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25일 일요일

10. 고종-순종

1863년 12월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은 당시 12살이었으므로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다. 흥선대원군과 부인 민씨사이에는 이재면, 이재선, 이재황 삼형제가 있었다. 철종이 승하하자 신정왕후 조대비는 즉각 어보을 점유하였고 흥선군과 사전에 조율하였던데로 흥선군의 셋째아들 재황을 옹위하여 등극시켰다. 한편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었다. 남연군의 부친은 은신군이었다. 은신군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을 양자로 들였었다. 은신군은 은언군의 동생으로서 모두 사도세자와 숙빈임씨사이의 소생이었다. 사도세자는 잘알다시피 영조의 소생이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대왕대비가 되어서 고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였으나 곧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였다. 흥선군은 당시 44세였다. 고종은 직계비속으로서가 아니라 종친으로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따라서 현왕인 고종의 부친은 대원군이 된다. 일례로 선조의 부친인 덕흥군은 덕흥대원군이 되었고 철종의 부친인 전계군은 전계대원군이 되었었다. 어쨌든 당시 영의정은 김좌근이었고 좌의정은 68세의 조두순이었다. 이제 조정은 서인 노론계열의 장김세력이 하락하고 남인이 득세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갑산부사 이석을 시켜서 동점에서 화폐 30만냥을 몰래 주조하도록 하였다. 동점이란 구리광산을 말한다. 이어서 흥선대원군은 김홍근의 삼계동 별장을 사취하였다. 당시 광통교의 지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종각 근처의 80여호를 불태웠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서원은 사설교육기관으로서 인재양성과 명현의 제사를 담당하였다.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그 최초였고 명종 때 소수서원은 왕으로부터 토지, 노비, 책을 하사받았고 면세, 면역이 되었으므로 점차 사원은 토색질을 일삼고 무법천지가 되어갔다. 당시 악명이 높았던 서원으로는 청주의 화양동 서원과 만동묘가 있었다. 화양동서원은 화양묵폐를 발행하여 세금을 거두었고 만동묘는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어 임진왜란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에 제사지내는 곳이었다. 명나라는 멸망하였지만 조선은 명나라를 잇는 소중화를 자처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서원은 650개가 난립하고 있었는데 서원이 많다는 것은 군약신강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원군은 서원 45개를 제외하고 모두 폐지하였다.

흥선대원군은 풍수와 참언을 믿었는데 때마침 나라연장을 위해서는 경복궁을 중건하라는 참언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다. 대원군은 경복궁 건설에 착수하였고 먼저 재원조달을 위하여 장김 세력가들로부터 30만냥의 원납전을 거두었고 점차적으로 강제징수하였다. 또 노동력을 위하여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였는데 부역민들에게 하루 1전씩을 지급하였다. 또 호포제를 실시하여 양반에게도 군역을 부담시키고 각 호당 2냥의 균일세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당시 원납전 500냥이면 벼슬을 살 수 있었고 당백전이 사용되고 있었다. 당백전이란 화폐의 명목가치를 100배 인상한 화폐였다. 한편 대원군은 삼정중 가장 문제가 되었던 환곡을 사창제로 바꾸었다.

1866년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령을 포고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프랑스신부 12명이 들어와 포교하고 있었는데 날로 번창하여 신도 수가 23,000명에 이르렀다. 조선 지배층은 천국과 지옥의 가설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혹세무민하는 천주교에 대하여 점차적으로 반발하고 있었다. 1월 21일 대원군은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도 색출에 나섰다. 대원군의 부인인 민씨는 천주교도였다. 한때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접촉하여 천주교의 포교을 인정해주는 대신 프랑스, 영국과 동맹하여 러사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1866년 2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는 고종의 왕비로서 민치록의 딸을 간택하였다. 고종은 15세였고 왕비 민씨는 16세였다. 왕비 명성왕후민씨는 9세 때 고아가 되었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59세였고 왕대비, 즉 쳘종비 철인왕후 김씨는 30세였다. 한편 청나라는 동치제가 즉위하였으나 공친왕이 섭정을 하고 있었다.

오가작통법이 실시되자 수 개월만에 조선 천주교인들이 처형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었다. 이것이 병인박해이다. 이때 프랑스 선교사 리델은 살아남아서 중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리델 신부는 텐진주재 프랑스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이 처형 사실을 알렸다. 이 병인박해는 후일 병인양요의 불씨가 된다.

1866년 8월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의 대동강변에 정박하였다. 제너널 셔먼호는 615톤이었고 선주는 미국인 프레스턴이었고 선장은 덴마크인 페이지였다.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와 통역인으로 중국인 이팔행과 선원 23명을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통상요구가 거부되자 난동을 부리고 조선군 이현익을 납치하여 감금하였다. 그러나 박춘권이 제너럴 샤먼호에 잠입하여 이현익을 구출하였다. 그런데 당시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수위가 높아졌고 배의 선체는 양각도에 걸렸다. 제너럴 셔면호 선원들은 불안하여 포격, 강도, 강탈하였는데 이 와중에 평양사람 7명이 죽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그러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포격을 명령하였다. 조선군은 대동강가에 식용유를 풀어서 제너럴 샤면호를 불태웠다. 제너럴 샤면호 선원 대부분이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제너럴 샤먼호는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USS Princess Royal호 였다는 일설이 있으나 이것은 미 해군의 기록과는 다르다. 어쨌든 이 제너럴 샤먼호 격침사건은 5년 후 신미양요의 불씨가 되었다.

한편, 프랑스 인도차이나함대 로즈제독은 군함 3척을 이끌고 리델 신부와 조선인 3명을 대동하고 인천 앞바다에 당도하였다. 로즈제독은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죽음에 대한 댓가로 조선인 9,000명의 목숨을 요구하였다. 이제 한양의 도성 안은 혼란에 빠졌으므로 어영대장 이용희를 현장에 파견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로즈제독은 3척의 군함으로는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지형만을 관찰하고 일단 돌아갔다.

로즈제독은 한 달도 채 안돼서 군함 7척과 요코하마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병대를 포함하여 1,230 여 명을 대동하고 강화도 부근의 물치도에 접근하였다. 곧 프랑스 함대는 강화성을 허물고 외규장각의 서적들을 약탈해갔다. 이어서 프랑스 해병은 조선군과 정족산성에서 조우하였고 프랑스군은 6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하여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로즈제독은 철군을 결심하였고 중국으로 철군하였다. 로즈제독은 강화성을 떠나면서 관아에 불을 질렀고 금괴 19상자와 보물, 서적, 무기 등을 약탈해갔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어쨌든 대원권은 프랑스군을 물리쳤으므로 쇄국의지에 자신감이 생겼고 이후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고수하게된다.

