구의 딸인 김문주를 맞아들였다. 영조는 66세였고 김문주는 15세였다. 그녀는 정순왕후 김씨가 되었다. 당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영조는 간택 규수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다른 규수들은 산이 깊다거가 물이 깊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여 영조를 감동시켰다.

1759년 사도세자는 경빈 박씨와의 사이에 은전군을 낳았다. 후일 은전군은 자신의 이복형인 정조에 대항하여 역모한다. 그리고 역모가 실패하자 사사된다.

1762년 2월 세손인 산은 세손빈으로서 김시묵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손인 산은 11살이었다. 세손빈은 10살이다 그녀는 효의왕후 김씨가 될 것이다.

1762년 5월 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인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사도세자가 세자빈을 칼로 찔러 죽이려 한 일과 여승을 궁궐에 끌어들여 질서를 어지럽힌 일, 또 20일간 평양을 미행했던 일 등 이었다. 사도세자는 의대증이 있었는데 옷을 입을 때 몸이 원할하게 움직이지 못하여 옷이 자주 찢어졌고 따라서 옷감에 상당히 민감하였다. 사도세자는 옷을 입다가 발작을 하면 옷 착용을 도와주는 궁녀나 내관들을 죽였고 나중에 후회하곤 했다. 나경언의 상소와 더불어 노론일당들인 김한구, 김상로, 홍계희, 윤동도 등도 사도세자가 환관들과 함께 영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1762년 5월 13일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세자하고 창경궁 홍화문의 오른편의 뒤주에 가두고 망치질을 하였다. 사도세자는 7일 동안 갇혀있다가 굶어죽었다. 향년 27세였다.

1764년 영조는 사도세자와 세자빈 홍씨 사이의 세손인 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다.

1770년 영조는 반계수록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반계수록은 유형원의 저서로서 26권으로 되어있다. 유형원은 효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성리학과 농업을 연구하면서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토지조세제도, 군사제도, 관리제도를 실증적으로 비판하였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토지를 농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하고 자작농을 육성하자는 균전제를 제안하였고 과거제도 대신 천거제의 일종인 공거제를 옹호하였다. 또 3정승 중에 영의정만을 남겨두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하였고 군사면에서는 병농일치와 무기개량, 성곽축성을 제안하였다. 또 노비제도로서 종모법을 실시하여 노비수를 점차적으로 줄여나가자고 하였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적 토대라고 보겠다.

한편 이익은 유형원의 제자였는데 성호사설을 저술하였다. 이익은 토지제도로서 한전제를 주장하였다. 한전제란 농민들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토지로서 영업전을 두고 그 영업전의 매매를 금지하자는 것이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천문학을 다루었고 또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백두대간, 풍수설에 대하여도 서술하였다. 재미있게도 이익은 삼한사회 백성들의 기원을 중국 전국시대의 한나라에서 찾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을 쓰면서 방법론적으로 고증학을 사용하였다 고증학이란 틀린 사실을 객관적 자료에 비추어서 수정하는 것이다.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은 성호사설을 요약한 성호사설유선을 저술하였다.

1775년 미국의 조지 워싱턴은 제 2차 대륙회의에서 식민지 13개 주의 대륙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각 주에 군사와 전쟁물자를 요구하면서 대영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에 들어갔다. 이전에 대영제국은 프랑스와 인디안을 상대로 승리하여 일부의 땅을 차지하기는 하였지만 전쟁비용이 많이들었다. 영국의 의회는 비용을 벌충하기 위하여 식민지 미국에 과세하였고 영국왕 조지 3세는 이러한 식민지 대표들의 동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승인하였다. 이제 미국인들은 대표없이는 과세없다면서 반발하였다. 당시 대영제국은 항해법을 이용하여 미국의 경제를 억압하고 있었는데 미국인들은 보스턴에 정박중이던 영국상선의 홍차를 바다에 내다버려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되자 대영제국은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민병대를 조직하여 대영제국에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1776년 7월 4일 식민지 13개주의 대표들은 미국의 독립선언에 서명하면서 U.S.A를 착공하였다. 미국은 이어서 프랑스와 동맹을 체결하였고 또 스페인과 네델란드와도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사라토가 전투와 요크타운 전투(1781)에서 영국군에 승리하였다. 이어서 미국은 1783년 영국과 강화하고 파리조약을 체결하여 독립 U.S.A를 준공하였다.

1776년 영조 52년 3월 5일 영조가 83세의 일기로 승하하였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의 숙빈최씨 사이의 원자였고 자신의 이복형인 경종이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세제가 되었다. 경종이 승하하자 그를 대신하여 왕위를 승계하였었다.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의 소생인 효장세자는 유년시절에 요절하였고 영조와 영빈이씨 사이의 소생인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서 7일만에 굶어죽었다. 사도세자의 장남은 3살때 요절하였으므로 차남인 산이 왕세자위를 승계하였었다. 영조는 붕당을 억제하고자 탕평책을 실시하였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였다. 또 떠오르는 부농층과 도고 상인들에게도 군역을 부담시켜다

1776년 3월 10일 26세의 왕세자 산이 정조로서 즉위하였다. 세자빈 김씨는 효의왕후 김씨가 되었다. 정조의 할아버지는 영조였고 정조의 부친은 뒤주에서 타계한 사도세자였다. 정조의 모친인 혜빈 혜경궁 홍씨는 당시 43세였다.

정조는 즉위 3일만에 홍국영을 승정원의 동부승지에 임명하였다. 홍국영은 정조의 모친인 혜빈 혜경궁 홍씨와 11촌 간이었다. 정조는 이제 노론 벽파의 숙정에 들어갔다. 노론벽파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갇혀죽도록 힘을 모았던 반사도세자파였다. 반면에 노론 시파는 사도세자와 세손인 지금의 정조를 보호하고자 하였었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타계하자 노론시파의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이제 정조가 즉위하게되자 노론벽파 일당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꼴이 되었다. 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동생인 노론벽파 김귀주와 홍인한은 각각 흑산도와 고금도에 위리안치되었다. 한편 위기에 몰린 노론벽파 홍계희 일족은 정조를 암살하려고 모반을 꾸몄지만 사전에 발각이 되고말았다. 반란은 성공하면 반정이 되지만 실패하면 역모가 된다. 노론벽파 홍계희 일족과 정후겸, 문성국 등은 사사되었다

정조는 즉위 초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28개 별자리중 규성은 인재를 뜻한다. 규장각이란 인재들이 모인 곳이란 뜻이다.

1777년 홍상범은 정조를 시해한 후에 은전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음모를 꾸몄다. 은전군은 사도세자와 경빈박씨 사이의 아들로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다. 은전군은 평소 사냥을 좋아하고 여색을 즐겼다. 장사 전흥문은 비수를 품고 대궐로 들어가려다 수문장에 걸려서 포도청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였고 모든 사실을 실토하였다. 이것이 은전군 추대사건이다. 홍상범 일당은 죽음을 당하였고 은전군 또한 사사되었다.

1778년 정조는 홍낙춘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다. 이 원빈홍씨는 당시 세도였던 홍국영의 누이동생이었다. 원빈홍씨는 다음해에 괴질로 온몸에 반점이 퍼지면서 타계할 것이다.

1779년 홍국영는 사직상소를 올렸다. 홍국영의 세도 3년간 전정, 군정, 환곡이 많이 문란해졌다. 2년 후 홍국영은 34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1780년 서얼출신 박제가는 북학의를 저술하였다. 박제가는 2년 전 사은사인 채제공을 따라서 연경(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청나라의 선진문물에 느낀 것이 많았다. 박제가는 우리의 농업 도구와 건축 기술은 청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으므로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실용적으로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다. 2년후 박지원은 청나라 여행을 기록한 열하일기를 간행하였다. 박지원도 인정했다시피 그 내용은 기존의 성리학적인 관념론과는 동떨어진 실사구시의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것으로 박제가의 북학의와 맥을 같이한다.

1781년 정조 5년 정조는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을 임명하였다. 그들은 모두 서자출신이었고 서로 친구였다. 규장각이란 28개의 별자리중 규성에서 따온 것으로 규성이란 인재를 뜻한는 것이므로 규장각이란 인재들이 모인 곳을 말한다. 규장각은 고서들을 수집, 보관하였고 도서를 출판하였다. 또 과거시험을 주관하였고 문신들을 교육하였다. 정조는 즉위한 1776년 창덕궁 안에 규장각을 설치하였었다. 정조는 1782년 강화도에 새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이것이 외규장각이다. 후일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외규장각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일부 문헌들은 약탈되어 프랑스로 이송되었다.

1782년 정조의 궁녀 성씨가 왕자를 출산하였다. 이 왕자는 3개월 만에 원자로 봉해졌고 궁녀 성씨는 정식으로 소용 성씨로서 후궁이 되었고 곧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2년 후에 이 원자는 왕세자로서 책봉이 되었다. 이 왕세자는 문효세자이다.

1783년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출판금지시켰다.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전통적인 문체와는 다르게 파격적이고 개성 넘치는 문체를 구사한 것이 그 이유였다. 이것이 정조가 주도했던 문체반정이다.

1784년 29세의 이승훈은 서장관인 부친을 따라서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승훈은 이벽의 부탁을 받고 천주교 서적을 구입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북경 남천주당의 그라몽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다음해 성서와 묵주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다음해에는 이벽, 이가환 그리고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3형제 등과 함께 지금의 명동인 명례방에 조선 최초로 천주교회를 설립하여 미사와 강론을 행하고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천주실의는 포교의 기초가 되었다. 천주실의는 명나라 말기때 마태오 리치가 명나라 포교를 위해서 지은 책이다. 천주실의는 인간의 영혼불멸과 성선설,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 범신론적 일신론을 비난하였다. 천주교는 사물의 근원이 천주에 있다고 말한다. 한편 유교에서 만물의 근원은 태극에 있다. 불교에서는 현상하는 모든 것은 공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도교에서는 모든 사물은 무에서부터 나온다고 강조한다.

1786년 5월 11일 왕세자인 문효세자가 홍역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5세였다. 그로부터 3개월후 문효세자의 모친인 의빈 성씨는 출산을 앞두고 갑자기 타계하였다.

1787년 정조는 후궁으로서 좌찬성 박준원의 딸을 맞이하였다. 정조는 36세였고 새 후궁인 수빈박씨는 18세였다. 수빈박씨는 다음 해에 원자를 생산하였다. 이 원자가 후일 순조이다.

1789년 프랑스 부르봉 왕조 루이 16세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했던 프랑스군의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성직자와 귀족에게 토지세를 부과하려고 명사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성직자와 귀족들은 자신들의 토지가 과세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래서 루이 16세는 평민들이 포함된 삼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삼부회의는 성직자 대표와 귀족 대표 그리고 평민대표로 구성되어있는데 1614년 태양왕 루이14세때 이후로 150여년 개최되지 않았었다. 이 삼부회의에서 성직자 대표와 귀족 대표는 신분별 표결방식을 주장했으나 평민대표는 머리 수로 표결하자고 대항하여 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평민대표들은 루이 16세의 실내 테니스코트에 따로 모여서 새로운 의회를 만들어 버렸다. 여기에는 진보적인 캐돌릭 성직자와 자유주의 귀족도 합세하였다. 이들은 7월 9일 국민헌법의회(National Constituent Assembly)를 구성하고 프랑스 헌법의 제정에 착수하였다. 7월 14일 왕당파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 국민헌법의회를 억압하려고하자 파리시민들은 관군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였다. 민중의 저항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8월 14일 국민헌법의회는 봉건제의 폐지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8월 26일에는 프랑스 인권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당초 이것들을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해 흉작으로 인한 물가불안과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루이 16세는 마지못해 그것들을 승인하였다.

1791년 채제공은 금난전권의 폐지를 건의하였다. 금난전권은 일종의 독점권이었다. 채제공은 시전상인들의 폐해가 심하므로 난전을 인정해주자고 건의하였던 것이다. 정조 즉위 초부터 상공업은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백성들의 욕구도 증가해가고 있었다. 이제까지 시전상인들은 전안에 등록되었다는 특권만을 이유로 갖가지 물품들, 즉 포목, 종이, 약초등을 독점판매해 왔다. 이러한 독점판매는 금난전권으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었는데 상공업발전의 저해와 물가상승을 가져왔다. 정조는 즉각 모든 상인들에게 판매권을 인정해주었다. 단, 육의전 상인들은 여전히 독점판매권을 유지하였으므로 다른 상인들은 육의전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품은 거래할 수 없었다. 이것이 신해통공이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은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유교식 장례를 행하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아니하였다. 또 모친의 유언대로 캐돌릭 장례식을 행하였고 집안의 신주도 불살랐다. 이를 보고 분개한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에 탄핵상소문을 올렸다. 조정의 서인노론 벽파는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윤지충를 사형시키고자 하였다. 결국 정조는 윤지충의 사형을 윤허하였다. 윤지충는 전주 남문 밖에서 사회도덕을 문란케했다는 죄목으로 참수되었다. 그는 순교자의 피는 신심이 씨앗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이 신해박해이다. 진산사건이라고도 한다. 정조는 서인노론시파의 조언에 따라서 천주교의 교주역할을 하고있던 권철신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하였다. 이후로 천주교는 지하화되었다. 그런데 조정은 이 천주교 사건과 관련하여 남인 채제공의 신서파와 홍의호의 공서파로 나뉘어져서 신유박해까지 10년 동안 서로 대립한다.

당시 조선천주교는 북경 교구의 감독을 받고 있었다. 북경 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프란체스코회 소속의 수도사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크수도회는 먼저 중국대륙에 들어간 예수회와는 다르게 제사를 엄격하게 규제하였으므로 조선 천주교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후일 1965년 바티칸공의회는 '전교지의 문화와 풍습에 따라서 전교하라.'고 명하였다.

1791년 프랑스 입법의회는 입헌군주헌법을 제정하였고 곧 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결과는 푀양파와 지롱드파 그리고 자코뱅파가 다수당이 되었다. 푀양파는 입헌군주제를 지지하였고 지롱드파와 자코뱅파는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1792년 입법의회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 수행해나가기 위하여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9월 20일 프랑스군은 프로이센에 승리를 거두었다. 곧 입법의회가 해산되고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1793년 국민공회는 공화정을 선포하였다. 따라서 입헌군주제는 붕괴되었다. 곧 국민공회는 루이 16세의 사형을 의결하였다. 1월 21일 루이 16세는 2만 여 명의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콩코드광장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후에 처형되었다. 영국과 스페인 그리고 사르디나 왕국은 충격을 받았고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하여 군대를 소집하였다. 한편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는 의회에서 지롱드당을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재판소와 공안의원회를 설치하여 공포정치를 실시하면서 에베르파와 당통파를 숙정하기 시작하였다.

