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7일 월요일

5. 중종-인종-명종

중종반정은 1506년 9월 1일 밤 11시 경에 시작하여 9월 2일 아침 거사가 완료된 사건이었다. 지중추부사 박원종과 영의졍 유순정, 전 이조참판 성희안은 반정계획을 세웠고 사복시 첨정 홍경주와 군기시 첨정 박영무는 훈련원의 병력들을 끌어모았다. 이어서 반정군은 연산군의 최측근인 훈구파 임사홍부터 주살하였고 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을 주살하였다. 곧이어 반정군은 궁궐을 장악하였다. 반정군은 연산군의 보모였던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에게 연산군을 폐위하자고 종용하였다. 또 반정군은 정현왕후 윤씨로부터 그녀의 아들인 진성대군으로 보위한다는 교지를 받아내었고 즉시 연산군을 찾아가서 옥새를 빼앗앗다. 이어서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옹립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끌고 진성대군의 사저를 찾아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진성대군은 반정군 일당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줄 알았다.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은 무관출신이었고 그때 나이 40살이었디. 박원종의 누나는 월산대군의 부인이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이다. 재미있게도 연산군은 자신의 백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을 자주 찾아가서 서로 연인관계까지 이르게 되었다. 마침내 임신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약을 먹고 자살해버렸다. 박원종은 그 일이 있은 이후로 연산군을 더욱 경원하였었다. 마침내 중종반정에 성공한 박원종은 후일 영의정으로 승차하였지만 화류병이 악화되면서 타계한다.

1506년 9월2일 19세의 진성대군은 중종으로서 즉위하였다.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즉 자순대비 사이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이었다. 중종의 부인은 신수근의 딸인 신씨부인이었다. 신씨부인의 부친인 신수근은 방금 전에 주살되었다. 재미있게도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또 새 왕이 된 중종의 장인이었다. 신수근의 여동생은 연산군의 왕비 신씨부인이었고 신수근의 딸은 중종의 왕비 신씨부인이었다. 신수근은 자신의 매제인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서 도승지, 이조참판, 좌의정 등 요직을 두루 거쳤었다. 재미있게도 신수근의 할머니는 임영대군의 딸이었다. 임영대군은 세종의 아들이다.

중종은 자신의 이복형이자 직전왕인 연산군을 강화도의 교동으로 유배보내었고 왕비 신씨를 폐비하였다. 또 자신의 조카인 폐세자 황을 강원도 정선으로 유배보낸 후에 곧 사사하였다. 한편 유자광은 중종에게 건의하여 연산군의 외척이 되는 중종의 왕비 신씨부인의 폐위를 간곡히 주장하였다. 중종은 영의정 유순정, 좌의정 김수동, 우의정 박원종 등 공신들의 위세에 눌린 나머지 눈물을 흘리면서 윤허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종비인 신씨부인은 폐비되어버렸다. 왕비 신씨부인은 나중에 중종을 그리워하며 못 잊다가 치마바위의 전설을 남기기도 하는데 그후 명종때 71세의 일기로 타계한다. 그녀의 고모인 연산군의 왕비 신씨부인도 폐비되었었다.

중종은 연산군이 폐쇄한 경연과 사간원을 부활시키고 중종반정에 공이 큰 인물들에게 정국공신의 훈작을 주었다. 정국공신의 1등공신에는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홍경주, 신윤무 등이 책록되었다. 한편 그해 1506년 11월 7일 강화도 교동에 유배중이던 연산군이 승하하였다. 향년 31세였다.

중종은 폐비 신씨부인 대신할 후궁들을 맞아들였다  경빈박씨는 서얼출신으로서 박원종의 친척이었다. 희빈홍씨 또한 서얼 출신이었는데 홍경주의 딸이었다. 숙원윤씨는 윤여필의 딸이었는데 나중에 중전으로 책봉이 되고 후일 인종의 모친이 될 것이다. .

중종 2년 1507년 박경과 김공저가 중종반정의 주역인 좌의정 박원종과 유자광에 불만을 품고 군사를 일으켰다. 박경과 김공저는 역모에 성공하면 정미수를 영의정에 앉히기로 계획하였다. 그런데 그만 심정과 남곤에 의하여 발각이 되고말았다. 정미수는 단종의 매형인 영양위 정종의 아들이었다. 주동자였던 김공저와 박경은 참수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재산이 몰수되면서 관노가 되었다. 또 역모에 가담했던 여럿은 유배되었다. 조광조와 김식도 이 '박경과 김공저의 옥사' 에 연루되었는데 나이가 어렸으므로 석방이 되었다.