1868년 4월 고종과 후궁 귀인 이씨 사이에 완화군이 태어났다. 고종은 명성왕후 민씨와의 관계이전에 첫 왕자를 얻은 것이다.

1868년 7월 2일 경복궁이 중건되었다. 착공한지 3년 4개월 만이었다. 총 774만 냥이 들어갔고 쌀 915석 그리고 연인원 수 십 만명이 동원되었다.

1868년 유대계 독일상인 오페르트와 프랑스신부 페롱은 충청도 아산만으로 잠입하여 덕산의 남원군의 묘를 파헤쳤다. 남원군은 흥선대원군의 부친이다. 오페르트는 2년 전에도 조선에 들어와서 통상요구를 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그 다음에 또 들어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그때는 병인양요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이번에 오페르트는 남연군의 시체를 가지고 통상협상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연군의 묘는 봉분만 훼손이 되었다. 왜냐하면 대원군은 30년 전에 부모상을 잇달아 당한 후에 부친 남연군의 묘를 충청도 덕산으로 이장하였다. 대원군은 풍수가의 말에 따라서 가야사를 불태우고 그 자리에 묘를 파고 철 수 만근을 녹여부었었다. 따라서 오페르트는 봉분의 윗부분만을 훼손한 것으로 그쳤던 것이다. 미국인 젠킨스도 오페르트와 합세하여 680톤 차아나호와 60톤 크레타호를 이끌고 서양인 8명과 중국인 100명과 말레이지아인을 대동하고 아산만에 들어왔었다. 이 남연군 묘 도굴사건이 본국인 독일과 미국에 알려지자 오페르트는 본국으로 소환되었고 젠킨스는 기소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서양오랑케가 침입해도 싸우지 않는 것은 화이하는 것이고 화이는 곧 나라를 파는 것' 이라고 말하였다. 대원군의 쇄국의지가 더욱 강해진 것이었다.

1871년 청나라주재 미국 공사 프레드릭 로우는 미국특명전권공사가 되어서 제너럴 샤먼호 침몰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청하였다. 미 아시아 함대 로저스 제독은 전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미 전함 5척 중에 USS Colorado 프릿깃함은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바가 있었다. 미 해병대는 강화도에 상륙하여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유린하였다. 조선군은 완패하였다. 조선군은 243명이 전사하였고 부상자들은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반면에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에 불과하였다. 로우 공사는 통상교섭을 실시하였으나 조선의 강경한 척화론으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미군은 40일 만에 중국 산둥성으로 철군하였다.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 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그런데 원자는 항문이 없었다. 민씨부인은 구멍을 내서 통변을 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시아버지인 대원군은 탕제를 써야한다면서 서로 실랑이가 벌어졌다. 원자는 탕제를 먹고 5일만에 타계하였다. 이 일로 대원군과 명성왕후 민씨사이는 멀어져갔다.

이 당시 정감록이 유행했다. 정감록은 이씨왕조가 무너지고 정씨왕조가 들어선다는 속설이었다. 한편 대원군은 풍속개량을 실시하여 사대부 갓 테를 줄이고 도포의 소매도 줄이고 장죽길이도 반으로 줄였다. 그리고 기생 옷을 개량하였고 기생이 가마 타는 것을 금지하였다. 또 화대는 120냥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것이었으므로 사대부들은 불만이었다.

1873년 고종10년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사이에 공주가 태어났다. 공주는 8개월 만에 타계하고 말았다.

명성왕후 민씨는 신정왕후 대왕대비 조씨의 친족인 조성하, 조영하와 손잡고 서원철폐로 소외되었던 최익현을 등용하였다. 그러자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버렸다. 최익현에 따르면 왕은 고종인데 대원군이 섭정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는 것이었다. 곧 최익현은 파직되었다. 그런데 명성왕후 민씨는 최익현을 복귀시키고 이어서 그를 호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최익현은 다시 대원군의 부당성을 상소하였다.

1873년 11월 고종은 대원군이 궁궐로 출입하는 전용문을 폐쇄하고 친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고종은 22세였다. 그 후 대원군과 명성왕후 민씨 및 민씨일족들은 수시로 갈등을 맺었다. 이 해에 원납전이 혁파되었고 성리학의 전당인 청주의 만동묘도 복구되었다. 또 당백전과 청전의 유통을 금지시켰다. 12월에는 경복궁에 화재가 있었다. 명성왕후 민씨가 거처하는 자경전의 부속건물인 순회당에 폭약이 발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364간이 전소되었다.

1874년 2월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사이에 원자가 태어났다. 이 원자는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이 왕세자가 후일 순종황제이다.

1874년 12월 민씨 일족의 수장이자 명성왕후 민씨의 양오라비인 민승호는 어떤 승려의 선물을 받게 되었다. 민승호가 그 선물상자를 여는 순간 폭발하였고 민승호와 그의 아들 및 그의 양어머니가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권좌에서 물러난 대원군이 연루되었다는 설이 있었다.

1875년 9월 일본 군함인 245톤의 운요호는 강화도 근처의 난지도에 정박하였다. 일본선원은 보트에 분승하여 연안을 탐지하다가 조선군과 조우하였다. 이어서 조선군과 일본군사이에 전투가 벌여졌고 조선군이 완패하였다. 조선군은 전사자 35명 포로 16명이 발생하였으나 일본군은 단지 경상 2명 뿐이었다. 일본은 이 전투의 책임을 조선에 전가하면서 배상과 통상, 개항을 요구하였다.

1876년 1월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간에 운요호사건과 관련하여 회담이 열렸다. 조선측 대표 신헌과 윤자승은 일본측 대표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타카와 부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회담하였다. 회담은 모두 세번 열렸다. 이때 일본측은 조선인 통역을 비롯하여 840명의 수행원을 대동하였다. 조선측은 흥선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장과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의사 그리고 중국 이홍장의 권고에 따라서 개국을 결정하였다. 이것이 강화도 조약이다. 이 강화도 조약은 12개조로 되어있다.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국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인정하였다. 조선은 3개의 항구를 일본에 개항해 주었다.