1794년 제주도에서는 가을태풍이 몰아닥치고 대흉년이 들어서 600명의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조정은 2만여 섬의 구호식량을 보냈다. 그런데 식량을 수송하는 선박이 도항중에 침몰하고 말았다. 제주여인 김만덕은 재산을 풀어서 쌀 500석을 사들이고 그 중 450석을 기부하였다. 당시 김만덕은 전라도의 양곡과 제주도의 약초와 해산물을 거래하던 객주였다. 정조는 김만덕의 선행을 알게되자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김만덕은 당시 섬의 출륙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한편 객주란 상품 집산지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매매하거나 알선하는 중간상인이다. 객주들은 상품보관을 위한 창고업, 상품이전을 위한 수송업, 상품대금 융통과 어음발행 등 금융업 그리고 식사와 잠자리등 여관업도 겸하였다. 객주들은 거대 자본력을 바탕으로 동업조합을 형성하였고 이윤을 위한 도고(독점)와 매점매석도 행하였다.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는 탈리앵의 탄핵을 받았다. 그 다음날 로베스피에르와 22명은 자신들이 애용하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이것이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1795년 프랑스의 국민공회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5명의 총재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총재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반대파들은 이것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이다. 이때 나폴레옹이 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곧 나폴레옹 장군은 이집트와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났고 시민들의 인기를 얻게 되었다.

1796년 수원 화성이 준공되었다. 착공 2년 만이었다. 이 수원성은 정약용이 제안한 거중기를 사용하였으므로 노동력을 절감하고 생산비용과 시간을  절감할 수 있었다. 화성은 화강암과 함께 벽돌을 쌓아올려서 지었다.

1799년 나폴레옹 장군은 브뤼메르 18일에 쿠네타를 일으키고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제 1대 대통령이 되었다. 프랑스의 제 1공화국이 10년도 안되서 붕괴된 것이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49세였고 등에 종기가 있었다. 정조는 뒤주에 갇혀서 굶어죽은 부친인 사도세자를 승계하여 왕세자가 되었다. 정조는 수빈박씨와의 사이의 원자인 공을 왕세자로 책봉했었다. 왕세자 공은 순조가 될 것이다. 정조대에는 관념적인 성리학보다는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실학이 융성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2011년 7월 13일 수요일

7. 인조-효종-현종-숙종

1623년 3월12일 밤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서인인 이귀, 김유, 김자점, 최명길은 광해군의 국정능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 서인들은 성리학적 이념에 능통한 자들이었는데 명나라와의 의리명분과 소중화사상을 중요시 하였다.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은 자신의 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주살하였고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삭호하였었는데 이것은 서인들에게 반감의 계기가 되었다. 또 광해군은 후금과는 실리외교를 펼쳤는데 이것은 친명배금을 주장하고 있던 서인들을 자극하고 있었다. 서인들은 조정의 실권자들이었던 대북파와 광해군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무관들이었던 이서, 이중로, 김유는 병력을 끌어모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은 이괄을 대장으로 삼아서 이 군사들을 통솔하면서 창의문으로 진격하였다. 이흥립은 훈련대장이었는데 반정군과 내응하고 있었으므로 궁궐은 반정군에게 쉽게 점령이 되었다. 반정군은 유폐되어있던 인목대비로부터 허락을 받아내어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곧 반정군은 의관인 안국신의 집에 피신하여있던 광해군을 붙잡았고 왕비유씨 그리고 세자와 세자빈 박씨를 모두 강화도로 유배보내었다. 반정군은 대북파인 세자빈 박씨의 외할아버지인 이이첨과 정인홍 등을 처형하였고 그외 200여명을 유배보내었다. 나중 일이지만 세자빈 박씨는 강화도에서 자결하였고 세자는 도망가다 잡히자 자결하고 말았다.  

곧 능양군은 즉위하여 인조가 되었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이면서 광해군의 조카였다. 인조는 광해군의 이복 동생인 정원군과 부인 구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정원군은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사이의 소생이었고 광해군은 선조와 후궁 공빈김씨와의 소생이었다. 인조는 당시 인렬왕후 한씨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두고 있었다.

인조는 반정에 공훈이 있는 자들에게 훈작을 수여하였다. 정난공신의 1등공신에는 김유, 이귀, 김자점, 신경진, 최명길 등이 추록되었고 2등공신에는 이괄, 김경징 등이 추록되었다.

1623년 7월에는 기자헌과 유몽인 등이 인조에 대하여 역모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해 10월에는 황현과 이유림 등이 역모를 하여 흥안군을 옹립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흥안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이괄은 정난공신의 2등 공신임에도 훈작에 불만을 품고있었다. 이괄은 부원수인 평안도 병사로 전직이 되었는데 나중에 조정의 중신들은 이괄과 그의 아들을 역모죄로 모함하였다. 조정은 체포령을 내렸고 이괄을 압송하기 위하여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이괄은 그들을 죽이고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인조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의 반란군은 보름만에 개성을 지나 임진강을 건넜다. 이 소식을 들은 인조는 공주를 향하여 몽진을 떠났다. 이것은 1624년 2월8일의 일이었다. 이괄의 반란군은 2월11일 한양에 입성하였고 흥안군을 옹립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흥안군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이었다. 그 후 이괄은 길마재에서 임경업과 정만이 이끄는 관군과 조우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괄은 도망하였고 그의 부하인 기익헌과 이수백은 잠들어 있던 이괄과 이수 그리고 한명련등을 목베어 주살하였다. 한편 한명련의 아들인 한윤과 한택 형제는 도망하여 후금에 투항하였고 당시 후금에 있던 강홍립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들은 나중에 정묘호란의 불씨가 된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훈이 큰 자들에게 훈작을 수여하였는데 진무원중공신의 1등공신에 임경업 등을 추록하였고  2등공신에는 최명길과 조시준 등을 추록하였다.

1626년 인조 4년 호폐법을 실시하였다. 호폐법은 호구조사를 통하여 군역과 요역을 충실하게 할 수 있고 또 신분관계의 증명을 통하여 계급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이 해 1월에는 영원성전투가 있었다. 명나라의 원숭환은 병력 1만을 이끌고 병력 10만의 누루하치군을 상대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누르하치는 퇴각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이 해 8월 11일에는 후금의 칸인 누르하치가 부상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 누루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치는 봉견영주인 베이러의 8기중에 3기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누르하치를 승계하여 후금의 칸이 되었다.

1627년 인조 5년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베이러, 즉 후금의 봉건영주인 아미타수에게 흉노족 3만을 내주어 조선을 치게 하였다.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광해군이 폐위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괄의 난 후에 후금으로 탈출하였던 한윤과 한택은 홍타이치에게 인조즉위의 부당성을 알렸던 것이다. 또한 홍타이치는 누르하치가 타계하였을 때 조선이 조문단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었다. 봉건영주 아미타수는 강홍립과 한윤과 한택 형제를 길잡이로 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를 침략하였다. 일부는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의 군대를 공략하였다. 모문룡은 이전에 광해군의 제의를 받고 요동수복을 위하여 가도에 병력 5천과 난민 1만을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조선은 이들에게 군량미를 지급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후금을 자극하고 있었다.

1627년 1월 24일 아미타수의 후금군은 평양성을 함락하였다. 이때 인조와 왕실은 강화도로 피신하였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전주로 피난하였다. 한편 안주성에서 후금군과 결전을 벌이던 남이흥은 무기가 떨어지고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성에 불지르고 김언수, 함응수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조정은 강화도에서 주화파와 주전파로 갈라졌으나 후금의 아미타수는 강홍립의 주선으로 강화제의를 해왔다. 협상에 나선 후금은 조선에게 명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도록 하였고 의주에 중강개시를 열어서 자신들과 교역하도록 하였다. 또 가도에 있는 모문룡을 축출하도록 하였고 자신들의 풍습인 하늘에 맹세하고 맹약하는 의식을 거행하도록 하였다. 후금은 왕실의 종친인 원창군을 볼모로 잡아갔고 평안도와 황해도의 백성12,000명을 포로로 끌고갔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10년 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난다.

인조의 왕세자인 소현세자는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소현세자는 16살이었고 민회빈 강씨와의 사이에 3형제를 두게될 것이다.

1628년 인조 6년 유효립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유효립은 대북파들의 잔당과 규합해서 인성군을 새 왕위에 옹립하려고 하였다. 인성군은 선조와 후궁인 정빈 민씨와의 소생이었다. 역모는 실패로 돌아갔고 인성군은 진도로 유배를 떠났다가 나중에 목을 매어 자진하고 말았다. 한편 후금으로 끌려갔던 포로 1만2천명 중에 3천명이 도망쳐서 돌아온 일이 있었다. 후금은 이들에 대한 몸값을 지불하도록 요구하였다.

1631년 인조 9년 인목대비가 49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였고 선조와의 사이에 영창대군을 두고 있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고 대북파들이 득세하자 소북파들은 숙청을 당하였고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된 후에 증살되었다. 증살은 불을 이용하여 쪄서 죽이는 것이다. 왕대비였던 인목대비는 유폐되었으나 후일에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환궁하였고 당시 능양군이었던 인조를 왕위에 올려놓았었다.

1633년 인조 11년에는 상평청을 설치하여 주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상평청은 물가조절기구였는데 풍년에는 곡물값이 떨어지므로 곡물을 비싼값으로 사들여서 곡가를 올렸고 흉년에는 곡물값이 상승하므로 곡물을 싼값으로 방출하여 곡가를 내렸다.

1635년 12월 인조비인 인렬왕후 한씨가 4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인렬왕후 한씨는 원자를 낳았는데 곧 죽어버렸고 인렬왕후 자신도 산후병으로 나흘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그녀는 능양군이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이 되었다. 인렬왕후 한씨는 인조와의 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두고 있었다. 후일 인조는 계비로서 장렬왕후 조씨를 맞이한다.

인조 14년인 1636년 12월 청나라 홍타이지는 12만 연합대군을 몸소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었다. 용골대와 마부대는 청군 7만을 이끌었다. 그리고 후금에 투항했던 명나라의 공유덕과 경중명이 명군 2만을 이끌었으며 또한 몽고군 3만이 합세하였다. 이제 연합대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피하여 쳐들어왔고 우수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단, 10일만에 수도 한양을 위협하였다. 조선조정은 척화론의 김상헌과 주화론의 최명길로 갈라져있었다. 조정은 이조판서 주화파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버는 한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하여 비빈종실의 귀족들을 강화도에 먼저 피신하도록 하였다. 그후 인조와 소현세자와 조정중신들이 강화도를 향하여 출발했을 때에는 이미 피난 길이 청나라군대에 의해 막혀있던 터라 남한산성으로 몽진하게 되었다. 청군은 12월16일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성내에는 조선군사 1만 2천과 50일분의 식량 1만 4천여 섬이 있었다. 다음해 정월에는 청나라 태종인 홍타이지가 직접 북한강가에 도착하여 진을 쳤고 전군을 지휘하였다. 청군은 먼저 도르곤과그의 3만 군사가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곧 강화성은 무너졌고 수비대장인 김상용은 자결하였으며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은 포로로 잡혔다. 이 소식은 남한산성 내에 전해졌고 주화파의 주장으로  45일만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인조는 성문을 열기전에 온조왕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삼전도(송파)의 수항단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였다. 인조는 땅바닥에 세번 무릎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것으로 인조의 용안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청나라는 화약의 조건으로서 황금 100냥과 백은 1,000냥 그리고 각종 물품 20여종을 세폐로 바치도록 하였고 신하의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며 명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명나라로부터 받은 고명책인을 헌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선왕의 장자와 제 2왕자 그리고 대신들의 자녀들을 인질로 보내도록 하였고 일본과 무역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인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는 도르곤을 따라서 인질로 끌려갔고 척화파였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는 인질로 끌려간 후에 참형을 당하였고 김상헌도 오랜 옥종생활을 하였다. 한편 당시 청나라 수도였던 심양에서는 조선인 처녀와 마님 등 포로 60만명 이상이 인간시장에서 거래되었다.

1638년 인조는 계비로서 조창원의 딸을 맞이하였다. 인조는 44세였고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는 15세였다.

1641년 인조 19년 광해군이 승하하였다. 향년 67세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사이의 소생으로서 선조를 승계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친명배금과 소중화사상을 중시한 서인들의 반정으로 폐위되고 말았었다. 서인들은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옹립하였고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능양군은 즉위하여 인조가 되었던 것이다.그후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제주도 애월로 이송되어 거기서 유배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8년간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몽골어를 배웠고 청나라와 조선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청나라에 거류하고 있던 50만 이상의 조선인들을 보호햐는데 심려를 기울이기도 하였고 조선에서 끌려와 재판을 받고 있던 김상헌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청나라 섭정인 도르곤이 명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는 소현세자도 함께 동행하였고 베이징에서 70일간 체류하면서 예수교 선교사였던 독일인 신부 아담샬과 교류하며 서양문물과 캐돌릭 등을 접하였다.

1643년 후금의 칸인 홍타이치는 명나라 출정을 위한 만찬모임에서 연회를 베푼후에 갑자기 타계하였다.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한편 도르곤은 8기체의 베일러 봉건영주 합의체에서 다음 황제의 승계자로서 홍타이치의 아들인 복임을 강력하게 추천하였고 그 뜻을 이루었다. 복임은 순치제로서 즉위하였고 당시 그의 나이는 6살이었으므로 그의 삼촌들인 호격과 도르곤이 좌우섭정을 맡았다.

명나라의 이자성은 군사를 일으켜서 서안을 점령하였고 국호를 대순으로 하여 나라를 창건하였다. 대순의 황제가 된 이자성은 대순 15년인 1644년 군대를 이끌고 북경을 포위하였다. 그러자 명나라 숭정제는 자결하고 말았다. 이로써 276년을 이어왔던 명나라는 망했다. 한편 명나라 장수 오삼계는 후금에 투항하면서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도르곤은 병력을 이끌고 오삼계와 함께 산해관을 넘었고 북경으로 치고들어가 이자성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재미있게도 도르곤은 운좋게 어부지리로 중국대륙을 통일했던 것이다.

1644년 좌의정인 심기원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심기원은 조정중신들을 잔치에 초대하여 거사를 치른 후에 회인군을 옹립하기로 하였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심기원은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두달만인  4월26일에 타계하였다. 향년 34세였다. 소현세자의 시신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7혈에서 선혈이 흘러나왔으므로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사람 같았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사이에는 석린, 석견, 석출 3형제가 있었다.

후금, 즉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던 3만 여명의 조선마님과 처녀들이 환향하였다. 이 여인들은 각 가정에서 이혼 등의 문제로 인하여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조선조정은 각 도에 회절강을 지정하였고 면죄의식을 거행한 후에 이 부녀들을 각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한편 회절강은 한강, 예성강, 낙동강, 소양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등이었다.