악처에 관한 일화가 있다. 노와공신 신수린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이 자꾸 하녀와 놀아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동안 그 하녀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어느날 노와공신 신수린은 부인으로부터 아침밥상을 받고 있었다. 신수린이 밥뚜껑을 열자 거기서 그 하녀의 손목이 잘린채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재미있게도 신수린의 부인이었던 성씨부인은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성희안의 여동생이었다. 성희안이 정국공신이 되자 성희안의 모친은 여동생과 사위도 좀 생각하라면서 데모하듯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이 일은 당시 좌의정 박원종 등 중신들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운좋게도 성희안의 매제인 신수린은 자신의 장모의 뜻대로 공신으로 추록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공신이되었다고 하여 그를 노와공신이라고 불렀다.

중종은 여러 후궁중에서 윤여필의 딸을 중전으로서 책봉하였다. 이 장경왕후 윤씨는 후일 인종의 모친이 된다. 장경왕후 윤씨는 인종을 낳고 7일만에 타계한다.

이과는 정국공신으로서 당시 전산군에 봉해졌는데 자신의 관직이 높지 않음으로 해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과는 좌의정 박원종과 영의정 유순정에 대항하여 역모가 상공하면 견성군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계획하였는데 그만 노영신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견성군은 성종과 숙위홍씨의 소생이었다. 중종은 사전에 이 거사를 막았다고 칭찬하였고 노영신을 정난공신의 1등공신으로 책록하였다. 이것이 이과의 난이다.

중종 5년 1510년 4월 4일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동래의 부산포와 웅천(진해)의 내이포, 울산의 염포에 왜인들이 2,000여명 거주하고 있었는데 웅천(진해)의 내이포에 그 인구가 가장 많아서 1,500명 가량 되었다. 조선조정은 이들 왜인들에 대하여 선박을 억제하고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등 강경책을 쓰고 있었다. 왜인들은 이것에 불만을 품었고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으로 조선백성 300명 가까이 희생되었고 민가는 800호 가까이 전소되었다. 조정은 4월 19일 병력을 파견하여 웅천(진해)의 내이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물리쳤다. 이것으로 삼포는 폐쇄되었다. 그 후 일본은 내부경제가 팽창하면서 교역로를 확장하려고 조선을 게속하여 침범한다

그해 1510년 4월 17일 중종반정의 주역인 영의정 박원종이 타계하였다. 반정 후 4년 만이었다. 2년 후에는 유순정이 타계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성희안이 타계하였다.

삼포왜란이 끝나고 2년이 지난 중종 7년 1512년 조선조정은 대마도주의 요청으로 임신약조를 맺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하였는데 웅천(진해)의 내이포만을 개항하였다. 그리고 세견선은 50척에서 25척으로 줄여서 교역을 허락하였고 세사미두도 200석에서 100석으로 줄여서 왜인들에게 수여하였다. 왜인들은 진해의 내이포 왜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시장과 상점, 공청을 설치하고 거주하면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상거래를 하였다. 이 왜관은 나중에 부산포로 옮겨가게되고 숙종때에 가서는 초량으로 옮겨간다. 한편 조선은 세종때부터 대마도주와 계해약조를 맺고 왜인들과 통상과 교역을 하고 있었는데 삼포왜란으로 인하여 교역이 중지되었었다.

중종반정의 삼총사인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이 모두 타계한 후인 중종10년 1513년 '박영문, 신윤무의 옥사' 가 일어났다. 중종반정의 훈구공신들이 타계하고나자 사림파들은 남아있는 훈구공신들을 공격하였다. 박영문과 신윤무는 중종반정의 훈작인 정국공신의 1등공신들이었다. 의정부 관노인 정막개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훈구공신 박영무와 신윤무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였다. 중종은 즉각 그들을 참수하였고 정막개에게는 정 3품 절충장군을 수여하였다. 그런데 중종은 정막개가 고변을 늦게 아뢰었다는 이유로 다시 그에게서 벼슬을 빼앗아버렸다.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왕자를 낳은후 7일 만에 타계하였다. 1515년 3월 25일 향년 25세였다. 한편 왕자는 후일 인종이 된다. 장경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담양부사 박상과 순천군수 김정은 중종의 왕비였던 폐비신씨의 복위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폐비신씨의 부친인 신수군은 반정군에 의하여 주살되었었다. 유자광은 신씨부인이 그대로 왕비에 머물러 있을 경우 아버지를 잃은 그녀가 자신을 비롯한 반정공신들에게 복수할 여지가 있으므로 왕비신씨를 폐위시켜 달라고 중종에게 간하였고 중종은 그녀를 폐위하였었다. 한편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은 이 신씨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한 박상과 김정을 벌주자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조광조는 이러한 처사에 발끈하면서 오히려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의 파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안로는 양시론을 주장하였는데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의 주장은 국가 백년대계의 우국충정에서 나온 것이므로 정당하다고 하였고 조광조의 주장은 언로가 국가의 흥망성세를 결정하므로 그의 주장 또한 정당하다고 하였다. 결국 중종은 상소를 올린 박상과 김정을 외지에 유배보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2년 후인 1517년 윤지임의 딸을 새 왕비로 맞이하였다. 이 17세의 왕비 윤씨는 문정왕후 윤씨이고 그녀의 원자는 명종이 될 것이다. 이미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와 지금 문정왕후 윤씨는 서로 9촌간이었고 세조비인 정희왕후 윤씨의 후손이었다.