1876년 7월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후속조치로서 조일수호조규부록과 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곧 조선은 김기수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일본은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대리공사로 한성에 파견하였다.

1880년 고종과 영보당 귀인 이씨사이의 소생인 완화군이 천연두로 타계하였다. 향년 13세였다. 영보당 귀인 이씨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실어증이 걸렸다.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갔던 지석영이 두묘 50병을 얻어와서 종두법을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종두란 천연두 예방백신을 말한다 종두법에는 인두법과 우두법이 있다. 인두법은 면역백신을 천연두에 걸린 사람의 고름으로부터 얻어서 접종하는 것인 반면에 지석영이 배우고 돌아왔던 우두법은 천연두에 걸린 소의 고름으로부터 면역백신을 추출해서 사람에게 접종하는 것이었다. 이전까지 인두법이 보편적 예방법이었으나 1796년 영국인 제너가 우두법을 발견한 뒤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880년 12월 20일 고종은 내정계혁에 착수하였다. 고종은 의정부와 6조를 폐지하는 대신에 통리기무아문과 12사를 두었다. 12사의 우두머리는 총리가 되었다. 다음해에 고종은 별기군을 조직하여 양반자제를 사관생도로서 선발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5위영은 양영으로 개편하여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나누었다.

1881년 조선 조정은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명성왕후 민씨측의 개화파로 나뉘어 있었다. 안기영과 권정호는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경기도 향시에 모인 유생들을 이용하여 고종과 명성왕후에 대하여 역모를 하여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하였다. 이재선은 흥선대원군의 양아들이므로 고종의 이복형이다. 이 역모는 실패하였고 안기영과 권정호는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재선도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것이 이재선 추대사건이다. 위리안치란 유배지 처소에 죄인을 가두고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로 처소 둘레를 치는 것이다.

1882년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는 왕세자의 왕세자빈으로서 민태호의 딸을 맞이하였다. 왕세자는 9세였고 왕세자빈 민씨는 13살이었다.

1882년 조선전권대신 신헌, 김홍집과 미국 전권대신 슈펠트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은 청국의 사신인 마건충과 정여창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은 전권대사로서 민영익과 부관 홍영식, 서광범을 미국으로 파견하였고 초대 미국전권공사 푸트(Foote)가 한성에 들어왔다. 이어서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선은 영국과 독일과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1882년 구식군대의 군인들은 급료가 13개월간 미불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또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별기군에 불만을 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명성왕후 민씨와 그녀의 친족인 민겸호에 투사하였으므로 이제 난리가 임박하였다. 민겸호는 그당시 군인들의 급료를 관리하던 선혜청 당상이자 병조판서였다. 선혜청 도봉소에서는 전라도에서 조세미가 도착하자 우선 구식군대군인들에게 1개월 급료를 지불하였다. 그런데 군료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있었고 그 양도 절반밖에 안되었다. 그리하여 구식군대 군인 김춘영, 유복만, 정의길, 강명준은 난동을 부렸고 순식간에 도봉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자 이들은 곧 포도청으로 잡혀갔고 사형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전파되었으므로 군병들은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수감된 유복만의 동생인 유춘만과 김장손 등은 군인들을 끌어모으고 병조판서 민겸호의 집 앞에 몰려들어갔고 드디어 집안에 난입하여 가재도구를 파괴하면서 폭동에 들어갔다. 이어서 그들은 운현궁에 거처하는 대원군을 찾아가서 사태를 의논하였다. 또한 군인들은 동별영의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약탈한 후에 포도청에 난입하였고 문제가 되었던 유복만, 김춘영 등을 구출하였다. 이어서 군인들은 의금부를 습격하여 척사론자인 백낙관 등 죄수를 석방하였고 민태호 등 개화파 인사들의 집을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이것이 임오군란이다.

이날 저녁 구식군대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였고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를 비롯하여 공관원들은 인천으로 피신하였다. 군인들은 일본공사관을 불태웠고 별기군 병영을 습격하여 일본인 교관등 총 13명의 일본인을 살해하였다.

다음날인 1882년 7월 24일 폭동군인들은 대원군의 밀지에 따라서 이최응과 민창식을 살해하였다. 이최응은 대원군 이하응의 형이었다. 군인들은 창덕궁 돈화문에 진입하여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의 인솔하에 명성왕후 민씨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명성왕후 민씨를 찾는 데 실패하였지만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을 살해하였다. 한편 명성왕후 민씨는 궁녀로 위장한 후에 무예별감 홍계훈과 함께 충주로 피신하였다.

조선 조정은 이 난리로 인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대원군의 장남인 이재면을 무위영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대원군은 자신의 심복인 허욱이 이끄는 200명의 군인들의 호위 속에 대궐로 입궁하였다. 대원군은 교지를 반포하고 사실상 조정을 장악하였다. 대원군은 별기군과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5군영을 복구하였다. 대원군은 남인계열을 등용하고 죄수들을 석방하였다. 이어서 주전을 금지시키고 도고와 수세를 정비하였다. 대원군은 실종된 명성왕후를 타계한 것으로 추정하여 국장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영선사로 청나라에 가있던 김윤식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의 마건충은 4,500명의 육군을 이끌고 한성에 당도하였다. 이틀 뒤에는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일본군 대대병력을 이끌고 한성에 입성하였다.그리고 청국의 해군제독 오장경은 김윤식과 정여창을 대동하고 남양만으로 들어왔다. 1882년 8월 25일 청국의 해군제독 오장경은 임오군란의 배후자로서 대원군을 지목하였으므로 대원군을 납치하여 텐진으로 이송하여 감금해버렸다. 대원군은 당시 63세였다.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제 명성왕후 민씨 조정이 부활하였다. 청군은 도성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조선인 350여 명을 살해하였다. 청국은 좌영 우영을 설치하여 청교관을 두고 한성에 청군 3,000명을 상주시켰다. 한편 일본국은 전영 후영을 설치하여 일교관을 두었다.

대원군이 청나라 텐진에 이송되고 임오군란이 마무리되자 명성왕후 민씨가 창덕궁으로 환궁하였다. 청국은 독일인 뮐렌도르프를 재정고문으로서 조선에 파견하였다. 뮐렌도르프는 당시 텐진 주재 독일 부영사였다. 한편 청국서 돌아온 김윤식과 조영하는 하수도정비를 위하여 치도국을 설치하고 치안을 위하여 순경국을 설치하였으나 온건개혁을 펼치고 있던 명성왕후 민씨 일파에 의하여 저지되고 말았다.