1645년 6월 봉림대군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였다. 인조는 즉시 새 왕세자로서 봉림대군을 책봉하였다. 한편 8월에는 소현세자빈인 민회빈 강씨의 동생인 강문성이 소현세자의 장사날짜가 불길하다고 지관에게 찾아가서 항의하였는데 인조가 이것을 듣고 불쾌하였다. 인조는 강문성, 강문명 형제를 제주도와 진도에 부처하였다. 나중에 이들은 장살당하였다. 그 다음해에는 민회빈 강씨의 궁녀들인 계향과 계환이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그녀들을 옥에서 죽였다. 민회빈 강씨 또한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별궁에 유치했다. 그런데 당시 김자점은 민회빈 강씨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그녀를 무고하였다. 그녀는 물증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사되고 말았다. 민회빈 강씨의 나이는 36세였고 귀국 후 1년만이었다. 그녀의 아들들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 석철은 장살당하였고 석린은 병으로 죽었다. 막내인 석린은 다음 왕으로 효종이 즉위하면서 복위될 것이다.

1646년 임경업은 포로로서 청나라의 심양으로 호송되어 있었다. 임경업은 명나라 말기에 숭정제로부터 작위를 받고 후금의 정벌에 나섰지만 명나라가 망하면서 그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한편 인조는 임경업이 심기원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설을 확인하기위하여 청나라에 그의 송환을 요청하였다. 이전에 좌의정 심기원은 인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사되었었다. 곧 인조는 송환된 임경업을 친국하였으나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자점은 그를 국법위반과 배신을 근거로 하여 문초하였는데 임경업은 문초중에 등뼈가 부러지면서 죽고말았다. 김자점은 열열한 친청파였고 임경업은 열열한 친명파였다.

1647년 주화파 최명길이 6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55세 였다. 인조는 능양군시절에 인조반정을 일으켜서 삼촌인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다. 인조는 선조와 인빈김씨 사이의 소생인 정원군의 장남이었다. 인조는 광해군의 조카였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의 사이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이 있었지만 소현세자는 청나라로부터 귀국한 지 2달만에 타계했었다. 인조는 둘째 아들인 봉립대군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자 즉각 그를 세자로 책봉했다. 인조는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당시 장렬왕후, 즉 자의대비 조씨는 24세였다.

1649년 5월31일 31세의 봉림대군이 효종으로서 즉위하였다. 효종은 원래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가 일찍 타계한 까닭에 원손을 대신하여 세자위를 승계하였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와의 사이에는 원손을 두고 있었는데 그가 후일의 현종이다.

효종 초기의 조정은 서인이 주도하였다. 공서파는 인조반정에 공훈이 있었던 서인들이었다. 반면에 청서파는 인조반정에 참가하지 않았던 서인들이다. 김자점은 공서파의 대표적 인물이었고  송시열은 청서파의 대표적 인물로서 효종의 스승이었다. 한편 효종은 즉위하자 김자점을 영의정으로 중용하였다.

1649년 영국에서는 찰스 1세가 처형되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직전 왕인 제임스 1세의 차남이었다. 찰스 1세의 왕비는 프랑스 앙리 4세의 딸인 앙리에뜨 마리였다. 찰스 1세가 처형된 이유는 청교도 혁명에 따른 내전에서 왕당파가 의회파에 패배했기 때문이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난 이유는 찰스 1세가 더햄과 뉴캐슬을 점령한 스코틀랜드 군대를 치기 위한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11년간 폐지되어왔던 의회를 소집하면서 비롯되었다. 의회가 열리자 의원들은 찰스 1세 에게 요구사항을 건의하였다. 그것은 11년(1629-1640)간 참주정을 도왔던 켄터베리 대주교 라우드(William Laud)와 스태포드(Stafford) 백작을 처형하도록 하고 또 선박세를 과세하는 것이 불법임을 인정하고 또한 의회의 동의없이 의회를 해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못박아 주기를 바랐다. 찰스 1세는 전제군주 성향의 왕이었다. 찰스 1세는 곧 격노하였고 자신에 대항하는 의원 5명을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재빠르게 도망가 버렸다. 도망간그들은 청교도들을 끌어모으고 절대군주에  대항하여 내전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럼, 왜 스코틀랜드는 뉴캐슬을 점령하여 청교도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는가. 찰스 1세는 매우 종교적인 왕이었다. 찰스 1세는 교회 의식이 웅장하고 형식이 완벽하게 갖추어져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간단하고 단순한 스코틀랜드인들은 기도서의 장황함에 반발하여 그것을 시정해 주도록 영국의 뉴캐슬과 더햄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불쾌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치기위하여 전쟁비용이 필요했고 상공인들과 재력가들을 등에 업은 의회 의원들의 힘 또한 필요했던 것이다. 찰스 1세가 처형되자 영국은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크롬웰의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크롬웰이 죽자 1660년 왕정이 복고되고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즉위하게된다.

1651년 김육은 대동법을 시행하도록 효종에게 건의하였다. 각 지방은 공납으로서 특산물을 중앙에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현지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공납으로서 지방에 부과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하여 중간관리들은 공납을 대신하여 중앙에 바치고 농민들에게 방납을 거두어 충당하였는데 중간착취의 폐단이 되었다. 이것은 중앙과 농민들 모두에게 이롭지 못하였다. 그런데 대동법은 이 공납을 특산물이 아니라 쌀로 통일하였고 그것도 각 호당 부과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의 결단위에 따라 부과하였다.

한편 김자점은 인조의 후궁이었던 귀인조씨와 함께 효종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김자점은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끌어모으게 하였고 송시열과 김집 그리고 원두표 등을 제거한 후에 귀인조씨의 아들인 숭선군을 옹립하려고 계획하였는데 사전에 탄로가 나서 실패하고 말았다. 김자점과 귀인조씨는 서로 친족관계였다.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은 귀인조씨의 딸인 효명공주와 혼인하고 있었다. 이 역모사건으로 인하여 김자점은 1651년 12월21일 참수되었고 귀인조씨는 사사되었다.

1652년 효종은 훈련도감의 대장에 이완을 임명하였고 비밀리에 북벌계획을 진행하였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은헤를 갚고 청나라에 대한 치욕을 씻겠다는 명분론을 강조하였는데 문에는 송시열, 무에는 이완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이들을 아꼈다. 훈련대장 이완은 어영청에 소속된 군사를 2만명으로 늘렸고 이들에게 지급되는 군보도 종전의 1보에서 3보로 늘리는 한편 안산의 덕물도에 둔전을 설치하였다. 이완은 현종대까지 16년동안 그 직책을 유지하는데 한성부판윤과 공조판서, 형조판서, 포도대장을 겸임하였다. 한편 이해에는 난리때 척화파였던 김상헌이 8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1653년 1월 10일 하멜과 그의 일행 36인은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에 제주도 근해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하였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고 있던 박연이 제주도에 급파되었다. 박연의 본명은 웰터브레였고 그 또한 1628년에 제주도에 표착하였었다. 곧 하멜과 그의 일행는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나중에 이들은 분산 수용되어 생활하다가 대부분 병사하였다. 그후 하멜을 포함한 7인은 탈출에 성공하였고  제주도 표착 15년만에 일본을 거쳐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654년 효종은 청나라 강희제의 요청으로 대장 변급과 조총군 150명을 흑룡강(아므르강) 유역의 아르바진에 파견하였다. 아르바진은 청나라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였다. 러시아는 이반대제 이후에 지금은 짜르 알렉세이 1세가 집권하고 있었다. 짜르는 영토를 계속 동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는데 야쿠츠크와 오호츠크에 이어서 1648년에는 캄차카를 건설하였다. 러시아의 짜르는 1651년에는 몽고 땅인 바이칼호 근처에 이르크츠크를 건설하였고 계속 남하하여 청나라의 영토인 아르바진을 위협하였다. 이전 러시아는 1613년에 이반 4세가 타계하자 전국회의인 젬스키 소보르에서 미하일 로마노비치를 짜르로 선출하였는데 이로써 로마노프왕조가 시작이 되었었다. 이 미하일 1세는 봉건제를 강화하였고 권력을 중앙집권화하였다. 1645년 미하일 1세가 타계하자 그의 아들인 알렉세이1세가 짜르가 되었다. 알렉세이 1세는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와의 권력다툼에서 승리하였고 황제권의 우위를 확립하였다. 한편 효종은 1658년 2차로 조총부대를 파견하였다. 후일에 러시아와 청나라는 네르친스크조약을 맺고 국경을 확정하였는데 분쟁지역인 아르바진은 버려진채 파괴되었다.

1658년 효종 10년 40세의 건장한 왕인 효종이 승하하였다. 효종의 귀밑 볼에 종기가 있었는데 점점 커졌다. 어의 신가귀가 침을 놓았는데 침을 빼자 피가 멈추지 않았다.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는데 나중에 교수형을 당하였다. 한편 송시열은 효종의 시신을 소렴하였는데 느슨하게 한 까닭에 시신이 부풀어서 관에 들여놓지를 못하였다. 그리하여 널판을 이어서 관을 늘리고 시신을 입관하였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으로서 병자호란 후에 자신의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었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에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그가 왕세자가 되었고 인조를 이어서 왕위를 승계하였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사이에는 청나라 심양의 조선관에서 태어난 원자가 있었는데 그 원자가 왕세자가 되었고 이제 현종으로서 즉위할 것이다.

1659년 5월 9일 현종이 즉위하였다. 현종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사이의 아들로서 청나라 심양의 조선관에서 태어났다. 19세의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에는 아직 원자가 없었다.

1660년 3월에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 즉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이 문제가 되었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는 38세였는데 전에 소현세자가 타계하였을 때 3년복을 하였었다. 서인들은 효종이 봉림대군으로서 제 2왕자였으므로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은 기년설 즉 만1년설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남인 허목은 송시열에 대항하여 3년설을 주장하면서 서인들을 맹공격하였다. 또한 남인 윤휴와 윤선도도 효종이 왕위를 승계하였으므로 적장자와 다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3년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송시열의 기년설이 채택이 되었고 이것으로 서인들이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1차 예송인 기해예송이다. 한편 윤휴가 3년복을 주장한 근거는 의례 참죄장의 주석이었는데 거기에는 제1장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제2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라고 쓰여있다.

1661년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가 후일의 숙종이다

현종대의 초기에는 홍수가 있었는데 이어서 흉년이 들었고 그러자 돌림병이 돌았다. 5만 여명이  장티푸스와 콜레라에 감염되어서 고열과 신음속에서 고통받다가 그 중 1,000여명이 죽었다. 이 때 환자를 길바닥에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고 환자를 추행하는 일도 있었으며 소돌림병까지 있었다.

1665년 현종 6년 남한산성에 화약 1,500근이 폭발하는 일이 있었다. 한편 송시열은 현종에게 건의하여 동성동본 통혼의 금지를 건의하였다.

1671년 현종12년에도 기근과 역질이 있었다. 이 해의 전국의 가구수는 138만 5408호였고 인구수는 472만 5189명이었다. 한편 여주의 효종능에는 호석이 갈라지고 양마석이 떨어져나가는 일이있었는데 효종의 능을 세종의 영릉 동편으로 천장하였다.

1674년 효종의 왕비이자 현종의 모친인 왕대비 인선왕후 장씨가 57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이때 인선왕후 장씨의 시어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가 문제가 되었다. 예조에서는 경국대젼의 예에 따라 기년복으로 정해놓았다가 나중에 대공복 즉, 9개월복으로 수정하였다. 이에 대하여 남인 허목은 원래 정해 놓았던 대로 기년복이 옳다고 주장하였다. 이번에는 남인이 주장하는대로 기년복이 채택이 되었고 남인이 득세하였는데 이것이 제 2차 예송인 갑인예송이다.

1674년 13살의 왕세자가 보위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숙종이다. 숙종은 직전왕인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 사이의 외아들이었다. 숙종과 16살의 인경왕후 김씨사이에는 원자가 없었다. 숙종은 나이가 어렸음에도 섭정을 세우지 않았다. 숙종은 자신의 할머니이자 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가 타계하자 장례 복제에 관련하여 자신의 증조할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복제는 기년복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남인 허목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9개월의 대공복을 주장하였던 서인들은 물러났고 남인정권이 수립되었다.

1680년 숙종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타계하였다. 발병 20일 만이었는데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그녀의 부친은 김만기였는데 김만기의 동생은 구운몽으로 유명한 김만중이었다. 한편 숙종과 인경왕후 김씨사이에는 두 공주가 있었다.

1680년에 숙종은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인 허적을 불러서 그의 조부인 허잠에게 시호를 내렸다. 허적은 이 경사를 위하여 연회를 준비하게 되었는데 마침 연회 당일날 비가 왔다. 허적은 궁궐에서 천막을 가져갔다. 그러나 숙종은 허적이 허락도 없이 천막을 가져간 것을 알게 되자 대노하였다. 숙종은 철원에 귀양가있던 김수항을 영의정에 임명하였고 조종의 요직들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었다. 김수항은 척화론자였던 김상헌의 손자였다. 한편 영의정에서 낙마한 허적에게는 서자인 허견이 있었다. 허견은 성질이 급하여 자신의 처형을 때려서 이빨을 부러뜨리기도 했었다. 허적은 복선군과 의논하여 숙종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복선군은 인평대군의 아들이었는데 역모에 성공하면 그를 옹립하기로 계획하였지만 사전에 발각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허견이 참수되었고 복선군은 교살되었다. 남인의 영수인 허적과 윤휴는 사사됨으로써 남인이 몰락하였다. 이것이 경신환국이다.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한다.

1681년에 숙종은 새 왕비를 맞이하였는데 민유중과 송씨부인 사이의 딸이었다. 그녀는 15살이었고 인현왕후 민씨이다. 인현왕후 민씨의 모친인 송씨부인은 송준길의 딸이었다. 따라서 송준길은 인현왕후 민씨의 외조부였다. 송시열은 송준길보다 1살 어렸는데 친족상 숙부인 송준길을 형이라고 불렀다.

1682년에 허새의 옥사가 일어났다. 서인인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기위하여 남인인 허새를 끌어들여 역모를 조작하도록 하였고 서인인 김석주와 김익훈은 남인 일당들을 역모죄로 몰살하기로 계획하였다 김석주는 대비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동생이었고 김익훈은 타계한 인경왕후 김씨의 종조부였다. 이 날조사건은 사전에 발각이 되었는데 서인인 윤증은 이 역모를 조작한 김석주와 김익훈을 처벌하도록 강하게 주장했던 반면에 같은 서인인 송시열은 처벌을 반대하였다. 따라서 서인들 내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는데 노론들은 정적인 남인 일당들에 대하여 온건한 태도를 취하였던 무리들이었고 반면에 소론은 남인 일당들에 대하여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던 무리들이었다. 노론은 영수인 송시열과 김수항, 김만기 등 노장파였다. 그리고 소론은 영수인 윤증과 남구만, 박세채, 조지겸, 한태동 등 소장파였다.