중종 12년 1517년 조광조는 출사 3년만에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에 승차하였다. 조광조는중종의 신임을 받게 되자 현량과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현량과는 한나라때 시행되었던 현량방정과를 말하는 것인데 일종의 천거제도이다.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제도만으로는 도학정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왜냐하면 유능한 인재들이 초야에 묻혀서 과거시험을 멀리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유생들은 과거시험 과목에만 몰두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의 도학정치를 위한 격물치지의 학습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학정치란 도를 따르는 정치이다. 유생들은 덕을 수양하고 인을 습득하여 현실 속에서 실천하여야 했다. 조광조는 왕의 마음은 정치의 근본이라고 주장하였고 왕을 통한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가 도학정치를 들고 나오자 공신세력인 훈구파들은 반발하였다. 특히 중종반정의 공신인 심정이 그러하였다. 마침 야인 속고내 사건이 터졌다. 야인 속고내가 압록강의 갑산에 번번히 침범해 약탈해가자 병조판서 유담년은 이들을 비밀스럽게 꾀어내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일이 시행되기 직전에 조광조는 오량캐인 속고내를 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조광조는 큰 나라가 도적들이나 쓰는 꾀로서 조그마한 오랑캐를 치는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종은 조광조가 주장하는 당위성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것은 1518년의 일이었다.

대사헌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소격서를 폐지하자고 중종에게 건의하였다. 소격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는데 도교의 의식에서 유래하였다. 조광조는 백성들이 미신과 무속에 미혹되어서 선량한 풍속을 해치고 있다고 보았다. 조선은 원칙적으로는 땅신을 모시는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조선 초기 세종은 즉위 초기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사직단과 함께 소격서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의 이념의 바탕이 된 성리학도 도교적인 속성이 없지 않았다. 공자의 유학이 송나라 말기에 도교의 형이상학과 합쳐진 것이 성리학이다.

조광조와 사림파들은 점차 훈구파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어느날 궁궐에 조광조와 김식을 비방하는 글이 화살과 함께 꽂혀있었다. 훈구파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훈구파들은 조광조와 신진세력들을 특이하게 보아왔고 자신들의 세력을 위협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를 비롯한사림파들은 중종반정에 따른 정국공신의 녹훈을 시정해서 기준에 미달하는 훈구파 공신들을 삭훈하려고 준비하였다. 훈구파들은 이에 반발하면서 조광조를 더욱 미워하였다. 중종의 후궁인 희빈홍씨는 정국공신인 홍경주의 딸이었다. 어느날 희빈홍씨는 자기처소를 거닐다가 뜰에서 낙엽을 발견하였다. 그 낙엽에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희빈홍씨의 부친인 홍경주는 훈구파 심정과 모의해서 낙엽들에 꿀을 발라놓았는데 개미들이 그 글자들을 따라서 갉아먹었던 것이다. 주走자와 초肖자를 합성하면 조趙자가 되므로 주초위왕이란 조씨가 왕이 된다는 의미였다. 이것은 곧 중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세력다툼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중종은 조광조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1519년 기묘년 11월이 되었다. 기묘사화가 임박하였다. 훈구파 홍경주와 심정 그리고 남곤은 주초위왕을 근거로 조광조와 김식 등 신진사류들을 역모로 몰았다. 훈구파들은 조광조와 김식등을 속전속결로 처단하고자 하였지만 영의정 정광필과 우의정 안당은 눈물을 흘리면서 간곡히 만류하였다. 그당시 국립대학인 성균관 유생들은 대궐로 몰려가 농성하였다. 이로인하여 조광조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고 능주 즉 지금의 전라도 화순으로 유배를 갔다. 사림파 신진세력들이었던 김정, 김식, 윤지임 등도 유배를 떠났다. 그런데 훈구파 심정은 조광조의 추종자였던 성균관 유생 황계옥을 매수하였다. 그러자 유생 황계옥은 조광조를 사사해달라고 상소해버렸다. 그리하여 조광조는 유배된지 한 달만인 중종14년 1519년 12월 16일 사사되었다. 향년 38세였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기묘사화의 주역중에서 남곤은 조선성리학의 시조인 김종직의 문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후대의 사림들로부터 간사한 인물로 매도당한다. 한편 조선성리학자 김종직의 문하는 김굉필이다. 김굉필의 문하는 조광조이다. 조광조의 문하는 백인걸이다. 백인걸의 문하는 이이이다. 이이의 문하는 김장생이다. 김장생의 문하는 송시열이다.