8월 30일 조선과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인한 일본인 재산과 인명피해와 관련하여 제물포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측 대표 김홍집은 일본측 대표 하나부사 공사에게 배상금 50만엔과 조선조정의 공식사과, 피해자 위로금 지불, 공사관에 일본 경비병주둔, 사과사절단 파견 등을 약조하였다. 한편 김홍집은 대일 배상금과 관련하여 일본외채를 받아 쓰기로 하는 밀약도 맺었다.

조선은 임오군란의 사과사절단으로서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민영익, 김옥균 등 15명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일본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는 이들이 100일간 체류하는 동안 극진히 대접하였고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조선사절단 일행은 일본정부의 배려로 부산 세관의 수입과 사천의 사금광산을 담보로 하여 17만엔을 차입할 수 있었다.

조선 조정은 임오군랸을 계기로 친청파가 주도하게 되었다. 이 친청파 보수세력에는 명성왕후 민씨와 척족인 민영익, 민승호와 김홍집, 김만집, 어윤중 등이 있었다. 이 친청파 보수세력은 사대당이라고도 불리웠다. 반면에 이들에 대항하였던 개화당에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윤웅렬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매료된 자들이었다.

당시 재정고문으로서 중국에서 들어왔던 뮐렌도르프는 당오전을 발행하였다. 당오전은 화폐의 명목가치가 5배 증가된 화폐였다. 개화당의 김옥균은 근대산업을 진흥하고 재정난을 타계하기위하여 일본으로부터 300만원의 차관을 들여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당시 사대당의 일원으로서 중국에서 들어왔던 재정고문 윌렌도르프의 제안에 따라서 당오전과 당십전이 발행되었다. 당오전은 화폐의 명목가치가 5배 부풀려진 화폐였으므로 화폐가 정치자금으로 유용될 수 있었고 인플레이션의 위험도 따랐다.

1883년 10월 1일 한성순보가 창간하였다.

1884년 청국과 프랑스는 베트남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하였다. 결과는 청국의 완패였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모의하여 조정의 실권자인 친청파 명성왕후 민씨에 대하여 역모하였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에서는 개국축하 만찬회가 열리고 있었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당 일당은 사대당 일당을 해치기로 되어있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옥균과 박영효는 창덕궁으로 달려가서 고종에게 청국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보고하고 고종을 경운궁으로 옮기고 사대당 민태호, 민영목, 한규직, 조영하 등을 살해하였다.

다음날 1884년 12월 5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은 한성주재 각국 공사와 영사에게 새로운 정부의 수립을 통고하고 새 내각을 발표하였다. 고종의 둘째 형인 이재원이 영의정이 되었고 우의정에 홍영식, 호조참판 김옥균, 한성판윤 겸 전후양영사에 서광범, 병조참판 겸 정령관에 서재필을 임명하였다. 새 내각은 14개 조의 신 강령을 작성하여 고종으로부터 윤허를 받았고 반포를 앞두고 있었다. 그 내용 중에는 단발령, 봉건신분제도 폐지. 국채모집 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친청파 명성왕후 일파는 청국 총독 위안 스카이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곧 청국 군사 1,500명이 당도하였으나 개화당의 군사는 150명에 불과하였다.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동원하기로 했던 일본군도 퇴각해버렸다. 그러자 김옥균과 짝하고 있던 고종은 명성왕후 민씨가 있는 북관종묘로 가버렸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고종을 호위하다가 청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김옥균과 박영효 등 역모의 주역들은 일본공사관에 숨어있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선박 천세환의 선장은 김옥균 등을 식당 마룻바닥에 숨겨줬다. 한편 김옥균의 부인과 딸은 음독자결하였다. 서재필의 부친도 음독자결하였다. 박영효의 부친은 옥사하였다.

이제 고종은 위안 스카이와 결탁하여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영의정 심순택, 좌의정 김홍집, 이조판서 이재원 등 이었다. 고종은 정변의 불씨였던 우정국을 폐지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을 5적으로 규정하여 비난하였다. 이어서 고종은 갑신정변으로 인한 일본군 희생자 40명을 위로하는 한편 일본과 한성조약을 맺었고 뮐렌도르프와 서상우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사죄하였다.

1885년 청나라 텐진에서 청국 대표 이홍장과 일본국 대표 이토 히로부미는 갑신정변의 마무리를 위하여 텐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청국과 일본국은 조선에서 동시에 철병하기로 하였고 유사시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고지하도록 하였다.

그해 1885년 영국함대가 제주도와 여수사이에 있는 거문도(포트 해밀턴)을 점령하였다. 5월에 조선은 러시아와 조러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첫 공사로 웨베르가 한성에 부임하였다. 7월 말에는 청국에서 파견된 재정고문인 뮐렌도르프가 파직되었고 위안스카이의 위세가 높아졌다. 이어서 8월에는 중국으로 납치되었던 대원군이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위안스카이의 주선으로 자신의 큰아들인 이재면과 함께 납치 3년만에 입국하였던 것이다.

1884년 이후 1894년까지는 태평 10년 이다. 1885년 미선교사에 의하여 배재학당이 설립되었고 다음해 1886년에는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 그해 조선은 프랑스와 조불 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1887년 대원군은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 세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므로 위안스카이와 결탁하여 이준용을 옹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준용 옹립은 실패하였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첫째아들인 이재면의 장남이었다. 이재면이 유순한 반면에 이준용은 괄괄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손자인 이준용을 총애하였으므로 그후 몇차례 더 그를 옹립하려고 계획한다.

1892년 운현궁에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다. 운현궁은 대원군과 그의 아들 이재면 그리고 손자 이준용이 거처하는 곳이었다. 황현은 이 사건의 배후로서 명성왕후 민씨를 지적하면서 그녀가 대원군 일가를 폭살하려했다고 주장하였다.