소론의 영수인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다. 윤증의 부친은 윤선거였는데 윤선거와 송시열은 서로 동문수학한 친구사이였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피난을 갔었는데 그때 당시 서인 사대부들과 부녀자들은 모두 자결을 선택하였으나 그는 살아서 돌아왔다. 그후 윤선거가 타계하자 아들인 윤증은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송시열은 묘비명에 윤서거가 병자호란 때 살아서 돌아온 것을 두고 그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면서 야유하듯 써버렸다. 이것에 격노한 소론 윤증은 노론 송시열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것을 시정해주도록 요구하였으나 송시열은 들어주지 않았다. 이것을 회니의 시비라고 하는데 노론 송시열의 집은 회덕에 있었고 소론 윤증의 집은 이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1683년 12월5일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가 42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청나라의 심양에서 태어난 현종의 왕비였고 현종이 승하하자 자신의 아들인 숙종이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고 자신은 왕대비가 되었었다. 숙종의 즉위 초기에 명성왕후 김씨는 자신의 부친인 김우명과 짜고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였던 인평대군의 세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을 무고하였다. 명성왕후 김씨는 그들이 궁녀들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다고 모함하면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것이 홍수의 변이다.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사건이 무고로 밝혀지자 주모자인 김우명은 무고죄로 처벌받게 되었는데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인 숙종을 다그치면서 불륜은 사실이었다면서 억지를 부렸다. 숙종은 외조부인 김우명을 처벌하지 않았고, 대신에 인평대군의 세아들을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 적이 있었다. 그후 김우명은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다가 홧병으로 타계했다. 한편 명성왕후 김씨는 아들인 숙종이 천연두에 걸리자 무당의 조언에 따라서 추운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홑치마만 입은 채로 물벼락을 맞으면서 아들의 쾌유를 기원하였다. 결국 그녀의 아들인 숙종은 완쾌가 되었으나 정작 자신은 독감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명성왕후 김씨가 타계한 다음해에는 그녀의 척족인 서인 노론 김석주가 타계하였다.  

1686년 자의대비 조씨는 장옥정을 재입궁시켰다. 장옥정은 후일의 희빈장씨, 즉 장희빈으로서 후일 경종의 모친이다. 원래 장옥정은 자의대비의 나인출신었으나 숙종비인 인경왕후가 타계하자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는 장옥정이 천민출신이었으므로 숙종과 어울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녀를 궁궐 밖으로 쫓아냈었다. 장옥정의 모친은 서인 노론 조사석의 가비였는데 한번은 조사석이 뱀에 물리자 그 상처를 입으로 빨았으므로 대댠한 총애를 받았었다. 자의대비 조씨의 사촌동생이 바로 조사석이었다. 한편 장옥정이 재입궁하자 이제는 인현왕후 민씨의 반발이 격렬하였는데 그 이유는 숙종이 장옥정을 너무도 총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들과 결탁해서 후궁을 들이기로 했는데 영빈김씨를 간택하였다. 후궁 영빈김씨는 서인 노론의 영수인 영의정 김수항의 증손녀였다.

1687년 인현왕후 민씨의 부친인 민유중이 57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한편 장옥정은 숙원에서 소의로 품계가 상승하였다. 그리고 1688년 8월 장렬왕후이자 자의대비인 조씨가 64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같은해 10월27에는 숙종과 소의장씨 장옥정사이에 원자인 윤이 태어났다. 숙종은 다음해인 1689년 1월에 왕자 윤을 원자로 봉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소의장씨 장옥정을 빈으로서 책봉하였다.

서인 노론 송시열은 후궁의 소생이 원자가 되는 것에 반대하여 상소하였다. 중국 송나라 때 신종은 28세 때 후궁으로부터 철종을 낳았으나 후궁의 아들이었으므로 번왕에 책봉하였다가 나중에 신종이 적자가 없이 죽은 후에야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을 승계한 전례가 있었다. 서인 노론 송시열은 이 역사적 사실을 숙종에게 상기시키면서 정빈인 인현왕후 민씨가 아직 젊기 때문에 후궁소생의 원자 책봉을 늦추어주기를 탄원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하여 송시열이 왈가왈부하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또한 남인들은 이제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숙종은 서인 노론 송시열을 파직하고 제주도로 유배보내었고  또 서인 노론 김수항을 진도로 유배를 보내었다. 그리고 인경왕후 김씨의 숙부인 서인 김만중을 남해에 유배보내었고 또 인현왕후 민씨의 중부인 민정중을 절해고도에 위리안치시켰다. 이렇게 서인들이 쫓겨나게 되자 남인들이 정권을 재집권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이 기사환국으로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 장옥정과 남인 일당이 득세하였다.

 1688년 11월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암은 영국의 데본Devon에 당도하였고 현직 왕인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피하였다. 1689년1월 오렌지공 윌리암3세는 의회를 소집하고 혁명에 필요한 법안을 성공적으로 통과시켰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다. 1689년 2월 13일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오렌지공 윌리암 3세와 그의 부인인 메리를 공동왕으로 선포하였다. 윌리암 3세의 부친은 네덜란드의 왕자인 윌리암 2세였고 그의 모친은 청교도 혁명과 내전의 패배로 인하여 처형된 찰스 1세의 딸이었다. 한편 공동왕이자 왕비인 메리의 부친인 제임스 2세는 이미 프랑스로 도피하였고 지금 막 폐위되었다. 제임스 2세는 재위동안 로만캐돌릭을 영국에서 다시 국교화하고자 시도하였지만 토리당과 휘그당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웠다. 결국 의회는 개신교도이자 당시 네덜란드에 있었던 찰스 1세의 외손자인 오렌지공 윌리암 3세를 초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으로 인하여 영국은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하였다.

1689년 5월 4일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 민씨를 폐비하여 사가로 폐출하였다. 그 일이 있기 전인 4월23일은 인현왕후 민씨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자의대비 조씨의 복상기간이었으므로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에게 생일하례와 선물을 생략하도록 당부하였지만 대신들은 인현왕후 민씨에게 생일 하례편지와 선물을 전달하였다. 숙종은 어명이 지켜지지 않는것에 분노하였고 그 다음날 인현왕후 민씨를 서궁에 유폐하였었다. 한편 후궁 귀인김씨도 인현왕후와 밀접한 관계라는 이유로 폐출되었다. 후궁 귀인김씨의 부친도 귀양을 떠났다. 6뤌에 숙종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송시열을 한양으로 압송하도록 하였는데 송시열은 한양으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왕명에 따라 사사되었다.

1690년 10월 22일 숙종은 희빈장씨 장옥정을 왕비로서 책봉하였다. 숙종은 왕비 장씨의 부친을 비롯하여 3대에 걸쳐서 정승을 추증하였다. 왕비 장씨의 이복 오빠인 장희재는 포도대장을 거쳐서 나중에는 한성부 좌윤에 승차한다.

1691년에 서인 김만중은 경상도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만중은 인현왕후 민씨가 폐비된 것은 부당한 처사였음을 알리기 위하여 <사씨남정기>를 집필하였다. <사씨남정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사대부 유현수라는 자가 있었다. 유현수의 부인은 사씨였는데 자식이 없어서 걱정이었다. 유현수 주변의 사람들은 소실을 얻도록 권하였다. 유현수는 교씨 성를 가진 첩을 구하였는데 그 교씨 첩은 얼굴이 예쁘기는 하였으나 마음씨는 나빴다. 이윽고 교씨 첩은 드디어 사씨 부인을 쫓아내버렸다. 한편 유현수는 쫒겨난 사씨 부인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마침내는 교씨를 쫓아내고 사씨를 찾아내어 다시 행복하게 같이 살았다. 이 <사씨남정기>는 언문으로 되어있었으나 나중에는 한문본으로도 간행하였다. 김만중은 이 소설에서 숙종을 유현수에 빗대었고 사씨부인을 인현왕후 민씨에 빗대었던 것이다. 김만중은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채 1692년 유배지인 남해에서 타계하고 말았다.

1694년 서인 노론인 김춘택과 서인 소론인 한중혁은 폐비된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운동을 하였다. 김춘택은 서인 노론 김만기의 손자이므로 이미 타계한 숙종비 인경왕후 김씨의 조카였다. 한편 남인의 영수이자 우의정인 민암은 이번 기회에 서인 일당들을 모조리 제거하고자 서인들인 김춘택과 한중혁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숙종은 오히려 남인 영의정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해버렸다. 그리고 숙종은 서인 소론인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등을 등용하였다. 이어서 숙종은 남인 일당과 결탁하고 있던 왕비 장씨 장옥정을 빈으로 강등하였고 그녀의 오빠인 한성판윤 장희재를 제주도에 부처하였다.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이 갑술환국으로 인하여 이전의 기사환국으로 조정을 거머쥐었던 남인 일당들은 몰락하였고 다시 서인들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이제 숙종은 폐비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로서 복위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서인 노론인 송시열, 민정중, 김석주, 김익훈, 김수항, 조사석 등을 복작하였다. 한편 복위된 인현왕후 민씨는 불결한 환경에서 생활했던 탓인지 허리와 디리에 종기가 많이 피었다. 한의학에서는 담경에 문제가 있으면 종기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해, 즉 1694년에 숙종과 후궁인 숙원 최씨사이에 아들 연잉군이 태어났다. 그리하여 후궁인 최씨는 숙빈으로 계급이 상승하였고 연잉군은 후일 영조가 될 것이다.

1696년 4월 희빈 장씨의 부친인 장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왕세자 윤을 저주하는 목패와 칼 찬 인형 두개가 발견되었다. 장희재의 가노가 이것을 고변하였는데 재미있게도 그 가노가 오히려 귀양을 갔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장희재의 자작극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묘소 작변의 사건이다.

9살이 된 왕세자 윤은 11살의 심호의 딸을 세자빈으로서 맞이하였다. 그녀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12대 손이고 명종의 장인인 심강의 7대 손이고 동서분당의 원인을 제공했던 심충겸의 6대 손이다. 세자빈 심씨는 왕세자 윤이 경종으로서 즉위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타계한다. 세자빈 심씨는 병약하여 가례당일에도 복통을 일으키는 소동이 있었다.

1701년 숙종 27년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된지 8년만에 이름모를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35세였다. 인현왕후 민씨의 부친은 서인 노론의 민유중이었고 모친은 송준길의 딸이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더불어 서인노론의 거두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가 타계하고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숙종의 계비가 되었지만 원자를 생산하지 못하였었다. 그러던 차에 희빈장씨가 왕자 윤을 생산하자 서인 노론 송시열은 이 왕자 윤이 원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면서 기사환국(1689)을 맞이하게 되었었다. 집권한 남인 일당은 숙원 장씨가 희빈이 되는데 일조하였고 또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는데 일조하였었다. 그후 희빈 장씨는 왕비가 되었지만 폐비복위 운동이 일어나고 갑술환국(1694)이 성공하자 폐비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되었고 왕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자 희빈장씨는 앙숙 관계였던 인현왕후 민씨의 단명을 기원하면서 방술에 심여를 기울였다. 희빈 장씨는 취선당 별채의 대청에 인현왕후 민씨의 화상을 걸어 놓았는데 그 화상은 화살자국으로 가득하였다. 인현왕후 민씨는 죽기전에 희빈장씨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3대 궁중소설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 한중록이다.

숙종은 곧 제주도에 부처되어있던 장희재를 한양으로 압송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숙종은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런데 희빈 장씨는 이 사약을 한사코 거부하였다. 이제 상궁들은 발광하는 희빈 장씨의 팔다리를 붙들고 막대기로 그녀의 입을 벌리고 사약을 쏟아 부었다. 그녀의 나이 43세 였다. 그때 왕세자 윤은 죽어가는 모친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서인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메달리는 왕세자를 외면했다. 한편 서인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말하기를 죽음으로써 세자의 은혜를 갚겠노라고 하였다. 한편 서울로 압송된 쟝희재는 군기시에서 사사되었고 그의 친구인 동평군 이항도 사사되었다. 이것이 무고의 옥이다. 이때 서인 소론 남구만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렸갔다. <청구영언>에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로 시작하는 남구만의 시 한수가 실려있다.

1702년 숙종은 새 왕비로서 김주신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인원왕후 김씨가  되었다.

1704년 숙종과 숙빈 최씨사이의 왕자인 11살의 연잉군은 서종제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그녀는 당시 13살로 후일 정성왕후 서씨가 될 것이다.

1714년 숙종 44년 왕세자 윤의 세자빈 심씨부인이 갑자기 혼절하여 돌연사하였다. 향년 33세었다. 왕세자 윤과 심씨부인 사이에는 원자가 없었다. 31세의 왕세자 윤은 새 세자빈으로서 14살의 어유구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후일 선의왕후 어씨가 될 것이다. 한편 어유구는 그때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김창집의 제자였다.

숙종 46년인 1720년 6월 8일 숙종이 타계하였다. 향년 60세였다. 숙종은 청나라에서 태어난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사이의 외아들이었다. 숙종의 재위동안은 붕당과 댱쟁의 전성기였다.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득세한 경신대출척, 남인이 득세한 기사환국, 서인 소론이 득세한 갑술환국등이 있었다.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의 왕세자 윤은 곧 숙종을 승계하여 경종으로서 즉위할 것이고 숙종과 숙원 최씨 사이의 연잉군 또한 경종을 승계하여 영조로서 즉위하게 될 것이다.

한편, 중국 송나라 때 구양수는 붕당의 갈등을 합리화하였는데 붕당 때문에 난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난정 때문에 붕당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나라 때 한비자는 군주는 말에 따라서 신하에게 일을 맡기고 말과 일이 다를때 신하를 벌준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2011년 7월 6일 수요일

6. 선조-광해군

1567년은 선조가 즉위한 해이다. 선조는 직전왕인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후사가 없었으므로 명종의 방계혈족으로서 보위에 오른 것이었다. 선조는 중종과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원군이었다. 이때 선조의 나이는 16살로 어렸으므로 인순왕후 심씨가 1년간 수렴첨정하게 되었다. 선조 2년인 1569년 선조는 왕비로서 박응순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15살이었고 의인왕후 박씨가 된다. 그녀는 후일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을 것이고 후사없이 타계할 것이다.

선조는 1574년에 후궁인 공빈김씨와의 사이에 임해군을 얻었고 3년 후에는 광해군을 얻었다. 그러나 공빈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후에 타계하였다. 향년 26세였다. 한편 1577년 선조는 또 하나의 후궁인 인빈김씨와의 사이에 의안군을 얻었고 그 다음해에는 신성군을 얻었으며  나중에는 정원군을 얻게 될 것이다. 후일에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은 인조가 될 것이다.

