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1일 화요일

1. 태조-정종-태종

고려말 우왕의 왕통에 대한 정통성 시비가 있었다. 우왕은 사생활이 도덕적으로 문란하다고 알려졌다. 게다가 그의 부친은 공민왕이 아니라 신돈이었다는 것이다. 토지제도 또한 혼란하였다. 토지를 기반으로 경제와 정치가 묶여돌아가는 지배와 피지배의 사회구조에 위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권문세가의 가렴주구와 우왕의 음란이 정체의 정당성을 흔들었고 지배층 전반의 덕성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이때쯤 중국은 원나라 말기였다. 불교도들인 백련교도들이 난을 일으키고 또한 홍건적들로 인하여 사회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1368년 주원장이 경제력을 장악하여 북경을 차지하자 원 순제는 내몽고로 후퇴하였다. 고려에서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도전과 이성계 등의 친명파와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친원파가 대의명분을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중원을 차지한 위세를 과시하면서 함경남북도의 옛 쌍성총관부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압박하였다. 한마디로 속주를 설치하겠다는 속셈이었다. 고려조정은 강건너 불구경하듯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왕은 맞대결을 위해서 조민수를 좌군도통사로 그리고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하여 이제 막 싹튼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하도록 내보냈지만 이성계는 이 명령을 거부하고 압록강의 위화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이끌고 회군해버렸다. 그 후 이성계는 쿠데타를 이용하여 조정의 실권자가 되었고  최영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위리안치시켰고 우왕의 아들을 창왕으로서 옹립해버렸다. 고려조정은 사전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토지측량을 시작하였지만 이에 반대하는 수구 반대세력도 없지 않았다. 토지를 제일의 생산수단으로 삼았던 농본주의의 봉건제도 하에서 토지의 소유권 또는 점유권의 변경은 지배, 피지배 계층을 통틀어 대단한 사회적 파장이요 변화였고 계급의 변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고려조정은 우왕에 이어 창왕까지 정통성에 대한 시비를 붙여 논하면서 마침내는 창왕을 폐위시켰버렸고 신왕의 7대손인 정창군을 공양왕으로서 옹립하였다. 공양왕은 논공행상으로써 이성계에게 작위와 더불어 토지와 노비등을 하사하였다. 이성계는 점차 고려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토지개혁으로 인하여 공전 사전의 문서들이 새롭게 작성되었던 것은 물론이겠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대의명분을 놓고 고려충신 정몽주와 대립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편인 조영규로 하여금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주살케 하였다. 곧이어 공양왕은 폐위되었다. 그리고 새 왕조가 세워졌다. 1392년 7월 17일 이었다. 이성계의 곁에는 그의 친한 여진족 친구인 퉁두란이 있었다. 또우란 티무르는 그의 본명 이었고  이성계는 그에게 이지란이란 이름과 과부 하나를 하사하였다. 나중에 또우란 티무르는 불승이 되었고 자신의 소원대로  고향인 몽고땅에 묻히게 된다.

고려는 끝났고 조선은 시작되었다. 충신 불사이군이라고 하였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려 충신 중에 성리학자였던 야은 길재는 낙향하였다. 그리고 두문동에서는 72학사들이 모여서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생활하였다. 또한 고려왕조의 왕족인 왕씨들은 정책상 거제도와 강화도에 분산 수용되어서 생활하게 되었다. 일부는 이송 도중에 수장되었는데 이방원의 계략이 있었다고 한다. 새 왕조는 특정한 고려왕조의 후손에게는 전 왕조의 제사를 담당케 하였다. 그들 중에 대댜수는 왕씨의 성을 버리고 전씨 또는 옥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다. 고려는 망했다. 한때 괴승 신돈은 비행과 방종으로 고려조정을 장악했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었다. 공민왕은 자제위에 의해 시해되었다. 자제위의 원래 목적은 뽑혀온 공신의 자제들이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국대장공주가 타계한 후로는 미소년들로 채워졌다. 한편 공민왕 다음의 우왕과 창왕은 왕위 정통성에 관한 시비에 휘말리면서 폐위되었다. 왕조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실제로 공민왕의 직게혈족이 아니었다.