1894년 1월 20일 전라도 고부군에 사는 동학의 접주 전봉준은 200여 명의 포를 이끌고 전라도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포란 동학신도의 무리를 말하고 접주란 포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그 당시 전봉준의 나이는 40세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전봉준의 부친을 불경죄로 장살한 바가 있었다.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자 전봉준의 부친은 부의금 2천냥을 걷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부친은 조병갑의 명령을 거부했었다. 한편 조병갑은 보를 만들어 징세하였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징세하기도 하였다. 불효죄와 음행죄를 명목으로 징세하였고 부친의 비각을 위하여 징세하기도 하였다. 또 조세로서 정백미를 받고 하등미를 서울로 올려보내어 차익을 얻기도 했다. 전봉준과 포는 고부관아의 곡식창고를 부수고 양곡을 꺼내어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정에서는 안핵사 이용태를 내려보냈고 농민군과 화약하였다. 이것이 동학 농민군의 1차 봉기이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이 봉기 가담자들을 역모죄로 몰아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전봉준과 김개남, 손화영 등은 농민군 10,000여명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이다. 농민군은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을 물리치자 전주성을 향하였다. 이때 조선조정은 황급히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1894년 6월 8일 청군은 내란진압을 목적으로 아산만에 당도하였다. 그러자 일본 또한 텐진 조약에 따라서 자국민 보호를 목적으로 출병하기로 결정하였고 곧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6월 11일 농민군은 관군과 화약하였다. 이것이 전주화약이다. 전봉준은 12개조의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 중에는 불량양반을 벌주고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백정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등을 요구하였다. 한편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교도들은 남원 부사 이용헌을 살해하고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집강소는 개혁적인 농민자치기구였다. 대원군은 2차 봉기의 주역인 김개남과 관련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조선 조정의 영의정 심순택과 신응조, 김홍집 등은 일본이 요구한 5개조의 내정개혁안을 실행하기 위하여 교정청을 설치하여 내정개혁에 착수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4대문과 경복궁을 점거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명성왕후 민씨내각을 쫒아내고 친일내각을 구성하였다. 일본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섭정을 하게하였고 영의정 김홍집과 박정양, 민영달 등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와 힘을 합쳐서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갑오개혁의 주요내용으로는 과거제 폐지, 선거조례 제정, 은본위제, 지세의 금납화, 연좌제 폐지, 조혼금지, 공사노비혁파. 과부재혼 허가 등이었다. 이것이 제 1차 갑오개혁이다. 한편 조선은 청국과의 모든 조약을 파기한다는 통고와 함께 청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한편 일본은 아산만에 파견되어있던 청국의 북양함대를 몰아내기위하여 더 많은 군사를 조선에 파병하였다.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근해에서 일본 순양함 나니와호 선장 토고 헤이하치로는 청국의 2,134톤 가오슝호를 침몰시켰다. 이것이 풍도해전이다. 그리고 8월 1일 청국과 일본간에 공식적인 전쟁이 선포되었다. 이것이 청일 전쟁의 시작이었다.

9월 16일 일본군은 15,000명의 청국군사가 사수하고 있던 평양을 탈환하였다. 청국군 사망자는 2,000명, 부상자 4,000명이었던데 반하여 일본군 사상자는 600명 이었다. 일본군은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1894년 9월 17일 일본함대와 청국의 북양함대는 압록강 하구에서 조우하였다. 청국 군함 5척이 침몰하였고 4척이 파손되었으며 사망자는 850명이었다. 일본국은 군함 3척이 파손되었고 사망자는 90명 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청국의 북양함대는 뤼순으로 피신하였다. 이것이 황해해전이다.

1894년 10월 24일 일본군은 단동과 요동반도 남부를 점령하였고 청국의 북양함대가 있는 뤼순항을 포위하였다.

이달 동학군은 남접의 전봉준과 북접의 손병희가 연합하여 연함군을 이끌고 우금치에서 조선 관군과 일본군 20,000명으로 구성된 조일 연합군과 조우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완패하고 말았다. 1만여 동학군 중 살아남은 자는 5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으로 동학농민운동은 종결되었다.

1894년 11월 21일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하고 6만여 명의 청국 백성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뤼순대학살이다.

조선 조정의 김홍집과 박영효 연립내각은 일본식 내각과 7부를 도입하고 의정부와 8아문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전국을 8도에서 23부로 개정하고 사법권을 독립시키고 치안과 행정을 분리시켰다. 또 외국어학교 관제를 공포하고 신교육을 실시하였고 경찰권을 일원화하였다. 또 군대를 개편하여 신설대, 시위대, 훈련대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3도통제군과 각 도의 병영, 수영을 폐지하였다. 이것이 제 2차 갑오개혁이다. 이것은 제 2차 김홍집내각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1894년 12월 2일 전라도 순창에 피신해있던 전봉준은 자신의 부하였던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로 인하여 체포되어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곧 전봉준은 일본영사관에 수감되었다. 한신현은 현상금 1천냥을 받았고 나중에 금천군수가 되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75세의 수구파 대원군 사이의 갈등이 깊어져가는 가운데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은 1895년 1월 7일 고종에게 홍범 14조를 반포해주도록 요청하였다. 그 내용은 자주독립, 왕위세습제, 조세법률주의, 국민의 재산과 생명 보호, 관제개혁, 인재양성 등이었다. 이 홍범 14조는 조선이 청국과 단절하고 자주독립을 선포한 조선 최초의 근대적 헌법이었다.

1895년 2월 12일 웨이하이웨이에 피신해있던 청국의 북양함대는 일본해군과 육군의 동시 공격을 받고 궤멸되었다.

1895년 3월 24일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개화파인 김학우를 암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손자를 살리기 위하여 이노우에 공사 등 각국 공사를 찾아가 하소연하였다.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은 동학교도를 이용하여 고종과 개화파 인사들을 암살하고 현정부를 전복하려고 하였지만 이 계획이 발각이 되어서 사형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준용은 할아버지 대원군의 도움으로 종신형으로 감해지고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

1895년 3월 26일 일본군은 대만 근처의 펑후제도를 무혈점령하였다. 일본군 장교 가바야마 스케노리는 3일 후에 대만을 상륙하여 점령하였다.

1895년 3월 30일 전봉준은 의금부에서 교수형 당하였다. 향년 41세였다. 전봉준의 형제들 또한 연좌되어서 사형되었다. 전봉준의 후처는 노비가 되었다. 전 고부군수 조병갑은 사면되었다.