심의겸은 어린 선조를 대신해서 수렴청정했던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동생이었다. 당시 심의겸은 이조참의였다. 마침 이조정랑인 오건이 물러나면서 후임으로 김효원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심의겸은 김효원이 소윤 윤원형이 계파였다는 것을 이유로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김효원은 우여곡절 속에서 다음해인 선조 6년 이조정랑에 승차하였다. 그런데 다음해인 선조 7년에 이조정랑 자리가 비게 되자 조정기가 자신의 후임으로 심충겸을 천거하였다. 그런데 심충겸은 심의겸의 동생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조정랑 김효원이 이것을 결사반대하였고 그리하여 심충겸은 낙마하고 대신에 이발이 승차하였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서 조정은 양쪽의 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쪽은 서인이 되었고 다른 한쪽은 동인이 되었다. 심의겸은 한양 서쪽인 정동에 살았으므로 서인이 되었고 김효원은 한양 동쪽인 건천동에 살았으므로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후일에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동인은 이발의 북인과 우성전의 남인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어서 동인의 북인은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지게 된다.

1589년 선조22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정여립은 이이 문하의 서인이었는데 서인들 내에서 마찰을 일으킨 때문에 동인으로 이탈해나갔다. 그래서 정여립은 고향인 호남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거기서 비밀결사단체인 대동계를 조직해서 노비와 무사를 끌어모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는 왜구를 섬멸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고 자신의 세력을 황해도로 진출시켰다. 재미있게도 황해도 관찰사는 정여립이 선조에 대항하여 역모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말았다. 즉시 조정은 체포령을 내렸고 관련자들을 압송하였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의 토굴에서 자결하였다.

정여립의 자결은 또다른 파장을 가져왔다. 이것은 기축옥사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인은 정여립을 역모로 몰았던 반면에 동인은 그것을 반박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는데 나중에는 희생자가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기축옥사이다. 당시 서인 송익필은 송사련의 아들이었다. 송사련은 중종때 신사무옥의 주모자였다. 이전에 송사련은 안당을  밀고하여 안당의 가문을 멸문시키고 일약 천민의 신분에서 당상관으로 승차하였었다. 그런데 선조가 즉위하면서 안당의 손자인 안로의 처 윤씨부인이 안당의 처사가 부당하였음을 상소하였고 선조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송사련의 70여 일족은 재산의 몰수되고 다시 천민이 되었었다.  이때 이발을 비롯하여 동인들이 많은 기여를 하였었다. 이제 송사련의 아들인 서인 송익필은 동인들을 경원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송익필과 정철을 주축으로 한 서인들은 이 기축옥사를 톻하여 호남의 많은 동인들을 희생시켰다.

서인 정철은 그후 좌의정이 되었다. 정철은 선조에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신성군의 모친인 의빈 김씨는 내심 신성군이 책봉이 되기를 바랬던 나머지 정철에 반발하였고 이에 부화뇌동하여 선조 또한 정철을 미워하게 되었다. 의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영의정인 동인 이산해는 마침내 서인 정철을 강계로 유배보내는 데 성공하면서 서인들을 보복하였다. 이것을 건저의 사건이라고 한다. 이때 동인들은 정철의 처벌을 놓고 정철을 죽여야한다는 북인과 살려두자는 남인으로 갈라졌는데 정철에 대하여 강경파였던 북인은 이산해와 정인홍 그리고 이발이었다. 다행히 정철이 유배를 가게되자 이발은 정철을 대신해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정철에 대하여 온건파였던 남인은 우성전과 유성룡 등이 있었다. 나중에 북인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으로 갈라진다.

일본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1583년 일본전토를 장악하였고 1585년에는 드디어 관백이 되었다. 관백이란 천황 바로 밑인 간바쿠로서 조선의 영의정과는 조금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 간바쿠 밑에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이 있었는데 이 다이묘들 즉 지방의 영주들은 주어진 토지와 가신, 농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전 1336년 무로마치 막부시대가 열렸다. 세월이 흐르자 각 지방의 다이묘들에게 충성하고 있던 가신들이 하극상을 벌리고 다이묘들에게 대항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혼란한 전국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각 지방의 다이묘들과 전쟁을 일으키면서 승전하였고 나중에는 큐슈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이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혼란했던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되었다.

158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상문제로 겐소와 소 요시토시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따라 조선도 황윤길과 김성일을 통신사로서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선통신사 일행들은 1590년 본국으로 돌아왔다. 조선통신사의 정사였던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곧 조선을 칠 것이므로 전쟁이 임박하였다고 말하였고 부사였던 동인 김성일은 이것을 부정하였다.

당시 조선의 군사체계는 제승방략이었다. 제승방략은 세종때 김종서가 함길도의 6진을 개척하면 사용했던 군사전략이었다. 진관법이 지역방어의 전략이라면 제승방략은 대인방어라고 볼 수 있다. 제승방략은 중앙의 순변사가 각 도의 병력을 특정한 곳에 집결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반면에 진관법은 각 도의 군사요충지인 진이 독자적인 병력과 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유성룡은 선조에게 제승방략체계를 진관법체계로 바꿀것을 건의하였지만 실패하였다.

1592년 임진년에 일본은 총병력 28만을 16군으로 나누어서 제1군에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를 필두로하고 제2군에는 가토 기요마사를 필두로 하여 조선진출을 시작하였다. 또 제 16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더불어 마지막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출정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일본의 대의명분은 정명가도였다. 명나라를 치고자 하므로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명나라와의 교역이 중단된 상태였다. 이에따라 왜구들은 일본상인들의 후원을 힘입어서 더더욱 명나라 해안을 약탈하고 있었다.

임진년 4월14일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함락하였고 이어서 송상현이 지키고 있던 동래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10일 후에는 순변사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을 상주에서 패퇴시키고 경상도를 장악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4월24일 충주의 탄금대에서 달천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치고있던 신립의 조선군대를 물리쳤다. 이때 신립과 부장 김여물은 자결하였다. 신립의 기병대는 이 날 비가 많이 왔으므로 땅이 질퍽해져서 파괴력있는 돌파를 하지 못하였다. 한편 제 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과 영천을 거처서 충주에 당도하였고 제 1군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합세해서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은 개전 20일만에 한양에 당도하였다. 이미 조선왕실과 조정은 피난을 떠나 평양에 당도해 있었다. 이때 선조는 광해군을 왕세자로서 책봉하였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끌어모으는 한편 공명첩을 이욯하여 군량미를 확보하였다. 공명첩이란 곡식과 벼슬을 맞바꾸는 것이었는데 광해군은 이것을 합리적으로 매관매직에 이용하였다. 한편 한양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안도로 진격하였고 6월 13일 마침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때 선조는 의주를 향하여 피난길을 떠나 있었다. 한편 일본군 제 2군의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출하고 있었다.

반면에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전술을 바탕으로 5월 사천해전, 6월 당포해전, 7월 한산도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일본군은 병력보충과 물자 그리고 보급품 수송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청주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었으나 금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곽재우와 김시민은 진주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금산성에서 전사하였고 김천일은 진주에서 전사하게 될 것이다. 정문부는 함경도 길주와 경성을 탈환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었다. 묘향산의 노승 휴정과 그의 제자 유정은 1500여명의 승병을 끌어모아서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김시민은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권율은 이치전투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것으로 조선 최대 곡창지역인 전라도는 안전하게 보전되었다.

명나라의 신종, 즉 만력제는 조승훈과 병력 5천을 구원군으로서 조선에 파병하였다. 조선이 일본에 점령당한다면 명나라로서도 좋을 리가 없었다. 순망치한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릴 수밖에 없다. 만력제의 조선파병 결정은 명나라의 연장을 위한 자구책일 수도 있었다. 조승훈은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이어서 이여송은 병력 4만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여 드디어 탈환하였고 그러자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이때는 1593년 1월 이었다. 퇴각한 일본군은 경기도 벽제관에서 병력을 정비하면서 전력을 최상으로 끌어모으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일본군은 벽제관에서 이여송의 명나라군대를 상대로 반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는 개성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일본군은 성종의 묘인 선릉과 중종의 묘인 정릉을 파헤쳤는데 선릉에서는 시신이 없었다. 이어서 일본군은 함경도에서 후퇴하고 돌아온 가토 기요사마와 합세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일본군과 분전하여 승리하였다.

명나라의 신종 만력제는 심유경을 보내어 화의를 추진하였다. 한양의 일본군 본진은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화의에 응하였고 4월에는 전군을 남하시켜서 서생포와 웅천, 즉 창원에 성을 쌓고 화의의 결과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병력 12만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진주성은 조선군 3천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9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함락되고 말았으나 일본군도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의병장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이 전사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에서 가장 치열했던 제 2차 진주성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명나라와의 강화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유성룡은 선조에게 훈련도감의 창설을 건의하였다. 훈련도감이란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들이 궁궐과 수도한양을 방위하는 관청이다. 병력은 10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포수와 사수, 살수로 나누어서 3개의 조직으로 만들었고 이것을 삼수병이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직업군인 예니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얀피부를 갖고 있었고 대부분 슬라브족 출신들이었다.

한편 이 난리로 인하여 기근과 전염병이 퍼졌고 식인도 행하여졌다. 이때 말 한필 값이 쌀 서너말이었다. 쌀에 대한 수요는 과잉이었고 쌀의 공급은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쌀의 실물가치는 급상승하였다. 물가상승, 즉 인플레이션이었던 것이다. 물가의 안정을 되찿기 위해서는 안정된 토지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쌀의 생산을 늘려야 했다.

1596년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다. 이몽학은 전주이씨이자 왕가의 서얼이었는데 전쟁과 흉년, 전염병으로 민심이 사나와지자 농민들을 선동하여 선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몄다. 이몽학의 반란군은 수천명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홍주성을 빼앗앗다. 이에따라 도원수 권율은 관군을 이끌고 홍주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김경창이 이몽학을 주살하는 일이 있게 되면서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다. 김경창은 이몽학의 부하였다. 선조는 김덕령과 곽재우를 이 역모에 관련이 있다고 하여 친국하였는데 김덕령은 매를 이기지 못하고 장독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일이었다.

1597년 일본군은 남해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전쟁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것이 정유년 1월14일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이다. 이번에는 가토 기요사마가 선봉군인 제1군으로서 부산으로 침략하였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 2군으로서 웅천 즉 창원으로 상륙하여 북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하삼도를 점령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가토 기요사마가 부산을 재침략하였을때 이순신은 조정으로부터 나가싸우라는 명령을 밭았음에도 이것을 거부하였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조선조정이 일본의 계략에 말려들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순신은 명령불복종으로 파면되었고 대신에 원균이 새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7월4일 원균은 가덕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는데 크게 당하였다. 조선수군은 패주하였고 거북선을 포함하여 판옥선 300여척중에서 170여척이 매몰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칠천량해전인데 이것으로 남해안의 제해권은 일본군으로 넘어갔다.

조선조정은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후인 7월22일 이순신을 새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일본군이 전라도까지 침입해 있었고 일본군은 방화와 약탈,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남원성에서는 소금에 절인 조선인의 코가 5만 이상이나 되었고 10만 이상의 조선인 포로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중 대부분은 도공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쓰마주에게 명령하여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오도록 하였던 것인데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들 조선포로중에 일부는 포르투갈의 노예시장에 팔려나갔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였고 마침내 직산에서 조선 명나라 연합군과 조우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대패하였고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진도의 울돌목 명량에서 조선수군 13척을 가지고  일본수군 133척을 대파하였고 그러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1598년 9월 조선 명나라 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과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왜성, 가토 기요사마의 울산왜성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이때 조선 명나라 육군과 수군이 서로 협력하면서 공격하였지만 패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일본군은 철병하기 시작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소식을 숨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향년 62세였다. 이순신과 명나라 도독 진린은 조명연합수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퇴로를 노량에서 차단하였다. 1598년 11월19일 새벽 4시에 전투가 시작되었고 그날 낮 12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조명연합군은 일본군 함대 500여척 중에서 450여척을 파괴하였다. 일본군은 본국으로 철수하지 못한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안타깝게도 이 순신은 이 노량해전 전투에서 일본함대를 추격하던 중에 적병의 총탄을 맞고 타계하였다. 이순신은 유성룡의 세살 연하였는데 같은 하회마을 출신이었다. 이것으로 7년간 이어졌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한편 서양에서는 1571년 레판토 해전이 일어났다. 스페인과 베네치아, 제노바 등 신성동맹국은 갤리선 203척을 이끌고 오스만 투르크의 갤리선 함대 230척에 대항하여 그리스의 고린트만 레판토에서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전에 오스만 투르크의 알리 파샤는 지중해의 키프로스를 점령하였고 서진을 계속하여 이탈리아를 침략하려고 하고있었다. 이때 교황 비오 5세와 스페인왕 필립2세가 중심이 되어서 연합군을 형성하였고 오스만투르크의 서진을 성공적으로 막아서 이탈리아를 보호할 수 있었다. 레판토 해전은 10월 7일 아침에 교전하여 5시간만에 끝이 났다. 신성동맹군은 7500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12척의 갤리선을 상실한 반면에 오스만 투르크의 함대는 25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고 갤리선 137척이 나포되었고 50척이 침몰되었다. 한편 이때 돈키호테를 지은 작가인 세르반테스도 신성동맹군으로서 참전하였는데 부상을 당하여 그후 평생 왼손을 쓸 수가 없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함대에 의해 궤멸당하였다. 스페인 왕 필립 2세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왕권을 무너뜨리려고 영국침공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의 후원자이었고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캐톨릭국인 스페인으로서는 영국의 지원을 차단하여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영국으로부터 보호하여야 했다. 또한 스페인 편이었던 교황 식스투스 5세도 스페인군이 영국에 상륙할 경우에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계약하여 스페인을 지원하였다. 초반에 영국함대는 선제 기습공격을 하였으므로 프랑스와 네덜란드 경계에 정뱍해있던 스페인 함대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무적함대는 6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영국함대의 전사자는 100여명이었다. 그러자 스페인은 본토로 퇴각하기로 결정했는데 퇴로인 영국해협이 영국함대에 의해 차단되었으므로 멀리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함대는 퇴각을 시작하였고 다행히 스코틀랜드를 무사히 지났지만 아일랜드 북부에서 큰 폭풍을 만나서 24척의 배가 난파되었고 150척중에서 50여척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이때 2만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로인하여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이용하여 영국을 침략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경복궁을 비롯한 건축물과 서적, 미술품들이 소실되었고 역대 실록을 보관해왔던 사고 중에 유일하게 전주사고 만이 남았다. 일본은 고추와 담배를 전래하였는데 조선은 종래의 동치미와는 맛과 모양이 다른 김치를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또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던 강항은 사서오경을 필사해 주었는데 이것은 조선주자학을 일본에 전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권력승계를 놓고 전투가 벌어졌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의 손녀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정략결혼을 시켰두고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파들에 대항해서 세끼가하라 전쟁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바쿠후가 되어서 에도시대를 열었다. 한편 고니시 유끼나가는 전투에서 패하여 참수당하였고 시마즈 요시하라도 전투에서 패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배려로 영지를 보장받았다. 이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외국과의 교역을 중단하는 등 쇄국정책을 실시하였다.