근동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동로마제국을 궤멸시키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1388년에 코소보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자 발칸반도의 일부가 그들 무슬림들에게 떨어졌다. 그 후 술탄 메메드 2세는 1453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였고 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 동로마 제국 내의 토지와 각종 동산과 부동산의 소유권과 그리고 제국 내의 백성들에 대한 모든 지배권은 오스만 제국의 주권자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동로마 정교회는 무슬림들의 배려로 명맥을 이어갔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서 책봉하였다. 방석은 현비 즉 경처인 강씨부인의 소생이었다. 그런데 책봉 과정에서 유목민 풍습인 말자상속이 실행됨으로 인해서 논란이 일었다. 이방원은 이 말자상속 때문에 심히 괴로웠다. 이것은 나중에 피를 부르는 난리로 이어지게 된다. 세자 의안군 방석은 12살때 빈궁 유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녀는 16살 이었다. 나중에 빈궁 유씨는 내시에게 겁탈당하는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서 마침내는 폐비가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 후 일이지만 세자 방석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주살된다.

태조는 한양 천도를 위해서 경복궁의 창건을 지시하였다. 고려의 수도는 개성이었고 개성에는 수창궁과 경덕궁이 있었다. 고려왕조의 불교 수도사들이었던 중들은 고려말에 이르러서는  그 수가 인구의 십분의 삼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을 뿐만아니라 고급 건축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잉여인구와 노동력과 기술은 경복궁의 창건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

조선은 종묘사직이다. 종묘는 왕실어른의 위폐를 모시는 것이고 사직이란 지신, 농업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여진족이나 몽고족은 하늘에 맹세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 관습이면서 정체의 형식이었다. 조선은 주자의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썼지만 조선왕실 내에서는 불교가 고려왕조에 이어서 그 명맥을 꿋꿋이 이어갔다. 태조 이성계의 곁에는 무학대사가 있었다. 그는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의 묘자리를 봐주었었고 이성계의 꿈도 해몽해 주었었다. 이성계가 꿈을 꾸었는데 쓰러져가는 폐가에서 서까래 세개를 지고 나오는 꿈이었다. 사람이 서까래 세개를 지고 나오는 모양은 임금 왕 자와 같은 형상이다. 나중 일이지만 태조 이성계는 절 하나를 짓고 그것을 석왕사라고 이름하였다. 참고로, 개국 초기의 병력은 보병과 기마병을 합하여 30만 이었고 그 중에 10만은 역리와 향리에 배치되었다.

개국한지 4년이 채 안돼서 태조의 현비 즉 경처였던 강씨부인이 타계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향처인 첫째부인 한씨에게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막 타계한 현비 강씨부인에게서 경순공주, 방번과 방석을 두었다. 막내인 의안군 방석은 세자로서 다음 보위의 승계자였다. 그런데 첫째부인 한씨의 소생인 다섯째 방원은 장자에게 세자위가 승계되지 않는 말자상속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방원은 자신과 갈등을 빚고있었던 친세자파인 정도전를 주살하고 왕세자 방석 또한 주살하였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1398년 무인정사라고도 한다. 이 때의 일로 하윤이 득세하였다. 이것으로서 후일 정종이 되는 둘째아들 방과가 세자에 오르게 되었다. 첫째아들인 방우는 일찍 죽고 없었다.

태조 이성계가 왕세자인 영안군 방과에게 양위하게 되니 그가 조선 제 2대 왕 정종이었다. 그런데 정종이 세자를 책봉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피바람이 일게 되었다. 정종과 그의 왕비인 덕비 김씨부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세자가 아니라 세제로서 보위가 승계되어야 할 판이었다. 이번에는 세제위의 물망에 오르고 있던 넷째아들 방간이 동생인 방원에 의해서 주살되었다. 이것이 제 2차 왕자의 난이다. 정종은 다음 보위를 이어갈 세자로서 방원을 왕세제로서 책봉하였다. 왕세제인 정안군 방원에게는  나중에 정빈이 되는 민씨부인이 있었다. 이 민씨부인은 양녕대군과 세종의 모친이 된다.

1401년은 태종 1년이다. 지난해에는 정종이 자신의 보위를 동생이자 왕세자였던 정안군 방원에게 양위하는 즉위식이 있었다. 정종이 보위에 오른지 2년 만 이었다. 정종은 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수도를 개경으로 옮겼는데 또 다시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였었다. 왕세자 정안군 방원은 조선의 제 3대 왕인 태종이 되었다. 이것으로서 정종은 상왕으로서 퇴위하였고 태조는 태상왕이 되었다. 한편 심덕부에게는 아들 심온이 있었다. 심온의 딸은 태종의 아들인 충녕대군 즉 후일의 세종과 혼인을 맺게 된다.