1517년 10월 독일의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교의 교회정문에 로마캐돌릭에 대항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는 면죄부의 부당성을 가지고 로마캐돌릭을 공격하였다. 면죄부란 교회의 사제가 돈을 받고 죄를 면제해주는 증서였다. 루터는 교황에 반감을 갖고있던 유럽의 시민들과 귀족들로 부터 환영받았고 마침내 로마캐돌릭으로부터 독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개신교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독일농민들은 귀족들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1524년에 있었던 독일농민반란이었다. 독일 농민들은 영주들의 과도한 소작료와 세금착취 때문에 생활이 피폐해져가자 영주들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독일농민들은 학살당하였고 주동자였던 토마스 뮌쩌도 처형되었다.

1536년 영국도 로마캐돌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영국 왕 헨리8세는 수도원법을 통과시키고 수도원을 해산하였으므로 1000년 가까이 영국에서 지속해왔던 로마캐돌릭과 결별하였다. 헨리 8세는 당시 자신의 형수인 캐더린과 결혼하였다. 헨리8세는 자신의 형인 헨리7세가 결혼 1년만에 타계하자 자신의 형수와 강제결혼한 것이었다. 캐더린은 스페인의 페르난도와 이사벨 공동황제의 딸이었다. 그런데 헨리 8세는 궁녀인 엔 불린과 사랑에 빠지게 되자 형수인 캐더린과의 결혼은 근친상간이자 성경에 위배되므로 혼인무효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7세는 이것을 불허하였다. 이에 대립해서 영국의 대주교 크랜머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은 적법하다고 주장하였다. 곧 헨리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였고 1533년에는 엘리자베스를 낳았다. 그리고 1534년 영국 의회는 수장령을 통과시켰고 국가가 교회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하였는데 이것으로 영국성공회는 로마로부터 독립하였다.

중종비인 장경왕후 윤씨가 원자를 낳고 7일만에 산후병으로 타계하였음은 이미 언급하였다. 그녀에게는 효혜공주와 원자가 있었는데 이 원자는 후일에 왕세자가 되고 인종이 된다. 한편 효혜공주는 김안로의 아들인 김희와 혼약하였다. 그러므로 김안로는 효혜공주의 시아버지였다. 따라서 중종과 김안로는 사돈이었다. 나중에 김안로는 영의정에 승차하게되고 공포정치를 편다. 한편 막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의 오빠는 윤임이었다. 윤임은 왕세자의 외삼촌이면서 대윤의 영수가 되어서 사림들을 가까이 두게되고 반대파인 윤원형의 소윤과 대립한다. 그런데 윤임은 김안로의 조카사위이기도 하였다.

우의정 안당은 기묘사화가 일어난 뒤 2년 후 1521년 파직되어 있었다. 어느날 안당의 부인이 타계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림파들이 안당을 조문하였다. 송사련도 조문을 갔다. 송사련은 사림파들이 훈구파인 심정과 남곤을 비난하는 얘기를 듣게되었다. 송사련은 이것을 훈구파 심정에게 고변하였다. 심정과 남곤은 이것을 알게되자 사림파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곧 안당과 그의 두아들인 안처겸과 안처근이 처형되었고 그외 조광좌, 권전, 이경숙 등도 방명록을 근거로하여 처형되었다. 이것을 고변한 송사련은 정 3품 절충장군으로 승차하였다. 이것이 신사무옥이다. 그후 명종때 안당의 손자인 안윤이 상소해서 댜행히 신원되고 칙첩을 회수받는다. 선조때는 시호를 받는다.