1602년 선조는 51세였다. 선조는 두 해 전에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후사없이 타계하였으므로 새 왕비를 맞이하였다. 새 왕비는 김제남의 딸이었는데 16세였다. 그녀는 계비 인목왕후 김씨로서 4년 후에 영창대군을 낳게 된다. 그리고 영창대군은 선조의 유일한 적장자가 된다. 광해군은 차기 왕권과 관련하여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선조는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경작지가 줄어들었므로 각 지방에 어사를 파견하여 양전을 실시하였고 납속책을 실시하여 재정을 확보하였다. 납속이란 곡식을 받고 벼슬을 주는 것으로서 납속수직이라고도 하였는데 양반이 쌀 백섬을 기부하면 동반 정3품에 승차할 수 있었고 서얼이 쌀 100섬을 기부하면 동반 6품에 승차할 수 있었다. 따라서 납속책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었다. 또 선조는 시전, 염분, 어전을 왕자와 옹주들에게 경제적 편의를 위하여 나누어줬는데 이것은 궁방전의 기초가 되었다.

선조는 1604년 유정을 일본에 보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협정을 맺게 하였고 왜관에 시장을 상설해서 통상하기로 하였다. 한편 유정은 일본에 끌려간 조선포로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였다. 향년 57세였다. 선조는 중종과 후궁 창빈안씨와이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원군이었다. 선조의 정비였던 의인왕후 박씨는 전란중에 후사없이 타계하였고 후궁인 공빈김씨와의 사이에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두었고 또다른 후궁인 인빈김씨와의사이에는 신성군과 정원군 등을 두었다. 나중에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은 인조가 된다. 또 선조는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적자인 영창대군을 두었다.

광해군은 왕세자이긴 하였지만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남으로 해서 저으기 불안하였다. 광해군 자신은 후궁의 소생이었으므로 세자위가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에 책봉을 구하고 확인을 받아오는, 즉 고명책봉하는 처지였으므로 광해군은 왕위의 정통성과 관련해서 정당한 승계위치에 있어야 했다.

1608년 2월2일 광해군이 34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하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사이의 둘째아들이었고 전란중이었던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었다. 임해군은 광해군의 형이었다. 광해군은 왕비 유씨와의 사이에 원자를 두고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강홍립 등 자신을 지지했던 대북파를 중용하였다. 한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소북파는 유영경을 중심으로 적통론을 내세우면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었다.

임해군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한다는 설이 있었다. 따라서 광해군은 자신의 형인 임해군을 전라도 진도에 부처하였다. 한편 명나라에서는 고명책봉에 시비를 걸면서 엄일괴와 민애민 등 차관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엄일괴는 왕권의 적통자로서 임해군을 염두해 두고 있었으므로 전라도 진도에서 강화도 교동으로 부처되어 있던 임해군과 몸소 면담하였다. 재미있게도 임해군은 그자리에서 의자를 들어서 엄일괴를 향하여 던져버렸다. 광해군으로서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고 위기를 모면한 순간이었다. 한편 광해군의 애첩이자 상궁이었던 김개시는 은 오천량과 인삼 50근을 엄일괴에게 뇌물로 주었다. 임해군은 그 다음해인 1609년 음독하여 타계하였다.

광해군 1년인 1609년 조선조정은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고 통상을 재개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1년에 세사미두 100석을 대마도에 하사하였고 대마도는 세견선 20척에 한하여 조선과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대마도주는 부산포에 한하여 교역할 수 있었다. 광해군 2년에는 허준이 임상의학 백과사전인 동의보감 25권을 완성하여 광해군에게 바쳤다. 나중에 동의보감은 18세기 일본과 청나라에서 번역출판된다. 한편 광해군은 전란으로 인하여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기 시작하였는데 백성들의 원성이 적지 않았다.

1611년 광해군은 왕세자의 세자빈으로서 박자흥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자는 그때나이 14살 이었다. 한편 박자흥은 대사헌 박승종의 아들이면서 대북파인 이이첨의 사위였다.

1612년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성균관 학유였던 김직재와 아들 김백함 부자가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그들은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을 옹립하고 이이첨 등 대북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순화군은 선조의 서자였다. 그런데 이 역모사건은 김직재가 고문도중에 매를 이기지 못하여 잘못 발설한 것으로서 사실은 대북파가 소북파를 제거하기위하여 조작한 사건이었다. 이 무고사건으로 인하여 김직재는 참형을 당하였고 진릉군은 위리안치되었다. 그리고 소북파 100명도 처벌받았다.

광해군때 강변칠우는 북한강변에서 술과 시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던 일곱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은 고관대작의 아들들이었는데 모두 서얼 출신이었으므로 관직에 나갈 수가 없었다. 영의정 박순의 서자인 박응서와 사양갑, 김평손 등이었는데 그들은 세상을 비웃으면서 자신들을 중국의 죽림칠현에 비유해서 강변칠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돈이 떨어지자 유흥비 마련을 위하여 새재에서 은상인을 살해하고 은 수백냥을 약탈했는데 다음해에 포도청에 잡혀왔다. 그들은 포도청에서 진술하기를 김제남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거짓진술하였다. 김제남은 영창대군의 외조부였다. 이것을 기화로 대북파들은 소북파들을 조정에서 완전히 밀어내려고 결심하였다. 광해군은 김제남을 사사하였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여 강화도로 유배보내버렸다.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 김씨는 서궁, 즉 경운궁에 유폐되었다.또 소북파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은 사사되었다. 그리고 정온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 대정에 위리안치되었다. 한편 강화도에 유배를 가 있던 영창대군은 강화부사 강항에 의하여 증살되었다. 향년 9세였다. 증살이란 아궁이에 불을 높인 후 쪄서 죽이는 것이다. 이것이 1613년에 있었던 계축옥사이다.

광해군 초기에 세도를 누렸던 인물들은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였던 이이첨과 세자빈 박씨의 조부였던 박승종 그리고 광해군의 왕비인 중전유씨의 부친이었던 유희분 등 이었다.

1615년 능창군 추대사건이 일어났다.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아들이었는데 정원군의 부친은 선조였다. 신경희는 서인이었는데 능창군을 옹립하면서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하였다. 이 사건은 사전에 발각이 되었고 주동자 신경희는 참수되었고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목매어 죽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정원군은 아들이 죽은 이 사건 때문에 화병으로 탸계하였다. 나중에 정원군의 첫째아들인 능양군은 반정에 성공하여 인조가 될 것이다.

1616년 광해군 8년에 이이첨은 해주사람 박이빈을 사주하여 소북파인 박승종과 유희빈 등이 광해군에 대항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상소하도록하였다. 해주목사 최기는 박이빈을 문초하는과정에서 이 역모가 조작된 것임을 알게 되었으나 발설하지는 않았다. 재미있게도 이이첨은 해주목사 최기를 역모의 괴수로서 몰아붙여서 마침내 그를 때려죽여버렸다. 이 사건으로 소북파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1616년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해서여진과 야인여진을 통일하여 후금을 건국하였다. 누르하치는 대패륵과 소패륵의 합의체에서 칸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후금의 팔기제도는 맹안모극제에서 유래한 것인데 팔기를 구성하는 각기의 수장은 대패륵이 되었고 이들의 합의하에 칸을 추대하였다. 평화시에는 팔기가 사법과 행정 그리고 토지를 관할하는 기준이 되었다.

인목대비 김씨의 모친인 노씨부인은 서궁에 유폐된 인목대비 김씨가 하루빨리 복위되기를 바라면서 불당에서 발원하였다. 내수사에서는 노씨부인의 생계를 위하여 양곡을 비밀리에 지급하고 있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노씨부인을 제주도로 유배보내버렸다. 제주도에 도착한 노씨부인은 생계를 위하여 주점을 열었는데 끼니 때에는 탁주를 걸러낸 찌거기인 모주를  밥 대신 먹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술에 쩔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주모라고 불렀다. 어원상 노씨부인은 조선 최초의 주모였다.

명황제 신종, 즉 만력제는 후금의 누륵하치가 강성해가자 위기감을 느꼈고 신하들에게 조선을 고무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명나라에 협조할 구원군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치도록 하였다. 1618년 도원수 강홍립은 조선병 13,000을 이끌고 요동으로 향하였다. 이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밀지를 전달하였는데 현지에서 명과 여진의 형세를 보아서 향배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1618년 신성로마제국, 즉 독일에서는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보헤미아의 왕인 페르디난드 2 세는 전 해에 페르디난드 1세를 대신하여 즉위하였다. 페르디난드 2세는 열렬한 캐돌릭교도었으므로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교도들 즉 루터교파들은 1555년에 있었던 아욱스부르크조약으로 인하여 캐돌릭의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종교적 자유를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개신교는 이제 그 수가  더 늘어나서 칼뱅파와 재세례파도 등장하면서 캐돌릭을 위협하고 있었다. 한편 황제 페르디난드 2세는 국정에 관여하게 될 대표 3명을 보헤미아에 보냈다. 그런데 보헤미아인들은 그 대표들을 불신하였고 약식재판을 한 후에 그들을 창문 밖으로 내던져버렸다. 이것이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다. 이 보헤미아인들의 반란을 기화로 하여 캐돌릭교도와 개신교도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나중에는 덴마크가 개신교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였다. 뒤를 이어서 스웨덴이 개신교편에 서서 전쟁에 등장하였지만 캐돌릭 황제인 페르디난드 2세는 독일과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의 지원을 통하여 그들을 무찔렀다. 한편 프랑스는 캐돌릭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이 캐돌릭과 개신교와의 전쟁에서 개신교를 편들기 위하여 전쟁에 참가하였다. 프랑스의 실권자인 리슐리외와 후임자인 마자랭은 개신교편에 서서 캐돌릭국가인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하여 전쟁에 참가하였고 마침내 승리하여 베스트팔렌조약을 맺었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은 인구의 4분의 1을 상실하였고 유럽의 지배력은 독일의 합스부르크가에서 프랑스의 부르봉가로 넘어갔다. 또한 개신교국인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80년 전쟁을 끝내어 독립을 이루어냈고 스위스도 독립국가가 되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도 개신교국을 지원했었고 캐돌릭국인 폴란드와 전쟁을 해서 승리하였었다.

1619년 명나라의 10만 군대는 조선군 1만2천의 군대와 더불어 후금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젼투는 3월 1일의 사르후 전투부터 시작하였다. 강홍립은 명나라 동로군의 장군인 유정과 함께 부차전투에 참가하였으나 후금 군대를 상대로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강홍립은 남은 군사 5,000을 이끌고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한편 명나라는 이 전투의 패배로 만주를 후금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누르하치는 요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1620년 명나라 만력제, 즉 신종이 타계하였다. 그러자 그의 20세의 아들인 광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광종은 즉위 29일만에 타게하고 말았다. 그는 알악 2개를 먹었는데 급사하고 말았다. 새 황제로서 그의 아들인 천계제, 즉 희종이 즉위하였다. 희종은 문맹이었으므로 국정을 환관에게 넘겨주었고 자신은 취미인 목공일을 하였다. 그로부터 7년후, 희종의 동생이 황제에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즉 의종이다.

광해군은 인목대비 김씨를 유폐했었는데 이번에는 삭호까지 하였다. 삭호란 관작을 삭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목대비 김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한편 광해군의 애첩인 김상궁은 매관매직을 통하여 재물을 확보하였는데 그녀는 장사꾼에게 돈을 빌려서 전결의 세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다. 세자빈 박씨의 외조부인 이이첨과 애첩 김상궁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반대파들을 혹독하게 탄압하였으므로 조정은 신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편 강홍립이 오랑케 후금에 투항하자 광해군은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광해군은 조정중신들의 요청으로 강홍립을 삭탈관직하였으나 그의 가족들을 구금하지는 못하게 하였다.

신경진은 임진왜란때의 도원수인 신립의 아들이었는데 한때 부친의 공으로 무관의 일종인 선전관이 되었었다. 그런데 신경진은 광해군과 대북파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이귀와 역모모의를 하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그때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왕조편





2011년 6월 27일 월요일

5. 중종-인종-명종

중종반정은 1506년 9월 1일 밤 11시 경에 시작하여 9월 2일 아침 거사가 완료된 사건이었다. 지중추부사 박원종과 영의졍 유순정, 전 이조참판 성희안은 반정계획을 세웠고 사복시 첨정 홍경주와 군기시 첨정 박영무는 훈련원의 병력들을 끌어모았다. 이어서 반정군은 연산군의 최측근인 훈구파 임사홍부터 주살하였고 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을 주살하였다. 곧이어 반정군은 궁궐을 장악하였다. 반정군은 연산군의 보모였던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 연산군을 폐위하자고 종용하였다. 또 반정군은 정현왕후 윤씨로부터 그녀의 아들인 진성대군으로 보위한다는 교지를 받아내었고 즉시 연산군을 찾아가서 옥새를 빼앗앗다. 이어서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진성대군의 사저를 찾아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진성대군은 반정군 일당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줄 알았다.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은 무관출신이었고 그때 나이 40살이었디. 박원종의 누나는 월산대군의 부인이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이다. 재미있게도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을 자주 찾아가서 서로 연인관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침내 임신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약을 먹고 자살해버렸다. 박원종은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연산군을 더욱 경원하였었다. 마침내 중종반정에 성공한 박원종은 후일 영의정으로 승차하였지만 화류병이 악화되면서 타계한다.

1506년 9월2일 19세의 진성대군은 중종으로서 즉위하였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즉 자순대비 사이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중종의 부인은 신수근의 딸인 신씨부인이었다. 신씨부인의 부친인 신수근은 방금 전에 주살되었다. 재미있게도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또 새 왕이 된 중종의 장인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왕비 신씨부인이었고 신수근의 딸은 중종의 왕비 신씨부인이었다. 신수근은 자신의 매제인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서 도승지, 이조참판,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었다. 재미있게도 신수근의 할머니는 임영대군의 딸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종의 아들이다.

중종은 자신의 이복형이자 직전왕인 연산군을 강화도의 교동으로 유배보내었고 왕비 신씨를 폐비하였다. 또 자신의 조카인 폐세자 황을 강원도 정선으로 유배보낸 후에 곧 사사하였다. 한편 유자광은 중종에게 건의하여 연산군의 외척이 되는 중종의 왕비 신씨부인의 폐위를 간곡히 주장하였다. 중종은 영의정 유순정, 좌의정 김수동, 우의정 박원종 등 공신들의 위세에 눌린 나머지 눈물을 흘리면서 윤허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종비인 신씨부인은 폐비되어버렸다. 왕비 신씨부인은 나중에 중종을 그리워하며 못 잊다가 치마바위의 전설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후 명종때 71세의 일기로 타계한다. 그녀의 고모인 연산군의 왕비 신씨부인도 폐비되었었다.