태종은 관제개혁을 단행하였다. 문하부가 의정부로 개편되었고 낭사가 사간원으로 개편되고 무과 과거시험도 시행하였다. 태종은 주자소를 확장하였다. 활자와 인쇄의 발달은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유생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이 주자소는 세조때 교서관 그리고 정조때 규장각으로 발전 진화하면서 우리나라 활자문화가 꽃을 피우는데 기여하게 된다. 한편 태종과 태상왕 이성계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골은 함흥차사 사건으로 깊어져갔다. 태종은 함경도 함흥에 은거하고 있던 태상왕 이성계를 한양으로 환궁시키고자 신하들을 보냈지만 그들은 매번 불귀의 객이 되어서 돌아왔다. 태상왕의 친구였고 이때는 불승이었던 퉁두란은 몸소 찾아가서 환궁을 요청하였지만 이성계의 고집을 꺽지 못하였다. 한번은 박순이 말과 망아지를 함께 이끌고 이성계를 찾아가 알현할 기회가 있었다. 태상왕은 새끼와 함께있는 말을 보고 감동한 바가 있었던지 자신의 의지와 태종과 신하들을 비롯한 조정의 의지 사이에서 합일점을 찾게되는 기회를 맞이한다. 그러나 태상왕 이성계의 환궁은 자신의 의지만큼 쉽지 않았다. 이제까지 태상왕을 따르고 있었던 조사의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사의는 자신의 노력에 따라서 태상왕을 옹립하여 새 왕위를 재창출할 만큼 충분한 가치를 점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태종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분명 자신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역모였다. 태종은 태상왕 이성계를 사이에 두고 조사의와의 한판 결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조사의는 여진족인 올량합 부족과 동맹을 맺고 조영무가 이끄는 관군에 대항하여 분전하였다. 그러나 조사의는 결국 조영무가 이끄는 관군에 패배하고 말았다. 이것이 조사의의 난이다. 조사의는 이성계의 둘째부인 경처 강씨부인 즉 신덕왕후의 외척이었다. 그 후 조정의 중신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영의정은 조준,  좌의정은 하윤, 우의정은 조영무였다, 왕명을 출납하는 대인 즉 후일 승지는 맹사성 이었다. 그는 최영의 손주사위였다. 황희는 후일에 지신사, 즉 도승지가 될 것이다.

태종은 창덕궁을 창건하였고 태상왕의 거처로서 덕수궁 즉 후일 창경궁을 건축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1408년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출생한 이후 그의 나이 74세였다.

태종과 정빈 민씨부인 사이에는 첫째, 왕세자인 양녕대군 둘째, 불교에 심취한 효령대군 셋째,  세종이 될 충녕대군 넷째, 일찍 타계하게 될 성령대군이 있었다. 첫째딸 정순공주는 이거이의 아들인 이백강과 혼인하였다. 그리고 둘째딸 경정공주는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과 혼인하였다. 민씨부인에게는 민무구와 민무질 두 오라비가 있었다. 한편 외척이 득세하고 조정이 외척들의 손에 좌지우지 되어가자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을 제주도에 부처하고 얼마 후에는 자진케 하였다.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이들의 동생들이었던 민무회와 민무휼 두형제가 형들에 대한 탄원을 하다가 외지에 부처되는 일이 있었다. 태종은 이들에게도 명을 내려서 자진하게 하였다.

태종은 호패법을 시행하였다. 1413년 10월 1일 이었다. 16세 이상의 남자는 벼슬, 성명, 얼굴색 등이 기재된 호패를 차고다녀야 했다. 이 때문에 자작목, 잡목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였다. 조정의 입장에서는 인구의 이동을 파악할 수 있었고 군역, 요역, 조세징수 등을 명확하게 할 수 있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세조때인 이징옥의 난때 그리고 광해군때 이 제도가 부활하게 된다. 한편 태종 17년 즉 1417년 명나라 성조인 영락제가 조선에 후궁울 요청하자 조정은 한확의 누이를 명나라로 보내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한확의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인 왕세자 도원군 장, 즉 의경세자와 혼약을 맺게되고 후에 인수대비가 된다.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세자임에도 여색에 취해 있었다. 한고조는 여색과 재색을 탐하였지만 천하를 평정하였고 진나라의 광은 어질었음에도 나라는 망하였다. 중국은 그러하였다. 양녕대군은 애첩이 여럿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부녀와의 정사도 대단히 즐겼다. 태종은 마침내 자유분망한 양녕을 폐세자하고 셋째아들인 충녕대군을 세자로서 책봉하였다. 그러면서 태종은 곧 양위하였다. 1418년 8월 10일에는 충녕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세종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왕권을 양위하면서 병권만은 자신이 소유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불씨가 되어서 피바람을 몰고오게 된다.

