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 26일 일요일

4. 성종-연산군

1469년 재위 2년만에 예종이 물러났고 자산군이 13살에 즉위하여 성종이 되었다.  자산군의 부친은 도원군 즉 의경세자였고 갑작스럽게 요절한 의경세자의 부친은 세조였다. 자산군 즉 성종은 홀어미니인 수빈한씨의 손에서 자신의 친형인 월산군과 함께 자랐었다. 성종은 자산군 시절이었을때 한명회의 넷째 딸과 혼약을 맺고 있었다. 한명회의 넷째딸은 이제 중전인 공혜왕후 한씨가 되었다.

성종 1년인 1470년 귀성군의 난이 일어났다. 귀성군은 세종대왕의 아들인 임영대군의 둘째아들이었다. 귀성군은 세조 말기에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남이, 유자광 등과 함께 출정하여 공을 세우고 돌아와서 영의정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최세호가 말하기를 귀성군이 왕의 재목이 될만 하다고 읖조렸다. 이것을 엿들은 정인지는 최세호를 역모로 엮었는데 끝내는 최세호와 권맹희가 주살되었고 귀성군은 유배를 가고 말았다. 이 귀성군의 난리를 평정하는 데에 공이 있다고 하여 좌리공신의 훈작이 주어졌다. 좌리공신의 1등공신에는 신숙주, 한명회 그리고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 조석문 등이 추록되었다. 신숙주는 성종 3년에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영의정에 승차하였다.

성종 1년인 1470년 토지조세제도가 바뀌었다. 세조 때부터 시행되던 직전법과 더불어 관수관급제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동안 토지를 놓고 수조권자인 전주와 경작자인 전호 또는 전객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수조권자인 관료 즉 전주들은 직전법이 당대에 한하므로 10분의 1의 수조율을 넘어서 수취하려고 들었다. 이에따라 성종은 경작자인 전객의 수확물을 직접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고 왕은 관료인 수조권자, 즉 전주에게 녹봉으로서 쌀, 보리 등을 비율에 따라서 지급하였다. 이로써 왕은 수조권자인 전주 즉 관료를 대신하여 새로운 수조권자가 되었다. 전주인 관료들은 녹봉만을 받았고 수조권은 왕에게 돌려주었다. 그리하여 경작자인 전객들은 전주인 관료들의 중간수취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세조의 지시로 편찬이 진행되고 있었던 경국대전이 반포되었다. 이 경국대전은 바로 직전 왕인 예종 때에 완성되었으나 예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반포를 미루고 있었다. 경국대전은 경제법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태종때의 경제육전과 속전등을 종합하였다.

성종의 왕비이자 한명회의 넷째딸인 공혜왕후 한씨가 타계하였다. 성종 5년 이었다. 성종에게는 소용정씨, 소용엄씨, 숙의윤씨, 숙의권씨등의 후궁들이 있었는데 공헤왕후 한씨가 타계하자 숙의윤씨를 새 왕비로서 책봉하였다. 이 숙의윤씨는 신숙주의 당조카였고 성종의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먼 친척이었다. 한편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 한씨는 내훈을 발간하였다. 내훈은 열녀전, 여교, 명감, 소학 등에서 명구들을 발췌하여 수록한 여성 교육서인데 원문은 한문으로 되어있고 정음으로 번안되었다.

성종이 20세가 되는 해였던 1476에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가 7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이때 한명회가 섭정폐지가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는데 한명회에 대한 불경죄 시비가 있었다.