중종은 연산군이 폐쇄한 경연과 사간원을 부활시키고 중종반정에 공이 큰 인물들에게 정국공신의 훈작을 주었다. 정국공신의 1등공신에는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홍경주, 신윤무 등이 책록되었다. 한편 그해 1506년 11월 7일 강화도 교동에 유배중이던 연산군이 승하하였다. 향년 31세였다.

중종은 폐비 신씨부인 대신할 후궁들을 맞아들였다  경빈박씨는 서얼출신으로서 박원종의 친척이었다. 희빈홍씨 또한 서얼 출신이었는데 홍경주의 딸이었다. 숙원윤씨는 윤여필의 딸이었는데 나중에 중전으로 책봉이 되고 후일 인종의 모친이 될 것이다. .

중종 2년 1507년 박경과 김공저가 중종반정의 주역인 좌의정 박원종과 유자광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켰다. 박경과 김공저는 역모에 성공하면 정미수를 영의정에 앉히기로 계획하였다. 그런데 그만 심정과 남곤에 의하여 발각이 되고말았다. 정미수는 단종의 매형인 영양위 정종의 아들이었다. 주동자였던 김공저와 박경은 참수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재산이 몰수되면서 관노가 되었다. 또 역모에 가담했던 여럿은 유배되었다. 조광조와 김식도 이 '박경과 김공저의 옥사' 에 연루되었는데 나이가 어렸으므로 석방이 되었다.

악처에 관한 일화가 있다. 노와공신 신수린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자꾸 하녀와 놀아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동안 그 하녀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어느날 노와공신 신수린은 부인으로부터 아침밥상을 받고 있었다. 신수린이 밥뚜껑을 열자 거기서 그 하녀의 손목이 잘린채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재미있게도 신수린의 부인이었던 성씨부인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성희안의 여동생이었다. 성희안이 정국공신이 되자 성희안의 모친은 여동생과 사위도 좀 생각하라면서 데모하듯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이 일은 당시 좌의정 박원종 등 중신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운좋게도 성희안의 매제인 신수린은 자신의 장모의 뜻대로 공신으로 추록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공신이되었다고 하여 그를 노와공신이라고 불렀다.

중종은 여러 후궁중에서 윤여필의 딸을 중전으로서 책봉하였다. 이 장경왕후 윤씨는 후일 인종의 모친이 된다.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7일만에 타계한다.

이과는 정국공신으로서 당시 전산군에 봉해졌는데 자신의 관직이 높지 않음으로 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과는 좌의정 박원종과 영의정 유순정에 대항하여 역모가 상공하면 견성군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계획하였는데 그만 노영신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견성군은 성종과 숙위홍씨의 소생이었다. 중종은 사전에 이 거사를 막았다고 칭찬하였고 노영신을 정난공신의 1등공신으로 책록하였다. 이것이 이과의 난이다.

중종 5년 1510년 4월 4일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동래의 부산포와 웅천(진해)의 내이포, 울산의 염포에 왜인들이 2,000여명 거주하고 있었는데 웅천(진해)의 내이포에 그 인구가 가장 많아서 1,500명 가량 되었다. 조선조정은 이들 왜인들에 대하여 선박을 억제하고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등 강경책을 쓰고 있었다. 왜인들은 이것에 불만을 품었고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으로 조선백성 300명 가까이 희생되었고 민가는 800호 가까이 전소되었다. 조정은 4월 19일 병력을 파견하여 웅천(진해)의 내이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물리쳤다. 이것으로 삼포는 폐쇄되었다. 그 후 일본은 내부경제가 팽창하면서 교역로를 확장하려고 조선을 게속하여 침범한다

그해 1510년 4월 17일 중종반정의 주역인 영의정 박원종이 타계하였다. 반정 후 4년 만이었다. 2년 후에는 유순정이 타계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성희안이 타계하였다.

삼포왜란이 끝나고 2년이 지난 중종 7년 1512년 조선조정은 대마도주의 요청으로 임신약조를 맺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였는데 웅천(진해)의 내이포만을 개항하였다. 그리고 세견선은 50척에서 25척으로 줄여서 교역을 허락하였고 세사미두도 200석에서 100석으로 줄여서 왜인들에게 수여하였다. 왜인들은 진해의 내이포 왜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시장과 상점, 공청을 설치하고 거주하면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상거래를 하였다. 이 왜관은 나중에 부산포로 옮겨가게되고 숙종때에 가서는 초량으로 옮겨간다. 한편 조선은 세종때부터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맺고 왜인들과 통상과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삼포왜란으로 인하여 교역이 중지되었었다.

중종반정의 삼총사인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이 모두 타계한 후인 중종10년 1513년 '박영문, 신윤무의 옥사' 가 일어났다. 중종반정의 훈구공신들이 타계하고나자 사림파들은 남아있는 훈구공신들을 공격하였다. 박영문과 신윤무는 중종반정의 훈작인 정국공신의 1등공신들이었다. 의정부 관노인 정막개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훈구공신 박영무와 신윤무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중종은 즉각 그들을 참수하였고 정막개에게는 정 3품 절충장군을 수여하였다. 그런데 중종은 정막개가 고변을 늦게 아뢰었다는 이유로 다시 그에게서 벼슬을 빼앗아버렸다.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왕자를 낳은후 7일 만에 타계하였다. 1515년 3월 25일 향년 25세였다. 한편 왕자는 후일 인종이 된다. 장경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담양부사 박상과 순천군수 김정은 중종의 왕비였던 폐비신씨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폐비신씨의 부친인 신수군은 반정군에 의하여 주살되었었다. 유자광은 신씨부인이 그대로 왕비에 머물러 있을 경우 아버지를 잃은 그녀가 자신을 비롯한 반정공신들에게 복수할 여지가 있으므로 왕비신씨를 폐위시켜 달라고 중종에게 간하였고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였었다. 한편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은 이 신씨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한 박상과 김정을 벌주자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조광조는 이러한 처사에 발끈하면서 오히려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의 파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안로는 양시론을 주장하였는데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의 주장은 국가 백년대계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하였고 조광조의 주장은 언로가 국가의 흥망성세를 결정하므로 그의 주장 또한 정당하다고 하였다. 결국 중종은 상소를 올린 박상과 김정을 외지에 유배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2년 후인 1517년 윤지임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 17세의 왕비 윤씨는 문정왕후 윤씨이고 그녀의 원자는 명종이 될 것이다. 이미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와 지금 문정왕후 윤씨는 서로 9촌간이었고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후손이었다.

중종 12년 1517년 조광조는 출사 3년만에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에 승차하였다. 조광조는중종의 신임을 받게 되자 현량과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현량과는 한나라때 시행되었던 현량방정과를 말하는 것인데 일종의 천거제도이다.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제도만으로는 도학정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유능한 인재들이 초야에 묻혀서 과거시험을 멀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유생들은 과거시험 과목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의 도학정치를 위한 격물치지의 학습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학정치란 도를 따르는 정치이다. 유생들은 덕을 수양하고 인을 습득하여 현실 속에서 실천하여야 했다. 조광조는 왕의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라고 주장하였고 왕을 통한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가 도학정치를 들고 나오자 공신세력인 훈구파들은 반발하였다. 특히 중종반정의 공신인 심정이 그러하였다. 마침 야인 속고내 사건이 터졌다. 야인 속고내가 압록강의 갑산에 번번히 침범해 약탈해가자 병조판서 유담년은 이들을 비밀스럽게 꾀어내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일이 시행되기 직전에 조광조는 오량캐인 속고내를 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조광조는 큰 나라가 도적들이나 쓰는 꾀로서 조그마한 오랑캐를 치는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종은 조광조가 주장하는 당위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것은 1518년의 일이었다.

대사헌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소격서를 폐지하자고 중종에게 건의하였다. 소격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는데 도교의 의식에서 유래하였다. 조광조는 백성들이 미신과 무속에 미혹되어서 선량한 풍속을 해치고 있다고 보았다. 조선은 원칙적으로는 땅신을 모시는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조선 초기 세종은 즉위 초기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사직단과 함께 소격서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의 이념의 바탕이 된 성리학도 도교적인 속성이 없지 않았다. 공자의 유학이 송나라 말기에 도교의 형이상학과 합쳐진 것이 성리학이다.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점차 훈구파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어느날 궁궐에 조광조와 김식을 비방하는 글이 화살과 함께 꽂혀있었다. 훈구파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훈구파들은 조광조와 신진세력들을 특이하게 보아왔고 자신들의 세력을 위협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사림파들은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의 녹훈을 시정해서 기준에 미달하는 훈구파 공신들을 삭훈하려고 준비하였다. 훈구파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조광조를 더욱 미워하였다. 중종의 후궁인 희빈홍씨는 정국공신인 홍경주의 딸이었다. 어느날 희빈홍씨는 자기처소를 거닐다가 뜰에서 낙엽을 발견하였다. 그 낙엽에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희빈홍씨의 부친인 홍경주는 훈구파 심정과 모의해서 낙엽들에 꿀을 발라놓았는데 개미들이 그 글자들을 따라서 갉아먹었던 것이다. 주走자와 초肖자를 합성하면 조趙자가 되므로 주초위왕이란 조씨가 왕이 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곧 중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세력다툼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1519년 기묘년 11월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임박하였다. 훈구파 홍경주와 심정 그리고 남곤은 주초위왕을 근거로 조광조와 김식 등 신진사류들을 역모로 몰았다. 훈구파들은 조광조와 김식등을 속전속결로 처단하고자 하였지만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안당은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당시 국립대학인 성균관 유생들은 대궐로 몰려가 농성하였다. 이로인하여 조광조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능주 즉 지금의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를 갔다. 사림파 신진세력들이었던 김정, 김식, 윤지임 등도 유배를 떠났다. 그런데 훈구파 심정은 조광조의 추종자였던 성균관 유생 황계옥을 매수하였다. 그러자 유생 황계옥은 조광조를 사사해달라고 상소해버렸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유배된지 한 달만인 중종14년 1519년 12월 16일 사사되었다. 향년 38세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기묘사화의 주역중에서 남곤은 조선성리학의 시조인 김종직의 문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후대의 사림들로부터 간사한 인물로 매도당한다. 한편 조선성리학자 김종직의 문하는 김굉필이다. 김굉필의 문하는 조광조이다. 조광조의 문하는 백인걸이다. 백인걸의 문하는 이이이다. 이이의 문하는 김장생이다. 김장생의 문하는 송시열이다.

1517년 10월 독일의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정문에 로마캐돌릭에 대항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가지고 로마캐돌릭을 공격하였다. 면죄부란 교회의 사제가 돈을 받고 죄를 면제해주는 증서였다. 루터는 교황에 반감을 갖고있던 유럽의 시민들과 귀족들로 부터 환영받았고 마침내 로마캐돌릭으로부터 독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개신교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독일농민들은 귀족들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1524년에 있었던 독일농민반란이었다. 독일 농민들은 영주들의 과도한 소작료와 세금착취 때문에 생활이 피폐해져가자 영주들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독일농민들은 학살당하였고 주동자였던 토마스 뮌쩌도 처형되었다.

1536년 영국도 로마캐돌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영국 왕 헨리8세는 수도원법을 통과시키고 수도원을 해산하였으므로 1000년 가까이 영국에서 지속해왔던 로마캐돌릭과 결별하였다. 헨리 8세는 당시 자신의 형수인 캐더린과 결혼하였다. 헨리8세는 자신의 형인 헨리7세가 결혼 1년만에 타계하자 자신의 형수와 강제결혼한 것이었다. 캐더린은 스페인의 페르난도와 이사벨 공동황제의 딸이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궁녀인 엔 불린과 사랑에 빠지게 되자 형수인 캐더린과의 결혼은 근친상간이자 성경에 위배되므로 혼인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7세는 이것을 불허하였다. 이에 대립해서 영국의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은 적법하다고 주장하였다. 곧 헨리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였고 1533년에는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그리고 1534년 영국 의회는 수장령을 통과시켰고 국가가 교회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이것으로 영국성공회는 로마로부터 독립하였다.

중종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를 낳고 7일만에 산후병으로 타계하였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녀에게는 효혜공주와 원자가 있었는데 이 원자는 후일에 왕세자가 되고 인종이 된다. 한편 효혜공주는 김안로의 아들인 김희와 혼약하였다. 그러므로 김안로는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였다. 따라서 중종과 김안로는 사돈이었다. 나중에 김안로는 영의정에 승차하게되고 공포정치를 편다. 한편 막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의 오빠는 윤임이었다. 윤임은 왕세자의 외삼촌이면서 대윤의 영수가 되어서 사림들을 가까이 두게되고 반대파인 윤원형의 소윤과 대립한다. 그런데 윤임은 김안로의 조카사위이기도 하였다.

우의정 안당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뒤 2년 후 1521년 파직되어 있었다. 어느날 안당의 부인이 타계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림파들이 안당을 조문하였다. 송사련도 조문을 갔다. 송사련은 사림파들이 훈구파인 심정과 남곤을 비난하는 얘기를 듣게되었다. 송사련은 이것을 훈구파 심정에게 고변하였다. 심정과 남곤은 이것을 알게되자 사림파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곧 안당과 그의 두아들인 안처겸과 안처근이 처형되었고 그외 조광좌, 권전, 이경숙 등도 방명록을 근거로하여 처형되었다. 이것을 고변한 송사련은 정 3품 절충장군으로 승차하였다. 이것이 신사무옥이다. 그후 명종때 안당의 손자인 안윤이 상소해서 댜행히 신원되고 칙첩을 회수받는다. 선조때는 시호를 받는다.

중종의 왕세자 후일 인종이 세자빈으로서 박용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자는 12살이었고 세자빈 박씨는 11살 이었다. 세자빈 박씨의 부친인 박용은 3개월 후에 타계한다.

동궁은 왕세자가 거주하는 궁궐이다. 어느날 불에 탄 쥐의 머리통과 왕세자를 저주하는 방서가 동궁의 나무에 메달려 있었다. 불에 탄 쥐는 꼬리와 사지가 잘려져 있었고 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바로 전날은 세자의 생일이었는데 세자는 돼지띠였다. 누군가가 세자를 모함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것이 1527년 2월 26일 있었던 작서의 변이다. 중종은 후궁인 경빈박씨와의 사이에 복성군을 두고있었다. 만에 하나 왕세자가 급사라도 하는 날이면 복성군이 세자위에 올라서 중종의 뒤를 이어서 보위를 이을 수 도 있는 처지였다. 불행하게도 경빈박씨는 이 일의 주모자로 몰렸고 복성군과 함께 유배되었다. 사건의 실체는 진실과 정반대로 되어갔다. 곧 환궁할 날만을 기다리던 그녀는 후일에 일어나는 가작인두의 변과 얽혀서 유배지에서 사사된다. 나중에 이 사건의 실체는 밝혀지고 주동자는 경빈박씨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주모자는 중중의 사돈인 김안로였다. 그때 당시 김안로는 훈구파 심정의 탄핵으로 유배를 가있었는데 자신의 아들인 김희를 시켜서 이 일을 꾸몄던 것이다. 김희의 부인은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이다. 한편 경빈박씨는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박원종의 수양딸이었다. 그래서 경빈 박씨는 훈구파인 심정과 남곤 등과 같은 편이었다. 그녀는 기묘사화때 희빈홍씨와 함께 주초위왕의 낙엽사건을 퍼뜨리는 데 일조하였었다. 한편 당시 김안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목장을 사유화하기에 이르자 영의정 남곤이 김안로를 유배보내었던 것이다. 이 작서의 변으로 인하여 훈구파 박원종의 수양딸인 경빈박씨가 희생되었으므로 유배지에 있던 김안로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이 일로 훈구파 심정은 주모자인 경빈박씨와 내통하였다고 해서 사사되었다. 그후 김안로는 유배가 풀려서 집으로 돌아온다.