중종의 왕세자 후일 인종이 세자빈으로서 박용의 딸을 맞이하였다. 세자는 12살이었고 세자빈 박씨는 11살 이었다. 세자빈 박씨의 부친인 박용은 3개월 후에 타계한다.

동궁은 왕세자가 거주하는 궁궐이다. 어느날 불에 탄 쥐의 머리통과 왕세자를 저주하는 방서가 동궁의 나무에 메달려 있었다. 불에 탄 쥐는 꼬리와 사지가 잘려져 있었고 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 바로 전날은 세자의 생일이었는데 세자는 돼지띠였다. 누군가가 세자를 모함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것이 1527년 2월 26일 있었던 작서의 변이다. 중종은 후궁인 경빈박씨와의 사이에 복성군을 두고있었다. 만에 하나 왕세자가 급사라도 하는 날이면 복성군이 세자위에 올라서 중종의 뒤를 이어서 보위를 이을 수 도 있는 처지였다. 불행하게도 경빈박씨는 이 일의 주모자로 몰렸고 복성군과 함께 유배되었다. 사건의 실체는 진실과 정반대로 되어갔다. 곧 환궁할 날만을 기다리던 그녀는 후일에 일어나는 가작인두의 변과 얽혀서 유배지에서 사사된다. 나중에 이 사건의 실체는 밝혀지고 주동자는 경빈박씨가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 주모자는 중중의 사돈인 김안로였다. 그때 당시 김안로는 훈구파 심정의 탄핵으로 유배를 가있었는데 자신의 아들인 김희를 시켜서 이 일을 꾸몄던 것이다. 김희의 부인은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이다. 한편 경빈박씨는 중종반정의 정국공신인 박원종의 수양딸이었다. 그래서 경빈 박씨는 훈구파인 심정과 남곤 등과 같은 편이었다. 그녀는 기묘사화때 희빈홍씨와 함께 주초위왕의 낙엽사건을 퍼뜨리는 데 일조하였었다. 한편 당시 김안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목장을 사유화하기에 이르자 영의정 남곤이 김안로를 유배보내었던 것이다. 이 작서의 변으로 인하여 훈구파 박원종의 수양딸인 경빈박씨가 희생되었으므로 유배지에 있던 김안로에게는 위안이 되었다. 이 일로 훈구파 심정은 주모자인 경빈박씨와 내통하였다고 해서 사사되었다. 그후 김안로는 유배가 풀려서 집으로 돌아온다.

중종의 외척은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었다. 대윤은 타계한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윤여필과 그의 아들인 윤임이었는데 왕세자 즉 후일 인종을 보호하면서 득세하였다. 소윤은 지금 왕비 문정왕후 윤씨의 일족으로서 윤지임과 그의 아들들인 윤원형과 윤원로를 가르키는데 앞으로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이 태어나게 되면서 소윤이 득세하게 된다.

김안로는 대제학이 되었다. 대제학은 종신직이었는데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당상관 이상이 모여서 다수결로 엄격하게 결정하였고 왕은 추인만 하였다. 대제학은 자신이 받은 신임성을 근거로하여 언론을 주도하였다.

1530년 자순대비 정현왕후 윤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58세 였다. 정현왕후 윤씨는 폐비윤씨를 대신하여 성종의 왕비가 되었었고 또 연산군의 보모이자 중종의 친모였다. 그녀는 연산군이 폐쇄한 원각사를 크게 일으켰었다.

1533년 중종 28년 가작인두의 변이 일어났다. 세자가 거주하는 동궁의 비자나무에 사람머리모양의 두상과 목패가 걸려있었다. 채무택이 이것을 발견하였는데 채무택은 김안로의 처족이었다. 그 목패에는 중종과 세자 그리고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를 저주하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그 내용은 왕은 목졸라 죽이고 세자는 찢어서 죽이고 중전은 목쳐서 죽이라고 쓰여있었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의 주모자로서 경빈박씨가 지목이 되었다. 이전의 작서의 변 사건으로 유배를 가있던 경빈박씨는 환궁할 날만을 기다리던 차에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그녀는 중종반정의 주역이었던 박원종의 친척이었는데 후일 박원종의 수양딸이되었고 그의 추천으로 중종의 후궁이 되었고 중종과의 사이에 복성군을 두고 있었다.

1534년 중종 29년은 중종이 46세가 되는 해였다. 중종은 새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와의 사이에서 원자를 얻었다. 문정왕후 윤씨는 그 때 나이 34살이었고 왕비로 책봉된지 17년만 이었다. 이 원자는 후일 명종이 될 것이다. 문정왕후 윤씨가 득남함으로써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과 부인인 정난정이 득세하게 된다.