성종과 새 왕비인 중전 윤씨사이에 원자가 탄생하였다. 1476년 11월 9일이었다. 이 원자는 후일 연산군이 될 것이다. 성종의 계비인 중전윤씨는 후궁시절부터 소용정씨와 소용엄씨와의 사이가 아니 좋았다. 그녀들은 모두 성종을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압승술 등 여러 방술을 써가면서 성종에게 구애했었다. 당시 소용 엄씨는 압승술을 시도하여 지금의 왕비인 숙의윤씨의 처소에 있는 소나무에 불을 질렀다. 이제 중전 윤씨는 소용 엄씨를 비롯하여 후궁들을 경원하였다. 그런데 중전 윤씨는 성종이 자신과 거리들 두고 후궁들과 가까이 지내자 소용정씨와 소용엄씨를 더욱 경원하였다. 어느날 소용 엄씨는 밥상에서 비상바른 곶감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모두들 중전윤씨를 의심하였다. 아닌게아니라 중전 윤씨의 방에서 방향하는 서책이 나오자 성종은 중전 윤씨를 수빈으로 강등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난 1477년 3월 29일 성종은 수빈 윤씨를 다시 왕비로서 복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전 윤씨는 계속하여 시기와 질투를 하였다. 소용엄씨와 소용정씨의 처소에서는 그녀들과 똑 닮은 인형들이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 당시 소용정씨는 임신하고 있었는데 원자라도 태어나는 날이면 소용정씨의 지위가 더 높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소용 정씨는 이 일로 인해서 충격을 받고 유태하고 말았다. 중전윤씨의 질투와 암투는 계속하여 극에 달하였고 마침내 성종의 용안에 손톱자국을 남기기에 이르렀다. 성종과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의 감정 또한 정점에 달하였다. 그래서 1479년 중전 윤씨는 폐비되고 말았다. 폐비윤씨는 친정으로 쫒겨났지만 자신의 이복 형제들인 윤구, 윤우, 윤후 형제들의 도움으로 재기를 준비하면서 다시 입궁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 꿈은 악몽이었다. 성종은 폐비윤씨의 생활이 날로 사치해가는 것을 알게되었다. 소용엄씨는 수태하여 귀인엄씨가되어있던 차였다. 성종은 원각사에서 불공을 들이면서 후일을 도모하고 있던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폐비윤씨는 사약을 먹고 타계하였다. 성종은 윤후를 비롯한 폐비윤씨의 형제들도 제주도와 거제도 등에 유배보내었다. 나중에 성종13년이 되어서야 이들 형제들은 유배가 풀려서 해방된다.

성종 때의 유명한 요부로서 어우동이 있었다. 어우동은 왕족이었는데 세종의 형인 효령대군의 서자의 후손이었다. 어우동은 유학자들 뿐만 아니라 천민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1480년 교형되었다.

폐비윤씨가 사사되자 성종은 새 왕비로서 윤씨부인을 맞아들였다. 이 부인이 정현왕후 윤씨이다. 정현왕후 윤씨는 폐비윤씨의 원자인 연산군을 보살피는데 연산군은 이 정현왕후 윤씨를 친모로 알고 성장한다. 후일 정현왕후 윤씨는 성종과의 사이에 진성대군을 낳는다. 진성대군은 후일 반정군에 의하여 중종으로 등극한다.

성종은 창경궁을 확장하면서 중건하였다. 창경궁은 세종 때는 수강궁이었다. 창경궁은 세 대비를 모시기위한 궁이었는데 성종 때의 태평성대로 인하여 많은 연회가 여기서 열리곤 하였다. 한편 성종을 대신하여 7년 동안 수렴청정했던 대왕대비 정희왕후 윤씨가 창경궁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66세였다. 알다시피, 정희왕후 윤씨는 세조비로서 의경세자와 예종의 모친이었다. 어쟀든 나중에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서 굶어죽는 일을 비롯하여 장희빈의 비극은 이곳 창경궁에서 벌어진다. 1911년 일본제국은 순종을 위로하는 구실로서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우고 창경원으로 개명한다. 그후 1984년부터 복원이 시작된다.

경연관 김종직이 조의제문을 지어올렸다. 김종직은 이 조의제문에서 단종이 삼촌 세조에 의하여 폐위된 사실을 초나라의 의제에 비유하였다. 초나라 항우가 회왕 의제를 모시고 창의군을 일으키자 세력이 강대해졌다. 그러나 항우는 의제를 죽여서 물속에 버리고 패권을 독차지하였다. 단종이 죽임을 당했을때 단종의 시신은 숲속에 버려졌다. 까마귀가 날아와서 그 시체를 쪼아먹었다. 어느 동자가 그 시체를 거두었는데 물 속에 집어넣었는지 불속에 넣었는지 몰랐다. 한편 후일 경연관 김종직은 죽은지 6년 후인 연산군 때 이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서 부관참시된다. 김종직은 고려 때 정몽주, 길재, 김숙자의 학통을 이어받은 조선 사림의 시조였다. 사림이란 성리학에 능통한 선비를 말한다. 사림들은 조선초기에 개국공신과 세조의 공신들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조선중기 이후로 사림들의 천하가 되면서 사림간에 서로 붕당하고 댱쟁하면서 피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이 사화이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중종 때 기묘사화, 명종 때 을사사화는 훈구파가 사림들을 숙청한 사건이다.