중종의 외척은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었다. 대윤은 타계한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윤여필과 그의 아들인 윤임이었는데 왕세자 즉 후일 인종을 보호하면서 득세하였다. 소윤은 지금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일족으로서 윤지임과 그의 아들들인 윤원형과 윤원로를 가르키는데 앞으로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이 태어나게 되면서 소윤이 득세하게 된다.

김안로는 대제학이 되었다. 대제학은 종신직이었는데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당상관 이상이 모여서 다수결로 엄격하게 결정하였고 왕은 추인만 하였다. 대제학은 자신이 받은 신임성을 근거로하여 언론을 주도하였다.

1530년 자순대비 정현왕후 윤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58세 였다. 정현왕후 윤씨는 폐비윤씨를 대신하여 성종의 왕비가 되었었고 또 연산군의 보모이자 중종의 친모였다. 그녀는 연산군이 폐쇄한 원각사를 크게 일으켰었다.

1533년 중종 28년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났다. 세자가 거주하는 동궁의 비자나무에 사람머리모양의 두상과 목패가 걸려있었다. 채무택이 이것을 발견하였는데 채무택은 김안로의 처족이었다. 그 목패에는 중종과 세자 그리고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를 저주하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그 내용은 왕은 목졸라 죽이고 세자는 찢어서 죽이고 중전은 목쳐서 죽이라고 쓰여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의 주모자로서 경빈박씨가 지목이 되었다. 이전의 작서의 변 사건으로 유배를 가있던 경빈박씨는 환궁할 날만을 기다리던 차에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그녀는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박원종의 친척이었는데 후일 박원종의 수양딸이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중종의 후궁이 되었고 중종과의 사이에 복성군을 두고 있었다.

1534년 중종 29년은 중종이 46세가 되는 해였다. 중종은 새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와의 사이에서 원자를 얻었다. 문정왕후 윤씨는 그 때 나이 34살이었고 왕비로 책봉된지 17년만 이었다. 이 원자는 후일 명종이 될 것이다. 문정왕후 윤씨가 득남함으로써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과 부인인 정난정이 득세하게 된다.

이조전랑은 이조의 정5품인 정랑과 정6품인 좌랑을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전랑은 그 직급이 높지는 않았지만 조선왕조의 3사인 홍문관과 사헌부 그리고 사간원의 관리를 천거할 수 있는 막강한 천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조전랑은 중죄가 아닌한 탄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조판서는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전랑을 임면할 수 없었고 전랑 자신이 스스로 후임을 임명한 후에 이직하였다.

김안로는 좌의정이 되어 있었다. 김안로는 중종의 사돈으로서 자신의 정적에 대하여는 친족과 재상을 불문하고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이전에 경빈박씨가 무고하게 사사된 것도 그가 배후에서 자신의 아들 김희를 시켜서 꾸민 일이었다. 한편 홍섬은 전랑인 이조좌랑이었다. 김안로는 홍섬에게 청탁하여 자신의 큰아들을 이조좌랑으로서 임명하여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홍섬이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김안로는 홍섬을 매질한 후에 옥에 가두고 삭탈관직하였다. 이것이 홍섬의 옥사이다.

김안로는 이제 문정왕후 윤씨를 탄핵하면서 폐위시키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안로는 이 일로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곧 사사되고 말았다. 한편 김안로와 채무택 그리고 허항을 합하여 정유년 3흉이라고 하였다. 김안로가 사사되자 김안로에 의해 외직으로 나가있던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이 내직으로 들어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이므로 후일 명종의 외삼촌이다.

김안로가 타계하자 권력관계는 타계한 전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대윤과  현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일족인 소윤의 2파전으로 좁혀졌다.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윤원형은 김씨부인 이외에 후실로 정난정을 두고 있었다. 정난정은 정실부인인 김씨부인을 독살하고 스스로 정실부인이 되었다. 당시 이 독살사건의 실체가 가려져 있었으므로 정난정은 자신이 올케인 문정왕후 윤씨와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중종이 승하하였다. 중종 39년 1544년 11월 15일이었다. 향년 57세 였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소생이었고 연산군은 그의 이복형이었다. 중종은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즉위하였다. 중종은 일찍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로부터 인종을 두었고 문정왕후 윤씨로부터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을 두었다. 중종은 후궁인 창빈안씨와의 사이에 덕흥군을 두었는데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은 후일에 선조가 될 것이다.

인종이 1544년 11월 20일 즉위하였다. 당시 인종은 19세였다. 인종은 중종의 아들로서 그의 모친 장경왕후 윤씨는 그를 낳고 7일만에 산후병으로 타계하였으므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사이에 아직 원자가 없었다. 인종에게는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그가 경원대군이다. 인종의 계모인 문정왕후 윤씨는 계모가 된지 17년만인 35세에 원자를 얻었는데 그가 경원대군이자 후일의 명종이다. 조선조정은 인종을 중심으로한 대윤 사림파와 문정왕후 윤씨와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 을 중심으로한 소윤 훈구파로 나뉘었다.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공조참판 소윤 윤원형이 영의정에 천거되자 대윤인 대사헌 송인수가 부당한 처사라고 하면서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리고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도 대윤으로서 소윤인 윤원형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 탄핵으로 인하여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은 영의정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원형의 누나인 문정왕후 윤씨는 마음이 심히 불편하였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 인종은 이 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계모 문정왕후 윤씨의 거처 앞에서 자리를 깔고 석고대죄하였다. 인종은 비를 맞으며 며칠을 그렇게 용서를 빌었으므로 몸이 더욱 나빠졌다.

한편 성균관의 유생들은 권당해서 대궐로 몰려가 기묘사화 때 죽은 사림 조광조의 신원을 간청하였다. 권당이란 지금의 데모이다. 그렇지않아도 인종은 조광조를 좋게 보아왔으므로 그를 복권하여 추작하였다. 또 그동안 폐지되었던 현량과도 복과하였다.

인종이 재위 7개월만에 승하하였다. 1545년 7월 1일 이었다. 향년 20세 였다. 인종은 자신의 계모이자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차려준 다과상에서 떡을 먹은 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정왕후 윤씨는 다과상을 차려주면서 그날따라 인종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인종은 왕비 인성왕후 박씨를 남겨둔채로 후사없이 승하하였다.

1545년 12세의 경원대군이 명종으로서 즉위하였다. 명종은 지난해에 심강의 딸인 심씨부인과 혼약하였는데 그녀가 인순왕후 심씨이다. 인순왕후 심씨는 후일에 순회세자를 낳을 것이고 순회세자는 요절할 것이다. 한편 명종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외삼촌인 훈구파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명종의 즉위한 이 해 즉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는 직전왕인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현왕의 외삼촌인 윤원형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이었다. 소윤인 훈구파 윤원형은 대윤인 윤임 및 사림파를 제거하여 권력을 안정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윤원로는 윤원형의 형이었는데 명종이 즉위하자 군기시 첨정에 승차하여 있었다. 윤원로는 대윤 윤임과 사림파들을 무고해서 숙청하고자 하였다. 윤원로는 대윤 사림파들이 과거 경원대군 즉 명종을 주살하려 했었다고 비방하고 다녔다.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은 윤원로가 망언을 하고 친족을 이간질한다고 탄핵하였고 그를 파직하고 해남으로 유배보내 버렸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불만을 품은 윤원형은 사림파들을 제거하기위하여 다시 일을 꾸몄다. 윤원형은 대윤 윤임과 유관 그리고 유인숙 등 사림파들이 왕을 폐위하고 계림군 또는 봉성군을 옹립하려 한다고 꾸며서 소문을 퍼뜨렸다. 마침내 소윤 윤원형은 대윤 사림파들을 역모죄로 엮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대윤 윤임과 사림파 유관, 유인숙과 계림군은 역모죄로 사사되고 말았다. 이것이 을사사화이다.

이 역모사건을 진압했다고 하여 위사공신의 훈작이 주어지는데 위사공신의 1등공신에는 윤원형의 심복들인 이기, 임백령, 정순봉, 허자 등이 추록되었다.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은 서녀였다. 정난정은 무반 최고직인 오위도총관 정윤겸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다. 한때 정난정은 기생이었지만 신분상승의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윤원형의 눈에 들어서 첩이 되었고 후사가 없었던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한 후에 스스로 정실부인이 되었다. 정난정은 남편인 윤원형을 따라서 궁궐출입을 하게 되었고 문정왕후 윤씨에게 궁밖 소식을 알리는 등 좋은 조언자가 되기도 해서 문정왕후의 사랑을 받았다. 또 그녀는 봉은사의 지주인 보우를 문정왕후 윤씨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정난정은 남편인 윤원형이 영의정에 승차하자 그녀는 종 1품인 정경부인에 승차하였다. 그러나 후일 문정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정난정은 급격히 몰락하였고 그녀의 신분 또한 천민으로 강등된다. 결국엔 남편 윤원형과 함께 자살하여 생을 마친다.

보우는 문정왕후 윤씨의 신임을 얻어서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불교를 부흥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보우는 1550년 선과 교 양종을 부활시켰고 300여 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공인 정찰화하였다. 그때 당시 봉은사는 선종이었고 봉선사는 교종이었다. 보우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 4,000여명을 선발하였고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게하였다. 보우 또한 나중에 문정왕후 윤씨가 타게하자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제주목사 변협은 보우를 장살한다. 그 후 양종제도와 승과제도는 폐지된다.

을사사화의 피바람이 지나갔지만 소윤과 훈구파들은 문정왕후 윤씨에 대항하고자 하는 대윤 윤임의 잔당이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다.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은 자신들의 정적이었던 대윤 송인수 등을 제거하였다. 이때 의금부와 형조는 자의적으로 숙청대상자들을 골라서 살생부를 만들었다.

1551년에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가 순회세자이다. 1553년인 명종 8년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첨정을 끝냈다. 그녀의 나이는 58세 였다.

1555년 왜구가 왜선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남도 영암, 달량, 진도 등을 약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왜구는 삼포왜란 이후에 교역조건이 계속 까다로워지자 난리를 일으켰다. 조정은 토벌군을 내려보내서 일망타진하였다. 이 왜구들은 퇴각중에 제주도를 침략하였으나 섬멸당하였다.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한편 이 을묘왜변을 계기로 해서 비변사는 상설기구가 되었다. 비변사란 전쟁시 문관무관 합동회의 기구이다. 비변사는 삼포왜란때는 임시기구였지만 앞으로 임진왜란을 통하여 더 강력해진다.

1559년은 황해도에 흉년이 들었다. 황해도 지방의 관리들은 문정왕후 윤씨의 외척세력들이었다. 황해도의 토산, 평산, 서흥 주변에 도적들이 출몰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관아를 습격하였다. 임꺽정은 관아에서 약탈한 곡식들을 빈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관군은 임꺽정과 그의 도적들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백성중에 내응하는자들이 있어서 그들를 사로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1562년 3도토포사 남치근은 관군을 이끌고 구월산에서 임꺽정을 비롯한 무리들을 섬멸하였다. 임꺽정은 백정으로서 신분사회의 한계를 뛰어넘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조선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강력한 신분사회였고 그가 불평하였던 사회적 모순은 결국 외적으로가 아닌 내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명종의 아들인 11살의 왕세자인 순회세자는 세자빈으로서 윤옥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12살이었다.

승려 보우는 문정왕후에게 건의해서 중종의 묘인 희릉을 이장하도록 하였다. 보우는 중종의 묘가 혈자리에 있으므로 산의 맥을 끊었는데 그렇게되면 후손이 메마르게 된다고 하였다.

명종의 왕세자인 순회세자가 타계하였다. 향년 13세였다. 세자빈 윤씨와의 혼인 후 2년만 이었다.

1564년 명종19년 명종의 외척인 이량의 아들 이정빈이 부정한 방법을 써서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량은 아들을 이조전랑을 시켜볼려고 하였지만 전임자의 전랑천대법에 따라서 천거절차가 필요하였다. 이량은 어렵게 아들을 위하여 전임자의 천거를 받아내었다. 하지만 당시 이조전랑이었던 윤두수는 이량의 청탁을 끝까지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무고로 파직되었다. 이정빈이 이조전랑이 된 후에 그의 부친 이량은 이조판서로 승차되었다. 이조판서가 된 이량은 상피제도로 인하여 아들인 이조전랑과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었으므로 그 아들 이정빈은 이직되고말았다. 나중에 심의겸과 김효원은 이 막강한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으로써 사림파들은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선다. 이것이 선조 초기(1575년)에 벌어지게 될 을해당론이다.

1564년 예조좌랑 이이는 명종에게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도록 또 외척인 소윤 훈구파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때 이이는 불승이었다.

명종 20년 1565년 4월27일 문정왕후 윤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5세였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계비로서 인종의 보모였고 현왕인 명종의 모친이었다.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은 소윤의 영수로서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사림들을 숙청하였고 윤원형의 부인인 정난정은 그녀의 총애를 입고 정경부인이 되어서 재물을 끌어모았다. 또 문정왕후 윤씨는 보우를 등용해서 불교를 중흥하였다.

이전에 명종의 부친인 중종은 왕비로써 문정왕후 윤씨와 장경왕후 윤씨 말고도 폐비된 신씨부인이 있었고 사사된 경빈박씨가 있었다. 또 후궁인 창빈안씨와의 사이에 덕흥군을 두었었다. 이 덕흥군은 인종과 명종의 이복동생으로서 후일에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은 선조가 될 것이다. 명종은 순회세자가 타계하였으므로 후사가 없어서 방계혈족인 하성군에게 보위를 내주게 된다.

1567년 명종22년 명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34세였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사이의 소생이었다. 명종은 왕비인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두었으나 순회세자는 일찍 타계하였으므로 후사가 없었다. 명종은 승하하기 전에 자신의 이복동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을 보위에 올렸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있다. 명종이 병석에서 덕흥군의 세아들을 불러서 익선관을 써보게하였다. 익선관은 왕이 쓰는 왕관의 일종이다. 위로 두 아들은 별 말 없이 써보았지만 셋째인 하성군은 현직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말하였다. 명종은 이 말을 듣고 흐믓해 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왕조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