1895년 4월 17일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청국대표 이홍장은 청일간의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국은 일본국에 배상금 2억냥을 지불하기로 하였고 대만과 랴오둥반도 및 펑후제도를 할양하였다. 한편 청국이 지급한 2억냥은 청국의 3년 세출예산액이고 일본의 4년 세출 예산액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또 청국은 쑤저우, 항저우 등을 일본에 개항해주었고 일본인들의 거주, 영업의 자유를 승인해주었다. 또 청국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였고 조선에 대한 조공 및 헌상 등은 더 이상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지 6일 후인 1895년 4월 23일 러시아, 독일, 프랑스는 일본에 대하여 요동을 청국에 반환하도록 요구하였다. 왜냐하면 러시아는 일본이 한반도와 남만주 및 청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위협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3천만냥의 추가배상금을 조건으로 요동을 청국에 반환하였다.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한편 조선 정부는 삼국간섭 이후로 러시아의 세력이 높아지자 이완용, 민영환, 윤치호 등 정동파는 명성왕후 민씨의 세력을 업고 친러, 친미 정책을 시행하였다.

1895년 5월 총리대신 김홍집은 내각을 친일세력으로 개편하고 제 3차 갑오개혁인 을미개혁을 실시하였다. 김홍집은 단발령을 단행하였고 태양력을 도입하여 구정을 대신하여 신정을 실시하였고 새 우편제도를 위하여 우체사를 설립하였다. 또 연호로서 건양을 사용하였다.

1895년 9월 1일 새 일본공사에 미우라 고로가 부임하였다. 미우라 고로는 일본육군 중장 출신이었으나 조선에 온 후로 두문불출하고 불경만 외웠으므로 염불공사란 별명을 얻었다. 이어서 김홍집은 3차 개각을 단행하였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수시로 미우라 고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명성왕후 민씨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4시 30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시를 받은 일본인 낭인들은 일본군 수비대와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 250명과 함께 명성왕후 민씨가 거처하는 경복궁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는 미국인 다이가 이끄는 조선군 시위대 300명과 조우하였다. 일본인 낭인들과 조선군 훈련대 250명은 우수한 화력을 이용하여 조선군시위대 300명을 궤멸하였다. 이어서 일본인 낭인들은 건천궁에서 궁녀복장을 한 명성왕후를 찾아내어 난자하였고 그녀의 국부를 검사한 후에 시신에 석유를 뿌리고 불태웠다. 명성왕후 민씨는 향년 45세였다. 이것이 을미사변이다. 이어서 명성왕후 민씨는 대원군과 일본의 압력으로 폐비되었다. 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은 강화도 교동에서의 유배가 풀렸다.

1896년 1월 서재필은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준비하였다. 독립협회는 지방에서 의병활동과 외세배격 운동을 하였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로 일본세력의 위협을 받고있었으므로 왕세자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이어서 고종은 김홍집, 정병하, 유길준, 조희연을 을미 4적으로 규정하여 비난하였다. 고종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파직하고 총리대신 서리에 박정양을 임명하여 내각을 개편하였다. 이날 파직된 김홍집과 정병하는 군중들로부터 돌맞아 죽었고 어윤중은 고향인 보은에서 타살되었다. 유길준은 비밀리에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한편 고종과 왕세자, 엄상궁은 다음해 1월까지 1년간 러사아 공사관에 머물렀다. 그리고 고종은 대원군과 일본의 압력으로 폐비되었던 명성왕후 민씨를 복위하였다.

1896년 5월 러시아는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러사아와 일본은 서로 가까와지면서 로마노프 외상과 야마가타 사이의 비밀회담을 하였다. 그 내용은 러시아와 일본 양국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한반도의 남북으로 군대를 파견하고 서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경원과 경성의 광산 채굴권을 요구하였고 압록강, 두만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채굴권을 요구하였다. 러사아는 한성에 한로은행을 설치하였다.

1896년 9월 29일 고종은 조칙을 내려서 한성판윤 이채연과 왕실재정고문인 영국인 맥레비 브라운에게 도시계획을 실시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서 도로가 정비되었고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그리고 탑골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어하였다. 덕수궁은 이전의 경운궁을 수리한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8월 17일 고종은 조선을 대한으로 개명하고 연호를 광무로 하여 칭제건원하였다. 이것이 대한제국이다. 고종 황제는 전국의 23부를 13도로 개편하였다.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왕세자와 왕세자빈 민씨는 황태자와 황태자빈으로 격상되었다.

10월 22일 고종황제와 엄상궁 사이에서 태자가 태어났다. 이 태자가 이은이다. 엄상궁은 엄귀인으로 승격되었다. 이은은 후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태자인 의민태자가 된다.

1897년 12월 러시아는 청국과 협정을 맺고 뤼순항(포트 아서)과 대련만을 조차하였다. 러시아는 이로써 부동항을 얻을 수 있었고 다음해에는 하얼빈과 심양 그리고 뤼순항을 연결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민씨 부인이 타계하였다. 이어서 다음 달에는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의 별장인 아소당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79세였다. 고종은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았다. 고종은 흥선대원군이 명성왕후의 시해사건과 관련되었다고 보았다.

1898년 3월 1일 국고금과 세납금을 관리할 목적으로 한아은행이 개점되었다.

러시아어 통역관 김홍륙은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권력을 남용하다가 뇌물사건에 휘말렸다. 김홍륙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나기 전에 고종이 즐겨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어서 시해하려고 시도하였다. 곧 김홍륙은 역모죄로 참수되었다. 김홍륙은 함경도 천민 출신이었다.

독립협회는 종로 네거리에서 종종 군중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정부시책을 비판하고 외세를 규탄하면서 여론을 형성하였다. 이것이 만민공동회이다. 독립협회는 이 만민공동회를 이용하여 한아은행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내의 수구파는 독립협회를 모함하였다.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왕정을 폐하고 공화국을 세우려한다고 모함하였다. 이것이 익명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고종은 독립협회를 해산하도록 명하였다. 한편 독립협회는 지주와 상인계층이 중심이 되었는데 관세철폐와 자유무역을 옹호하였다. 반면에 황국협회는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었는데 자생적 민간주도의 상업활동을 옹호하였다.

1899년 고종 36년 광무 3년 한성에 전차운행이 시작되었다. 동아시아 최초였다.

1899년 중국 허베이 지방의 농민들이 외세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서태후가 이 농민봉기를 배후에서 사주하였다. 미국, 일본, 영국, 독일 연합군은 텐진과 베이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러시아는 여순역과 대련역이 화재로 소실되자 동청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병력을 만주에 진출시켰다. 이것이 의화단 사건이다.