이조전랑은 이조의 정5품인 정랑과 정6품인 좌랑을 합하여 이르는 말이다. 전랑은 그 직급이 높지는 않았지만 조선왕조의 3사인 홍문관과 사헌부 그리고 사간원의 관리를 천거할 수 있는 막강한 천거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조전랑은 중죄가 아닌한 탄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조판서는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전랑을 임면할 수 없었고 전랑 자신이 스스로 후임을 임명한 후에 이직하였다.

김안로는 좌의정이 되어 있었다. 김안로는 중종의 사돈으로서 자신의 정적에 대하여는 친족과 재상을 불문하고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시행하였다. 이전에 경빈박씨가 무고하게 사사된 것도 그가 배후에서 자신의 아들 김희를 시켜서 꾸민 일이었다. 한편 홍섬은 전랑인 이조좌랑이었다. 김안로는 홍섬에게 청탁하여 자신의 큰아들을 이조좌랑으로서 임명하여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홍섬이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김안로는 홍섬을 매질한 후에 옥에 가두고 삭탈관직하였다. 이것이 홍섬의 옥사이다.

김안로는 이제 문정왕후 윤씨를 탄핵하면서 폐위시키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안로는 이 일로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곧 사사되고 말았다. 한편 김안로와 채무택 그리고 허항을 합하여 정유년 3흉이라고 하였다. 김안로가 사사되자 김안로에 의해 외직으로 나가있던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이 내직으로 들어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이므로 후일 명종의 외삼촌이다.

김안로가 타계하자 권력관계는 타계한 전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일족인 대윤과  현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일족인 소윤의 2파전으로 좁혀졌다.

중종비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윤원형은 김씨부인 이외에 후실로 정난정을 두고 있었다. 정난정은 정실부인인 김씨부인을 독살하고 스스로 정실부인이 되었다. 당시 이 독살사건의 실체가 가려져 있었으므로 정난정은 자신이 올케인 문정왕후 윤씨와 더욱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중종이 승하하였다. 중종 39년 1544년 11월 15일이었다. 향년 57세 였다.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소생이었고 연산군은 그의 이복형이었다. 중종은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인하여 즉위하였다. 중종은 일찍 타계한 장경왕후 윤씨로부터 인종을 두었고 문정왕후 윤씨로부터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을 두었다. 중종은 후궁인 창빈안씨와의 사이에 덕흥군을 두었는데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은 후일에 선조가 될 것이다.

인종이 1544년 11월 20일 즉위하였다. 당시 인종은 19세였다. 인종은 중종의 아들로서 그의 모친 장경왕후 윤씨는 그를 낳고 7일만에 산후병으로 타계하였으므로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사이에 아직 원자가 없었다. 인종에게는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그가 경원대군이다. 인종의 계모인 문정왕후 윤씨는 계모가 된지 17년만인 35세에 원자를 얻었는데 그가 경원대군이자 후일의 명종이다. 조선조정은 인종을 중심으로한 대윤 사림파와 문정왕후 윤씨와 경원대군 즉 후일의 명종 을 중심으로한 소윤 훈구파로 나뉘었다.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공조참판 소윤 윤원형이 영의정에 천거되자 대윤인 대사헌 송인수가 부당한 처사라고 하면서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리고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도 대윤으로서 소윤인 윤원형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 탄핵으로 인하여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은 영의정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윤원형의 누나인 문정왕후 윤씨는 마음이 심히 불편하였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 인종은 이 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계모 문정왕후 윤씨의 거처 앞에서 자리를 깔고 석고대죄하였다. 인종은 비를 맞으며 며칠을 그렇게 용서를 빌었으므로 몸이 더욱 나빠졌다.

한편 성균관의 유생들은 권당해서 대궐로 몰려가 기묘사화 때 죽은 사림 조광조의 신원을 간청하였다. 권당이란 지금의 데모이다. 그렇지않아도 인종은 조광조를 좋게 보아왔으므로 그를 복권하여 추작하였다. 또 그동안 폐지되었던 현량과도 복과하였다.

인종이 재위 7개월만에 승하하였다. 1545년 7월 1일 이었다. 향년 20세 였다. 인종은 자신의 계모이자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차려준 다과상에서 떡을 먹은 후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런데 당시 문정왕후 윤씨는 다과상을 차려주면서 그날따라 인종에게 매우 친절하였다. 인종은 왕비 인성왕후 박씨를 남겨둔채로 후사없이 승하하였다.