병조참판 강상인은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의 공신이었으므로 태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강상인은 병권이 왕권에서 분리되는 것을 줄기차게 반대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영의정 심온 또한 병권은 주상인 세종에게 되돌려져야 한다고 한사코 주장하였다. 영의정 심온의 입장에서는 확실하고 명확하고 일관된 전제군주권의 양위없이는 왕실과 조정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왕의 권력이 두 군데서 즉 대권이 두 왕에게서 나온다면 조정이 입장에서는 조정의 분열이 불가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상왕 태종은 대노하였고 심온에게는 사약을 내렸다. 심온은 세종비인 공비심씨의 부친이었으므로 국구였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심온의 동생인 심청도 이때 참수되었고 일가족은 관노비가 되어서 처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 병조참판 강상인은 수레참형을 당하였고 그의 가족들은 노비가 되었다. 이것이 강상인의 옥이다. 한편 1418년에 벌어진 일로서 기해동정이 있다. 대마도에 대흉년이 들자 왜구들은 서해안에 몰려와서 해적질을 하였다.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하였다. 최윤덕은 왕명에 따라서 병력을 이끌고  3군도절제사로서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이때 당시 이종무는 3군도제찰사였다.

세종 1년 즉 1419년부터 가뭄이 사작되었다. 농사는 7년 흉년이었으므로 보릿고개가 7년 동안 이어졌다. 세종은 금주령을 내려서 양곡을 아끼는 정책을 썼다. 세종은 격물치지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비파와 거문고를 잘 다루는 등 음의 명인이었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3대 악성은 신라의 우륵, 고구려의 왕산악 그리고 조선의 박연이다. 우리의 아악은 명나라의 것을 모방하였다. 그 당시 '예는 변계량이요 악은 맹사성이다' 라는 말이 있었다. 그 맹사성은 우리 고유의 향악이 너무 속되다고 하였다.

야은 길재가 66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과 더불어 3은으로 불렸던 성리학자로서 조선창건을 반대하였었다. 한편 성리학은 12세기 송나라때 주희가 수집정리한 학문으로서 4서 즉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특히 중요시하는 학문이면서 신유학이라고도 불리운다. 격물치지, 즉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서 앎에 도착하는 자기수양을 우선으로 하는 학문이다. 형이상학적인 이와 물리적인 기가 조화롭게 맞물리면서 태극과 음양오행이 합일하도록 서로 침투하게 해서 보편과 개별간의 구분과 차별이 사라지도록 도를 닦아내는 자기수양의 학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안향이 원나라에서 가지고 들어왔다. 한편 명나라의 왕양명은 인간에게는 선과 악에 대한 선천적인 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양명학을 개시하였다. 조선 성리학은 시대 전반을 통틀어서 합리성을 중시하였으므로 직관을 강조한 양명학을 이단시 할 수밖에 없였다.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국가이념으로서 국가정의의 근본이었고 정당화의 실체였다.

세종과 공비 심씨부인 사이에는 첫째아들 향과 둘째아들 유가 있었다. 향은 왕세자가 될 것이고 후일에 문종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유는 수양대군으로서 후일에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게 된다.

궁녀는 궁중여관의 준말이다. 궁녀들은 원칙적으로 2인 1실을 쓰게 되어있다보니 동성애가 문제가 되고는 하였다. 궁녀들 중에는 운좋게 왕의 눈에 띄어서 계급이 수직상승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내명부에는 비, 빈, 귀인, 숙위, 소의, 소용 등의 계급이 있었는데 원자 즉 왕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생산하게 되면 계급이 수직상승하게 될뿐만 아니라 원자가 왕세자로서 책봉이 되고 보위를 승게하는 날이면 그녀는 대비가 되어서 외척을 거느릴 수 있는 권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므로 그 가치를 놓고 이들간의 암투와 모략이 암암리에 벌어졌다.

세종이 경희루 동편에 삼간초옥을 짓고 도량에 전념하는 중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정종이 승하하였다. 정종은 태조 이성계의 둘째아들이고 태종의 형님이면서 자신의 보위를 태종에게 양위하였었다. 그리고 세종의 백부이기도 하다. 1419년 향년 63세 였다. 이어서 대비 민씨 즉 세종의 모친이자 태종의 왕비가 학질즉 재귀열로 타계하였으니 향년 56세 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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