성종이 세자 연산군의 세자빈으로서 신승선의 딸을 맞이하였다. 신승선은 머지않아 영의정에 승차한다.

1487년 성종 18년 한명회가 타계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이 타계하였다. 1494년 성종 25년 12월 24일에 성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38세였다. 성종은 직전 왕인 예종이 갑작스럽게 타계하자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모친인 인수대비 한씨의 도움으로 왕위에 등극하였다. 성종의 부친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였지만 갑자기 요절했었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은 이미 타계하고 없었다. 성종의 모친인 인수대비 한씨는 당시 58세였다.

서양에서는 1492년 이탈리아 제노아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캐톨릭 공동황제였던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후원을 받고 신대륙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당시 유럽은 몽골족에 의하여 고립되었고 동로마제국의 평화가 오스만투르크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자 마르코 폴로 등 유럽인들이 이용하던 교역로인 실크로드가 막혀버렸다. 콜럼버스는 새 교역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일본을 향하여 서쪽으로 항해하였다. 콜롬버스는 자신이 발견한 바하마를 죽을때까지도 인도라고 믿었다. 한편 유럽은 공간을 아메리카로 확장하였고 후일 유럽인의 의식을 심고 국가를 세운다.

연산군이 즉위하였다. 1494년 겨울이었다. 연산군의 부친은 성종이었고 모친은 사사된 폐비윤씨였다. 연산군의 왕비는 영의정 신승선의 딸인 신씨부인이었다. 연산군에게는 배다른 동생인 진성대군이 있었다.

실록청에서는 승하한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고 있었다. 당상과 낭청은 승정원일기와 사관들이 매일 기록해 둔 사초를 기초로하여 초초, 중초를 거치는 동안 교정과 삽입을 하고 마침내 정초를 완성하여 실록을 펴내게 된다. 사관 김일손은 조선 사림의 시조인 김종직의 문하였다. 김일손은 성종실록에 실리게 될 자신의 사초에 세조가 주살하였던 김종서와 황보인의 죽음을 절개있는 행위였다고 추켜세웠고 사육신을 애석한 일로서 풀이하여 써넣었다. 또한 자신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성종실록에 실으려고 하였다.

영의정 이극배의 동생은 이극돈이었다. 이극돈은 그때 당시 종1품인 의정부 좌찬성이었다. 유자광은 세조의 공신이었므로 훈구파였다. 유자광은 전라도 영광 출신의 서얼이었는데 김종직은 살아있을때 유자광의 출신을 문제 삼으며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던 터라 김종직과 유자광은 서로 앙숙이었었다.

훈구파 이극돈이 김일손의 사초를 실록에서 삭제하려고 하자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들이 반발하였다. 이것을 기화로 유자광과 학문을 싫어했던 연산군은 사림파들을 제거하였다  이것이 1497년 무오년 4월에 있었던 무오사화이다. 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서로 대립하면서 빚어낸 결과였는데 연산군의 덕으로 인하여 훈구파가 승리하였다. 이것으로 김종직은 경상도 선산에서 부관참시되었고 김일손은 능지처사되었다. 부관참시는 시체를 관에서 끌어내서 목을 치는 것이고 능지처사는 몸을 찢어서 죽이는 것이다. 깁굉필과 정여창 등도 귀양를 가게되었고 사림의 영남학파는 절맥위기에 다다랐다.

1499년 연산군 5년 연산군과 신씨부인 사이의 원자가 천연두에 걸렸으나 곧 나았다. 이어서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이 신수근의 딸과 혼인하였다. 신수근은 신승선의 동생이었다. 신승선은 연산군의 장인이다.