1545년 12세의 경원대군이 명종으로서 즉위하였다. 명종은 지난해에 심강의 딸인 심씨부인과 혼약하였는데 그녀가 인순왕후 심씨이다. 인순왕후 심씨는 후일에 순회세자를 낳을 것이고 순회세자는 요절할 것이다. 한편 명종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외삼촌인 훈구파 소윤의 영수인 윤원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명종의 즉위한 이 해 즉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는 직전왕인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현왕의 외삼촌인 윤원형 사이에 벌어진 권력다툼이었다. 소윤인 훈구파 윤원형은 대윤인 윤임 및 사림파를 제거하여 권력을 안정화하고자 하였다. 한편 윤원로는 윤원형의 형이었는데 명종이 즉위하자 군기시 첨정에 승차하여 있었다. 윤원로는 대윤 윤임과 사림파들을 무고해서 숙청하고자 하였다. 윤원로는 대윤 사림파들이 과거 경원대군 즉 명종을 주살하려 했었다고 비방하고 다녔다. 영의정 윤인경과 좌의정 유관은 윤원로가 망언을 하고 친족을 이간질한다고 탄핵하였고 그를 파직하고 해남으로 유배보내 버렸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불만을 품은 윤원형은 사림파들을 제거하기위하여 다시 일을 꾸몄다. 윤원형은 대윤 윤임과 유관 그리고 유인숙 등 사림파들이 왕을 폐위하고 계림군 또는 봉성군을 옹립하려 한다고 꾸며서 소문을 퍼뜨렸다. 마침내 소윤 윤원형은 대윤 사림파들을 역모죄로 엮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대윤 윤임과 사림파 유관, 유인숙과 계림군은 역모죄로 사사되고 말았다. 이것이 을사사화이다.

이 역모사건을 진압했다고 하여 위사공신의 훈작이 주어지는데 위사공신의 1등공신에는 윤원형의 심복들인 이기, 임백령, 정순봉, 허자 등이 추록되었다.

윤원형의 부인 정난정은 서녀였다. 정난정은 무반 최고직인 오위도총관 정윤겸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였다. 한때 정난정은 기생이었지만 신분상승의 욕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문정왕후 윤씨의 동생인 윤원형의 눈에 들어서 첩이 되었고 후사가 없었던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한 후에 스스로 정실부인이 되었다. 정난정은 남편인 윤원형을 따라서 궁궐출입을 하게 되었고 문정왕후 윤씨에게 궁밖 소식을 알리는 등 좋은 조언자가 되기도 해서 문정왕후의 사랑을 받았다. 또 그녀는 봉은사의 지주인 보우를 문정왕후 윤씨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정난정은 남편인 윤원형이 영의정에 승차하자 그녀는 종 1품인 정경부인에 승차하였다. 그러나 후일 문정왕후 윤씨가 타계하자 정난정은 급격히 몰락하였고 그녀의 신분 또한 천민으로 강등된다. 결국엔 남편 윤원형과 함께 자살하여 생을 마친다.

보우는 문정왕후 윤씨의 신임을 얻어서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불교를 부흥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보우는 1550년 선과 교 양종을 부활시켰고 300여 개의 사찰을 창건하고 공인 정찰화하였다. 그때 당시 봉은사는 선종이었고 봉선사는 교종이었다. 보우는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 4,000여명을 선발하였고 과거제도에 승과를 두게하였다. 보우 또한 나중에 문정왕후 윤씨가 타게하자 사림파의 탄핵을 받고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제주목사 변협은 보우를 장살한다. 그 후 양종제도와 승과제도는 폐지된다.

을사사화의 피바람이 지나갔지만 소윤과 훈구파들은 문정왕후 윤씨에 대항하고자 하는 대윤 윤임의 잔당이 남아있다고 주장하였다.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은 자신들의 정적이었던 대윤 송인수 등을 제거하였다. 이때 의금부와 형조는 자의적으로 숙청대상자들을 골라서 살생부를 만들었다.

1551년에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 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가 순회세자이다. 1553년인 명종 8년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첨정을 끝냈다. 그녀의 나이는 58세 였다.