1901년 엄귀인이 고종 황제의 왕비로서 책봉되었다.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은 엄귀인 왕비책봉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지만 오히려 고종 황제는 이준용이 명성왕후암살에 관련되어있다고 믿었으므로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해 제주도에서는 민란이 일어났다. 당시 천주교는 대한제국 내에서 세력이 확장되었을 뿐만아니라 상당한 권력을 향유하고 있었다. 성당은 치외법권적인 구역이 되어갔다. 죄를 짓고 성당에 들어가 은거할 경우에 죄수를 인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제주민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은 커져가는 천주교 세력과 징세를 남발하는 봉세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제주성을 함락하였다. 이어서 천주교도로 자처하는 300여명을 처형하였다. 그러자 프랑스 신부들은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어서 프랑스 함대가 파견되었다. 신임 제주목사 또한 함께 도착하였다. 민란은 더이상 확전되지 않았고 이재수와 주동자들은 처형되었다. 참고로 제주도는 천주교도가 개신교에 비해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이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영일동맹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한국에서 정치 상업적 이익을 지키고 영국은 중국에서 이익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또 한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때 동맹국으로서 합세하기로 했다. 이것이 제 1차 영일동맹이다.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만주에서 철수하도록 요구하였다. 3년 후 제 2차 영일동맹를 맺게되는데 그 직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을사조약이 체결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 조약에 따라서 영국을 돕기 위하여 전쟁에 참전하게된다.

1903년 고종의 왕비 엄씨는 황제비가 되었다. 이 황제비 엄씨가 순헌황귀비이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뤼순항에 정박하고 있던 러시아 극동함대를 공격하였다. 다음날 일본은 제물포항의 러시아군함 2척을 공격하였다. 다음날인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것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이 요청해옴에 따라서 공수동맹을 위하여 한일의정서를 조인하였다. 외무대신 이지용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체결하였다. 처음에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일본사이에서 국외중립을 희망하였지만 실패하였다. 3월 17알 일본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하였다. 한편 일본은 백동화를 주조하여 대한제국에서 유통시켰고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여 유통시키고 결제하였지만 금화결제는 하지않았다.
 
7월 13일 보안회가 결성되었다. 보안회는 일본인 나카모리가 조선의 황무지 개간권을 확보하려는 것을 저지하였다.

8월 10일 러사아함대 제독 빌헬름 비트게프트는 뤼순항을 출발하여 황해를 지나 제주해협을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고 시도하였다. 일본함대의 도고 제독은 러시아함대와 조우하였다. 비트게프트 제독은 교전중에 사망하였다. 따라서 러시아 함대는 뤼순항으로 되돌아갔다. 이어서 일본 육군은 뤼순항을 포격하여 함락시켰다. 9월 일본은 러시아 군함을 감시하기 위하여 울릉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였다.

8월 18일 송병준과 이용구는 일진회를 결성하여 보안회와 대립을 시작하였다. 한때 송병준은 민씨일족의 억압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에 망명했었다. 송병준은 망명 10년만에 일본군 오타니 소장의 통역관으로서 귀국하였다. 송병준은 당시 47세였다. 이용구는 동학교도였다.

1904년 8월 22일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고문정치를 실시하기 위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외무대신서리 윤치호와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재정고문으로 일본인 메카다 다네타로를 추천하였고 외교고문에 미국인 스티븐슨을 추천하였다. 일본은 그외에도 궁내부고문, 군사고문, 경무고문, 학무고문을 추천하였다. 이것이 한일 의정서이다. 제 1차 한일협약이라고도 한다. 한일 의정서 전문 4조에는 대한제국의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일본국은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인 재정고문 메카다 다네타로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왔고 화폐개혁을 실시하였다. 조선의 은행들은 점점 일본은행에 종속되어갔다. 다음해 일본은 한일 의정서, 즉 제 1차 한일협약에 따라 러시아를 감시하려는 목적으로 조선의 독도를 일본의 시마네 현에 편입한다.

9월 28일 황태자비 민씨가 타계하였다. 향년 33세였다.

1905년 1월 2일 뤼순의 러시아 주둔군 지휘관은 상부의 허락없이 뤼순항을 일본에 양도하였다. 한편 러시아의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발트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최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아시아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함대와의 대전투가 임박하였다.

이 해 1월 28일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고등경찰제도를 선포하였다. 따라서 현행범체포가 가능해졌다.

1905년 2월 22일 일본정부는 독도를 시마네 현이 관할하는 다케시마로 명명하고 일본영토로 편입하였다. 제 1차 한일협약에 따른 것이었다. 이 해 8월 일본은 독도에 군사용 망루를 설치하였다. 이 독도편입은 일본이 제 2차 대전에서 패망후 전승국이었던 미국과의 강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조약(1951년)에서 대한민국과의 소유권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본국은 조약에 따라서 한반도와 제주도와 거문도 울릉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다.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트 함대(제 2태평양함대)는 전함, 구축함, 순양함 등 38척을 대동하고 쓰시마 근해에서 일본함대와 조우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함대는 완패하였다. 러시아함대는 8척의 전함을 상실하고 5,0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일본은 3척의 어뢰정과 116명이 전사하였다.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은 테프트-가쓰라 비밀협약을 맺고 필리핀과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서로 인정해주기로 하였다.

1905년 9월 5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여 러일전쟁을 종결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경비로서 17억원을 사용하였다. 이중 14억원은 공채를 발행하여 충당하였고 나머지 3억원은 외채였다. 이로써 일본은 대한제국에서 정치, 경제, 군사적 우위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 일로 인하여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05년 11월 9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가 한성에 당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면서 일본천황의 친서를 바쳤고 일본정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신하여 행사할 것을 조약하자고 하였다. 고종황제는 이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내각를 소집하고 대신들에게 조약체결의 가부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 3명은 조약체결 불가라고 결정하였고 나머지 5명의 대신은 조약체결 찬성을 결정하였다. 을사 5적이란 이들 5명의 대신들을 말한다. 이들은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대신 8대신 중에 5대신이 찬성하였으므로 조약이 가결되었음을 선언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선의 외교권에 대한 조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이것이 제 2차 한일협약이다. 을사조약이라고도 한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정부를 경유하게 되었고 고종황제 바로 밑에 통감을 두게되었다. 대한 제국 제 1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이다. 이로써 한성에 주재하던 모든 외국공사관은 철수하였다.