판내시부사 김처선이 양자로서 이공신을 맞아들였다. 내시는 환관 또는 내관, 환자라고도 불리는데 궁궐에서 살림을 맡아서 처리하였다. 내시의 기원은 중국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있어왔다. 내시가 되기 위해서는고환을 잘라내어야 했다. 고환을 잘라내는 이유는 궁궐내의 왕족을 비롯한 여인들을 겁탈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효자동의 원래 이름은 화자동이었는데 환관들은 거기서 집단거주하였다. 갑오개혁때는 내시제도가 폐지되었다.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이다. 따라서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에게는 백부가 될 차례였다. 월산대군의 미망인이자 연산군의 백모인 박씨부인은 미모가 출중하였다. 연산군은 그녀를 연모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박씨부인이 임신까지 하는일이 있었다. 박씨부인은 연산군과의 관계가 탈로날까봐 두려웠던지 약을 먹고 자살해버렸다. 그런데 이 박씨부인의 동생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당시 우부승지였고 그의 부친은 세조 때의 공신 박중선이었으므로 훈구파였다. 박원종은 자신의 누님이 자살하자 이 일로 연산군을 경원하였는데 후일에는 역모한다.

연산군은 장녹수를 후궁으로 책봉하였다. 장녹수의 부친은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장한필이었는데 장녹수의 모친은 첩이었다. 장녹수는 원래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의 노비였다. 장녹수는 먹고살기 위해서 몸을 팔기도 했고 제안대군의 가노와 혼인하여 자식까지 두고 있던 몸이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으면서 자신의 오빠인 장복수를 양인의 신분으로 올려놓았다. 그런데 장복수는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여 연산군이 몰락하는 데에 일조하게된다. 나중에 장녹수는 중종반정 후에 참수된다.

연산군 6년 폭정이 극에 달해서였는지 민심이 흉흉하였고 흉년이었으므로 도적떼들이 출몰하였고 탐관오리들도 나타났다. 62세의 유자광은 미복차림으로 민정시찰을 나갔다. 충청도 언풍과 경상도 문경의 경계에는 새재가 있다. 이곳에서 의적으로 자처하는 홍첨지가 재물을 무상으로 거둬들이고 재분배한다고 하였다. 이 도적단은 중앙의 당상의 도움으로 중앙진출을 꾀하면서 전국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광해군 때의 인물이므로 이곳의 홍첨지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곧 유자광은 서반직의 최고계급인 5위도총관에 승차하였다.

1504년 연산 10년 갑자년이 닥쳤다. 잘알다시피, 연산군의 모친인 폐비윤씨는 사사되었었다. 그후 폐비윤씨의 모친인 신씨부인과 윤우, 윤구 등 형제들은 유배를 갔다가 풀려났다. 연산군은 임사홍으로부터 이들 외가의 소식을 접하고 몸소 외할머니를 찾아갔다. 외할머니 신씨부인은 연산군에게 폐비윤씨가 피를 토하며 죽어갈때 남겨놓은 적삼을 내놓았다. 이 일을 기화로 피바람이 일게되었다. 임사홍과 더불어 훈구파 유자광이 부화뇌동하자 연산군은 폐비 윤씨와 앙숙관계였던 소용정씨와 소용엄씨를 주살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폐비윤씨을 폐출하려할 때 찬성하였던 사림파 김굉필과 이세좌를 처형하였고 이미 타계한 훈구파 한명회와 정창손, 남효은을 부관참시하였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훈구파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그해 1504년 4월 26일 아녀자들의 교육을 위하여 내훈을 편찬하였던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 한씨가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연산군은 인수대비 한씨와 언쟁중에 밥상을 엎어서 그녀에게 던진적이 있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 한씨를 위하여 3년상 대신 25일 상을 치렀다.

연산군은 부친인 성종의 후궁들을 범하는 일이 있었다. 내시 김처선이 왕의 주색과 음주가무를 탓하자 연산군은 내시 김처선을 주살하였다. 연산군은 채홍사와 채청사를 파견하여 소녀들과 말들을 징발하였고 경연과 사간원을 폐지하여 언로를 차단하였다. 또 연산군은 원각사를 폐쇄하고 성균관과 예문관, 홍문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기생을 불러들여 즐거이 만찬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한글로 된 투서가 들어오자 한글사용을 금지시켰다. 연산군은 백성들이 자신의 음란함을 목격할까봐 두려웠던지 성곽 주변의 민가를 부수고 그곳을 사냥터로 만들었는데 그때 쫓겨난 철거민들의 원성이 심하였다. 한편 임사홍의 아들 풍원위 임숭재가 화류병으로 타계하였다. 화류병은 지금의 성병이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키백과.  조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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