1555년 왜구가 왜선 60여척을 이끌고 전라남도 영암, 달량, 진도 등을 약탈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왜구는 삼포왜란 이후에 교역조건이 계속 까다로워지자 난리를 일으켰다. 조정은 토벌군을 내려보내서 일망타진하였다. 이 왜구들은 퇴각중에 제주도를 침략하였으나 섬멸당하였다. 이것이 을묘왜변이다. 한편 이 을묘왜변을 계기로 해서 비변사는 상설기구가 되었다. 비변사란 전쟁시 문관무관 합동회의 기구이다. 비변사는 삼포왜란때는 임시기구였지만 앞으로 임진왜란을 통하여 더 강력해진다.

1559년은 황해도에 흉년이 들었다. 황해도 지방의 관리들은 문정왕후 윤씨의 외척세력들이었다. 황해도의 토산, 평산, 서흥 주변에 도적들이 출몰하여 민가를 약탈하고 관아를 습격하였다. 임꺽정은 관아에서 약탈한 곡식들을 빈민들에게 분배하였다. 관군은 임꺽정과 그의 도적들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백성중에 내응하는자들이 있어서 그들를 사로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1562년 3도토포사 남치근은 관군을 이끌고 구월산에서 임꺽정을 비롯한 무리들을 섬멸하였다. 임꺽정은 백정으로서 신분사회의 한계를 뛰어넘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해 보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조선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강력한 신분사회였고 그가 불평하였던 사회적 모순은 결국 외적으로가 아닌 내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명종의 아들인 11살의 왕세자인 순회세자는 세자빈으로서 윤옥의 딸을 맞이하였다. 그녀는 12살이었다.

승려 보우는 문정왕후에게 건의해서 중종의 묘인 희릉을 이장하도록 하였다. 보우는 중종의 묘가 혈자리에 있으므로 산의 맥을 끊었는데 그렇게되면 후손이 메마르게 된다고 하였다.

명종의 왕세자인 순회세자가 타계하였다. 향년 13세였다. 세자빈 윤씨와의 혼인 후 2년만 이었다.

1564년 명종19년 명종의 외척인 이량의 아들 이정빈이 부정한 방법을 써서 알성시에서 장원급제하였다. 이량은 아들을 이조전랑을 시켜볼려고 하였지만 전임자의 전랑천대법에 따라서 천거절차가 필요하였다. 이량은 어렵게 아들을 위하여 전임자의 천거를 받아내었다. 하지만 당시 이조전랑이었던 윤두수는 이량의 청탁을 끝까지 거절하다가 나중에는 무고로 파직되었다. 이정빈이 이조전랑이 된 후에 그의 부친 이량은 이조판서로 승차되었다. 이조판서가 된 이량은 상피제도로 인하여 아들인 이조전랑과 같은 부서에서 일할 수 없었으므로 그 아들 이정빈은 이직되고말았다. 나중에 심의겸과 김효원은 이 막강한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으로써 사림파들은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선다. 이것이 선조 초기(1575년)에 벌어지게 될 을해당론이다.

1564년 예조좌랑 이이는 명종에게 승려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도록 또 외척인 소윤 훈구파 윤원형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때 이이는 불승이었다.

명종 20년 1565년 4월27일 문정왕후 윤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65세였다.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계비로서 인종의 보모였고 현왕인 명종의 모친이었다.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은 소윤의 영수로서 을사사화를 일으켜서 사림들을 숙청하였고 윤원형의 부인인 정난정은 그녀의 총애를 입고 정경부인이 되어서 재물을 끌어모았다. 또 문정왕후 윤씨는 보우를 등용해서 불교를 중흥하였다.

이전에 명종의 부친인 중종은 왕비로써 문정왕후 윤씨와 장경왕후 윤씨 말고도 폐비된 신씨부인이 있었고 사사된 경빈박씨가 있었다. 또 후궁인 창빈안씨와의 사이에 덕흥군을 두었었다. 이 덕흥군은 인종과 명종의 이복동생으로서 후일에 덕흥군의 셋째아들인 하성군은 선조가 될 것이다. 명종은 순회세자가 타계하였으므로 후사가 없어서 방계혈족인 하성군에게 보위를 내주게 된다.

1567년 명종22년 명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34세였다. 명종은 중종과 문정왕후 윤씨사이의 소생이었다. 명종은 왕비인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서 순회세자를 두었으나 순회세자는 일찍 타계하였으므로 후사가 없었다. 명종은 승하하기 전에 자신의 이복동생인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을 보위에 올렸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있다. 명종이 병석에서 덕흥군의 세아들을 불러서 익선관을 써보게하였다. 익선관은 왕이 쓰는 왕관의 일종이다. 위로 두 아들은 별 말 없이 써보았지만 셋째인 하성군은 현직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말하였다. 명종은 이 말을 듣고 흐믓해 하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왕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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