12월 20일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 장지연은 이 일로 투옥되었고 황성신문은 정간되었다.

1906년 2월 1일 일본헌병대는 행정, 사법, 경찰권을 장악하고 무단정치를 시작하였다.

1907년 황태자는 새 황태자비로서 윤택영의 딸을 맞이하였다. 황태자는 33세였고 황태자비 윤씨는 14세였다.

1907년 1월 대구에 사는 서상돈과 김광제는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 1,300만원을 갚기 위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여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았다. 일본은 일진회를 동원하여 방해하였고 주동자인 양기탁을 구속함으로써 사실상 국채보상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상류층과 부자들의 의지 부족도 한 몫 했다.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는 제 2차 만국평화회의(Hague Convention)가 열렸다. 이 회의는 처음 1899년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의 제안에 따라 전쟁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영국과 독일 등의 군비축소와 영토분쟁에 대한 중재재판소 설립에 대한 국제회의였다. 고종은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인하여 참가하지 못했다. 이것이 헤이그 밀사사건이다. 이준은 전 평리원 검사였고 이상설은 전 의정부참찬으로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중이었다. 그리고 이위종은 페테르부르크주재 전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그 당시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없었고 일본이 대신하여 외교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1907년 7월 20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헤이그주재 일본공사가 일본외무성에 긴급전문을 보냈고 이어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책임질 것을 요구하였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송병준, 이병무는 고종에게 양위하도록 종용하였다. 고종은 양위를 결심하였고 양위식을 거행하였다. 양위식은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직접하지 않았고 내관들이 대신하였다. 고종은 당시 56세였다. 이완용은 고종양위를 계기로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백성들은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나중에 고종은 이완용에게 집을 장만해주면서 황실소유의 저택을 하사하였다. 사실 을사조약 이후로 매국노로서 박제순이 더 유명했다. 한편 철종의 사위인 박영효는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은 일본제국과 정미 7조약을 체결하였다. 순종은 이 조약을 윤허하였다. 정미 7조약에 따라서 일본제국은 대한제국에서 법령제정권, 관리임명권을 간섭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인 관리를 채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법권이 일본통감에게 넘어갔고 내각의 차관과 경찰간부는 일본인이 아니면 아니되게 되었다. 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으므로 관동, 관서, 영남지방에는 의병이 봉기하여 무장항일투쟁이 시작되었다.

1907년 8월 7일 순종황제는 황태자로서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황비 엄씨소생의 이은을 책봉하였다. 이은은 당시 11세였다.

1907년 고종 44년이자 광무 11년, 순종1년이자 융희 1년인 8월 27일 순종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순종황제는 34세였다. 순종비 순정효황후 윤씨는 14세였다.

12월 15일 황태자 이은은 일본의 학습원 수학을 위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1908년 3월 23일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스티븐슨을 저격하였다. 왜냐하면 스티븐슨은 대한제국의 통감정치를 찬양하였기 때문이었다. 장인환은 금고 25년을 선고받았으나 10년 후에 석방되었고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08년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징옥, 윤휴, 윤원형, 밀풍군 탄, 김익순(김삿갓의 부친), 이인좌의 난 때 관련자 등 77명을 복권하였다.

1909년 봄 일본총리 가쓰라 타로와 외무상 고무라는 대한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상의하여 조선과 일본의 합병을 동의하였다.

1909년 6월 14일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통감직을 사임하고 일본의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추밀원은 일본천황의 자문기구로서 추밀고문들로 구성되어있었다. 제 2대 대한제국 통감으로서 소네 아라스케가 부임하였다.

1909년 7월 1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소네 아라스케는 조약을 체결하여 사법권과 교도행정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사법부, 재판소, 형무소는 전부 폐지되었고 새롭게 통감부 사법청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기유약조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의 의병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안중근은 31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과다출혈로 타계하였다. 향년 69세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초프와 회담하기로 되어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화학을 공부하였고 미국의 예일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또 그는 일본제국헌법의 기초를 놓았다. 그리고 초대 일본 내각 총리를 역임하였고 그 후 제5대, 7대, 10대 내각 총리를 역임한 후에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었다. 순종황제는 그에게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909년 12월 일진회 소속 동학교도 이용구는 보부상들과 유생들을 매수하여 한일합방을 촉진하는 100만 회원 연명칭을 전개하면서 송병준과 함께 한일합방 성명서와 청원서를 준비하였다.

1909년 12월 12일 이완용은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추도회에 참가하려고 종현천주교회(명동성당)에 가는 길에 이재명에게 피습되었다. 이완용은 어깨, 허리, 복부에 칼을 맞았고 왼쪽 폐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2개월 후에 회복되었다. 이재명은 다음해에 교수형되었다.

1910년 3월 16일 안중근이 처형되었다. 안중근은 히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에 러시아 공안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일본제국 정부에 넘겨진 후에 당시 일본의 조차지인 뤼순 감옥에 갇혔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안중근은 16세때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부친과 함께 참전하기도 했었고 17세 때 천주교세례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안중근을 한국의 모세, 한국의 사도바울이라고 부른다.

1910년 5월 30일 제 3대 대한제국 통감으로서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부임하였다.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던 육군대장 출신이었다.

1910년 6월 24일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대한제국 총리대신 서리 박제순과 경찰사무위탁 한일약정 각서를 체결하여 경찰권을 위탁받았다

1910년 8월 16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한일합방 각서를 작성하였다. 국호는 조선으로 하기로 하였고 순종 황제를 이왕 전하로 칭하기로 하였다.

8월 18일 이완용 내각의 대신들은 만장일치로 한일합방안을 통과시켰다.

8월 22일 어전회의에서 순종황제는 대한제국의 통치를 일본황제에게 양여하기로 결정하여 추인하였다. 한일합방조약이 승인된 것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순종 4년, 융희 4년 대한제국 내각은 공식적으로 한일병합조약을 발표하였다. 조선창업 519년 만이었다. 당시 퇴위한 고종은 59세였고 순종은 37세였고 황태자 이은은 14세였다.




<참고문헌>

신봉승. 조선왕조오백년.
위카백과. 조선편.





댓글 1개:

  1. 너무나 화가 치미는 부분이 많아요..이 역사기록이 과연 우리나라 사람이 쓴거 맞나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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